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 아침 윈난성 쿤밍역에 도착했다. 돈 아끼느라 34시간 동안 기차를 탔는데, 하늘 맑고 시원한 쿤밍에 오니 천국이 따로 없다. 전통시장거리인 '노가'를 걷다가 커피숍에 앉아 기차 안에서 내내 읽은 이 책을 마저 읽었다.
올해는 중국어 공부한답시고 책을 거의 읽지 못했다. 방금 읽은 이 책 《사상의 분단 - 아시아를 방법을 박현채를 다시 읽다》가 일곱번째 쯤 될까. 그래도 올해는 양서만 읽는 기분이다. 노회찬 의원의 죽음으로 마음 가눌 길이 없어 몇 번이고 글을 썼다 지웠다 하다가 차재민이 사주고 백상진이 전해준 이 책을 바로 집어들었다. (감사...) 이 책의 정성스럽고 진지한 논의가 많은 고민을 안겨준다.
지금 핸드폰으로 이 책의 논의를 정리하긴 어렵겠고, 시간이 될 때 서평이라도 하나 쓰고 싶다. (하지만 이 책은 난해한 것을 다루고 있어 우리같은 보통 독서인들이 읽기 쉽지 않다.) 짧게나마 메모를 남기는 차원에서 - 학자가 아닌, 활동가의 입장에서 - 이야기한다면, 저자의 박사논문을 책으로 낸 이 책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어떤 거대한 공백, 단절에 대해 박현채라는 매개를 통해 집요하게 질문한다. 나는 이전의 사회구성체 논쟁에 대한 구PD류의 반응들이 죄다 못마땅했었는데, 하나는 '그거 다 쓸데없는 것이었다'는 식으로 몽매하게 깎아내리는 것이었고, 하나는 'PD가 옳았다'는 식의 정신승리적 태도였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두 태도 모두 마뜩찮다. 전자의 실용주의적 태도는 사상의 빈곤을 자촉하고, 후자는 오늘날의 거대한 붕괴를 설명할 길 없는 이론주의적 경향을 보여주는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전자가 진보정당이라면 후자는 당 밖 좌파다. 전자가 진중권이나 홍기빈이라면, 후자는 김성구나 윤소영이다. 사상의 빈곤도 극복해야 하고, 사상과 실천 사이의 단절도 극복해야할 우리는 이 모두를 지지하기 어렵다.
이 책은 그런 내게 수십년만에 발굴된 옛날 지도같은 책이다. 내가 전혀 모르는 까마득한 시기의 이야기지만 지금 우리가 마주한 "사상의 분단"의 맥을 짚어간다. 요컨대 오늘날 지식 사상계가 직면한 무기력은 단지 학계만의 위기를 환기하지 않는다. 모든 사회운동, 노동운동, 진보정당운동의 위기를 공히 환기한다. 지난 월요일에 책을 처음 읽을 땐 이 책의 문체와 구성이 잘 이해되지 않았는데, 읽고나니 이해가 될 것 같다.
책의 말미를 잠시 인용하면, "권역적 사상사의 맥락에서 볼 때, '사상의 분단'으로 동아시아 권역의 식신민 상황을 개괄"할 수 있는데, "(대만의 사상가) 진영진의 '사상의 빈곤'과 박현채의 '사상의 단절'을 낳은 근본 원인은 권역적 국제주의 사상의 역사적 분단에 있다. 이러한 분단은 동시에 역사와 지리의 단절이 초래한 후과를 반영"한다. 요컨대, 우리의 곤경은 그 분단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그것의 극복 역시 이 분단 지점을, 역사적/정세적으로 고찰하고 실천해나갈 때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다시 동아시아를 방법으로 할 것을 필요로 한다.
이를 위해 사회운동가들은 당장 실천이 더 느려지더라도 조급해하지 않고 더 깊이 공부해야 하고, (즉, 운동의 사상을 정비해야 하고) 연구자들은 사회운동적 실천과 자신의 연구 작업이 얼마나 정세적으로 잘 연결되고 있는지, 지나친 이론주의적 경도나 운동과의 단절을 불필요한 죄책감으로 갈음하는 건 아닌지 부단히 점검해야 하는 것 같다. 지금은 모든 연결고리가 끊겨있고, 다 각자 혼자서 떠드는 것만 같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연구자로서 적어도 내게 큰 가르침을 주었으니 아주 좋은 연결고리가 생겼다. 실천과 지식을 대하는 박현채의 사상적 태도 역시 인상적이고, 적극 공감이 된다. 나 역시 공부하는 분들이 항상 이런 태도를 견지해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고, 주위의 친구들에게 기회가 될 때마다 이야기하고 싶어했던 것 같은데, 더 확신을 갖고 토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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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춥다. 왜 거리의 쿤밍 사람들 대부분이 긴팔을 입는지 알겠다. 이곳의 기후, 공기, 풍경, 음식 모든 게 맘에 든다. 제갈량이 왜 그 개고생을 해서 여길 정벌하려고 했는지 너무나도 이해가 된다. 다른 지방은 여름엔 너무 덥고 겨울엔 너무 춥기 때문. 이문열 삼국지에서 남만은 정말 살기 어려운 땅인 것처럼 묘사돼있었던 것 같은데, 정반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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