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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안에서 좌파가 되려면...

역사와 현실 안에서 좌파이고자 한다면, 운동에서의 기층 대중 운동이라는 관점과 이론에서의 반보편주의의 관점의 결합이 필수적이다. 그래서 정치사회운동의 상층, 즉 '당' 운동은 늘 '기층' 또는 '민간'의 정세적 능동성으로부터 정당성을 찾아야지, 자신의 이론적 선명성이나 입장으로 기층 운동을 재단해서는 안 된다. 노선 간의 싸움은 단지 '이론 내부의 논쟁'에 그쳐야지, 근래에 보여준 것처럼 기층 대중과 유리된 채 '운동의 분리'로 나아가서도 절대 안 되는 것이다.

 

그랬었던 이유는 바로 '당' 및 지식인 운동의 책임성의 결여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겉으로는 모종의 보편주의에서 이러한 분리의 정당성을 찾고자 했다.(패권주의의 문제는 담론의 수준에서는 오히려 나중에 부각된 것 같은데, 사실 '패권주의' 라는 문제제기는 그 자체로서 문제적이다. 운동을 너무 순진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 운동 내부에서 영원히 대면해야 하는 문제가 아닐까. 그래서 난데 없이 '종북주의'를 끌여들였던 것이 아닐까. 그렇게 보면 '종북주의' 또한 하나의 패권주의의 수단이었던 셈인데, 내가 보기엔 더욱 악질적이다.) '종북주의'는 어떤 논자의 말처럼, '냉전' 논리의 '진보좌파' 버전이었던 셈이다. 물론 거기에는 의회주의적 개량화의 물질적 힘을 얻고자 했던 세력(대략 현 '정의당')과 탈역사/탈현실적 좌익보편주의를 견지하고자 했던 세력(대략 현 '노동당')이 결합된 측면이 있다. 그들 사이의 관계가 하나였다가 결국 둘이 되었지만...

 

이번 사태를 마주하며, '좌익 당 운동'에 대한 탄압에 대해 아주 강력한 엄호가 필요한 상황이지만, 그것이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우선 '종북주의'에 대한 반성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고, 그것의 기초가 되었던 '좌익 보편주의'의 문제를 조금이나마 해소하고 가야하기 때문이다. 이는 다름 아닌 역사적으로 좌우익이 공유한 '북조선'에 대한 '냉전적 이해'이다. 나는 만약 진정한 '탈냉전'의 입장에 선다면, 누구도 절대 남한이 북조선 보다 '낫다'는 얼토당토한 판단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한 논리는 '북'에 대한 외부 제국주의 세력의 개입의 명분이 되기도 하지만, 나아가 남한의 '현대적 국가'와 '분단체제'를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적 근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랬을 때, 우리가 유럽의 좌익운동이든, 남미의 것이든, 적극적으로 동시에 '주체'적으로 참조할 필요가 있는 것처럼, 북조선의 경험도 참조할 필요성이 정당하게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현실의 담론에서는 이 정도까지만이라도 먼저 나아가야 할 것이다.

 

물론 이론의 차원에서는 더욱 과제가 크고 복잡하다. 왜냐하면 북조선이라는 역사와 현실의 개별특수적 대상은 그것이 우리의 역사의 일부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분단' 속에서 왜곡된 대상으로 존재한다는 남한 사회의 종별성을 중심으로 역사의 구조를 새로 짜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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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목록

양비론이 가장 나쁘다!

우선 이 말 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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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과 관련한 가설적 연구 주제 하나.

첫 번째 번역 작품은 중국어를 한국어로 옮긴 것이었고, 학술적이면서도 개체의 삶의 체험이 복잡하게 얽힌 서술이었다.

 

두 번째 번역 작품은 대만에서 곧 출판될 예정인데, 한국어를 중국어로 옮긴 것이고, 매우 이론적인 저작이다.

 

세 번째 번역 작품은 내년 상반기에 번역에 착수할 예정인데, 중국어를 한국으로 옮기게 되고, 문학성이 매우 풍부한 소설이다.

 

세 작품 모두 관통하는 제재는 중국의 현당대 역사, 특히 '문화대혁명'이다. 공통의 제재는 방법/형식이라는 핵심적 문제로 진입하는 매개를 제공해준다.

 

늘 예기치 않게 우연적으로 기회는 주어지는데, 이와 같은 '번역'의 경험은 나에게 '글쓰기의 방법'에 대한 고민을 던져 준다. 물론 나는 이 고민을 받아 안을 고민을 하고 있기는 했다. 첫 번역 작품이 주는 곤혹감 때문이었다.

 

역사적 전변기에 지식인, 즉 번역자에게 요구되는 임무는 무엇일까? 추상적이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변혁적 실천에 불가결한 언어의 번혁일 듯 싶다. 언어의 변혁은 동시에 지식의 변혁이고, 나아가 지식을 매개로한 주체의 변혁이기도 하다.

 

그래서 역사적 단계를 설정하여, 현대성, 식민, 냉전 등 그 시간과 구조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고민하면서, 먼저 제기할 문제로 사고되는 것이 바로 '번역' 문제이다. 탈중국화(탈한자화)와 현대화(식민/냉전 하의 친일/친미/친서방)는 어떤 의미에서 아주 강하게 '번역'과 지식생산의 변혁을 전제로 했다는 가설도 가능하다. 아마도 그러한 변화를 구체적으로 추적하기 위해서는 <식민/제국적 현대성과 역사적 번역실천>이라는 과제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탈중국화와 현대화의 과정에서 '중국'이 어떻게 타자화되어 번역되었는지를 추적하는 일은 매우 흥미로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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