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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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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난.쏘.공.'을 꼼꼼히 읽게 되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 책을 이렇게까지 꼼꼼히 읽은 건 처음이다.
몇년 전까지 난 '고전'을 거부 또는 회피해 왔다.
이유는 정확치 않다. 아마 무의식적이다.
내가 옛날에 이 책을 읽었다 해도
진가를 얼마나 알아볼 수 있었을까 는 회의적이다.
물론 이 책은 '고전'이다. 고전이란
초심자가 읽어도 30%는 알고
전문가가 읽어도 30%는 모르는 책이므로
읽어야 했을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너무 늦게 읽었기 때문에 이 책을 섯불리 '지양'한다는 따위의
건방진 얘기는 하지 않을 것 같다는 점이다.
'소설이 끝났다'는 선언에 대해 쿤데라는
'백년의 고독'이 있으므로 그런 얘기는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다른 어떤 분야보다 소설에선 일반적 진술을 하기 어려운 것 같다.
문제는 개별 '작품'이다. '난.쏘.공.'을 읽으면서
난 어떤 다른 기록형태도 이 책의 표현을 대체할 수 없다고 느꼈다.
속단일 순 있다. 다른 기록형태에 유례없는 난제를 제기했다
고 표현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이 작품을 앞에 두고 '소설이 끝났다'고 말할 만큼
뻔뻔한 사람은 존재할 수 없게 됐다는 점이다.
조세희 선생은 작품의 '독특성'을 통해 소설의 '보편성'을
구원했다. '구원'이란 단어를 쓰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경외스러운 방식으로.
많은 이들은 자신들이 '난.쏘.공.'의 세계를 떠났다고 생각한다.
저 '산업화' 시대, 그 시절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말한다.
조세희 선생이 아직 살아 그런 뻔뻔한 자들에게
침을 뱉아줄 수 있다는 점이 감사할 뿐이다.
선생은 오래 사셔야 한다. 소설도 빨리 출간하셔야 한다.
'난.쏘.공.'은 비극이다.
마지막 장면에서의 재판은 공론장에서의 발언의 환유라는 점에서
'오이디푸스왕'과 '안티고네'를 계승하며
비속류적인 헤겔적 '인정투쟁'을 상연한다.
'적대'와 '불화'를 전면화하고
'위반'과 '폭력'으로밖에는 자신의 존엄성을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상황을 묘사한다. 여기서 직접적으로 나오는 질문은
따라서 '반폭력'이다. 어설픈 '지양'과 '화해'를 얘기하지 않으므로
속류들에게는 역설적으로 보이겠지만 그는 진정으로
폭력의 문제를 정확히 다루고 해결할 길을 개방한다.
자본주의 및 우리 사회에 대한 통찰과 함께
이 모든 질문, 무엇보다 그것이 제기되고 상연되는 방식 때문에
나는 읽는 내내 눈이 부셨다.
내가 볼 때 이 소설 이전과 이후의 대부분의 대당은
이 소설의 존재 자체로 해체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87년 재판에 실린, 뤼시엥 골드만을 원용한 김병익의 비평도
마찬가지다. 내 생각에 이 비평은 이 소설을 인내할 수 없다.
이런 위대한 작가가 의도적으로 과작을 하는 게 안타깝다.
하지만 그 과작 자체가 메세지이므로.
나는 그의 동료나 후배들이 이 메세지를 이해했으면 좋겠다.
한 사람이 열 편씩의 쓰레기를 쓰는 것보다
열 사람이 한 편씩의 위대한 저작을 쓰는 편이 훨씬 낫다는 것.
모두 이 입장을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이런 입장을 곰곰히 인내하면서 글을 쓰라는 뜻에서.
그렇다면 조세희 선생은
비부르주아적인 다원주의의 전망을
과작이라는 뼈아픈 선택을 통해 몸소 실현한 셈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이 담긴 까닭에
쉽게 스스로를 타협/양보할 수 없는 강렬성/진정성들의
작가 수 만큼의 출현. 한편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작가는
'직업'이 아니라(평생 한 편을 쓰는 직업이 어디 있는가?)
모든 대중들에게 부과된 일생 (최소한) 한 번의 과제다.
이 얼마나 위대하고 황홀한 빛의 세계인가.
Posted by 아포리아
얼마전 좋아하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이스트우드 영화이야기를 했다.
나는 이스트우드의 영화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세계관에는 공감하지 않는 편이다.
내 앞의 친구는 내게
'이스트우드를 싫어하면서
어떻게 차이밍량과 잉게마르 베리만을
좋아할 수 있는 것인가'고 물었다.
그의 질문은 논쟁적이라기 보다는
상대방의 영화 보기에 대한 궁금함 혹은 공유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의표를 찌르는 질문에 나는 움찔했고
말도 안되는 소리를 중언부언했으며
스스로 느끼지 못한 것을 느낀양 장황하게 설명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내 이야기가 끝날 무렵 옆에 앉은 친구는
'애정만세'에서 감동받은 점을 진솔하게 말했다.
공간에 대한 이야기,
(첫번째 섹스 장면에서 이강생은 문 밖에 있었으나
두번째 섹스에서 이강생은 침대 아래 들어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 시퀀스에 대한 이야기다.
섹스를 끝낸 새벽에 양귀매는 그 집을 나선다.
그러나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그녀에게는
아이러니 하게도 돌아갈 집이 없다.
그녀는 황량한 타이빼이의 새벽거리를
무감한 표정으로 가로지르며 걷고
그 걸음은 재개발 택지 근방의 공원에서 끝난다.
그녀는 밴취에 앉아 흐느끼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통곡을 한다.
나는 그 장면에서
타이빼이의 오늘을 생각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그 친구가 본 것은
놀랍게도 감독의 마음이다.
그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기나긴 롱테이크 장면에서
차이밍량은 그녀와 타이빼이의 거리를 함께 걷고
공원에서 밴취에 앉아 그녀의 울음을 지켜봐주는 것이다.
(강조는 나)
그 친구의 이야기는 진정으로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나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다.
알게된 것 하나.
사람 사이의 대화는 기본적으로
자기가 아는 세계를 상대와 나누는 것이다.
알게된 것 둘.
자기가 알고 있는 것, 느낀 것을 솔직히 말하는
진솔한 이야기는 언제나 감동적이다.
그 밖에..
베리만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감독 중 한명이다(뭐야 이건).
여하튼.. 새벽 다섯시 무렵, 다른 사람들 잠든 모습 바라보면서
비몽사몽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음..
필시.. 이건 성숙의 징조인 거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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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 팬카페에 한 회원이 쓴 글이다.
강조표시해 둔 저 부분을 읽고, 나 역시 잠시 멍해졌다.
카메라에 관해 아주아주 조금씩 생각하기 시작했지만
얼마나 멋진 장면을 잡는지, 그 장면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하는 정도였을 뿐, 카메라로 누군가를 찍는 행위가
동반이자 치유 그 자체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그런 관념 자체가 서지 않았다는 게 정확하리라.
슬픈 사람을 따라 촬영하는 카메라는 지금껏 많았으리라.
('쾌걸춘향' 같은 통속극에도 나온다)
그러나 저런 마음을 담은 카메라가 있었을까?
아니 그런 건 커녕, 대상의 슬픔을 더욱 크게 작위하여 만든
'감정상품'의 소비, 이를 목표로 하는 외설적 잔혹함을 경계하는
카메라라도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아마 있었을 것이다. 내가 보지 못했을 뿐. 하지만 내 생각에
주위에서 '흔히' 볼 순 없었을 것 같다)
반영도, 연출도 아닌, 실재와의 다른 교섭으로서 카메라.
(물론 이것이 반영과 연출을 배제하진 않는다.
오히려 반영과 연출을 통과한 후에만 이런 카메라가 가능하리라)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자면, '정서'로서 카메라.
아직까지는 관념의 유희일 뿐이지만 더 고민해 보고 싶은 문제다.
Posted by 아포리아
단연코,
내가 본 올해의 영화는 Mysterious Skin (2004, Gregg Araki)이다.
한 사람의 감독이 성숙한다는 것은,
그리하여 다시 한 걸음 더 전진한다는 것은,
서슬 푸르게 날이 선 칼을 내리고 손 내미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왜 서로 칼을 겨누고 있는지 물어보는 일은 이제
너무 지겹다는 것을,
그 답을 발견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우리는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고,
기원에 대한 매혹, 그 이데올로기를 뿌리치라는 것을.
우리는 이제 우리가 어떻게 살아 남을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기꺼이 상대가 겨눈 칼을 맨 손으로 쥐겠다고,
혹은 내 칼을 내 품으로 끌어 안아야 한다면 끌어안겠다고.
우리는 살아 남을 것이라고.
외국, 낯선 거리의 어느 극장에서,
숨죽이며 이 영화를 보았을 때는 눈치채지 못했다.
몇 일 전인가,
프랑소와 오종이 성숙했다고 떠들던 타임 투 리브를 보다가
알아차렸다.
애러키는 전진하고 있었다.
닥치라 그래.
우린 이렇게 또 살아남을 꺼야.
이렇게 중얼 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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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친구가 블로그를 권했다.
전에 한 선배도 그런 얘기를 한 적 있었는데
어떻게 꾸미는지 몰라서 그냥 두었었다.
얼마나 꾸준히, 제대로 할 수 있을진 모르지만
어쨌든 작은 방백의 공간을 열어 본다.
완전히 공적이지도, 완전히 사적이지도 않은
그런 공간일 수 있기를...
Posted by 아포리아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최근 본 영화 중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사실 내용 면에서는 아주 선명한 영화라서
(촬영 등에서 어떤 성취가 있는지는 내가 잘 모르는 문제라 패스.)
그에 관해서 특별히 얘기하고 싶은 건 없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의 감독이자 주연인 양익준의 연기 데뷔작이
<품행제로>였고, 그가 이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는 점이다.
사실 이 영화 첫 장면에서부터 나오는 욕을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올랐던 영화가 <품행제로>였다.
태생이 전라도고 거기서 남중/남고를 나왔기 때문에
욕에 관해서는 나름 익숙한 편인데
사실 영화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욕, 특히 전라도 사투리를 섞은 욕은
대개 실제 용법과는 거리가 있는 작위적인 것이었다.
(예컨대 <목포는 항구다>의 경우 전체적으로 그렇고
전라도 출신이고 사투리와 욕을 걸죽하게 잘 구사한다고 평가받는 박철민의 경우도
실제 용법과는 거리가 있다. 그가 어디서 밝힌 것처럼 그의 사투리와 욕은
오히려 <태백산맥> 식 언어, 문학적으로 변용된 언어다.)
<품행제로>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기억이 닿는 한에서 양아치들의 실제 욕설을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너무 작위적이지 않게 재밌게 각색한 영화였기 때문이다.
정말 학교 다닐 때 들었을 법한 그런 욕 말이다.
물론 거기엔 류승범(또한 봉태규와 공효진)
의 공이 무척 컸다. 그는 정말이지 양아치 연기의 달인이다.
그런데 <품행제로>는 낭만화된 양아치 얘기라고 할 수 있고
이는 특히 이 영화의 주인공 류승범의 연기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와 비교해 보면 너무나 분명해진다.
영화를 본 지 오래되서 거기서 구사한 언어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영화에 담겨 있던 강렬한 현실감은 <품행제로>에서 완전히 사
Posted by 아포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