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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명사와 지식윤리

藝術人生님의 [번역과 관련한 가설적 연구 주제 하나.] 에 관련된 글.

 

'고유명사'라는 관념 자체는 '현대성'의 반영이 아닌가 유럽의 역사적 맥락에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우리에게 이 보다 더 적실한 주제는 "이러한 '고유명사'의 체계가 어떻게 수입되어 원용되고 있는가" 이다. 물론 이는 '지식의 나눔'이라는 윤리적 문제에 관련된다.

 

일반적으로 '고유명사'가 표현하는 것은 '고유성'이다. 이는 '배타성'이라는 성격을 가진다. 그로 인해서 '번역'되지 않는다. 달리 표현하면 '독점'이다. 나는 '나'로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너희들이 '나'를 나누어 가져서는 안된다. 이는 우리의 번역 현실에서 '번역되지 않는 고유명사'로 표현된다. 특히 유럽적 언어들의 경우 인명, 지명 뿐만 아니라 일간지 및 잡지 이름도 그렇게 '번역'되는 경우가 많다. 아마 이를 비유럽세계에까지 적용한 가장 급진적인 실천의 사례가 <창작과비평>의 '고유'한 번역실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지'의 세계인 유럽에 대해서 그러한 실천은 일반적 관행과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그나마 낯설지 않게 느껴지지만, 우리의 역사의 일부인 '중국'과 관련해서 그런 실천이 급진적으로 실행될 경우 여러 충돌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요즘은 '남들'도 아는 분야에 대해서는 적당히 '타협'하는 모양새도 취하는 듯 하다.

 

'번역되지 않는 고유명사'는 직간접적 번역능력을 가진 지식인만이 그 의미에 상대적으로 온전하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엘리트주의적 실천의 결과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런 위선적 번역의 대상으로만 존재해온 '유럽'에 대해서 우리는 여전히 알지못한다고 할 수 있다. 달리 표현하면 '번역자'들만 알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타자'를 번역하지 않는 방식은 '자신'의 번역불가능성을 주장하기에 이르게 된다. '타자'를 번역을 통한 '나눔'을 통해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 '나'를 나누고자 하지 않는다. 역으로 진정한 '번역'은 '타자'의 것을 나누어가지는 것이고, '나'를 타자와 나누는 것이기도 하다. 즉, 번역은 '나'와 '타자'의 동시적 다원화의 방법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편성'과 갈등적이게 된다. '다원화'는 개별적 역사문화의 맥락에 근거해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번역은 이와 같은 존재론적 전제를 갖게 된다. 개별민족사가 영원히 세계사를 구성해가는 하나의 과정으로서의 역사를 전제한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진정한 번역을 통한 지식의 형성과 이를 매개로한 대중의 주체화는 또한 인식론적 전제가 된다.

 

따라서, 역사 속 대중의 '주체성'은 '지식'에 의해 보증되고, '지식'은 '민족적인 것'에 의해 매개되어야만 한다. 그러한 역사적 매개를 통해서 세계와 사회에 이중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주체성이 해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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