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해서 행복해요

요새 자출을 하고 있다.

의외로 학교에서 집까지 대부분 자전거 도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10월 초 언젠가 자출을 했는데, 갑자기 추워진 날이라

감기에 된통 걸렸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이 되어

몸이 회복된 다음에도 망설이다가, 얼마 전부터 다시 자전거를 탄다.

 

자정을 넘긴 시간, 양화대교를 건너 집을 지척에 둔 자전거 도로에 들어섰을 때

이어폰에서 루시드폴의 "고등어"가 흘러 나왔다.

한밤의 반짝이는 한강 곁에서 그의 노래를 듣자니

특히 '수고했어요 오늘 이 하루도'라는 가사에서는

정말 깊은 위로를 느꼈다.

 

그의 따뜻한 노래와 위로는 '돈이 없는 사람들'과 '가난한 그대'를 위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 일반을 향한 것이 아니다.

(물론 모든 인간은 어떤 면에서는 다 가난하다고 말장난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떤 계급을 위한 노래,

어떤 계급('몇만 원이 넘는다는 서울의 꽃등심'을 예사롭게 먹는 자들)은 밀어내는 노래,

그러나 가난하지 않은 이들에게조차

저기에 속해 저 따뜻한 위로의 수신자가 되고 싶다

는 욕망을 일으킬 정도로 감동적인 노래다.

 

가난은 행복과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의 노래의 수신자에 속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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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7 15:46 2010/10/17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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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an Baez, Children of the 80's

몇년 전에 듣고 무척 좋아하게 된 곡.

뭐랄까, 나이든 바에즈만이 쓸 수 있는 곡이란 느낌.

특히 'And we don't care if Dylan's gone to Jesus / Jimmy Hendrix is playing on.'
부분이 좋았다. 누군가는 갔지만, 그러나 무언가는 남았고,

또 누군가가 올 거라는, 낙관주의 때문에.

나도 이렇게 늙을 수 있을까.

 

 

 

 

 

CHILDREN OF THE 80'S
(Words and Music by Joan Baez)

 

We're the children of the eighties haven't we grown
We're tender as a Lotus and we're tougher than a stone.
And the age of our innocence is somewhere in the garden.

We like the music of the sixties
It's The Rolling Stones The Beatles and The Doors.
Flower children Woodstock and the war.
Ah but it's getting harder to deceive us.
And we don't care if Dylan's gone to Jesus
Jimmy Hendrix is playing on.
We know Janis Joplin was the Rose
ah but all the stuff she put in her arm.
We are not alone.
 

We're the children of the eighties haven't we grown
We're tender as a Lotus and we're tougher than a stone.
And the age of our innocence is somewhere in the garden.

Some of us are the sisters and the brothers
We take a leatherjacket and a single golden earring.
Hang out at Discos Rock shows lose our hearing
Take uppers downers blues and reds and yellows.
Our brains are turning to jello
We are looking forward to the days when we live inside of a purple haze.
And the salvation of the soul is Rock and Roll

We are the children of the eighties haven't we grown
We're tender as a Lotus and we're tougher than a stone.
And the age of our innocence is somewhere in the garden.

Recently have you looked in our eyes
Maybe with your conscience in disguise.
We're well informed and we are wise
please stop telling us lies.
We know Afganistan's invaded and we know El Salvador's dictated
Ah but our lives have just begun
we are the warriors of the sun.
We're the golden boys and the golden girls
For a better world.


We are the children of the eighties haven't we grown

We're tender as a Lotus and we're tougher than a stone.
And the age of our innocence is somewhere in the gar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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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6 20:23 2010/10/16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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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에 관한 발리바르의 또 다른 글

어제 아는 분께

발리바르가 공산주의에 관한 쓴 글이 또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요새 발리바르가 '맑스, 그리고 맑스주의에 관한 11 테제'(!)를 구상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 중 6 테제와 7 테제를 발췌하여 <국제 맑스 총회>에서 발표한 것이 아래 글이다.

(http://actuelmarx.u-paris10.fr/cm6/com/MI6_Plenum3_%20Balibar.doc)

 

이것 말고도 Rethinking Marxism Volume 22 Issue 3 2010

에도 공산주의를 비롯한 여러 문제에 관한 발리바르와 네그리의 대담이 실렸다.

(http://www.khukuritheory.net/equaliberty-the-common-and-communism/)

아무래도 발리바르가 공산주의에 관한 책을 한 권 쓸 모양이다.

기대 만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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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6 20:11 2010/10/16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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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an Baez, Prison Trilogy(감옥 3부작)

얼마 전부터 조앤  바에즈 노래를 듣고 있는데

유독 흥겨운 노래가 있어 가사를 찾아 봤다가

잠깐 멈칫했다.

 

어디에서 태어났든

이 정도로 위대한 사람이라면

세계 사람 모두에게 알려질 만할 것이다.

 

 

 

 

 

 

 

 

 

PRISON TRILOGY
(Words and Music by Joan Baez)

Billy Rose was a low rider, Billy Rose was a night fighter
Billy Rose knew trouble like the sound of his own name
Busted on a drunken charge
Driving someone else's car
The local midnight sheriff's claim to fame

In an Arizona jail there are some who tell the tale how
Billy fought the sergeant for some milk that he demanded
Knowing they'd remain the boss
Knowing he would pay the cost
They saw he was severely reprimanded

In the blackest cell on "A" Block
He hanged himself at dawn
With a note stuck to the bunk head
Don't mess with me, just take me home

Come and lay, help us lay
young Billy down

 

Luna was a Mexican the law called an alien
For coming across the border with a baby and a wife
Though the clothes upon his back were wet
Still he thought that he could get
Some money and things to start a life

It hadn't been too very long when it seemed like everything went wrong
They didn't even have the time to find themselves a home
This foreigner, a brown-skin male
Thrown into a Texas jail
It left the wife and baby quite alone

He eased the pain inside him
With a needle in his arm
But the dope just crucified him
He died to no one's great alarm

Come and lay, help us lay
Young Luna down
And we're gonna raze, raze the prisons
To the ground

 

Kilowatt was an aging con of 65 who stood a chance to stay alive
And leave the joint and walk the streets again
As the time he was to leave drew near
He suffered all the joy and fear
Of leaving 35 years in the pen

And on the day of his release he was approached by the police
Who took him to the warden walking slowly by his side
The warden said "You won't remain here
But it seems a state retainer
Claims another 10 years of your life."

He stepped out in the Texas sunlight
The cops all stood around
Old Kilowatt ran 50 yards
Then threw himself down on the ground

They might as well just have laid
The old man down
And we're gonna raze, raze the prisons
To the ground
Help us raze, raze the prisons
To the ground

© 1971, 1972 Chandos Music (ASC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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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5 17:11 2010/10/15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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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상적인 말

'먹는 입'과 '말하는 입'.

말 참 기가 막히게 만든다.

(넓은 의미의) 경제와 정치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니.

더욱이 보편주의를

'먹는 입으로 말할 수 있는 가능성, 즉 함께 먹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가능성'

으로 정식화할 수 있다니.

이게 문학의 힘일까.

굳이 사회과학과 인문학을 대립시키려는 것에는 찬성하기 어렵지만

문학과 철학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정도로 이해한다면, 뭐.

 

진은영은 랑시에르를 비롯한 프랑스 철학을 가지고

한국에서 어떤 말을 할 수 있을지에 관해 보여주는

가장 주목할 만한 사례임에 틀림없다.

 

------------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419448.html)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0826)

 

‘절차에 갇힌 소통’ 인문학으로 구출을

공동체 위계·폐쇄성 둔 채
규범 따져봐야 ‘불통’ 못깨
현실 뛰어넘는 상상력 필요

 

이대 학술대회 진은영 연구교수 제안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고 갈등이 다양하게 분출할수록 누구나 ‘소통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진짜 소통은 찾아보기 어렵다. 정부는 ‘국민들의 뜻에 따라’ 정책을 집행한다지만, 사람들은 ‘소통 없는 정부’를 비판하며 촛불집회에 나선다. 그들에게는 소통 대신 ‘불법 집회 참가자’ 딱지가 돌아온다. 소통만 있으면 어떤 문제든 해결의 실마리가 잡힐 것 같지만, 단지 서로의 입장과 의사를 주고받는다고 해서 소통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이화여대 탈경계인문학 연구단은 지난달 30일 ‘소통을 위한 인문적 상상’이라는 제목의 학술대회를 열었다. 철학자이자 시인인 진은영(40)씨는 ‘소통, 그 불가능성 안의 가능성’이라는 제목의 여는 발표를 통해 진정한 소통의 어려움과 그 가능성에 대해 철학적인 정리를 시도했다.

진씨는 사사로운 이해관계나 편견 등 방해 요소들만 제거하면 왜곡 없는 투명한 소통이 가능하다는 일반적인 관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소통은 어떤 공식처럼 규범화할 수 없는 행위이며, 각자의 입장 속에서는 이미 보내야 할 메시지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아무리 메시지를 주고받는 ‘절차’에 대해 따져봐도 ‘소통의 불가능성’만 더해간다는 것이다.

그는 한나 아렌트, 위르겐 하버마스 등이 시도한 ‘소통의 규범화’에 비판을 들이댄다. 아렌트는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휘둘릴 수 있는 경제적 사안들이 아닌, 오직 공동의 문제만 다루는 정치적 영역에서만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다고 봤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합리성’ 개념을 통해 진실성·진리·정당성 등이 모두 충족되는 말하기만이 보편적인 소통이 가능하다고 봤다. 진씨는 이들의 시도가 ‘먹는 입’과 ‘말하는 입’의 구분을 통해 소통을 보편적 규범으로 만들려 했던 것으로 풀이한다.

그러나 진씨는 “먹는 입과 말하는 입의 구분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말하는 이와 듣는 이 사이에는 다양한 모습의 현실적인 불평등·불균형이 존재하며, 이는 어떤 종류의 규범화를 통하더라도 끊임없이 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동한다. 게다가 경제적인 조건은 말하는 이의 자리를 결정해주는 핵심적인 구실을 하기 때문에 “경제적 사안과 관련된 문제야말로 소통의 핵심적인 주제로 도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한 몸’ 이미지를 통해 소통이 일어나는 공동체의 위계화와 폐쇄성에 비판의 초점을 맞춘다. 공동체 내부 주체들은 소통 주체들이 각자 서 있는 입장이 모두 다르더라도 ‘전체 공동체를 위한 것’을 내세우며, 공동체 내부의 위계질서를 타고 전해져오는 메시지는 별다른 소통 없이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또 공동체 밖에 있다고 여겨지는 ‘절대적 타자’와는 소통하는 방법 자체가 없다. 어떤 공동체가 ‘관용’에 근거해 난민들을 받아들일 수는 있어도, 난민 스스로는 아무런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소통의 불가능성이 나타나는 이유는 절차로 굳어져버린 소통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씨는 ‘두 주체 사이에 확정된 의미를 서로 전달·교환하는 방식의 소통’을 벗어나기 위해선 소통의 당사자들이 아예 기성의 경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주체로 거듭나야 한다고 본다. 이를테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불평등한 현실을 외면하는 대가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사용자와의 협상에서 자신들의 몫을 챙기며 경제적 투쟁에 몰두할 때 그들은 오직 ‘먹는 입’으로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기존 경제적 재분배 방식에 균열을 일으키며 여성·비정규직·이주노동자들의 ‘먹는 입’과 함께 말하기 시작할 때, 그들의 입은 ‘먹기도 하면서 말하는 입’이 된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나에게 낯설기만 했던 ‘절대적 타자’로부터 나와 함께할 수 있는 근접성을 발견하는 ‘탈경계적 보편주의’다. 진씨는 이를 “어떤 이들이 우리를 향해 자신들의 고통과 현실에 대해 호소할 때, 바로 그 순간 그 문제가 우리들이 함께 해결해야 하는 공동의 문제가 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내게 주어진 고정된 정체성을 벗어날 때에만 비로소 소통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사회과학으로 대표되는 ‘소통의 과학’과 다르게 ‘소통의 시학’으로서 인문학의 중요성이 드러난다. 새로운 주체를 만드는 작업에 대해 사회과학이 여러 문제들에 대한 현실적인 분석과 연구를 이뤄낸다면, 인문학은 현실적 조건들을 뛰어넘는 다양한 상상력을 발명해낼 수 있기 때문에 새로운 주체를 상상할 수 있도록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진씨는 “새로운 주체는 상상을 현실로 옮기는 부단한 실천 속에서 만들어지며, 그것은 당연히 기성 질서와의 ‘불화’를 겪는다”며 “그렇지만 이런 불화의 과정이야말로 소통의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것으로 이를 절차라는 이름으로 제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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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4 22:23 2010/10/14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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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놀라운 무식

어떤 글을 번역하고 있는데

나름 꼼꼼하게 하자는 생각에서

저자가 인용한 책들을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대조하고 있다.

그런데 쪽수가 맞지 않는 인용문도 있고

원문에는 나오지 않은 단어(물론 진짜 원문은 불어이기 때문에 그걸 보긴 해야겠지만

본인이 달아 놓은 참고문헌 자체가 영역본이고, 거기에는 틀림없이 나와 있지 않다)

가 들어가 있는 경우도 있다.

 

뭐 그런 거야 실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대개 큰 흐름 면에서 문제가 되는 건 아니었는데

오늘 발견한 대목은 좀 심각하다.

그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인류학"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In Structural Anthropology Levi-Strauss argues that kinship systems could not be 'the arbitrary product of a convergence of several heterogeneous institutions..., yet nevertheless function with some sort of regularity and effectiveness.'"

 

그런데 인터넷(책을 잘못 빌려서. ㅋ)에 등록된 원문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No one asks how kinship systems, regarded as synchronic wholes, could be the arbitrary product of a convergence of several heterogeneous institutions (most of which are hypothetical), yet nevertheless function with some sort of regularity and effectiveness."

 

보다시피 원문에는 'could be'라고 되어 있다.

저자는 앞의 'No one'의 'no'를 'could' 쪽으로 당겨온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원문의 뜻과 정반대가 된다.

원문은, 친족체계가 어떻게 이질적 제도들이 수렴한 자의적 산물일 수 있으면서(긍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규칙성과 실효성을 가지고 기능하느냐라는 이야기인데,

저자의 해석은, 자의적 산물일 수 없고(부정), 오히려 규칙성과 실효성을 갖는다는 식이다.

 

내가 레비스트로스를 잘 모르지만

레비스트로스에 관해 최소한의 소양만 있으면 하기 어려운 오독이고

게다가 문맥상으로도 앞뒤 내용이 'nevertheless'로 연결된다고 보기 매우 어렵기 때문에

(자의적이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칙성과 실효성을 갖는다?)

다른 곳에서 그랬던 것처럼 저자가 'not'을 잘못 삽입한 게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불과 몇 문장 아래에서 저자는 레비스트로스와 알튀세르를

다음과 같이 싸잡아 비판한다.

"In neither case is any attempt made to justify the belief that all the components of a social system must be necessary and functional elements of that system."

 

그러니까 저자는 레비스트로스(와 알튀세르. 알튀세르 문제는 일단 논외로 치자)를

일종의 기능주의로, 적어도 변이가능성에 대한 부정으로 비판하면서,

그 근거로 위 인용문을 들고 있는 것이니 이건 실수라고 보기 어렵다.

즉 레비스트로스가 자의성을 부정했다는 게 일단 가장 중요한 근거인 셈인데,

아니 레비스트로스가 받아들인 소쉬르의 가장 중요한 명제가 '기호의 자의성'라는 건

약간 ABC 아닌가? 혹여 얼핏 그렇게 봤더라도 이 정도 내용이면

일단 자기 눈을 한번 의심하고 혹시 잘못 읽은 게 아닌지 다시 한번 읽어야 하는 것 아닐까?

 

비단 이 부분만 문제는 아니지만

이건 약간 실소를 자아내는 대목이라 적어둔다.

원어민도 이런 실수를 할 수 있다니, 역시 문제는 단지 어학 실력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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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4 19:55 2010/10/14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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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정지

이번 학기에는 (일본어 수업까지 포함)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수업이 있다.

그래서 목요일 오전 수업을 마치고 나면 약간 진이 빠진다.

사실 큰 일은 치렀으니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미뤄둔 일을 해야 하는데

언제나 닥쳐오는 이 나른함이란...

 

내일도 알바랑 세미나가 있어서

제대로 시간이 나진 않는다.

그러니 지금이 가장 황금시간인데! 그런데...

 

조금 있으면 정신이 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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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4 14:41 2010/10/14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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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여덟 시구나

새삼 느끼지만 하루가 너무 빨리 간다.

물론 충분히 집중하지 않으니까 시간이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자전거를 갖고 오지 않았으므로, 아무리 늦어도 10시 반쯤엔 학교를 나서야 한다.

집에서 인터넷이 안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원래는 어떻게든 집에 가기 전까지 과제를 올려 놓아야 하지만

아무래도 여의치 않을 듯.

이것 참 쉽지 않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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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3 19:41 2010/10/13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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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정신을 다잡을 때

한동안 무계획적으로 살았다.

알바가 큰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것저것 손은 대는데, 제대로 되는 건 없이 시간을 보내던 중

인터넷에서 다이어리 비스무리한 걸 다운받아

이것저것 할 일, 하고 싶은 일 등을 적어 보았다.

그랬더니 정말 어마어마하게 일이 많다...!

공부하고 싶고, 어느 정도 읽어야 할 책의 윤곽이 나온 주제만 일단 다섯 개인데,

모르긴 해도 하나만 붙잡고 전력해도 각각 최소한 반년은 걸릴 주제들이다.

그러니 이것만 해도 2년 반이 간다는 얘기인데

게다가 수업이랑 알바, 이런저런 일들까지 감안하면

견적이 잘 나오지 않는다.

 

이것저것 조금씩 손만 대고

뭐 하나 제대로 끝내놓지 않으니 결국 이 모양이다.

나도 어느덧 30대 중반을 바라보는데

좀 한심한 노릇이다.

 

박명수가 말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정말 늦었다."

또 버나드 쇼의 묘비명.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참으로 명언이 아닐 수 없다.

아직 나는 아주 늦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누가 봐도 늦었다고 할 만할 때가 그리 멀지 않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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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2 18:29 2010/10/12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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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독서에 관한 짧은 생각

아니나다를까 지금까지 발리바르 글만 읽었다. ㅠㅠ

뭐 그래도 놀지는 않았으니까...

 

아직 충분히 읽지도 않았고

거기서 다루는 여러 화두를 다룰 수도 없는 노릇.

한두 가지 정도에 관해서만 조금 더 생각해 보려 한다.

 

알다시피 맑스주의 역사에서 공산주의는 항상 사회주의와 쌍을 이뤘다.

사회주의가 지향할 '규제적 이념'이든, 사회주의를 보다 급진화.발본화할 필요성이든.

그런데 1998년에 쓴 "공산주의 이후에 어떤 공산주의가?"라는 글에서 발리바르는

사회주의-공산주의라는 쌍을 해체하려고 시도하며

사회주의의 다음 단계로서로서의 공산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를 가능케 하는 조건으로서 공산주의

라는 도발적인 명제를 제시한다.

(물론 1990년대 초반에 쓴 '공산주의 이후의 유럽'이나

심지어 1976년에 쓴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하여"도 이런 관점에서 읽어볼 수 있다.)

 

이번 글에서 발리바르는 이 명제를 연장하면서

공산주의에게 '사회주의의 지양'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역설적 대체보충'

또는 '인민주의의 대안'라는 새 자리를 마련해 줘야 한다고 말한다.

'공동체'와 '인민(주권)'(peuple)이라는 준거점을 공유하는 인민주의라는 혁명적 담론,

자본주의(또는 제국주의)에 맞선 '인민-되기'라는 혁명적 운동

'내부에서의' 대안적 비판으로 공산주의를 재규정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지금까지 발리바르의 이론화와 수미일관할 뿐더러

그의 사변적 작업이 궁극적으로 지향한 것이 '공산주의'의 혁신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을 계승하고 스피노자를 경유하여

'대중들'(masses)을 이론과 정치의 중심 문제로 제기한 그의 작업은

어떤 점에서는 현 정세의 주요 특징 중 하나인 인민주의

에 대한 좌익적 개입을 이론적으로 준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인민주의에 대한 우익적 비판을 부지불식간에 수용하고

대중운동의 인민주의 경향 앞에서 외재적 계몽주의로 후퇴한 것이야말로

(나를 포함한) 어떤 이들의 가장 큰 이론적.정치적 패착이었다.

 

현 정세에서 맑스(주의)가 다시 돌아온다고 할 때

그것은 비단 사회주의, 그리고 그 이론적 기초로서 (정치)경제학 비판

의 귀환만이 아니다. 물론 그것은 불가결한 필요조건이며

현실사회주의 붕괴 이후 이론의 문화주의 경향을 감안할 때

막대구부리기가 필요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만일 그것만이라면, 그것은 '좋았던 옛 시절'로의 회귀일 뿐이며,

그럴 거였다면 알튀세르와 발리바르를 힘겹게 읽을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발리바르가 맑스주의의 토대-상부구조 도식을 비판하면서

역사에는 경제와 이데올로기라는 '두 개의 토대'가 있다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를 데 없이 쇼킹한 명제를 제시하고,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맑스주의만으로는 결코 안 되며

스피노자를 비롯, 맑스주의 이외의 이론적 자원을 읽어야 한다고 할 때,

그 말로 말미암아 기존의 체계가 해체되는 고통을 겪고

새로 열린 저 막막한 지평 앞에서 현기증을 느낄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맑스로 돌아가야 한다는 점에는 이론이 있을 수 없지만,

어차피 문제는 어떻게 돌아갈 것인지, 맑스의 어떤 부분을 어떤 식으로 읽어야 할지

가 아니었던가.

 

사회주의-공산주의 쌍을 해체하면서 발리바르는

민주주의-인민주의-공산주의로, 새롭게 자리를 배정한다.

내가 볼 때 그 정치적 함의 중 하나는,

민주주의를 놓고 인민주의와 공산주의가 각축을 벌이는 현 정세에서

사회주의(그리고 (정치)경제학 비판)라는 관점을 충실하게 견지하는 것만으로는

결정적 문턱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회주의가 필요하지만, 그러나 공산주의가, 곧

인민주의라는 민주주의의 우익적 전유에 맞선 민주주의의 좌익적 전유

(아마 더 정확히 말한다면 '탈-전유'(ex-appropriation))가 필요하다.

사회주의 없이 공산주의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마찬가지로 공산주의 없이 사회주의 없는 것 역시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인민주의를 비웃거나 매도하지 않고 진지하게 다루는 것.

내가 보기에 우리가 우선 출발해야 할 곳은 거기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미 거기서 출발했기 때문에

너무 늦지 않으려면 더욱 서둘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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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10/10 21:22 2010/10/10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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