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쯤, '난.쏘.공.'을 읽고 쓴 글

어쩌다 '난.쏘.공.'을 꼼꼼히 읽게 되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 책을 이렇게까지 꼼꼼히 읽은 건 처음이다.

몇년 전까지 난 '고전'을 거부 또는 회피해 왔다.

이유는 정확치 않다. 아마 무의식적이다.

 

내가 옛날에 이 책을 읽었다 해도

진가를 얼마나 알아볼 수 있었을까 는 회의적이다.

물론 이 책은 '고전'이다. 고전이란

초심자가 읽어도 30%는 알고

전문가가 읽어도 30%는 모르는 책이므로

읽어야 했을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너무 늦게 읽었기 때문에 이 책을 섯불리 '지양'한다는 따위의

건방진 얘기는 하지 않을 것 같다는 점이다.

 

'소설이 끝났다'는 선언에 대해 쿤데라는

'백년의 고독'이 있으므로 그런 얘기는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다른 어떤 분야보다 소설에선 일반적 진술을 하기 어려운 것 같다.

문제는 개별 '작품'이다. '난.쏘.공.'을 읽으면서

난 어떤 다른 기록형태도 이 책의 표현을 대체할 수 없다고 느꼈다.

속단일 순 있다. 다른 기록형태에 유례없는 난제를 제기했다

고 표현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이 작품을 앞에 두고 '소설이 끝났다'고 말할 만큼

뻔뻔한 사람은 존재할 수 없게 됐다는 점이다.

조세희 선생은 작품의 '독특성'을 통해 소설의 '보편성'을

구원했다. '구원'이란 단어를 쓰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경외스러운 방식으로.

 

많은 이들은 자신들이 '난.쏘.공.'의 세계를 떠났다고 생각한다.

저 '산업화' 시대, 그 시절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말한다.

조세희 선생이 아직 살아 그런 뻔뻔한 자들에게

침을 뱉아줄 수 있다는 점이 감사할 뿐이다.

선생은 오래 사셔야 한다. 소설도 빨리 출간하셔야 한다.

 

'난.쏘.공.'은 비극이다.

마지막 장면에서의 재판은 공론장에서의 발언의 환유라는 점에서

'오이디푸스왕'과 '안티고네'를 계승하며

비속류적인 헤겔적 '인정투쟁'을 상연한다.

'적대'와 '불화'를 전면화하고

'위반'과 '폭력'으로밖에는 자신의 존엄성을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상황을 묘사한다. 여기서 직접적으로 나오는 질문은

따라서 '반폭력'이다. 어설픈 '지양'과 '화해'를 얘기하지 않으므로

속류들에게는 역설적으로 보이겠지만 그는 진정으로

폭력의 문제를 정확히 다루고 해결할 길을 개방한다.

자본주의 및 우리 사회에 대한 통찰과 함께

이 모든 질문, 무엇보다 그것이 제기되고 상연되는 방식 때문에

나는 읽는 내내 눈이 부셨다.

 

내가 볼 때 이 소설 이전과 이후의 대부분의 대당은

이 소설의 존재 자체로 해체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87년 재판에 실린, 뤼시엥 골드만을 원용한 김병익의 비평도

마찬가지다. 내 생각에 이 비평은 이 소설을 인내할 수 없다.

이런 위대한 작가가 의도적으로 과작을 하는 게 안타깝다.

하지만 그 과작 자체가 메세지이므로.

나는 그의 동료나 후배들이 이 메세지를 이해했으면 좋겠다.

한 사람이 열 편씩의 쓰레기를 쓰는 것보다

열 사람이 한 편씩의 위대한 저작을 쓰는 편이 훨씬 낫다는 것.

모두 이 입장을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이런 입장을 곰곰히 인내하면서 글을 쓰라는 뜻에서.

 

그렇다면 조세희 선생은

비부르주아적인 다원주의의 전망을

과작이라는 뼈아픈 선택을 통해 몸소 실현한 셈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이 담긴 까닭에

쉽게 스스로를 타협/양보할 수 없는 강렬성/진정성들의

작가 수 만큼의 출현. 한편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작가는

'직업'이 아니라(평생 한 편을 쓰는 직업이 어디 있는가?)

모든 대중들에게 부과된 일생 (최소한) 한 번의 과제다.

 

이 얼마나 위대하고 황홀한 빛의 세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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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0/14 16:07 2008/10/14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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