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와 행복

2003년쯤에 쓴 글.

아마 한창 지젝을 읽던 중에 쓴 것 같다.

얼마 전 한 새내기가 이랜드 노동자들 앞에서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것'이라고 발언하는 걸 들었는데

문득 옛날에 쓴 이 글이 생각났다.

 

지금이라면 약간 다른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젝이 여기서 설정하는 진리/행복의 대당은

결국 칸트의 의무/행복 대당에 기초한 것일 텐데

그것은 본래 '행복'이라는 욕망에 눈이 멀어 봉기를 일으킨 프랑스 혁명의 대중들을

꾸짖기 위한 도식이기 때문이다.

행복과 일상이라는 문제, 대중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고민이다.

내가 지젝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

내가 계몽주의적 경향에 끊임없이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후기 알튀세르('이론의 이중적 기입')와 스피노자에게 동의를 보낸 것도 결국 그 때문이다.

 

다만 행복/일상의 언표 역시 계급에 따라 다른 효과를 내고

상대적으로 지배 계급에 편입될 가능성이 높은 자들이 저런 얘기를 늘어놓는 것은

대개 반동적이다. 그냥 '착실하게' 살았다면 나에게도 가입 기회가 있었을 지배 계급

의 유혹과 아직 싸우고 있었을 때였으므로

나에겐 저 처방이 필요했다. 물론 앞으로도 '타락'을 막기 위해서는

항상 필요한 처방이기도 할 것이다.

 

------------

 

행복을 얼마간 부정적인 뉘앙스의 '일상'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국한시킨다면,
진리와 행복은 모순적이거나 심지어 적대적이지 않을까.

노동자가 마르크스주의를 배우는 것, 여성이 페미니즘을 배우는 것이
행복이 아닌 것처럼.

2001년(이었나...?)을 뜨겁게 달궜던
대우차 파업의 와중에 있었던 한 해고노동자가
이제 복직이 되어 다시 한 명의 '가장'으로 설 수 있었을 때
그의 가족에 흐르는 그 행복을 TV 다큐멘터리에서 스쳐가듯 목격했을 때
나는 까마득함 같은 걸 느꼈다.

그와 그의 아내, 자식들을 '속물' 따위로 바라봤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다만 진리와 행복 사이에 존재하는 그 거대한 간극 앞에서
휘청거리지 않을 수 없었을 뿐이다.
그/녀들에게 '진리'를 말한다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에 대해서
내가 너무 고민하지 못했음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럴진대, (쁘띠 이상의) 부르주아와 남성이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을 배운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
문득 이리가레의 'Speculum'을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의 책을 펴들었을 때
나는 남성 및 가부장제에 포섭된 여성에 대한 거의 완벽한 사고가
프로이트와 그의 (이단을 포함한) 후계자들에게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남성이 페미니즘에 대해 안다는 것에 대해 나는 그동안 너무 간단히 생각했다.
일반적인 기준에 비추어 별로 '남자답지 못한 남자'로서
별로 누리고 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남성성에 내가 어떤 식으로 포섭되어 있는지를
머리 속에 들어왔다 간 것처럼 꿰뚫는 그/녀들 앞에서
나는 하얗게 질릴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의 진리는 나의 일상과 행복을 완전히 붕괴시켜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아마 곧, 혹은 이미 지금이나 과거부터
진리에 대한 본격적 저항이 발동할 것 같다는 예감.

진리는 파괴적이다.
진리는 비타협적이다. 따라서 진리는
잔혹하다.
그것은 따라서 행복의 반대편에 있거나
적어도 행복으로 환원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진리는 그것에 고유한 어떤 행복을 분비하지만
그 행복은 진리를 부인하며 구축된 질서의 그것에 비하자면 너무 미약하다.

따라서 진리에 충실한 사고/정치가
붕괴론(혹은 비극)과 친화적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람들이 만일 진리를 따른다면 그것은
기존의 행복에 대해 더 '우월한' 행복을 진리가 약속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기존의 행복이 불가능해졌고
새로운 행복을 기초할 수 있기 위해 다시 진리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기 때문에.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정치적 진리/사건이었던
10월 혁명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므로 나는 행복을 비웃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것의 붕괴를 재촉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그것의 불가능성을 가슴 깊이 슬퍼하고
새로운 행복을 기초짓기 위해 통과해야만 하는
어떤 잔혹을 거부하려 들지 않기만 할 것이다.
그것이 행복을 해치는 것이라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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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0/22 14:07 2008/10/22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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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너에게

    Tracked from 2009/07/18 05:00 Delete

    아포리아님의 [진리와 행복] 에 관련된 글. 행복을 대하는 태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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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09/07/18 05:00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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