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과 이론, 철학과 과학

"To recognize the concept is to remain faithful to the question and to its nature as a question instead of seeking to realize it, hence, instead of having done with it without really having responded to it. This requirement is as important for the procedures of science as for the history of science, without their being reduced in this way to a common measurement or a point of view. "What matters to us is less to furnish a provisional solution than to show that a problem deserves to be posed."(Canguilhem 1989, 177.) It is in this way, astonishingly, that the formula that turns philosophy into "the science of resolved problems,"(Canguilhem 1955.) in a sense that Brunschwicg never meant the expression to have, is retrieved: philosophy ― and it must immediately be said, although this can only be made entirely clear in what follows, that philosophy is history ― is the science of problems independent of their solution. It is the science that is not preoccupied with solutions, because in a certain way there are always solutions, the problems are always resolved at their level; and the history of solutions is only a partial history, an obscure history, and obscuring everything it touches, by giving the illusion that one can dissolve ― and forget ― problems. Passing behind the accumulation of theories and responses, history is really in search of forgotten problems, up to their solutions."
- Pierre Macherey, "Georges Canguilhem's Philosophy of Science: Epistemology and History of Science", In a Materialist Way: Selected Essays by Pierre Macherey, Verso, 1998, p. 177.

 

지금껏 읽은 글 중에서

철학과 과학의 변별적 관계라는 내 오랜 고민을

가장 명쾌하고 설득력 있게 정리해 준 것이

알튀세르의 제자 피에르 마슈레가 그의 또 다른 스승 조르쥬 캉길렘의 작업에 관해

1964년(!)에 쓴 이 대목이었다.

 

이 글을 통해, 다소 거칠긴 하지만,

한편으로 문제-개념-철학, 다른 한편으로 해법-이론-과학

이라는 도식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때 개념을 ‘한계 개념’(concept-limite)으로 이해하면

쟁점이 더욱 분명해진다.

 

한계 개념이란 하나의 이론만으로는 제대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하나 이상의 이론들이 동원될 때에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

나아가 스스로의 해결을 위해 새로운 이론들의 발전을 추동하는 문제

를 제기하는 개념을 말한다.

알튀세르가 즐겨 사용한 예를 들자면

프로이트의 ‘충동’(Treib) 개념이 대표적인데

이는 정신분석학과 생물학의 경계에 있는 개념이며

더욱이 현재보다 훨씬 발전한 정신분석학과 생물학의 힘을 빌어야만

해결의 실마리가 잡힐 수 있는 개념이다.

이 개념으로써 생물학으로 환원할 수 없는 정신분석학의 고유한 영역이 생겨나는 동시에

정신분석학의 자기충족성(self-sufficiency)이 불가능해지는 두 가지 결과가 산출된다.

 

사실 모든 개념은 경향적으로 한계 개념, 즉 하나 이상의 이론을 요청하며

하나 이상의 해법을 갖는 문제를 제기한다. 만일 특정한 해법과 이론으로써

이 개념이 제기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됐다고 선언하고 문제를 억압하더라도

문제는 사라지지 않고 해법과 이론 안에 출몰하며

때로는 이들을 위기나 심지어 파국으로 내몰 것이다.

'문제들의 과학/학문'으로서 철학이 독자적 존재이유와 효과를 갖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다.

철학은 개념의 원천에 있는 문제로 돌아가, 해결책이 없는 채로 문제를 옹호한다.

이 때 철학은 문제의 새로운 해법을 예상하는 정식화(formulation) 즉

특정한 공식(formula)을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문제를 정돈함으로써

문제 해결에 기여하기도 하지만, 그렇더라도 철학의 본령은

특정한 해법과 이론으로 환원할 수 없는, 실은 그 해법과 이론 더미에 깔려 보이지 않는

문제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여러 가지 개념, 따라서 문제를 제기했는데

가장 수수께끼 같지만 또 가장 집요하게 살아남은 것이 바로 '이데올로기'

즉 '종속화'(subjection)이자 '주체화'(subjectivation)라는 모순적 항의 불안정한 통일체인

'인간-되기'(becoming-man) 과정일 것이다.

알튀세르는 이 개념에 대한 전통적인 철학적 접근 곧 '이론적 인본주의'를 비판하면서

한때 프로이트와 맑스, 정신분석학과 역사유물론이라는 두 과학의 '종합' 속에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과학적 사고가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던 것 같다.

이른바 '프로이트-맑스주의'라는 기획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 개념은, 이 두 과학, 그것도 아직 불완전한 이 두 과학보다 훨씬 더 많은

과학을 동원할 때에만 해결될 수 있음이, 더 정확히 말하자면,

특정 과학의 근원적 불충분성을 지시하는 부정적 지표라는 점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즉 각각의 과학은 이데올로기의 한 측면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지만

이데올로기 일반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당분간은 그렇다.

(물론 이데올로기가 인식론적 의미의 '오류'로 환원될 순 없지만)

발리바르에 따르면 이는 '오류 일반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이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유다.

각각의 과학은 유한하고 유효한 자신의 영역 및 대상에서 진리를 생산하면서

그 필연적 효과로, 특정 오류가 발생하는 국지적 이유와 조건에 대한 설명 역시 생산하지만

오류 일반에 대한 설명을 목표로 삼거나 그를 수행하는 과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발리바르가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에 대해 그의 스승 알튀세르 못지 않게 충실하면서도

이를 다루기 위해 스승과 얼핏 보기엔 정반대로 '철학적 인간학'이란 길을 택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철학적 인간학이란,

"우선 다양한 유형의 사회적 관계들(예를 들면 경제적, 가족적, 교육적 관계들) 또는 사회적 관계의 다양한 차원들(개인적/집단적, 제도적/무의식적 차원들)에 대한 연구들의 접합점에서 제기되어야 하는 질문들(정확히 과학적이지도 않고 형이상학적이지도 않은, 말하자면 간(間)과학적(inter-scientifique)이거나 관(貫)과학적(trans-scientifique)인 질문들)의 공간의 이름입니다. 그것은 맑스와 프로이트, 레비-스트로스와 브로델이 대화하도록(서로를 혼동하지 않으면서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즉 여기서 요점은, '인간-되기'라는 과정을 사고하기 위해서는

철학의 전통적 실천으로서 형이상학으로 후퇴해서는 물론 안 되지만

그렇다고 정의상 유한함을 통해 유효함을 성취하는 개별 과학 중 어느 한두 분과,

그것이 맑스주의가 됐든 그것을 대체하는 또 다른 과학이 됐든 간에, 그것을 절대화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발리바르는 '프로이트-맑스주의'의 해체를 선언한 알튀세르의 노선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이는 '인간-되기'를 설명하는 데 정신분석학이 필요없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이것은 정신분석학과 (맑스주의가 그 초보적 형태인) 역사과학을 '종합'한다면

이데올로기를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 '절대과학'이 탄생할 수 있다는 야심을 포기하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과학들과의 대화이다. 물론 특정 과학이 특정 시점에서 주도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세적인 것이며, 정세가 바뀌면 자리도 바뀔 것이다.

 

그렇다면 발리바르는 '학제간 연구'를 옹호하는 것인가?

내 생각에, 이 점에서도 발리바르는 학제간 연구가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말한

알튀세르의 노선을 따르고 있다. 각각의 과학은 고유한 대상을 가지며,

그 대상들이 유관한 한에서만 서로 만날 수 있다. 이 구체적 목표와 쟁점 없이

무작정 서로 넘나들고 통합한다고 해서 과학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과학철학/과학사의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발리바르가 '철학적 인간학'을 주창하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인간-되기'가 됐든, '주체화'가 됐든, 또는 '이데올로기'가 됐든간에,

각각의 과학 곧 이 문제에 대한 부분적 해법으로 환원되지 않는 문제의 권리를 옹호하고

이로써 각각의 과학에 새로운 연구 의제를 제시하기 위해서다.

연구 과정에서 어떤 과학은 실은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것이 분명해질 수도 있고,

어떤 과학은 다른 과학과 합쳐질 수도 있으며,

또 어떤 과학은 환원할 수 없는 독자성을 재차 입증할 수도 있다.

이는 연구 과정의 끝에서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결과이지,

선험적으로 예단할 수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율성'과 '통합'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식별하고 이를 사고할 수 있는 적합한 방식을 발명하는 것이다.

 

발리바르가 철학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철학이 이 사고 프로그램을 정립하고 진전시키는 데

특정 과학으로 환원할 수 없는 고유한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형이상학적이지 않은 철학의 개입,

'철학의 전통적 실천'이 아닌 '철학의 새로운 실천',

그 효과로서 과학과 정치의 발전.

결국 언제나 문제는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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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07/14 10:28 2010/07/14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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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후네 도시로

휴일에 집에서 뒹굴거리며 채널을 돌리다가

<매트릭스 3>를 봤다.

기계와 인간의 대전이 나왔는데

인간편 장군의 이름이 '미푸네'(Mifune)였다.

 

우연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찾아 보니 역시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미후네 도시로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본 구로사와 회고전 상영작 중에서

두 편인가를 빼놓고는 모두 미후네가 나왔다.

내 기억 속에 미후네라는 인물을 기입한 영화는 <거미집의 성>인데

일본 영화배우 중 내가 처음으로 이름을 외웠던 사람이 그였으니

인상적(impressive)이라는 말의 정의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일본 영화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말고는

구로사와 아키라와 오즈 야스지로 영화 약간밖에 본 적이 없어

지금도 내가 이름을 외우는 일본 배우는 서너 명을 넘지 않는다.

주위에 팬들이 많아 이름만 기억하게 되었을 뿐 얼굴하고 일치시키진 못하는 오다기리 조와

<노다메 칸타빌레>를 통해 알게 된 우에노 주리(꺅!) 정도?

물론 구로사와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한다면

적어도 시무라 다카시 이름은 외웠어야 했겠지만 말이다..)

 

이번 회고전 자료집에 따르면

<거미집의 성> 라스트신은 특수 촬영이 아니라

실제로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명사수가 미후네를 겨냥하고 쏜 것이라고 한다.

촬영이 끝난 후 미후네는 위험한 촬영을 감행했다며 감독을 격렬히 비난했고

심지어 술에 취해서는 산탄총을 들고 감독 집에 찾아갔다고.

미후네에게는 좀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관객의 입장에서는 구로사와의 위험한 시도를 절대적으로 지지할 수밖에 없다.

정말이지 그 라스트신은 운명 앞에 선 인간의 무력함을

어떻게 해볼 수 없을 정도로 표현하며

이 장면으로써 <거미집의 성>이 원작인 <맥베스>를 뛰어넘는

실로 엄청난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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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2 09:25 2010/07/12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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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를 통한 한 가지 반성

"On pense à Machiavel, dont l'influence s'est fait sentir dans les théories qui se sont efforcées de combiner une réflexion sur les perversionstotalitairesde la tentatives révolutionnaire avec une phénoménologie desnouveaux mouvements sociauxqui en formeraient comme la contrepartie positive, dans la mesure où ils ne chercheraient pas tant àprendre le pouvoirqu' à transformer les institutions existantes ou à pousser l'État vers sa propre démocratisation, dans la tradition des revendications de droits civiques. Il y a à cet égard unair de familleréunissant des penseurs aussi différents entre eux que Hannah Arendt, Claude Lefort ou Jacques Rancière. Tout doivent quelque chose à la thèse des Discours sur la première décade de Titre Livre, où Machiavel énonce que l'objectif des classes dominantes est toujours d'opprimer les dominés ou la masse, mais que celle-ci a seulement pour objectif de ne pas être dominée. Autrement dit, ce qu'elle cherche n'est pas, symétriquement, à devenirclasse dominanteà son tour, mais plutôt à neutraliser la volonté de puissance des dominants. Une telle représentation de la demande dejusticeen politique, qu'on peut dire négative, est peut-être encore plus significative dans l'èrepostrévolutionnaireactuelle."

- Étienne Balibar,La justice ou l'égalité, La justice bafouée : L'état des droits de l'homme en France, La Découverte, 2010, pp. 21~22.

 

돌이켜 보면 사회운동을 시작한 이래

운동 노선에 관한 두 가지 다소 이율배반적인 명제가 항상 고민이었다.

 

첫 번째는, 사회운동이 '요구 투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요구 투쟁이란 나보다 강한 자, 곧 지배계급이나 국가를 향해 제시되는 것으로

그 실현 여부를 타자에게 맡기는 수동적인 태도이며

설사 요구가 실현되더라도 사회운동의 자율성보다는

지배계급에 대한 의존 및 국가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이유였다.

심지어 지젝은 요구 투쟁이 일종의 '히스테리', 즉

타자가 들어줄 수 없는 과도한 요구를 던져 타자가 실패하는 것을 즐기려는 목적

을 갖는다고까지 비판하기도 했다.

즉 요구 투쟁은 사회운동의 자율성을 확대할 수 없는 실리주의 '로비' 활동에 머물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오히려 수동성을 강화시키는 '투정'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만 놓고 보자면, 이른바 '개량 대 혁명', 또는 '사민주의 대 레닌주의'라는

전통적 구도를 되풀이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지젝의 경우는, 그렇기 때문에 '지배계급으로서의 책임을 떠맡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레닌주의 심지어 '스탈린주의'의 정신을 되찾을 필요가 있다고까지 말한다.

어쨌든 이런 입장이라면 비록 고전적이긴 해도 그리 이율배반적이진 않을 텐데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하고 '새로운 사회운동'이 출현한 이후 운동을 시작한 우리에게는

또 다른 명제가 제시되었고 문제가 복잡해지는 곳은 바로 여기였다.

 

그 두 번째 명제는, '국가 권력 장악'을 지상 목표로 삼지 말아야 하고

역사적으로 나타난 사회운동의 국가주의 경향과 단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국가 장치를 우회하는 아나키즘은 대안이 될 수 없으므로

'집권으로 환원되지 않는 국가 장치 전화/변혁'이라는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고는 했지만

그 현실적 형태가 무엇인지는 사실 수수께끼에 가까운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이 두 가지 명제를 만족시키려는 모색의 일환으로

'자기 통치'나 '평의회', '자율적 사회운동' 등의 개념에 주목하게 됐던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아나키즘과 정말 다른 것인지,

다르다면 어떤 점에서 그런지는 충분히 해명되지 못했고

이를 목적으로 제시된 개념들이 많은 경우 알리바이에 지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해결해야 할 문제를 흐리게 만드는 효과를 낳곤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나키즘이라는 논리적.실천적 궁지에서 벗어나려면

(역으로 아나키즘이라는 이름 아래 모순적으로 공존하던,

이 때문에 도매금으로 배척되곤 했던 어떤 긍정적 전통들을 급진적으로 전유하기 위해서는)

'집권으로 환원되지 않는 국가 장치 변혁'이라는 아포리아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발리바르는 이 문제와 대결하기 위해 마키아벨리가 정식화한 공화주의 전통을 전유한다.

즉 그는 개량과 혁명, 아나키즘과 국가주의라는 대당에서 벗어나

국가 장치 더 일반적으로는 '제도'에 개입하는 국가주의적이지 않은 방식을 정식화하기 위해

'귀족과 평민의 욕망의 비대칭성' 및 이 비대칭적 욕망을 대표하는 제도적 개입,

평민을 '지배계급'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려는 의지'에 대항하고 그를 중화시키기 위한

제도적 개입('호민관'(護民官))이라는, 마키아벨리의 놀라운 통찰을 전유한다.

 

이로써 국가와 사회라는 대당은

귀족과 평민, '지배하려는 욕망'과 '지배받지 않으려는 욕망'의 비대칭적인 대립으로 대체되고,

이에 따라 국가를 우회하지 않으면서도 국가주의로 미끄러지지 않을 수 있는

사고의 공간이 열리게 된다.

이는 맑스주의의 위대한 전통, 곧 '만인을 해방시키는 계급 아닌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관념론적/이상주의적 전통을 좀 더 유물론적인 방식으로 부활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좀 더 고민은 필요하겠지만

발리바르의 최근 작업의 문제의식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에

매우 중요한 정치적 쟁점이 걸려 있다는 것은 점점 더 분명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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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9 16:01 2010/07/09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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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벤트 블루 5 - 천 개의 눈

“천안함 스모킹 건 '1번' 글씨, 국내 문구업체 매직 성분과 동일”
합조단, “국내 생산 잉크와 불일치”…네티즌, “모나미에서 1998년 출원”
 
2010년 07월 01일 (목) 16:55:06 권순택 기자 nanan@mediaus.co.kr
 

민·군합동조사단(이하 합조단)이 천안함을 침몰시켰다는 주장하는 어뢰에 쓰인 ‘1번’ 글씨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청색을 나타내는 ‘솔벤트 블루(Solvent Blue) 5’로 국내에서 생산되는 잉크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최근 네티즌들 사이에서 이를 뒤집는 주장이 나와 파문이 일 것으로 보인다.

   
  ▲ 쌍끌이 어선이 건져올렸다는 어뢰에 파란 매직으로 '1번'이라고 선명하게 쓰여있다ⓒ권순택  

합조단은 지난 29일 '천안함 의혹 관련 설명회' 당시 “북한 어뢰에 쓰인 ‘1번’이라는 글씨의 잉크 성분을 분석한 결과 청색 유성매직으로 확인됐다”면서 “성분 색소는 ‘솔벤트 블루5’로 청색 유성매직으로 많이 쓰이지만 국내에서 생산된 잉크와 비교한 결과 일치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합조단은 ‘1번’글씨에 대한 조작 가능성을 부정한 것이다. 

그러나 네티즌들은 국내 문구기업 (주)모나미가 1998년 ‘솔벤트 블루5’가 배합된 잉크를 특허청에 출원한 사실을 찾아내 합조단의 주장을 뒤집었다.  

실제 네티즌들의 주장에 따라 특허청 사이트에서 출원번호 ‘10-1998-0023008’를 입력하면 1998년 (주)모나미가 출원한 ‘유성 마킹펜용 잉크 조성물’이란 결과가 검색된다. 그리고 ‘공보보기’를 통해 확인한 결과 유성 마킹펜용 잉크조성물에 착색제 솔벤트 블루 5가 함유돼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출원내용에서 (주)모나미는 ‘발명의 구성 및 작용’에 대해 “본 조성물(유성 마킹펜용 잉크)에는 착색제가 배합되는데 그 함량은 조성물 총중량 기준으로 1~20중량% 정도가 바람직하다”며 “본 조성물에 있어서 솔벤트 블루(Solvent Blue) 2, 4, 5, 37, 38, 43, 44, 51, 64 및 베이직 블루(Basic Blue) 1, 7 등 같은 안료로 이루어진 군에서 선택되는 1종 또는 2종 이상의 혼합물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출원)청구의 범위’란에서 역시 “상기 착색제로서 솔벤트 블루(Solvent Blue) 2, 4, 5, 37, 38, 43, 44, 51, 64 및 70과 같은 안료로 이루어진 군에서 선택되는 1종 또는 2종 이상의 혼합물을 조성물 총중량 기준으로 1~20 중량% 함유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유성 마킹펜용 잉크조성물”라고 명시돼 있다.

   
  ▲ 특허청 사이트에서 검색한 (주)모나미의 출원 상세내용 캡처. (주)모나미는 착색제로 솔벤트 블루 5를 배합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  
 

이에 네티즌들은 “난리가 났다”며 “이제 이 뒷수습을 누가하며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합조단은 그동안 어뢰에 표기된 ‘1번’글씨는 북의 소행에 대한 결정적 증거라고 이야기한 바 있어 천안함 침몰 원인을 둘러싼 의혹은 깊어질 수 밖에 없게 됐다.

 

'솔벤트 블루 5'.

얼마나 전문적인 용어인가!

SBS나 중앙일보 등은 합조단 관계자의 말을 빌어

"국내에서 생산된 모든 잉크와 비교한 결과와 일치하지 않아 한국산 잉크가 아니다"고 보도했다.

사실 저 정도 전문 용어를 쓰면서 '국내에서 생산된 모든 잉크와 비교'했다는 근거를 들어

합조단이라는 어쨌든 공식 기구에서 한국산 잉크가 아니다

라고 말한 것을 믿고 보도했으니, SBS나 중앙일보 쪽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만한 정보망도 없고, 보도라는 직업으로 삼아 생계를 꾸려 가는 것도 아닌 '일개 네티즌'이

특허청 사이트에 접속해서 모나미 출원 상세내용을 검색해 보는 것만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

(물론 그 네티즌의 노력이나 능력을 폄하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조차 확인하지 않고 저 '스모킹 건'이라는 중대 사안에 관한 뉴스를,

그것도 '직업으로서 언론인'의 지위와 명예, 권한과 책임을 지닌 자들이 보도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억울하다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리라.

하다 못해 잉크 회사에 전화 한 통만 했어도 알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

((주)모나미 관계자에 따르면, 이 성분은 모나미뿐만 아니라 국내 대부분 업체에서

사용하는 재료라고 한다.)

각자의 일에 바빠 매 사안에 대해 직접 알아볼 여유가 부족한 동료시민들이

자신들 대신 이런 일을 하라고 만들거나 지원하는('위임'까지는 아니더라도) 직업이 언론 아닌가?

뭐 너무 당위적인 얘기라고 할 수도 있지만, 좌우를 떠나 이건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근본적인 책임은 합조단에게 있다.

이게 지금 몇 번째 터진 일인데, 이렇게 무대포로 나갈 수 있다니 놀라울 정도다.

이건 '무능'과 '무시'라는 말 말고 다른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울 것 같다.

합조단 쪽에서는 언론 쪽에서 오보를 한 거라고 책임을 떠넘긴다는데

네티즌이 밝히고 나서야 저런 변명을 했다는 점에서 신뢰하기 어렵다.

총리실에서는 사찰 대상자가 민간인인 줄 몰랐다는 참으로 어이없는 변명을 하던데

얘들은 도대체 뭘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저 '일개 네티즌'이라는 '천 개의 눈'이 공론장을 통해 정보를 얻고 공론장에서 발언하지 않았다면

진보에 반하는 보수가 판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참에 반하는 거짓이 더욱 판쳤으리라.

비단 이 문제뿐이겠는가. 황우석 사건을 통해 드러난, 그러나 용산참사를 비롯해

드러나지 않은 그보다 더 많은 거짓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결국 '천 개의 눈'이 더 활발하게 공론장에 들어오는 것만이

진보뿐만 아니라 참을 확대하는 유일한 길임이 새삼 분명해진다.

즉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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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07/04 19:48 2010/07/04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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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아키라 탄생 100주년 특별전

얼마 전 우연찮게 상암동에 있는 한국영상자료원에 들렀다가

7월 1일부터 구로사와 아키라 탄생 100주년 특별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세한 일정은 http://www.koreafilm.or.kr/cinema/program/category_view.asp?g_seq=69&p_seq=429)

 

몇 년 전 구로사와 회고전에서 <거미집의 성>을 비롯 영화 몇 편을 본 적이 있는데

정말 죽였다.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을 각색한 <란>의 경우

어떤 분의 말을 빌자면 '구름이 연기하는' 압도적인 장면도 나온다.

 

마침 요새 좀 시간이 나고

장소가 가까운 데다가 무료상영(!)이라니

오랜만에 큰 스크린으로 명작을 감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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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07/01 00:49 2010/07/01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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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를 놓치면 안 되는 이유

기회는 자주 오지 않고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며

상대방도 노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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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06/27 00:36 2010/06/27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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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에 관한 독서 노트 1

한번 날잡아서 제대로 읽겠다 맘만 먹은

미구엘 바터의 마키아벨리 연구를 읽고 있다.

바터의 책은, 박사논문을 출판한 거라 그런지,

처음에 관련 문헌을 한참 열거한 후 자기 얘기를 하는데

워낙 문헌에 대한 소양이 없다 보니까 앞 부분을 읽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중간에 다른 일이 생기면 본론에 못 들어가고 중단하곤 했는데

이번에 맘을 다잡고 더듬더듬 읽고 있다.


이번에도 역시 앞 부분을 읽는 건 쉽지 않았다.

대낮에 책을 읽다가 오랜만에 졸았는데

그 고비를 넘기고 나니 뒷 부분 내용이 비로소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마키아벨리의 virtù-fortuna 도식

(전자는 (변)덕으로 번역하면 될 것 같은데

후자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운세'(運勢)라는 말이 자구적으로는 매우 정확하고

또 '정세'(政勢) 개념과 의미적으로 친화적이라는 점을 가리킬 수 있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의 운세' 따위의 기존 용법이 너무 강력해서 문제지만...

그러나 fortuna도 원래 그런 의미를 가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게 꼭 단점은 아닐 수도 있다.)

전통적인 '자유의지-필연'의 이율배반을 넘어서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변)덕과 운세를 각각 자유의지-결정론이나 주체/주관-대상/객관 등의 도식 아래

포섭해서는 안 된다.


바터는 다른 개념을 도입해 전체 도식을 복잡하게 만들어 이런 위험을 극복하려 하는데

action-times(행위-시대) 개념이 그것이다.

내가 이해하기에 운세는 위의 두 개념이 후자의 우위 하에 결합한 상태,

곧 시대에 부합하는 상태로 행위가 길들여진 즉 '행실'(behavior, 또는 '행태')로 된 상태를 말한다.

반면 (변)덕은 전자의 우위 하에 두 개념이 결합한 상태,

곧 시대를 주도하고 변화시킬 수 있도록 행위 개념이 능동화된 상태를 이른다.


즉 (변)덕과 운세는 자유의지/주관-결정론/객관의 도식에 따라 이해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통상 자유의지/주관에 속한다고 간주되는 행위가 (행실의 형태로) 운세에도 속해 있고

행실이 행위로 길들여지면 (변)덕의 역량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행위라는 모래알 하나로 전체가 무너지는 결정론,

모든 행위를 결정론에서 벗어난 자유의지로 맹신하는 관념론 대신

이제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는 행위 개념 자체의 분할이며,

따라서 유형화된 행위란 수동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반성과 함께

행위 일반이 아닌 시대를 바꿀 수 있는 행위란 무엇인가 하는 난문이 출현한다.


이 같은 접근은 철학적 구조주의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게 해 준다.

(또는 역으로 철학적 구조주의 덕분에 마키아벨리를 이렇게 읽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예컨대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주체로 호명한다'고 말할 때

그가 제출하는 것은 자유의지/주관/능동/행위 등의 항에 속한다고 간주된 주체가

실은 구조를 재생산하는 수동성의 담지자일 수 있다는 반성이며

지배는 행위 일반을 억압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재생산과 양립할 수 있도록 행위를 유형화하고 길들이는 데 있다는 통찰이다.


마키아벨리와 철학적 구조주의는 근대성을 매개로 연결되어 있는데

근대성이란 결국 '변화의 정상화'(월러스틴)를 조건으로 하기 때문이다.

근대에 이르러 이제 문제가 질서와 변화, 그 정치적 대응물로서 보수와 진보의 단순화된 이분법

이 아니라 정상화된 변화에 대한 서로 다른 태도로서 보수주의-자유주의-사회주의이며

그 지배 이데올로기가 길들여진 변화를 지향하는 '중앙파' 자유주의인 것은 이 때문이다.

맑스가 분석한 것이 자본주의라는 '(정상화된) 변화의 구조'이고

맑스주의 안에 개혁-혁명의 대립이 항상 따라 붙는 것,

그람시가 혁명과 구별되는 '수동 혁명'을 개념화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비롯한 것이리라.


요컨대 마키아벨리에서 맑스주의를 거쳐 철학적 구조주의에 이르기까지

문제는 변화와 행위에 대한 반성이며,

변화에 대한 변화, 행위에 대한 행위다.

물론 그 사이에 여러 가지 이단점이 있겠지만

나름 하나의 접근법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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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06/26 15:49 2010/06/26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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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우샤오시엔 감독의 2004년 강연 중

"생각하는 것은 물 위에 글을 쓰는 것인데, 당연히 물은 흘러간다.

중요한 것은 반드시 돌 위에 새겨야 하고 그러면 영원히 존재할 수 있게 된다."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article_id=26840&mm=005004002)

(양익준 자신의 표현은 이거였다.

"생각하는 것은 물 위에 흘려 보내는 것이다.

바위에 파서 새겨 넣어라."

이 말이 더 강렬하게 느껴진다.)

 

요새 집에 케이블이 나와서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예능 프로그램에 나온 양익준 감독을 보았다.

거기서 그가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말을 인용했는데

인상적이어서 기록해 둔다.

 

기록과 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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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3 23:37 2010/06/23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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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바르와 공화주의

"On peut se placer dans une perspective, si vous voulez, quasi républicaine. On peut essayer de lutter pour que se développe un pouvoir constituant qui ne soit pas enfermé dans des frontières nationales, et des pouvoirs constitués le plus représentatifs possible. (...) Le coeur même de l'idée du pouvoir constituant, c'est de ne pas tendre à la prise du pouvoir, de ne pas tendre à opprimer les autres, mais de tendre à la limitation des excès du pouvoir. Non pas exercer, s'emparer du pouvoir pour opprimer les autres mais essayer de faire en sorte qu'il soit le moins oppressif et le moins absolu possible."

- Etienne Balibar, Cosmopolitisme et Internationalisme aujourd'hui, Marx contemporain : Acte 2, Espaces Marx, 2008, p. 356.

 

국제주의에 관한 발리바르의 글에서 예기치 않게 발견한 문구다.

여기에서 공화주의, 더 정확히는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를 떠올리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이 짧은 문구에 지난 수십년간 발리바르가

맑스주의 및 근대 정치의 아포리아에 관해 고민한

핵심 문제의식 중 하나가 집약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를 추적하는 것이 당분간 과제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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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2 20:04 2010/06/22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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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과 (사회)과학

"Si la philosophie politique, d'une certaine façons, 《disparaît》 dans la deuxième modernité post-révolutionnaire entre les philosophies du sujet et le théories de l'évolution sociales, il est tentant de penser que sa résurgence (avec la crise de la modernité, depuis les guerres mondiales et la 《guerre civile》 des systèmes socio-politiques) correspond à une 《fermeture》 de la question révolutionnaire (voire à une 《fin de l'illusion》 révolutionnaire, comme le dit François Furet). En réalité, il serait tout aussi juste de remarquer qu'elle traduit une nouvelle incertitude quant au sens de l'événement révolutionnaire, avec ses 《corrélats》 tendanciels dont la description a formé le coeur de la discipline sociologique (laïcisation ou 《désenchantement du monde》, individualisme et société de masse, démocratisation et 《règne de l'opinion》, rationalité bureaucratique, etc.)."

- Etienne Balibar, Qu'est-ce que la philosophie politique? Notes pour une topique, Actuel Marx N° 28 (Août 2000), p. 13.

 

'철학의 종언'은 근대 사회과학이 성립한 후

사회과학이 철학에 대해 제기한 가장 흔한 비판이었다.

그러나 철학자 중 누구보다 소리높여 과학의 중요성을 외쳤고

'철학의 전통적 실천'과 점점 더 멀어진 알튀세르가 지적했듯

진정한 쟁점은 철학의 종언이 아니라 '철학의 새로운 실천'이다.

더욱이 사회과학의 탄생 자체를 규정한 근대성이 위기에 빠진 지금이라면 더더욱

"(사회)과학이냐 (정치)철학이냐"라는 양자택일은 전자의 쇄신에 장애물이 될 뿐이다.

 

철학의 전통적 실천을 철학 일반과 같은 것으로 놓고

철학을 비웃는 것은 무척 손쉬운 일이다.

더욱이 철학의 전통적 실천이 오늘날 철학적 실천의 지배적 형태이므로

(이는 물론 (사회)과학도 예외가 아니며, 양자 모두

최종심에서 좌익에 불리한 세력 관계 때문일 것이다.)

그런 태도가 나타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렇더라도 알튀세리앙을 자임하거나 알튀세르를 많이 읽었다는 이들조차

그런 태도를 보일 땐, 글쎄, 정말 알튀세르를 제대로 읽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알튀세르가 절대 진리는 아니다.

다만 그가 이론을 철학과 과학으로 구별짓고

어느 한 쪽으로 환원되지 않는 양자의 자율성 및 생산적 긴장을 유지하려 한 것은

그의 직업이 철학자여서가 아니라 좀더 진지한 이론적, 더 중요하게는 정치적 쟁점 때문이며

그 쟁점은 오늘날에도 곱씹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철학자들에게 "과학의 학교로 가라"고 말한 바슐라르,

현대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과학사가 중 한 명이었던 캉길렘 모두

여전히 철학자였던 이유가 무엇이며

레닌이 1917년을 앞둔 그 엄중한 시기에 헤겔을 읽으며 <철학 노트>를 쓴 이유가 무엇인지

숙고해 봐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건 철학을 위해서가 아니다.

정반대로, 과학과 정치를 위해서다.

철학을 멀리 하고도, 또는 멀리 해야만

과학과 정치가 전진할 수 있다고 믿는 건 각자의 자유이며

거기에 간섭할 자격도 능력도 내게는 없다.

다만 이데올로기 외부에 있다고 여기는 순간이 가장 이데올로기에 철저하게 사로잡힌 순간이며

철학의 부재를 대신하는 것은 '자생적 철학'의 충만함이라는 알튀세르의 경고를

그냥 흘려듣지 않았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품어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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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06/22 02:24 2010/06/22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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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잖아 비가 오면 바다 정도는 생긴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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