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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번역 작품은 중국어를 한국어로 옮긴 것이었고, 학술적이면서도 개체의 삶의 체험이 복잡하게 얽힌 서술이었다.
두 번째 번역 작품은 대만에서 곧 출판될 예정인데, 한국어를 중국어로 옮긴 것이고, 매우 이론적인 저작이다.
세 번째 번역 작품은 내년 상반기에 번역에 착수할 예정인데, 중국어를 한국으로 옮기게 되고, 문학성이 매우 풍부한 소설이다.
세 작품 모두 관통하는 제재는 중국의 현당대 역사, 특히 '문화대혁명'이다. 공통의 제재는 방법/형식이라는 핵심적 문제로 진입하는 매개를 제공해준다.
늘 예기치 않게 우연적으로 기회는 주어지는데, 이와 같은 '번역'의 경험은 나에게 '글쓰기의 방법'에 대한 고민을 던져 준다. 물론 나는 이 고민을 받아 안을 고민을 하고 있기는 했다. 첫 번역 작품이 주는 곤혹감 때문이었다.
역사적 전변기에 지식인, 즉 번역자에게 요구되는 임무는 무엇일까? 추상적이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변혁적 실천에 불가결한 언어의 번혁일 듯 싶다. 언어의 변혁은 동시에 지식의 변혁이고, 나아가 지식을 매개로한 주체의 변혁이기도 하다.
그래서 역사적 단계를 설정하여, 현대성, 식민, 냉전 등 그 시간과 구조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고민하면서, 먼저 제기할 문제로 사고되는 것이 바로 '번역' 문제이다. 탈중국화(탈한자화)와 현대화(식민/냉전 하의 친일/친미/친서방)는 어떤 의미에서 아주 강하게 '번역'과 지식생산의 변혁을 전제로 했다는 가설도 가능하다. 아마도 그러한 변화를 구체적으로 추적하기 위해서는 <식민/제국적 현대성과 역사적 번역실천>이라는 과제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탈중국화와 현대화의 과정에서 '중국'이 어떻게 타자화되어 번역되었는지를 추적하는 일은 매우 흥미로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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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는 어쩜 ‘오염’될 수밖에 없는지 모른다. ‘진보의 오염’을 운운하면서 역사의 현실에서 사라지는 국면에 서 있는 한국의 일부 자칭 ‘진보’.‘진보의 오염’이란 표현에서 러시아, 중국, 남미, 아프리카, 아랍, 그리고 이북에서의 사회주의의 현실적, 실질적 경험에서 후퇴하고, 그리고 마르크스주의를 현실에서 발전시킨, 최소한 발전시키려고 노력한 사상들을 멀리하고 칸트로 떨어져 ‘순수’를 운운하는 ‘진보’. 처녀성은 지키면서 아이는 갖고 싶다? ‘진보’란 이름은 떼고 차라리 ‘신천지’와 같은 교단을 세우지. 그럼 밥벌이문제는 해결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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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짐 혹은 후퇴 자체를 문제 삼는 게 아니다. 현실사회주의 붕괴에 동작정지 안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중력에 의해서 떨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연의 법칙에 의한 매우 자연적인 일이다. 근데,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의식적으로 확실히 더 떨어져야 한다. 헤겔 밑으로, 칸트 밑으로, 스피노자 밑으로... 그리고 기층[민중] 밑으로 떨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 떨어짐은 다시 올라오기 위한 떨어짐이다. 나는 이 떨어짐의 바탕에 유적이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올라오면서 이 유적이성은 더욱 풍부하게 규정되어 유적존재가 되어야 한다. 현재 추상적으로나마 형성된 ‘인류’를 풍부하게 규정하는 상승이어야 한다.관리 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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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역사가 아닌 새로움을 더 하는 역사에 기반한 사회 속의 '개체'와 세계 속의 '민족'의 변증법이 인식론/존재론적으로 주는 풍부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