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안티고네> 1차 포스터

보관 및 기록용.

 

9월 대만 공연, 10월 부산 공연이 우선 잡혀 있음.

 

인터넷에서 찾은 인터뷰 동영상(중문): 연극에 대한 기본 입장이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사람들이 이해못하는 연극을 만든다. ...... (티비 드라마와 비교하며) 이건 아주 공포스러운 것이야. 다들 이해하는 극이 어떻게 예술이 되었는가. "

http://www.youtube.com/watch?v=3JDTnveRP4g

 

왕 선생님의 이력(중문):

http://taiwanpedia.culture.tw/web/content?ID=6806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갈 길이 멀다.

대체적으로 나에게 어떤 지식의 형성은 나의 모종의 공백이 만들어내는 불안감(그에 이은 개방성)과 개별적 대상에 대한 인식불가능성이 결합되면서, 대상의 개별성에 의미가 부여 되는  과정인 것 같다.

 

지난 밤, 왕 선생님의 극본 <안티고네>의 초역을 마쳤다. 이 연극에 참여할 한국의 배우 두 분께 먼저 보내드렸다. 이 극본이 어떤 연극으로 태어날지 자못 궁금하다. 기대도 크다. 극본의 내용에 대해서는 따로 포스팅을 해야 할 것 같다.

 

왕 선생님과 이야기하면서 내가 연극과 맺게된 인연의 의미를 좀더 생각하게 된다. 마치 왕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맺어진 역사적 인연처럼 느껴진다. '아름다움', '미학'이라는 범주가 본래 내 사유 속에 자리잡고 있던 '문학'적 실천의 범주를 포함하면서 대체하는 것 같다.

 

무엇을 아름답다 하는가? 왜 왕 선생님은 연극의 핵심 요소로서 '비판적 담론'과 '미학적 형식'을 이야기할까. 이 둘은 어떻게 결합되는걸까. 내가 보기에, 기본적으로 보편/특수주의(그것이 세계주의이든 국민주의이든, 아니면 동일한 원리를 공유한 지역공동체든)적 현대성에 기반한 인식과 지식으로는 담론적 비판성을 확보할 수도 없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이러한 형식적 동일성에 기반해서는 미학 또한 추구될 수 없다. 그것이 총체성에 기반한 것이든, 다원성에 기반한 것이든. 결국 내가 보기에 이 둘에 공히 관계하는 것이 '역사'이다. 물론 여기에서 '종교'적 초월로 나가는 방향도 있는 것 같다.

 

역사를 매개로 한 '민족'적 지식은 변혁적 주체화의 내용일 것인데, 그 구체적 실천 과정에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윤리성의 문제가 미학과 관련되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미학은 형식적 측면에서의 혁신을 지시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형식은 보편주의적이지 않다는 의미에서 '역사'로부터 주어진다. 그러나 그 형식은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주어지지만, 그 현실에 묶인 채 해석되지 않는다. 오히려 비판적 담론과 결합되는 차원에서 그 혁신의 의미를 온전하게 얻게 된다. 

 

아직 할 얘기가 많이 남아 있다. 왕 선생님이 나와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가 늘 말하는 것처럼 내가 '좌파'(왕 선생님 나름의 해석이 있을 듯)여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비판적 담론과 관련한 나의 모종의 민감성 그리고 언어적 표현 능력 때문일 것이다. 달리, 나는 왕 선생님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직관적 판단과 표현이 궁금하다. 다시 말해 그가 내 앞에서 어떤 인식불가능성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동성애 비판은 아니다.

90년대 중반만 해도 동성애에 대한 차별과 공포가 사회적으로 만연해 있었고, 진보 사회운동에서 일종의 묵인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어느덧 십 수년의 과정을 거쳐 '성 다원주의'라 할만 한 것이 뿌리내리고 있는 것 같다. '이성애중심주의'에 대한 비판과 함께 동성애, 양성애 등을 포함하는 다원주의가 적어도 '진보' 진영 안에서 일종의 '정치적 올바름'으로 자리잡고 있는 듯 하다. 얼마전에 러시아에서 동성애를 '조장'하는 행위에 대해 법적으로 처벌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는 뉴스를 접하고, 사석에서 이에 대해 전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게' '동성애의 조장'에 대한 비판에 동조하는 왕(汪) 선생을 반박한 바도 있다. 그런데, 나중에 다른 왕(王) 선생과 <안티고네> 극본의 내용을 논의하면서 왕 선생의 '정치적 올바르지 않음'이 어느 정도 이해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간단히 말하면, 동성애/이성애/양성애 등으로 단지 범주가 늘어나는 것이 모종의 '폭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문제의식이다. 지난 해에 대만에서는 '공공 장소에서의 섹스 파티 사건'으로 떠들썩 한 적이 있다.

 

https://zh.wikipedia.org/wiki/%E5%8F%B0%E9%90%B5%E8%BB%8A%E5%BB%82%E6%80%A7%E6%B4%BE%E5%B0%8D%E4%BA%8B%E4%BB%B6

https://www.facebook.com/TrainPublicSex

 

기차의 한 칸을 전세 내어 진행된 이 파티는 일본의 성인 영화 <電車痴漢>을 모방하여, 이 파티에 자원한 17세 고교 중퇴생 여성과 18명의 남성의 섹스를 진행했다고 전한다. 이 사실이 알려진 후 법적 처벌이 진행되기도 했고, 이에 대해 2012년 9월 발간된 <대만사회연구계간> 88호에서는 특집으로 다루기도 했다. 대체적으로 대만사회연구계간이나 대만의 급진주의 운동가들은 "인민의 성적 결합 자유를 지키자"는 구호를 내세우고 있다.

 

그런데, 왕 선생이 <안티고네>에서 다루려는 것은 이 차원을 넘어서는 것 같다. 왕 선생은 과연 이 섹스파티에 어떤 '미학'이 있는가라고 묻는다. 그는 안티고네가 상징하는 '법', '국가', '윤리' 등에 대해 비판하고 저항하지만, '아름다움'과 '무질서'를 구별한다. 일종의 '다원화'의 윤리학이 필요한 것일까? 

 

나는 왜 '동성애'가 어떤 측면에서 '범주'적 차원에서만 인식되었는가라는 문제를 던질 수 있다고 본다. 과연 '동성애'란 무엇일까. 왕 선생이 말하는 '에로스'적인 사랑은 단순한 성적 결합을 넘어서는 것이다. 성적 결합 또는 모종의 '욕망'으로부터 찾아지는 이러한 동성애 및 다원주의의 소극적 의미는 충분히 인정하지만, 그것이 거기에서 그치면서 성적 결합을 넘어서는 동성간 또는 이성간의 감성적 유대의 다양한 형식이 제약되는 측면이 있지 않은지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현대성'에 내재하는 원리로서의 '욕망'에 대한 억압 기제를 비판하는 측면에서 프로이드는 '내재적' 비판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인간은 단지 '욕망'하는 존재일 뿐인가? 그 내재적 비판은 어떤 의미에서 역사에 외재적인 측면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와 같은 외재성은 '범주'적 차원에 머물게 하는 원인이 된다. 이는 다시 지식의 차이를 선으로 하여 위로부터의 내려지는 '다원화'이기 때문에, 아래로부터 대중적 참여를 바탕으로 하는 '미학'을 구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일종의 엘리트주의와도 연관되지 않는가 생각해본다.

 

잘은 모르겠으나, 프로이드의 현대성에 내재한 비판이 헤겔의 이성과 그에 따르는 종교 등이 이와 대비되기도 하고 또 상호보충적인 구도를 만들어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