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recognize the concept is to remain faithful to the question and to its nature as a question instead of seeking to realize it, hence, instead of having done with it without really having responded to it. This requirement is as important for the procedures of science as for the history of science, without their being reduced in this way to a common measurement or a point of view. "What matters to us is less to furnish a provisional solution than to show that a problem deserves to be posed."(Canguilhem 1989, 177.) It is in this way, astonishingly, that the formula that turns philosophy into "the science of resolved problems,"(Canguilhem 1955.) in a sense that Brunschwicg never meant the expression to have, is retrieved: philosophy ― and it must immediately be said, although this can only be made entirely clear in what follows, that philosophy is history ― is the science of problems independent of their solution. It is the science that is not preoccupied with solutions, because in a certain way there are always solutions, the problems are always resolved at their level; and the history of solutions is only a partial history, an obscure history, and obscuring everything it touches, by giving the illusion that one can dissolve ― and forget ― problems. Passing behind the accumulation of theories and responses, history is really in search of forgotten problems, up to their solutions."
- Pierre Macherey, "Georges Canguilhem's Philosophy of Science: Epistemology and History of Science", In a Materialist Way: Selected Essays by Pierre Macherey, Verso, 1998, p. 177.
지금껏 읽은 글 중에서
철학과 과학의 변별적 관계라는 내 오랜 고민을
가장 명쾌하고 설득력 있게 정리해 준 것이
알튀세르의 제자 피에르 마슈레가 그의 또 다른 스승 조르쥬 캉길렘의 작업에 관해
1964년(!)에 쓴 이 대목이었다.
이 글을 통해, 다소 거칠긴 하지만,
한편으로 문제-개념-철학, 다른 한편으로 해법-이론-과학
이라는 도식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때 개념을 ‘한계 개념’(concept-limite)으로 이해하면
쟁점이 더욱 분명해진다.
한계 개념이란 하나의 이론만으로는 제대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하나 이상의 이론들이 동원될 때에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
나아가 스스로의 해결을 위해 새로운 이론들의 발전을 추동하는 문제
를 제기하는 개념을 말한다.
알튀세르가 즐겨 사용한 예를 들자면
프로이트의 ‘충동’(Treib) 개념이 대표적인데
이는 정신분석학과 생물학의 경계에 있는 개념이며
더욱이 현재보다 훨씬 발전한 정신분석학과 생물학의 힘을 빌어야만
해결의 실마리가 잡힐 수 있는 개념이다.
이 개념으로써 생물학으로 환원할 수 없는 정신분석학의 고유한 영역이 생겨나는 동시에
정신분석학의 자기충족성(self-sufficiency)이 불가능해지는 두 가지 결과가 산출된다.
사실 모든 개념은 경향적으로 한계 개념, 즉 하나 이상의 이론을 요청하며
하나 이상의 해법을 갖는 문제를 제기한다. 만일 특정한 해법과 이론으로써
이 개념이 제기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됐다고 선언하고 문제를 억압하더라도
문제는 사라지지 않고 해법과 이론 안에 출몰하며
때로는 이들을 위기나 심지어 파국으로 내몰 것이다.
'문제들의 과학/학문'으로서 철학이 독자적 존재이유와 효과를 갖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다.
철학은 개념의 원천에 있는 문제로 돌아가, 해결책이 없는 채로 문제를 옹호한다.
이 때 철학은 문제의 새로운 해법을 예상하는 정식화(formulation) 즉
특정한 공식(formula)을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문제를 정돈함으로써
문제 해결에 기여하기도 하지만, 그렇더라도 철학의 본령은
특정한 해법과 이론으로 환원할 수 없는, 실은 그 해법과 이론 더미에 깔려 보이지 않는
문제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여러 가지 개념, 따라서 문제를 제기했는데
가장 수수께끼 같지만 또 가장 집요하게 살아남은 것이 바로 '이데올로기'
즉 '종속화'(subjection)이자 '주체화'(subjectivation)라는 모순적 항의 불안정한 통일체인
'인간-되기'(becoming-man) 과정일 것이다.
알튀세르는 이 개념에 대한 전통적인 철학적 접근 곧 '이론적 인본주의'를 비판하면서
한때 프로이트와 맑스, 정신분석학과 역사유물론이라는 두 과학의 '종합' 속에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과학적 사고가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던 것 같다.
이른바 '프로이트-맑스주의'라는 기획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 개념은, 이 두 과학, 그것도 아직 불완전한 이 두 과학보다 훨씬 더 많은
과학을 동원할 때에만 해결될 수 있음이, 더 정확히 말하자면,
특정 과학의 근원적 불충분성을 지시하는 부정적 지표라는 점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즉 각각의 과학은 이데올로기의 한 측면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지만
이데올로기 일반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당분간은 그렇다.
(물론 이데올로기가 인식론적 의미의 '오류'로 환원될 순 없지만)
발리바르에 따르면 이는 '오류 일반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이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유다.
각각의 과학은 유한하고 유효한 자신의 영역 및 대상에서 진리를 생산하면서
그 필연적 효과로, 특정 오류가 발생하는 국지적 이유와 조건에 대한 설명 역시 생산하지만
오류 일반에 대한 설명을 목표로 삼거나 그를 수행하는 과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발리바르가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에 대해 그의 스승 알튀세르 못지 않게 충실하면서도
이를 다루기 위해 스승과 얼핏 보기엔 정반대로 '철학적 인간학'이란 길을 택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철학적 인간학이란,
"우선 다양한 유형의 사회적 관계들(예를 들면 경제적, 가족적, 교육적 관계들) 또는 사회적 관계의 다양한 차원들(개인적/집단적, 제도적/무의식적 차원들)에 대한 연구들의 접합점에서 제기되어야 하는 질문들(정확히 과학적이지도 않고 형이상학적이지도 않은, 말하자면 간(間)과학적(inter-scientifique)이거나 관(貫)과학적(trans-scientifique)인 질문들)의 공간의 이름입니다. 그것은 맑스와 프로이트, 레비-스트로스와 브로델이 대화하도록(서로를 혼동하지 않으면서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즉 여기서 요점은, '인간-되기'라는 과정을 사고하기 위해서는
철학의 전통적 실천으로서 형이상학으로 후퇴해서는 물론 안 되지만
그렇다고 정의상 유한함을 통해 유효함을 성취하는 개별 과학 중 어느 한두 분과,
그것이 맑스주의가 됐든 그것을 대체하는 또 다른 과학이 됐든 간에, 그것을 절대화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발리바르는 '프로이트-맑스주의'의 해체를 선언한 알튀세르의 노선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이는 '인간-되기'를 설명하는 데 정신분석학이 필요없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이것은 정신분석학과 (맑스주의가 그 초보적 형태인) 역사과학을 '종합'한다면
이데올로기를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 '절대과학'이 탄생할 수 있다는 야심을 포기하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과학들과의 대화이다. 물론 특정 과학이 특정 시점에서 주도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세적인 것이며, 정세가 바뀌면 자리도 바뀔 것이다.
그렇다면 발리바르는 '학제간 연구'를 옹호하는 것인가?
내 생각에, 이 점에서도 발리바르는 학제간 연구가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말한
알튀세르의 노선을 따르고 있다. 각각의 과학은 고유한 대상을 가지며,
그 대상들이 유관한 한에서만 서로 만날 수 있다. 이 구체적 목표와 쟁점 없이
무작정 서로 넘나들고 통합한다고 해서 과학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과학철학/과학사의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발리바르가 '철학적 인간학'을 주창하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인간-되기'가 됐든, '주체화'가 됐든, 또는 '이데올로기'가 됐든간에,
각각의 과학 곧 이 문제에 대한 부분적 해법으로 환원되지 않는 문제의 권리를 옹호하고
이로써 각각의 과학에 새로운 연구 의제를 제시하기 위해서다.
연구 과정에서 어떤 과학은 실은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것이 분명해질 수도 있고,
어떤 과학은 다른 과학과 합쳐질 수도 있으며,
또 어떤 과학은 환원할 수 없는 독자성을 재차 입증할 수도 있다.
이는 연구 과정의 끝에서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결과이지,
선험적으로 예단할 수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율성'과 '통합'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식별하고 이를 사고할 수 있는 적합한 방식을 발명하는 것이다.
발리바르가 철학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철학이 이 사고 프로그램을 정립하고 진전시키는 데
특정 과학으로 환원할 수 없는 고유한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형이상학적이지 않은 철학의 개입,
'철학의 전통적 실천'이 아닌 '철학의 새로운 실천',
그 효과로서 과학과 정치의 발전.
결국 언제나 문제는 이것이다.
Posted by 아포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