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거리두기가 성취한 영화미학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는 1988년 일본에서 발생했던 ‘나시 스가모의 버림받은 4남매 사건’을 실화적 모태로 하는 영화이다. 한 엄마와 각기 다른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4명의 아이들, 출생신고가 되어 있지 않아 공식적으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 그나마 어렵게 마련한 전셋집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큰아이를 제외한 나머지 세 아이는 말 그대로 그곳에 없는 아이들이 되어야 한다. 어느 날 엄마는 새로운 사랑을 위해 그 아이들을 떠나버리고, 아이들은 끝내 비극적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 6개월 동안 아무도 모르는 그들만의 삶을 살아낸다. 그곳에 있지만 그곳에 없었던 아이들의 유령 같은 삶. 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화는, 한동안 일본 열도를 떠들썩하게 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 떠들썩함 속에는, 버려진 아이들에 대한 연민, 아이를 버린 무책임한 어미에 대한 분노, 결국 그 어미와 함께 아이들을 방치한 공범이 되어버린 사회-어른들 자신의 부채의식, 이 모든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던 대도시의 익명적 삶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 또는 반성이 있었을 법도 하다.

그러나 그 사건 이후 15년 만에 세상에 나온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이 모든 소란에서 한 걸음 비켜서 있다. <아무도 모른다>는 그 아이들의 삶이 생각만큼 온기없는 유령 같은 삶은 아니었음을 보여줄 만큼 충분히 사실적이지만, 또한 아이들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 그 어미에 대한 섣부른 도덕적 분노와 단죄로 변질되게 하지 않을 만큼은 충분히 허구적이기도 하다.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결코 이 영화가 ‘재현 드라마’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 사건을 모태로 하고는 있지만, 세부적인 디테일은 1년간 배우인 아이들과 함께 발견하고 창조해낸 것임을 힘주어 말한다. 사실, 그 단호함은 현실과 영화에 대한 감독 자신의 조심스럽고 근본적인 윤리적 질문의 다른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대상에 대한 연민은, 특히 그것이 폭발적이고 집단적인 것일 때, 쉽사리 그 대상을 영원히 타자화시킬 위험에 빠진다. 터무니없는 일로 인한 충격과 분노는, 특히 그것이 폭발적이고 집단적인 것일 때, 도덕적 단죄라는 폭력이 되어 자신이 담지하고 있는 윤리적 힘을 소진시켜버린다. 문제는 연민과 분노라는 감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쉽사리 출구를 찾아 스스로를 해소하려고 하는 그 완강한 관성 또는 자동운동 속에 있다. 그것을 막는 또는 그 힘에 저항하는 유일한 길은, 그것을 끊임없는 삶에 대한 탐색과 윤리적 질문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실제로 수행하는 일은 생각만큼 쉬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외줄타기와도 같이, 고도의 균형감각과 끊임없는 긴장을 요구하는 일이다. 영화 <아무도 모른다>가 많은 ‘버려진 아이들’에 대한 영화와 구별된다면, 그래서 우리에게 새로운 감동을 준다면, 그것은 이 영화가 바로 그 쉽지 않은 일을 해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큐와 픽션, 선과 악 사이의 아슬아슬한 균형잡기

영화 <아무도 모른다>에는 시종일관 미묘한 긴장이 흐른다. 그것은 카메라와 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팽팽한 공간적인 거리 감각이 낳는 긴장이기도 하고, 촬영과 편집 사이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시간적 리듬의 공존에서 비롯되는 긴장이기도 하다. 카메라는 대상을 향해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지만, 끝내 그 인력에 함몰되지 않는다. 카메라는 무한한 인내심으로 대상의 진실이 드러나기를 기다리지만, 일단 포착된 대상의 진실은 과잉에 이르기 이전에 냉정하게 편집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카메라와 편집 리듬에는, 대상을 향한 자연스러운 인력과 대상으로부터의 의식적인 척력 사이에 존재하는 팽팽한 물리적 긴장이 실려 있다. 그 물리적 긴장은 감독 자신의 윤리적 질문의 필연적인 결과일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는 두 가지 의미에서 다수화된 ‘이분법’에 질문하고 도전하는 영화이고, 그 이분법의 경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 영화이다. 영화는 순수한 아이들과 오염된 어른들이라는 선악의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하고, 그것을 위해서 사실과 허구, 다큐와 픽션 사이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잡고 있다.

아무도 모르는 아이들이 만든 유사 가족 생활담

<아무도 모른다>는 아이들의 그 6개월을 고난과 참상으로 재현하려 하기보다는, 그 6개월을 살아낼 수 있었던 아이들의 삶의 의지와 생의 감각을 포착하고 그것과 하나가 되려고 한다. 아이들을 트렁크에 넣어 옮겨야만 하는 삶의 절박함은, 유키(시미지 모모코)의 천진난만한 질문(“여기는 몇층이야?”)과 시게루(기무라 히헤이)의 천진난만한 미소로 스릴 넘치는 비밀 작전, 즉 유희가 된다. 비밀 작전의 무사한 성공을 자축하는 저녁식사 자리에서 아이들보다 더 아이 같은 철없는 엄마가 제시하는 터무니없는 의무의 법칙은, 아이들의 웃음과 함께 게임의 규칙이 된다. 무엇보다 아이들은 엄마가 사라진 뒤에도 막연한 기다림 속에서 삶을 낭비하지 않는다. 엄마보다 더 어른스러운 아이였던 장남 아키라(야기라 유야)는 이미 아빠이고, 이사한 집에서 제일 먼저 세탁기가 놓인 곳을 확인하는 장녀 교코(기타우라 아유)는 이미 엄마이며, 시게루와 유키는 아빠 엄마의 사정을 충분히 헤아려 보채거나 칭얼대지 않는 착한 아이들이다. 이 자발적인 유사 가족은, 위기의 순간을 삶의 영역을 확장하는 계기로 만드는 놀라운 생명력을 보여준다.

생활비(식비)의 고갈을 새로운 연대(먹을 것을 챙겨주는 편의점 직원)의 기회로 삼고, 단수로 인한 고통을 공원으로의 진출 기회로 삼는다. 엄마와 함께 금지의 규칙은 사라졌다. 공원과 거리로 자신들의 삶의 영역을 확장한 아이들은, 그곳에서 새로운 친구(사키-간 하나에)를 사귀고, 그곳에서 발견한 새로운 생명의 싹에 감응하며, 그것을 데려다가 소중하게 키운다. 시게루는 자판기와 공중전화에서 동전을 모으는 생활의 지혜를 터득한다. 그리고 그 6개월 동안 아이들은, 자신들이 키우는 화분 속의 식물처럼, 실제로 자라난다. 13살이 된 아키라는 변성기가 시작되고, 5살이 된 유키는 이제 예전의 작은 트렁크에는 들어가지 않을 만큼 그렇게 자랐다. 물론 그 생명력과 성장력은 축복이라기보다는 비극이다.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버린 아키라의 고집(아키라는 이미 성을 바꾸어버린 엄마에게 더이상 도움을 호소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들을 뿔뿔이 흩어놓을 것이 분명한 사회에도 도움을 청할 생각이 없다)은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너무나 빨리 자라버린 유키의 싸늘해진 몸은 한순간 우리의 머리를 텅 비게 만드는 충격이 된다. 유키의 죽음을 확인한 뒤 거리로 나간 아키라의 눈에 세상은 더이상 현실감을 갖지 않는 공허가 되고, 그 초현실적 공허감은 우리의 오감을 얼어붙게 한다. 아키라의 발걸음은 자동반사적으로 그를 경찰서 앞으로 이끌지만, 그는 끝내 돌아선다. 유키에게 모노레일을 타고 가서 비행기를 보여주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그 순간 아키라는 아이와 어른의 경계를 훌쩍 넘어서 있으며, 그리하여 세상의 상식을 향하여 무기력하지만 끈질긴 질문을 던진다.

아이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에 대한 탐색

어쩌면 이 영화가 그 제목을 통해 말하려 했던 것은, 아이들의 존재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아무도 몰랐던’ 어른-사회의 무책임에 대한 반성의 촉구 같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정작 아무도 몰랐던 것 그리고 지금까지도 아무도 잘 모르고 있는 것은, 그 아이들이 보여준 놀라운 삶에의 의지와 삶의 감각(감독은 그것을 “삶의 리얼리티를 느낄 수 있는 육체적인 기억”이라고 표현한다)일 것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영화는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느꼈었는가를 질문하고 탐색한다. 마치 <말아톤>이 초원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도덕적 다그침이 아니라, 초원이가 바라보는 세상과 삶의 감각이 무엇인가를 포착함으로써 새로워질 수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아무도 모른다>는 새로운 영화가 된다. 그것은 영화가 영화를 넘어서는 놀라운 기적의 순간들이다.

그때 영화는 사실과 허구, 다큐와 픽션의 경계를 넘어선 화법으로, 쉽게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재단해낼 수 없는 삶의 진실에 이야기한다. 도덕적 폭력이 되지 않아야 할, 그저 끊임없는 새로운 윤리적 질문의 출발점이기만 해야 할 연민과 분노만을 낮고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환기시킨다. 고레에다 감독의 전작 <원더풀 라이프>(1999)에는, 또 하나의 아이-소녀가 등장한다. 기억하고 싶은 삶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습관적으로 디즈니랜드를 떠올렸던 소녀는, 그것이 이미 많은 아이들의 것이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것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일 수 없음을 느낀다. 그 소녀가 대신 찾아낸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무릎에 누이고 귀를 파주던 엄마의 살냄새”였다. 상식적이고 자동화된 우리의 반응에 대한 새로운 윤리적 질문은 이렇듯 늘 새로운 삶의 감각과 함께 비로소 작동한다. <아무도 모른다>는 그 새로운 윤리적 질문, 새로운 삶의 감각으로 충만해 있는, 아름답고 새로운 영화이다. 다음과 같은 고레에다 감독의 진심어린 연출의 변은, 그 새로움을 찾는 모든 감독들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자 다짐일 것이다. “소년의 옆에서 어깨를 다독여주고자 했다. 안아주는 건 안 된다… 나도 카메라도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글: 변성찬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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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4 16:14 2008/10/14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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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쯤, '난.쏘.공.'을 읽고 쓴 글

어쩌다 '난.쏘.공.'을 꼼꼼히 읽게 되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 책을 이렇게까지 꼼꼼히 읽은 건 처음이다.

몇년 전까지 난 '고전'을 거부 또는 회피해 왔다.

이유는 정확치 않다. 아마 무의식적이다.

 

내가 옛날에 이 책을 읽었다 해도

진가를 얼마나 알아볼 수 있었을까 는 회의적이다.

물론 이 책은 '고전'이다. 고전이란

초심자가 읽어도 30%는 알고

전문가가 읽어도 30%는 모르는 책이므로

읽어야 했을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너무 늦게 읽었기 때문에 이 책을 섯불리 '지양'한다는 따위의

건방진 얘기는 하지 않을 것 같다는 점이다.

 

'소설이 끝났다'는 선언에 대해 쿤데라는

'백년의 고독'이 있으므로 그런 얘기는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다른 어떤 분야보다 소설에선 일반적 진술을 하기 어려운 것 같다.

문제는 개별 '작품'이다. '난.쏘.공.'을 읽으면서

난 어떤 다른 기록형태도 이 책의 표현을 대체할 수 없다고 느꼈다.

속단일 순 있다. 다른 기록형태에 유례없는 난제를 제기했다

고 표현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이 작품을 앞에 두고 '소설이 끝났다'고 말할 만큼

뻔뻔한 사람은 존재할 수 없게 됐다는 점이다.

조세희 선생은 작품의 '독특성'을 통해 소설의 '보편성'을

구원했다. '구원'이란 단어를 쓰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경외스러운 방식으로.

 

많은 이들은 자신들이 '난.쏘.공.'의 세계를 떠났다고 생각한다.

저 '산업화' 시대, 그 시절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말한다.

조세희 선생이 아직 살아 그런 뻔뻔한 자들에게

침을 뱉아줄 수 있다는 점이 감사할 뿐이다.

선생은 오래 사셔야 한다. 소설도 빨리 출간하셔야 한다.

 

'난.쏘.공.'은 비극이다.

마지막 장면에서의 재판은 공론장에서의 발언의 환유라는 점에서

'오이디푸스왕'과 '안티고네'를 계승하며

비속류적인 헤겔적 '인정투쟁'을 상연한다.

'적대'와 '불화'를 전면화하고

'위반'과 '폭력'으로밖에는 자신의 존엄성을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상황을 묘사한다. 여기서 직접적으로 나오는 질문은

따라서 '반폭력'이다. 어설픈 '지양'과 '화해'를 얘기하지 않으므로

속류들에게는 역설적으로 보이겠지만 그는 진정으로

폭력의 문제를 정확히 다루고 해결할 길을 개방한다.

자본주의 및 우리 사회에 대한 통찰과 함께

이 모든 질문, 무엇보다 그것이 제기되고 상연되는 방식 때문에

나는 읽는 내내 눈이 부셨다.

 

내가 볼 때 이 소설 이전과 이후의 대부분의 대당은

이 소설의 존재 자체로 해체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87년 재판에 실린, 뤼시엥 골드만을 원용한 김병익의 비평도

마찬가지다. 내 생각에 이 비평은 이 소설을 인내할 수 없다.

이런 위대한 작가가 의도적으로 과작을 하는 게 안타깝다.

하지만 그 과작 자체가 메세지이므로.

나는 그의 동료나 후배들이 이 메세지를 이해했으면 좋겠다.

한 사람이 열 편씩의 쓰레기를 쓰는 것보다

열 사람이 한 편씩의 위대한 저작을 쓰는 편이 훨씬 낫다는 것.

모두 이 입장을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이런 입장을 곰곰히 인내하면서 글을 쓰라는 뜻에서.

 

그렇다면 조세희 선생은

비부르주아적인 다원주의의 전망을

과작이라는 뼈아픈 선택을 통해 몸소 실현한 셈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이 담긴 까닭에

쉽게 스스로를 타협/양보할 수 없는 강렬성/진정성들의

작가 수 만큼의 출현. 한편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작가는

'직업'이 아니라(평생 한 편을 쓰는 직업이 어디 있는가?)

모든 대중들에게 부과된 일생 (최소한) 한 번의 과제다.

 

이 얼마나 위대하고 황홀한 빛의 세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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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4 16:07 2008/10/14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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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어도 감동적인 글

얼마전 좋아하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이스트우드 영화이야기를 했다.
나는 이스트우드의 영화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세계관에는 공감하지 않는 편이다.

내 앞의 친구는 내게
'이스트우드를 싫어하면서
어떻게 차이밍량과 잉게마르 베리만을
좋아할 수 있는 것인가'고 물었다.
그의 질문은 논쟁적이라기 보다는
상대방의 영화 보기에 대한 궁금함 혹은 공유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의표를 찌르는 질문에 나는 움찔했고
말도 안되는 소리를 중언부언했으며
스스로 느끼지 못한 것을 느낀양 장황하게 설명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내 이야기가 끝날 무렵 옆에 앉은 친구는
'애정만세'에서 감동받은 점을 진솔하게 말했다.
공간에 대한 이야기,
(첫번째 섹스 장면에서 이강생은 문 밖에 있었으나
두번째 섹스에서 이강생은 침대 아래 들어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 시퀀스에 대한 이야기다.

섹스를 끝낸 새벽에 양귀매는 그 집을 나선다.
그러나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그녀에게는
아이러니 하게도 돌아갈 집이 없다.
그녀는 황량한 타이빼이의 새벽거리를
무감한 표정으로 가로지르며 걷고
그 걸음은 재개발 택지 근방의 공원에서 끝난다.
그녀는 밴취에 앉아 흐느끼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통곡을 한다.

나는 그 장면에서
타이빼이의 오늘을 생각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그 친구가 본 것은
놀랍게도 감독의 마음이다.

그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기나긴 롱테이크 장면에서
차이밍량은 그녀와 타이빼이의 거리를 함께 걷고
공원에서 밴취에 앉아 그녀의 울음을 지켜봐주는 것이다.

(강조는 나)

그 친구의 이야기는 진정으로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나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다.

알게된 것 하나.
사람 사이의 대화는 기본적으로
자기가 아는 세계를 상대와 나누는 것이다.
알게된 것 둘.
자기가 알고 있는 것, 느낀 것을 솔직히 말하는
진솔한 이야기는 언제나 감동적이다.
그 밖에..
베리만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감독 중 한명이다(뭐야 이건).

여하튼.. 새벽 다섯시 무렵, 다른 사람들 잠든 모습 바라보면서
비몽사몽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음..
필시.. 이건 성숙의 징조인 거시야..

 

----------

 

정성일 팬카페에 한 회원이 쓴 글이다.

강조표시해 둔 저 부분을 읽고, 나 역시 잠시 멍해졌다.

카메라에 관해 아주아주 조금씩 생각하기 시작했지만

얼마나 멋진 장면을 잡는지, 그 장면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하는 정도였을 뿐, 카메라로 누군가를 찍는 행위가

동반이자 치유 그 자체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그런 관념 자체가 서지 않았다는 게 정확하리라.

 

슬픈 사람을 따라 촬영하는 카메라는 지금껏 많았으리라.

('쾌걸춘향' 같은 통속극에도 나온다)

그러나 저런 마음을 담은 카메라가 있었을까?

아니 그런 건 커녕, 대상의 슬픔을 더욱 크게 작위하여 만든

'감정상품'의 소비, 이를 목표로 하는 외설적 잔혹함을 경계하는

카메라라도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아마 있었을 것이다. 내가 보지 못했을 뿐. 하지만 내 생각에

주위에서 '흔히' 볼 순 없었을 것 같다)

반영도, 연출도 아닌, 실재와의 다른 교섭으로서 카메라.

(물론 이것이 반영과 연출을 배제하진 않는다.

오히려 반영과 연출을 통과한 후에만 이런 카메라가 가능하리라)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자면, '정서'로서 카메라.

 

아직까지는 관념의 유희일 뿐이지만 더 고민해 보고 싶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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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4 16:01 2008/10/14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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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올해의 영화

 

단연코,

내가 본 올해의 영화는 Mysterious Skin (2004, Gregg Araki)이다. 

한 사람의 감독이 성숙한다는 것은,

그리하여 다시 한 걸음 더 전진한다는 것은,

서슬 푸르게 날이 선 칼을 내리고 손 내미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왜 서로 칼을 겨누고 있는지 물어보는 일은 이제

너무 지겹다는 것을,

그 답을 발견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우리는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고,

기원에 대한 매혹, 그 이데올로기를 뿌리치라는 것을.

 

우리는 이제 우리가 어떻게 살아 남을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기꺼이 상대가 겨눈 칼을 맨 손으로 쥐겠다고,

혹은 내 칼을 내 품으로 끌어 안아야 한다면 끌어안겠다고.

우리는 살아 남을 것이라고.

 

외국, 낯선 거리의 어느 극장에서,

숨죽이며 이 영화를 보았을 때는 눈치채지 못했다. 

몇 일 전인가,

프랑소와 오종이 성숙했다고 떠들던 타임 투 리브를 보다가

알아차렸다.

애러키는 전진하고 있었다.

 

닥치라 그래.

우린 이렇게 또 살아남을 꺼야. 

 

이렇게 중얼 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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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4 15:49 2008/10/14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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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세상 블로그 시작

한 친구가 블로그를 권했다.

전에 한 선배도 그런 얘기를 한 적 있었는데

어떻게 꾸미는지 몰라서 그냥 두었었다.

 

얼마나 꾸준히, 제대로 할 수 있을진 모르지만

어쨌든 작은 방백의 공간을 열어 본다.

완전히 공적이지도, 완전히 사적이지도 않은

그런 공간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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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4 15:44 2008/10/14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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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파리>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최근 본 영화 중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사실 내용 면에서는 아주 선명한 영화라서

(촬영 등에서 어떤 성취가 있는지는 내가 잘 모르는 문제라 패스.)

그에 관해서 특별히 얘기하고 싶은 건 없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의 감독이자 주연인 양익준의 연기 데뷔작이

<품행제로>였고, 그가 이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는 점이다.

사실 이 영화 첫 장면에서부터 나오는 욕을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올랐던 영화가 <품행제로>였다.

태생이 전라도고 거기서 남중/남고를 나왔기 때문에

욕에 관해서는 나름 익숙한 편인데

사실 영화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욕, 특히 전라도 사투리를 섞은 욕은

대개 실제 용법과는 거리가 있는 작위적인 것이었다.

(예컨대 <목포는 항구다>의 경우 전체적으로 그렇고

전라도 출신이고 사투리와 욕을 걸죽하게 잘 구사한다고 평가받는 박철민의 경우도

실제 용법과는 거리가 있다. 그가 어디서 밝힌 것처럼 그의 사투리와 욕은

오히려 <태백산맥> 식 언어, 문학적으로 변용된 언어다.)

 

<품행제로>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기억이 닿는 한에서 양아치들의 실제 욕설을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너무 작위적이지 않게 재밌게 각색한 영화였기 때문이다.

정말 학교 다닐 때 들었을 법한 그런 욕 말이다.

물론 거기엔 류승범(또한 봉태규와 공효진)

의 공이 무척 컸다. 그는 정말이지 양아치 연기의 달인이다.

 

그런데 <품행제로>는 낭만화된 양아치 얘기라고 할 수 있고

이는 특히 이 영화의 주인공 류승범의 연기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와 비교해 보면 너무나 분명해진다.

영화를 본 지 오래되서 거기서 구사한 언어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영화에 담겨 있던 강렬한 현실감은 <품행제로>에서 완전히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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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11/30 00:00 1999/1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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