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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진과 '중국'

지난 2009년 대만 교통대학에서 이틀동안 진행된 토론회는 <진영진: 사상과 문학> (상/하)로 출판된 바 있다. 근래에야 진영진이 뒤늦게 나의 시야에 들어왔는데, 그로 인해서 나는 무수히 많은 기회를 놓쳐버린 셈이 되었다. 진광흥 선생의 강의도 그렇고, 동학들의 독서회도 그렇고... 늘 그렇게 나는 계속 놓치고, 다시 붙잡고 그러기를 반복한다.

 

여기에 몇 차례의 원탁토론이 녹취되어 있는데, 왕립협 선생과 전리군 선생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왕 선생은 개인적인 친분으로 서평을 써서 Pots지에 발표한 바도 있고, 나중에 중국의 <인문과 사회>에도 전재되었다. http://wen.org.cn/modules/article/view.article.php/3738

 

왕립협: ...... 만약 대만에 독립파가 없고, 대륙에 나중에 자유주의의 부흥, 그렇게 많은 자유주의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진영진은 용감하고 공개적으로 공산당을 비판했을 사람이라고 믿는다. ...... 그는 "대만의 우파든, 좌파든, 대만의 모든 좌파, 통일파, 독립파가 공산당을 욕하는데, 내가 그들을 따라 욕하는 것은 그들에게 구실을 만들어주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오히려 말레이시아에서 수상 시에 '그들이 중국이 특색있는 사회주의라고 말하는데, 그들이 말하는 그것은 중국 특색의 자본주의이다'라고 대륙에 대해 비판한바 있다. 그의 이 말을 아주 많은 대만 사람들이 가져와 그를 풍자하는 말이 된다. 이것이 바로 그의 고통이다! 그래서 이러한 복잡한 심리는 대내외적으로 모두 말해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전리군: 여기에 "애국주의"에 대한 이해라는게 있는데, 나의 이해는 여러분과 다르다. 나의 이해에 따르면, 애국주의는 노신이 강조한 것처럼, '자기 비판'을 가장 큰 특징으로 한다. 예를 들어, 나는 애국하는데, 그래서 나는 나의 국가를 맹렬히 비판한다. 그래서 솔직히 말해, 진영진이 6.4에 대해 갖는 입장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대륙에서 6.4 대학살을 마주한 그 느낌 역시 애국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애국주의는 6.4에 대한 비판으로 체현된다. ... 진영진이 대륙에서 생활했다면, 아마도 우리와 같이 아주 첨예한 비판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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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진과 박현채...

<진영진작품집>(15권)이 인간출판사에서 1988년 4월과 5월에 출간된 바 있는데, 이미 절판이어서 구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가까스로 방도가 생겨 곧 수집될 예정이다. 당장 읽지는 못하겠지만, 큰 그림을 그리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지난 밤에 박현채 전집을 다시 읽느라 잠을 못이루었는데, 그 안에서도 적지 않은 긴장과 모순, 공백 등이 보이기 시작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일정기간 연구 대상이 되었던 그들에게는 면목 없지만, 모종의 조급함과 현실적 타협으로 리영희와 전리군이 다소간 비약적으로 내 연구 안으로 들어온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전리군 연구가 외부와 관련된 비약이었다면, 리영희 연구는 내부와 관련된 비약이었다. 꿰맞추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지만, 내 눈 앞에 그 비약이 점점 크게 보이기 시작한 이상, 에둘러갈 수 없게 된 것이다.

 

지난 6월 연구소의 진도 발표회에서 일정한 방법론적 성찰과 심화의 방향을 제시했는데("후식민/후냉전 지식상황 성찰: '대만'을 방법으로"), 그때까지도 나는 나의 방법적 성찰과 괴리되어 '비약'적 상황에 놓인 연구주제의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 비약은 연구의 설계나 구도의 측면에서 나의 방법론적 성찰에 부합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과연 '지금' '나'에 의해 가능한지의 문제는 나의 '실존'적 측면과 결합되어 판단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나중에 의식하게 되었다.

 

냉전의 적극적 두 축으로서 "중국"과 "남한"의 좌우익에게 존재하는 현대적/국가주의적 무의식과 과도한 정치성의 문제를 역사적으로 제기하기 위한 연구의 실마리로써 전리군과 리영희는 모두 일정한 적합성을 갖는다. 이는 냉전의 소극적 한 축으로서의 '대만'을 방법으로 하여 진행될 수 있는 연구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난 6년 나의 사유에서 진행된 '남한'의 상대화와 '대만'의 내재화의 각도에서 볼 때, 이와 같은 큰 그림을 그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단계적 연구 과제를 설정하면서 그 내포를 심화해 가는 것도 중요하다. 이런 생각에 미치자, 흥미로운 구상이 다시 떠올랐다. 이는 "2종의 비대칭"과 "3종의 비판성"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인데, 역사적 비판성과 현실적(당대적) 비판성, 그리고 이 양자의 변증법적 결합의 가능성의 조건을 밝히는 메타적 비판성을 지식, 주체, 실천의 범주를 중심으로 묶을 수 있다는 구상이고, 다시 이는 식민-냉전적 비대칭과, 후식민-후냉전적 비대칭을 통합적으로 사고하는 것, 즉 동아시아에서 식민-냉전 하의 역사적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분리가 낳은 비대칭과 냉전과 후냉전의 과정에서 새롭게 출현한 지식의 비대칭(정상국가와 비정상국가의 규정성의 차이)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제를 다루기 위한 입구가 바로 진영진과 박현채 같은 사상가들일 것이다. 그리고 간단치 않지만, 어느덧 조건을 형성하여 내가 할 수 있게 된 연구이기도 하다. 이러한 방법론적 성찰과 역사화된 내용을 바탕으로 일정한 '내재화'의 과정을 거쳐 '중국', 나아가 '북조선'에까지 나아갈 수 있을 것이고, 그 안에서 적절한 발언의 위치를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도 타진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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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채...

얼마 전 박현채 선생님의 글을 다시 뒤적이다가, 전집 7권에 실린 89년인가 제2회 단재 상 수상 기념 강연의 녹취록을 봤다. 초입에서 박현채 선생이 세 가지를 언급하는데, 참으로 감동적이다. 지금 원문을 가지고 있지 않아 정확히 옮기지는 못하지만 대략 이런 이야기였다.

 

첫째, 신채호 선생이나 단재 상을 받는 박현채와 같이 역사에 기록되는 사람도 있지만, 역사의 진보에 공헌한 무수한 기록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둘째, 살아오면서 해온 모든 것들을 살아 생전에 보상받고자 하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다는 것.

셋째, 주제넘게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고 하기 보다는 고전에 충실하고자 했으며, 자신의 작업이 그러한 고전을 벗어나 어떤 독창성을 갖는 것은 아니라는 것.

 

수상소감으로 볼 때, 이와 같은 발언들은 상당히 긴장감을 담고 있는 것 같다. 기록되지 않는 민중의 역사적 주체성을 전제하는 그는 상을 존재하게 해주는 더 큰 조건으로서의 기록되지 않는 민중을 언급함으로써 시상자와 수상자 모두를 긴장케 한다. 나아가, 그는 개체의 삶의 한계에 지적 실천의 작업을 가두지 않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개인의 지적 작업을 더욱 긴 역사적 시간대 안에 위치시키면서, 개인의 소유물이 아닌, 세대의 소유물이 아닌, 역사적 민족/사회의 자산으로 공유화하고 있다. 나아가, 새로운 것을 추구하며 역사로부터 단절되기 보다는, 고전에 충실한 지적 실천의 태도를 취한 것 역시 새로운 것에 휩쓸리는 근시안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학술풍토에 보내는 경고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나는 90년대 이후 나온 어떤 지적 성과들도 박현채만큼의 독창성을 담보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박현채로부터 한발자국도 더 나가지 못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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