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히트, '표현주의 논쟁' 중

 <나 자신은 표현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러한 비평가들을 보면 화가 난다. 논쟁 중에는 형식주의 문제로 소란이 생긴다. "너희들은 내용은 그냥 둔 채, 형식만 바꾼다"고 한 사람이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너야말로 형식을 위해서, 즉 관습적인 형식을 위해서 내용을 희생시킨다"는 느낌을 받는다. 말하자면 많은 사람들이 아직 한 가지를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즉 항상 변해가는 사회환경의 항상 새로운 요구사항들에 비추어볼 때 낡은 관습적 형식들을 고수하는 것 역시 형식주의라는 점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혁명을 하겠다는 자들이 실험을 반대할 수 있을까? 어째서 "무기를 잡지 말아야 할" 것인가? 혁명의 이점들을 설명함으로써 단순한(Putsches) 폭동의 해로운 점들을 설명하는 작업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진화의 이점들을 설명함으로써 그럴 수는 없다.

  리얼리즘을 하나의 형식 문제로 만들어, 그것을 단 하나의(그것도 실로 낡은) 형식과 결합시키는 것은 리얼리즘을 거세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리얼리즘에 입각하여 글을 쓰는 것은 형식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인과관계의 기반에까지 도달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형식 요인들은 모두 사라져야 한다. 반대로 사회적 인과관계의 기반에까지 도달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형식 요인들은 모두 동원되어야 한다.

  민중들에게 말하고자 할 때에는, 민중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이 또한 단순히 형식적인 문제가 아니다. 민중이 낡은 형식들만을 이해하지는 않는다. 맑스나 엥겔스, 그리고 레닌은 민중들이 사회적 인과관계를 깨닫게 하기 위해 매우 새로운 형식들을 이용하였다. 레닌은 비스마르크와 다른 내용을 이야기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는 낡은 형식으로도 새로운 형식으로도 이야기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목적에 부합되는 형식을 이용해 이야기했다.>(강조는 나)

 

- 베르톨트 브레히트, 「표현주의 논쟁」 中 pp. 52~53, 『브레히트의 리얼리즘론』, 남녘, 1989

 

현 정세(의 사고와 투쟁)에 적합한 형식/형태를 만들지 못하면서

대중들의 운동과 실험을 젠체하며 폄하하는 자들이 있다.

상반기에 나타난 촛불에 무작정 열광할 생각은 없고

특히 온갖 혁명적 수사들을 만들어 내는 이런저런 지식 분자들이 한심해 보이긴 하지만

그 대중운동에서 아무 것도 배우려 하지 않고 보수적 형식주의(최악의 형식주의!)

로 뒷걸음치는 이들을 보면, 브레히트처럼 나도 화가 난다.

 

우연히 브레히트를 읽으며

우리가 그를 좀 더, 보다 일찍 가까이 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그가 우리의 '상식'(common sense) 노릇을 해 주었다면

우리는 덜 화 내며 대화할 수 있었거나,

또는 지속적인 화와 교통불능의 경험 때문에 지금처럼 대화를 중단하진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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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0/20 16:34 2008/10/20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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