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날잡아서 제대로 읽겠다 맘만 먹은
미구엘 바터의 마키아벨리 연구를 읽고 있다.
바터의 책은, 박사논문을 출판한 거라 그런지,
처음에 관련 문헌을 한참 열거한 후 자기 얘기를 하는데
워낙 문헌에 대한 소양이 없다 보니까 앞 부분을 읽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중간에 다른 일이 생기면 본론에 못 들어가고 중단하곤 했는데
이번에 맘을 다잡고 더듬더듬 읽고 있다.
이번에도 역시 앞 부분을 읽는 건 쉽지 않았다.
대낮에 책을 읽다가 오랜만에 졸았는데
그 고비를 넘기고 나니 뒷 부분 내용이 비로소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마키아벨리의 virtù-fortuna 도식
(전자는 (변)덕으로 번역하면 될 것 같은데
후자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운세'(運勢)라는 말이 자구적으로는 매우 정확하고
또 '정세'(政勢) 개념과 의미적으로 친화적이라는 점을 가리킬 수 있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의 운세' 따위의 기존 용법이 너무 강력해서 문제지만...
그러나 fortuna도 원래 그런 의미를 가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게 꼭 단점은 아닐 수도 있다.)
전통적인 '자유의지-필연'의 이율배반을 넘어서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변)덕과 운세를 각각 자유의지-결정론이나 주체/주관-대상/객관 등의 도식 아래
포섭해서는 안 된다.
바터는 다른 개념을 도입해 전체 도식을 복잡하게 만들어 이런 위험을 극복하려 하는데
action-times(행위-시대) 개념이 그것이다.
내가 이해하기에 운세는 위의 두 개념이 후자의 우위 하에 결합한 상태,
곧 시대에 부합하는 상태로 행위가 길들여진 즉 '행실'(behavior, 또는 '행태')로 된 상태를 말한다.
반면 (변)덕은 전자의 우위 하에 두 개념이 결합한 상태,
곧 시대를 주도하고 변화시킬 수 있도록 행위 개념이 능동화된 상태를 이른다.
즉 (변)덕과 운세는 자유의지/주관-결정론/객관의 도식에 따라 이해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통상 자유의지/주관에 속한다고 간주되는 행위가 (행실의 형태로) 운세에도 속해 있고
행실이 행위로 길들여지면 (변)덕의 역량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행위라는 모래알 하나로 전체가 무너지는 결정론,
모든 행위를 결정론에서 벗어난 자유의지로 맹신하는 관념론 대신
이제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는 행위 개념 자체의 분할이며,
따라서 유형화된 행위란 수동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반성과 함께
행위 일반이 아닌 시대를 바꿀 수 있는 행위란 무엇인가 하는 난문이 출현한다.
이 같은 접근은 철학적 구조주의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게 해 준다.
(또는 역으로 철학적 구조주의 덕분에 마키아벨리를 이렇게 읽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예컨대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주체로 호명한다'고 말할 때
그가 제출하는 것은 자유의지/주관/능동/행위 등의 항에 속한다고 간주된 주체가
실은 구조를 재생산하는 수동성의 담지자일 수 있다는 반성이며
지배는 행위 일반을 억압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재생산과 양립할 수 있도록 행위를 유형화하고 길들이는 데 있다는 통찰이다.
마키아벨리와 철학적 구조주의는 근대성을 매개로 연결되어 있는데
근대성이란 결국 '변화의 정상화'(월러스틴)를 조건으로 하기 때문이다.
근대에 이르러 이제 문제가 질서와 변화, 그 정치적 대응물로서 보수와 진보의 단순화된 이분법
이 아니라 정상화된 변화에 대한 서로 다른 태도로서 보수주의-자유주의-사회주의이며
그 지배 이데올로기가 길들여진 변화를 지향하는 '중앙파' 자유주의인 것은 이 때문이다.
맑스가 분석한 것이 자본주의라는 '(정상화된) 변화의 구조'이고
맑스주의 안에 개혁-혁명의 대립이 항상 따라 붙는 것,
그람시가 혁명과 구별되는 '수동 혁명'을 개념화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비롯한 것이리라.
요컨대 마키아벨리에서 맑스주의를 거쳐 철학적 구조주의에 이르기까지
문제는 변화와 행위에 대한 반성이며,
변화에 대한 변화, 행위에 대한 행위다.
물론 그 사이에 여러 가지 이단점이 있겠지만
나름 하나의 접근법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Posted by 아포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