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어도 감동적인 글

얼마전 좋아하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이스트우드 영화이야기를 했다.
나는 이스트우드의 영화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세계관에는 공감하지 않는 편이다.

내 앞의 친구는 내게
'이스트우드를 싫어하면서
어떻게 차이밍량과 잉게마르 베리만을
좋아할 수 있는 것인가'고 물었다.
그의 질문은 논쟁적이라기 보다는
상대방의 영화 보기에 대한 궁금함 혹은 공유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의표를 찌르는 질문에 나는 움찔했고
말도 안되는 소리를 중언부언했으며
스스로 느끼지 못한 것을 느낀양 장황하게 설명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내 이야기가 끝날 무렵 옆에 앉은 친구는
'애정만세'에서 감동받은 점을 진솔하게 말했다.
공간에 대한 이야기,
(첫번째 섹스 장면에서 이강생은 문 밖에 있었으나
두번째 섹스에서 이강생은 침대 아래 들어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 시퀀스에 대한 이야기다.

섹스를 끝낸 새벽에 양귀매는 그 집을 나선다.
그러나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그녀에게는
아이러니 하게도 돌아갈 집이 없다.
그녀는 황량한 타이빼이의 새벽거리를
무감한 표정으로 가로지르며 걷고
그 걸음은 재개발 택지 근방의 공원에서 끝난다.
그녀는 밴취에 앉아 흐느끼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통곡을 한다.

나는 그 장면에서
타이빼이의 오늘을 생각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그 친구가 본 것은
놀랍게도 감독의 마음이다.

그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기나긴 롱테이크 장면에서
차이밍량은 그녀와 타이빼이의 거리를 함께 걷고
공원에서 밴취에 앉아 그녀의 울음을 지켜봐주는 것이다.

(강조는 나)

그 친구의 이야기는 진정으로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나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다.

알게된 것 하나.
사람 사이의 대화는 기본적으로
자기가 아는 세계를 상대와 나누는 것이다.
알게된 것 둘.
자기가 알고 있는 것, 느낀 것을 솔직히 말하는
진솔한 이야기는 언제나 감동적이다.
그 밖에..
베리만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감독 중 한명이다(뭐야 이건).

여하튼.. 새벽 다섯시 무렵, 다른 사람들 잠든 모습 바라보면서
비몽사몽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음..
필시.. 이건 성숙의 징조인 거시야..

 

----------

 

정성일 팬카페에 한 회원이 쓴 글이다.

강조표시해 둔 저 부분을 읽고, 나 역시 잠시 멍해졌다.

카메라에 관해 아주아주 조금씩 생각하기 시작했지만

얼마나 멋진 장면을 잡는지, 그 장면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하는 정도였을 뿐, 카메라로 누군가를 찍는 행위가

동반이자 치유 그 자체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그런 관념 자체가 서지 않았다는 게 정확하리라.

 

슬픈 사람을 따라 촬영하는 카메라는 지금껏 많았으리라.

('쾌걸춘향' 같은 통속극에도 나온다)

그러나 저런 마음을 담은 카메라가 있었을까?

아니 그런 건 커녕, 대상의 슬픔을 더욱 크게 작위하여 만든

'감정상품'의 소비, 이를 목표로 하는 외설적 잔혹함을 경계하는

카메라라도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아마 있었을 것이다. 내가 보지 못했을 뿐. 하지만 내 생각에

주위에서 '흔히' 볼 순 없었을 것 같다)

반영도, 연출도 아닌, 실재와의 다른 교섭으로서 카메라.

(물론 이것이 반영과 연출을 배제하진 않는다.

오히려 반영과 연출을 통과한 후에만 이런 카메라가 가능하리라)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자면, '정서'로서 카메라.

 

아직까지는 관념의 유희일 뿐이지만 더 고민해 보고 싶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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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0/14 16:01 2008/10/14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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