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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또는 ‘조선 전쟁) 정전 60주년 관련 논의들이 좀 있다.
정전을 종전으로 전환해서 평화체제를 만들자는 논의는 기본적으로 ‘일반론’이다. 대중적 수준에서 대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평화체제를 누가, 어떻게 만들며, 그 이후에 어떤 방향과 접목되어야 하는가와 관련된다.
그래서 다시 역사적 문제들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2년 전 쯤 우연찮게 김용옥 선생이 제기한 ‘동아시아 30년 전쟁’이라는 개념을 원용하여 한반도(또는 ‘조선 반도’) 및 동아시아의 역사적 맥락을 다시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논의를 조희연 선생님과 나눴고, 선생님이 그와 관련한 글을 최근에 쓰셨다(근간, <아시아저널> 제7호. 2013년). 오늘 이 글을 읽으면서 참 좋은 글이라 생각되었다. ‘역사’를 다시 다루는 글이 쓰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대담하게 역사를 다시 다루는 글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많은 선생님들과 지식인들이 심지어 국가보안법에 걸려 구속될 각오를 하고 이런 글들을 많이 썼으면 한다. 그렇지만, 오히려 가장 걱정되는 것은 지금의 추세처럼 지식과 담론의 ‘역사성’이 사라져 사회적으로도 더이상 국가보안법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가 되어 국보법이 자동 소멸되는 상황이다(대만의 상황은 다소간 이러하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이제 더이상 국보법을 두려워하지 않고도 많은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국보법이 낙후해서라기 보다는, 지식인들의 변화, 나아가 지식인의 탈대중화와 더 관련되는 것 같다.
암튼, 선생님이 제기한 이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한국전쟁은 중국의 내전(1946~1949년, 공산당의 승리로 종결)과 베트남 내전(1955~1975년, 북베트남의 승리로 종결)의 사이에 끼어 있으나, 두 나라와는 달리 ‘정전’ 상태로 ‘분단 체제’를 지속하고 있다(중국과 대만의 ‘분단체제’는 ‘미완’의 통일, 즉 공산당의 승리 하의 ‘비대칭’적 분단을 형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중국과 베트남의 내전에서 좌익이 승리한 반면, 한반도에서는 좌익이 승리하지 못했다. 미국과 연합군의 개입이 작용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어찌보면 중국과 베트남의 좌익의 승리 사이에 끼어 있는 한국 전쟁이 모종의 ‘중간물’적 성격이 강하지 않나 생각되기도 한다. 중국 혁명의 여파 속에서 김일성은 당연히 중국과 같은 ‘내전’의 방식으로 사회주의 통일 정권을 수립하려고 했고, 소련의 승인, 중국의 직접 지원 약속을 받고, 내전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런데, 전쟁 이전의 해방공간 속에서 이미 이데올로기적인 분열을 바탕으로 분단이 가시화되었고, 특히 남한의 좌익 상황은 식민 역사 속에서 분산되고 일부 상실된 ‘정치적 지도력’을 통합하고 복원하여 대중적 역량으로 승화시키지는 못했던 것 같다. 결국 외부의 개입에 쉽게 무력화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식민 과정 속에서 불가피하게 ‘대중’과 분리된 급진적 민족주의/사회주의 세력이 갖는 결정적 한계가 해방공간 속에서의 무능에 반영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건 공산당이 ‘농민’의 대대적 지지를 얻어 세력적 열세를 극복해 나간 것과 대비된다. 이러한 모종의 근원적 결함이 주는 역사적 교훈이 무엇인지는 깊이 고민해볼 지점이라 할 수 있다.
결국 그렇게 ‘내전’은 ‘외전’으로 전환되었고, ‘냉전’ 체제는 세계적 수준에서 확고해졌다. 한국전쟁이라는 내전의 외전화가 만들어 놓은 냉전 조건 하에서, 베트남 내전이 다시 본래의 급진적 민족주의/사회주의 세력의 지도를 통해 내전을 승리로 만들 수 있었다는 점에서 다소간 역설적이다.
반제국주의적 민족주의는 기본적으로 탈식민주의de-colonialism의 포괄적 표상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모종의 국민주의로 전락된 것은 필연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제3세계 민족주의는 기본적으로 반자본주의-반자유주의였는데, 그것은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자유주의 세력의 또 다른 표현형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주의는 제3세계에 기본적으로 외재적이었지만, 그럼에도 제3세계 민족주의는 자연스럽게 사회주의와 결합될 수 있었고, 나아가 그 속에서 ‘민중’과 함께 하는 길을 찾았던 것이다. 식민지 경험을 갖는 나라의 역사와 사상은 이렇게 ‘민족’과‘민중’을 결합하는 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우리가 ‘냉전’을 거쳐 역사로부터 단절된 현재의 인식틀(이른바 ‘좌우익 보편주의’)로 역사를 재단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사유들이 다시 복원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평화체제’를 이야기하는데도 이런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평화체제의 주체는 현실적으로 ‘국가’들이다. 그래서 이 국가들 사이에서 일종의 상호 양보를 취하여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현실’적인 방법일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북한 위협에 반대하고, 북한의 ‘핵무장’에 반대한다. ‘역사’로 들어가도, 김일성과 박정희에 대해 양비론을 펴고, 좀더 나아가면 중국과 미국에 대해서도 양비론을 편다. 그렇지만, 이는 ‘탈역사화’된 담론, 즉 가상적 ‘현재’로부터 소급된 과거로서의 역사이다. 따라서 전쟁을 성찰함에 있어서도, ‘현실론’을 펴면서 현재의 역학 구도를 출발점으로 삼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게 할 경우, 평화협정이 만들어져도 각 개별 사회 내에서 갖는 함의는 그다지 크지 않을 것이고, 아주 쉽게 파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론은 최후에 검토될 사항에 불과하다. 그래서 전쟁의 성격이 기본적으로 일본 제국주의 패망이 낳은 공간 내부에서의 ‘내전’이었고, ‘내부의 주체들의 자주적 결정’의 가능성이 미국의 신제국주의적 개입에 의해 박탈되었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그 이후의 ‘중국’의 개입은 이미 ‘내전’이 ‘외전’화되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논점을 역사로 끌고 들어가서, 누가 진정 ‘민족’과 ‘민중’을 위한 싸움을 했는지 담론 승부를 해야할 것이다. 근래의 이른바 ‘엔엘엘’(‘북방한계선’이라 부르지 않는 것 자체가 일종의 반지성주의적 ‘징후’이기도 한) 논란에서 야권이 보여주는 것처럼, 더이상 ‘반공적 정서’ 뒤에 숨어서 자기 기만을 해서는 대중적 이데올로기의 지형은 조금도 바뀌지 않는다는게 지난 20여년의 ‘민주화’의 역사가 증명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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