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를 통한 한 가지 반성

"On pense à Machiavel, dont l'influence s'est fait sentir dans les théories qui se sont efforcées de combiner une réflexion sur les perversionstotalitairesde la tentatives révolutionnaire avec une phénoménologie desnouveaux mouvements sociauxqui en formeraient comme la contrepartie positive, dans la mesure où ils ne chercheraient pas tant àprendre le pouvoirqu' à transformer les institutions existantes ou à pousser l'État vers sa propre démocratisation, dans la tradition des revendications de droits civiques. Il y a à cet égard unair de familleréunissant des penseurs aussi différents entre eux que Hannah Arendt, Claude Lefort ou Jacques Rancière. Tout doivent quelque chose à la thèse des Discours sur la première décade de Titre Livre, où Machiavel énonce que l'objectif des classes dominantes est toujours d'opprimer les dominés ou la masse, mais que celle-ci a seulement pour objectif de ne pas être dominée. Autrement dit, ce qu'elle cherche n'est pas, symétriquement, à devenirclasse dominanteà son tour, mais plutôt à neutraliser la volonté de puissance des dominants. Une telle représentation de la demande dejusticeen politique, qu'on peut dire négative, est peut-être encore plus significative dans l'èrepostrévolutionnaireactuelle."

- Étienne Balibar,La justice ou l'égalité, La justice bafouée : L'état des droits de l'homme en France, La Découverte, 2010, pp. 21~22.

 

돌이켜 보면 사회운동을 시작한 이래

운동 노선에 관한 두 가지 다소 이율배반적인 명제가 항상 고민이었다.

 

첫 번째는, 사회운동이 '요구 투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요구 투쟁이란 나보다 강한 자, 곧 지배계급이나 국가를 향해 제시되는 것으로

그 실현 여부를 타자에게 맡기는 수동적인 태도이며

설사 요구가 실현되더라도 사회운동의 자율성보다는

지배계급에 대한 의존 및 국가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이유였다.

심지어 지젝은 요구 투쟁이 일종의 '히스테리', 즉

타자가 들어줄 수 없는 과도한 요구를 던져 타자가 실패하는 것을 즐기려는 목적

을 갖는다고까지 비판하기도 했다.

즉 요구 투쟁은 사회운동의 자율성을 확대할 수 없는 실리주의 '로비' 활동에 머물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오히려 수동성을 강화시키는 '투정'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만 놓고 보자면, 이른바 '개량 대 혁명', 또는 '사민주의 대 레닌주의'라는

전통적 구도를 되풀이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지젝의 경우는, 그렇기 때문에 '지배계급으로서의 책임을 떠맡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레닌주의 심지어 '스탈린주의'의 정신을 되찾을 필요가 있다고까지 말한다.

어쨌든 이런 입장이라면 비록 고전적이긴 해도 그리 이율배반적이진 않을 텐데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하고 '새로운 사회운동'이 출현한 이후 운동을 시작한 우리에게는

또 다른 명제가 제시되었고 문제가 복잡해지는 곳은 바로 여기였다.

 

그 두 번째 명제는, '국가 권력 장악'을 지상 목표로 삼지 말아야 하고

역사적으로 나타난 사회운동의 국가주의 경향과 단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국가 장치를 우회하는 아나키즘은 대안이 될 수 없으므로

'집권으로 환원되지 않는 국가 장치 전화/변혁'이라는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고는 했지만

그 현실적 형태가 무엇인지는 사실 수수께끼에 가까운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이 두 가지 명제를 만족시키려는 모색의 일환으로

'자기 통치'나 '평의회', '자율적 사회운동' 등의 개념에 주목하게 됐던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아나키즘과 정말 다른 것인지,

다르다면 어떤 점에서 그런지는 충분히 해명되지 못했고

이를 목적으로 제시된 개념들이 많은 경우 알리바이에 지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해결해야 할 문제를 흐리게 만드는 효과를 낳곤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나키즘이라는 논리적.실천적 궁지에서 벗어나려면

(역으로 아나키즘이라는 이름 아래 모순적으로 공존하던,

이 때문에 도매금으로 배척되곤 했던 어떤 긍정적 전통들을 급진적으로 전유하기 위해서는)

'집권으로 환원되지 않는 국가 장치 변혁'이라는 아포리아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발리바르는 이 문제와 대결하기 위해 마키아벨리가 정식화한 공화주의 전통을 전유한다.

즉 그는 개량과 혁명, 아나키즘과 국가주의라는 대당에서 벗어나

국가 장치 더 일반적으로는 '제도'에 개입하는 국가주의적이지 않은 방식을 정식화하기 위해

'귀족과 평민의 욕망의 비대칭성' 및 이 비대칭적 욕망을 대표하는 제도적 개입,

평민을 '지배계급'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려는 의지'에 대항하고 그를 중화시키기 위한

제도적 개입('호민관'(護民官))이라는, 마키아벨리의 놀라운 통찰을 전유한다.

 

이로써 국가와 사회라는 대당은

귀족과 평민, '지배하려는 욕망'과 '지배받지 않으려는 욕망'의 비대칭적인 대립으로 대체되고,

이에 따라 국가를 우회하지 않으면서도 국가주의로 미끄러지지 않을 수 있는

사고의 공간이 열리게 된다.

이는 맑스주의의 위대한 전통, 곧 '만인을 해방시키는 계급 아닌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관념론적/이상주의적 전통을 좀 더 유물론적인 방식으로 부활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좀 더 고민은 필요하겠지만

발리바르의 최근 작업의 문제의식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에

매우 중요한 정치적 쟁점이 걸려 있다는 것은 점점 더 분명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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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07/09 16:01 2010/07/09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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