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에서 책읽기

미류님의 [그날에서 책읽기] 에 관련된 글.

#0.

잃어버린 책 생각이 갑자기 나서 아깝더라는 이야기를 알딸딸한 기분에 주절주절 늘어놓은 다음날 못내 무안하더라. 책방 변천사라기보다는 나의 책방 편력이라도 덧붙여야 할 것 같은 압박. 입이 떨어지지 않는 여러 이유를 잠깐 잊어주고 다시 주절거린다.



서점 '그날이 오면(그날)' 근처-흔히 '녹두'라고 부르는-에 6개월, 그리고 1년을 살았다. 그때는 그날 말고도 '전야'라는 서점이 있었다. 지금 그날 자리가 전야가 있던 자리다. 지금 빵집이 있는 건물쯤에 그날과 '두껍아 두껍아'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부터 그날을 다녔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전야보다는 그날이 부르기 편했다는 것 아니었을까.

그러고보면 서점을 들락거릴 즈음에 '전야는 NL 서점이고 그날은 PD 서점'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도 같다. 그래서 전야가 문을 닫을 때는 'NL이 기울어가나보다'는 실없는 생각도 했던 것 같고. ('전야'를 '백두'라고 썼는데 덧글에서 noblog님이 지적해주셨어요.)

그날이 새로 간판을 달았을 때 뒤집어놓은 'ㄱ'이 마음에 들었다. 그날만이 꿈꿀 수 있는 '그날'이 있다는 도도함.

 

#2. (담배연기에 대한 기억은 조작된 기억인가봐요. -_-;)

처음 만난 그날은 지금 풀무질처럼 매우 좁은 공간이었다. 게다가 담배 연기마저 자욱할 때가 많았다. 서점에서 담배연기라니, 상상할 수도 없는 지금 같아서는 대학가 서점에 어울리는 멋스런 추억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모서리마다 하나씩 놓여있던 작은 의자에 앉아 책을 읽기가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3.

책읽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무슨 이유로 책을 집어드는 지는 모르겠다, 기보다는 일단 다양하다. 뭔가를 알아간다는 것에 우쭐할 때도 있고 왠지 읽어야 세상을 쫓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초조함을 느낄 때도 있고 가끔은 책읽기가 휴식이 되기도 한다. 어떤 이유든지간에 책을 집어들었다 놓았다 하는 데 익숙한 편이다. 아마 그날 덕분이다. 옷가게를 자주 가면 입고 싶은 옷이 많아지는 것처럼.

그날이 백두 자리로 옮기고 두 배쯤 넒어졌을 때 그날에 넉넉하게 둘러앉아 책을 읽을 수 있는 탁자가 하나 생겼다. 책으로 놀기에 완벽한 조건이 마련된 것.

 

#4.

선풍기도 없었던 그 여름, 나는 그날이 문 닫을 시간까지 그 탁자에서 책놀이를 했다. 그날이 문을 닫는 자정까지 술마시고 놀 때도 많았으니 이런저런 약속이 없을 때 그랬다는 얘기다. 책을 미친 듯이 읽어댄 것은 아니고 그야말로 책놀이, 읽다가 들춰보다가 만지작거리다가 책표지도 감상하고 들었다놓았다 한다거나 그런 놀이. 그리고 영화를 서너 편 보면 꼭 한번은 나오는 장면, 책이 꽂혀 있는 서가에서 발꿈치를 살짝 들어올리며 가느다란 손을 슬로모션처럼 주욱 뻗어서 묵직한 양장본 책을 한 권 꺼내는 사람의 옆모습 같은 것 연출하기. 물론 살이 축축 늘어지는 팔로 기우뚱거리며 인상 쓰는 모습이 영화 장면 같았을 리야 있겠냐마는.  

 

#5.

98년인가, <그날에서 책읽기>가 발행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이미 먼 곳에 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무슨 고집인지 책은 그날에 가서 사고야 마는 까탈을 부렸다. 그날에 대한 묘한 의무감이 있었다. 

아는 선배가 소개팅시켜준다는 말은 못하고 어설프게 불러냈던 곳도 그날이었고 후배들이 모여 한참을 울기만 했던 자리에 손님도 불청객도 아닌 채 앉아있게 했던 곳도 그날이었다. 내가 어디에서 사람을 만나든 그날을 거쳐가지 않기란 힘들었는데 그날은 시침떼고 있었을 뿐 나의 한 시절을 지켜봐주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눈치를 챘다.

 

#6.

그날은 그날을 거쳐간 모든 사람들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앞의 게시판은 사람들을 끊임없이 불러모으면서도 떠나보내는 아쉬움을 드러내지 않는, 지독하게 고독한 것이었다. 게시판에 마지막까지 붙어있는 메모지들을 한장 한 장 뜯어내는 일은 고독을 다독거리는 무안한 손짓이었던 건가.

그 게시판이 있어서 '녹두'는 열린 공간일 수 있었다. 메모지에 적힌 메모들은 특정한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기도 하지만 그 사람들을 특정해놓지는 않기 때문에 누구나 기웃거릴 수 있는 것들이었다. 실제로 나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 모임들에 낀 것도 꽤나 자주 있었던 일이다. "잠깐 들렀다 얼굴 보고 가려고" 앉았다가 술취한 사람들 집까지 데려다주는 일도 가끔 있었다. 게시판의 고독이 기다림을 제공했다?

 

#7.

<그날에서 책읽기>는 무척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날과 좀더 오래 맺어지는 느낌.

기획이 신선해서 좋기도 했다. 대학가의 서점이 모두들 흔들릴 때 학생들과 함께 책읽기에 대해 말하는 정기간행물을 서점이 발행한다는 사실에 뿌듯하기도 했다. 마치 내가 하는 일인 양.

사실, 기획이 중단돼서 아쉬움이 크고 언젠가 다시 시도해볼 만한 일이라는 생각을 여전히 한다. 책읽기에 대해서, '그날에서 책읽기'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책읽기'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말이다.

 

#8.

드디어 그날까지 가서 책을 사는 건 심각한 오버질이라는 것을 시인했을 때 내가 사는 동네에는 '논장'과 '풀무질'이라는 서점이 있었다. 심지어 둘이라 좋기도 하지만 둘 중에 어느 곳을 갈 지 잠시 난감하기도 했다. 단지 작고 허름하다는 이유로 풀무질을 선택한 것은 당시 장백, 오늘의 책 등이 문을 닫을락 말락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논장이 확장하면서 자리를 옮겼을 때는 역시 풀무질을 선택하길 잘했다는 어줍짢은 건방도 떨었다.

풀무질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그날이 자리를 옮기기 전보다 더 좁은 공간이다보니 마음편하게 책과 놀 수도 없고 책 분류도 잘 되어있기가 힘들다. 그럴 때 서점 대신 책읽기를 도와주었던 것이 <그날에서 책읽기>이기도 했고 그도 안 나온 다음부터는 논장에서 책을 뒤적여 고른 후 풀무질에서 사곤 했다. 역시 오버질의 연속이다.

 

#9.

묘한 의무감 같은 것도 더이상 생기지 않고 책놀이도 일상에서 멀어질 때쯤 나는 다시 이사를 가게 되었고 큰길가에서 100여미터를 들어가기가 버겁다는 이유로 논장에서 책을 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논장이 문을 닫은 것이 작년 3월쯤. 풀무질보다 논장이 먼저 문을 닫았다는 것이 충격적이기도 했지만 알고보면 풀무질의 생존전략이 좀더 적중했던 것일 뿐이다.

 

#10.

"책들 정리하시나 봐요." "반품하려고요." 나는 그냥 오래된 책들을 돌려보내는 정도라고 생각을 했고 딱히 읽고 싶지는 않지만 왠지 읽어야 할 것 같은 책을 한 권 집었다. 마일리지가 꽤 쌓여있었기 때문이다. 읽고 싶어서 사는 책은 마일리지를 쓰지 않았다. 풀무질의 교환권도 그랬다.

"마일리지 쓸 수 있죠?" "그럼요." 마일리지는 책값을 약간 웃도는 정도였고 뭔가를 깔끔하게 털어낸 기분으로 서점을 나왔다.

논장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알게 된 건 그 다음날 신문기사를 통해서였다. 서점을 정리하려고 반품 준비로 부산한 논장 아저씨에게 마일리지를 쓸 수있냐고 천연덕스럽게 물어본 셈이다. 미리 알았더라도 똑같은 책을 똑같은 방식으로 가져왔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을 닫는 서점의 마지막 여운을 마일리지로 망쳐놓은 것처럼 주책스러워보였다.

 

#11.

인터넷 서점을 기웃거려보기도 했으나 쉽게 익숙해지지 못했다. 책소개만 보고 책을 사는 것은 신어보지도 않고 신발을 사는 것만 같았다. 다시 풀무질로, 하지만 예전만큼 책을 많이 읽지도, 사지도 않는다. 언젠가부터 책읽기는 일상보다는 일탈에 가까워진다. 책을 손에 댄 지 오래되면 책에 손을 뻗고 싶은 막막함만 커지다가 이것저것 읽기 시작하면 중독증 환자가 갑작스레 스스로에게 자물쇠를 채우듯 손을 떼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느낀다. 요즘이 그런 때.

어제는 풀무질에서 소설 한 권과 시집 두 권을 집었다. 서점에는 다른 손님이 한 명 있었고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저씨는 5-6년쯤 지나면 시골로 내려가겠다셨다. 실상사 작은 학교나 간디학교에 아이를 보내고 싶단다. "풀무질 없는 명륜동은 상상할 수 없"다는 손님의 아쉬움 묻은 말에 아저씨는 "제가 내려가도 풀무질은 남아있어야 할 텐데요." 하며 텁텁해하신다. "아저씨 내려가면 풀무질 저한테 물려주세요~ 히히" 나는 묵직한 분위기를 털어보려고 농담-모든 농담이 그렇듯 절반은 진담인-을 꺼낼 뻔했지만 턱 막혀 나오지 않았다.

대학가 서점의 기억을 자랑처럼 읊어대지만 사회과학서점의 무거운 외로움을 교환권이나 마일리지처럼밖에 공유하지 못하는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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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20 13:31 2005/08/20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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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티고네 2005/08/20 14:3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아아...그날의 추억^^;;;

    대학 오려고 서울로 첫 상경을 했던 곳이 신림동 녹두거리였어요. 언니 손에 이끌려 '그날'에 갔었지요.인문과학 서점, 사회과학 서점 등등의 말에 대해 전혀 몰랐기에 서울 대학가의 서점은 대충 다 그날 같은가 보다 하고 생각하고 있다가 돈암동으로 이사를 간후 문제집만 파는 학교 앞 서점에 크게 당황했던 기억이 나네요.

    어쩐지. 미류랑 책이 굉장히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는데. 책놀이에 깊은 내공이 있으셨군요. 글 잘 읽고 가요~^^*

  2. 뎡야핑 2005/08/20 16:4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그 동네에 단골 헌책방 두 군데 있었는뎅. 저도 잠깐 거기 살았었거등요. 아유 나는 거기 살 때를 추억하기 싫어 밤마다 외로워서 젊은 피를 수혈받으로 녹두거리를 배회했었어요-_- 이 글 읽으니 그날 아저씨에게 여기는 마일리지 없냐고, 광장(새로생긴서점)은 있다고 말했던 게 갑자기 미안해지네...-ㅅ-

  3. noblog 2005/08/21 01:11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백두가 아니라 전야입니다. 지금 자리로 옮기기 전의 그날에도 탁자가 있었고 물이 담긴 주전자와 컵, 그리고 휴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그날 안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못합니다. 그날 안의 뿌연 담배연기라니, 기억을 다시 살려보시지요.

  4. 2005/08/21 20:4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백두한라라고 줄여말했던...술집 이름과 헷갈리신듯.

  5. 미류 2005/08/22 09:33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안티고네도 어울려요~ ^^

    뎡야, 마일리지 있으면 좋죠~ ^^; 젊은 피 수혈이라, 왠지 섬뜩한 기운이... ㅋㅋ

    noblog, 감사합니다. 어쩌면 그렇게 백두라고 쓰면서 아무런 이상한 느낌이 없었을까 이상하네요. ㅎㅎ 탁자는, 옮기기 전 그날의 탁자는 의자를 두고 편안히 책을 읽을 만한 둘레가 확보된 것이 아니라 그냥 가운데 책꽂이들을 살짝 연장해놓은 것 같은 느낌만 있어서...

  6. 미류 2005/08/22 09:35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그리고 담배는... 저는 왜 그런 장면이 기억에 남아있을까요? 조작된 기억일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둘레를 청회색으로 짙게 두르고 휘어감기며 올라가는 연기가 기억에 남아있어요. 그러고보면 그날이 뿌옇다거나 담배냄새로 갑갑했다거나 하는 기억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는 아무나 아무때나 담배를 피우지는 못하는 곳이었다는 건데, 음, 아무래도 환영인가봐요. -_-;

    준, 그런 것 같네요.

  7. 보라돌 2005/08/23 09:4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이른바 '리버사이드'가 제 기억에 존재하지 않듯, 지금 그 자리가 아닌 '그날'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그날'에서 책 포장해 주는 게 가장 마음에 들었죠. 빨간 책들은 종이 포장을 했고, 빨갛지 않은 책은 비닐 포장을 했던. 예나 지금이나 되도록 책은 사서 보고자 하여, 그날에 앉아 뒹굴거렸던 추억은 없지만. ^^;; 누님 글 보니 또 기억나네요. 그 때의 영상들이.

  8. 미류 2005/08/23 10:0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아, 그런가? '리버사이드'가 그때까지는 있지 않았나? 기억이 가물거리네. 내게는 **의 생일잔치로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공간인데~ ㅎㅎ
    빨간 책도 비닐 포장을 해달라면 해주셨지. 난 비닐포장을 좋아했는데. 그리고 책 사서 뒹굴거리는 방법도 있다구~ ^^

  9. schoner 2005/08/26 17:4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아, 그날.

    그날에서 담배를 피운 기억이라니 대단하군요! 로망입니다..

  10. 미류 2005/08/27 09:35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schoner, 피운 기억은 아니구 누군가 피우는 걸 본 기억인 건데... 그때는 제가 담배를 안 피우던 때라 ^^;; 근데 schoner님이 로망이라고 쓰신 걸 보니 제 기억이 조작된 기억 수준이 아니라 정말 로망을 이미지화해서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번뜩 드네요. 하하. 로망. 네. 로망인가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