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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과 책임

숟가락을 얻는 기회주의적인 목적의 글은 쓰고 싶지 않다. 그런 글로 읽히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다.

 

자살과 일반적인 죽음은 구별하여 대할 필요가 있다. 다양한 이유로 자살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기지만, 자살은 대체로 '책임'의 문제와 관련된다. 자살하는 이들에게는 자살이라는 방법은 자신에게 또는 자신이 속한 조직에게 책임을 다하는 최선의 길이다. 책임져야 할 일을 책임지지 못했을 때 돌아오는 후과가 주는 공포가 자살을 결심하게 만든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책임져야 할 일을 책임졌을 때 개인에게 축적되는 명성과 인기가 삶을 유지하게 만든다. 개인은 관계가 표현되는 대리인에 불과한데, 개인이 곧 관계 전부인 것처럼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삶과 죽음 둘 다 공동체적인 유대와 공생적인 윤리가 부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전적으로 개체에서 출발해서 개체로 끝나는 논리다. 구조에서 원인을 찾는 방식은 다를까? 사실 마찬가지다. 문제의 원인을 개별과 구조에서 찾는 것은 사실 같은 논리구조를 가진 거울의 양면이다. 엘리트주의와 포퓰리즘적 관계설정이 그럴 수 밖에 없다. 탈역사화된 구조과 탈주체화된 개체가 결합된 작금의 정치양식은 궁극적으로 상호폭력적이다. 역사와 현실로부터 유리된 가치와 이념을 위해 주체와 객체가 서로 바뀌면서 폭력을 행사하게 되어 있는 시스템이다. 역사적인 자기 모순에 대한 인식이 부재한 채 식민주의적이고 대리주의적인 상호폭력이 점증한다. 폭력적 관계가 가진 모순은 개체를 통해서 발현되고, 그것의 극복 또한 개체를 통하지 않을 수 없다. 이분법적으로 나와 타자를 분리하여 어느 한쪽을 정의로 내세우는 우리 상황을 보면 분단/반공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깊히 내재화되었는지 놀라울 정도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노신이 말했던 '입인立人‘이라는 고민이 부족한 것 같다. 당장 스스로가 살아 남는 것이 중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동지를 죽음으로 내몰 수도 있다.

 

살아 있어도 죽은 것만 못한 어떤 후과와 그로부터의 공포는 어찌된 일일까. 언제부터 우리는 이러한 단죄의 문화를 가지게 되었을까. 이런 맥락에서 사형제의 실질적인 폐지는 참으로 역설적이다. 자살을 감행하는 주체와 이를 강요하는 공동체 모두 어떤 단죄의 문화에 적응되어 있는 상황이다. 그러하기에 누군가의 자살은 다시 추모의 외양을 한 채 남탓의 소재가 된다. 자살한 그가 생전에 속했던 공동체의 다양한 층위 그 어느 곳에서도 구제와 갱생의 출구를 마련해주지 않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역사의 왜곡이 이와 같은 문화로 표현되는 것이라 생각해 본다. 책임을 지는 전통이 나쁜 것이 아니라, 모든 책임이 파편화된 개체에게 전가되는 문화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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