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게 말할 준비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어.

마음 깊숙한 곳에 흰 페인트를 쏟아버리고 간 시간들.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들이 겹겹이 덧칠되어 숨이 막힐 것 같았어.

 

말하지 않고 숨구멍 하나하나를 막아오고 있는 것이 나일 뿐임을 확인하고

나는 그걸 트라우마라고 부르기로 했어. 

 

쏟아져들어오는 광선들이 나의 망막에서 빛으로 해독되지 않기를,

밀려들어오는 진동들이 소리가 되지 않기를,

냄새도 없이 무색무취의 대기에 모두 먹혀버리기를,

바라는 것은 나였다. 나는 아직 

빛깔과 소리와 냄새에서 뻗어져나갈 기억의 잔상들을 살풋

웃으며 쫓아달려갈 용기가 없다. 몇 번의 실패도 인정해야 한다.

 

말을 입 밖에 낼 수 있는 용기를 준 것은

당혹스럽게도.

황새울이었어.

 

요즘 나는 눈과 귀를 닫으려 애쓰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평택에서 날아오는 동영상들을 보지 않았다.

기사도 스트레이트만 보려고 애썼다.

더이상 내게 흔적을 남기고서는 내가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빨간 신호등 앞에서 갑자기 핏방울이 떨어지는 환영을 보고 싶지 않았고

무너져내리는 대추분교 앞에서 우지끈 꺾여버린 나무의 이파리들도

모두 초록색이었다는 걸 알고 싶지 않았다.

후끈 달아오른 지하철에서 미어지는 땀냄새들이

전경버스 안의 퀘퀘함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랬고

행여라도 오토바이 소리를 들으며 헬리콥터가 떠오르면 어떡하나

조바심내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랬다.

 

그래서

그렇게 평택으로 갈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어.

불복종, 저항, 이런 말들은

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주위를 배회하기만 했지.

그냥 걸어갔을 뿐이야.

내가 보고싶지 않았고 듣고 싶지 않았던 것들에 홀린 듯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이끌렸을 뿐이야.

그리고 나서 현실로 돌아오면 다시금 흰 페인트를 들이부었어.

기억은 하고 싶지 않아 앞만 보고 싶어 어디든 갈 수 있지만 기억에 등떠밀려 가고 싶지는 않아 앞을 보며 걷

하지만 길이 잘 보이지 않았어. 흐릿한 저 너머에

함께 손잡고 걸어갈 사람들이 있을 것만 같은데

내가 아직 눈을 감고 있는 걸까.

 

각자 걸어가다보면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함께하는 자리에서도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우리를 옥죄어오는 폭력과 광기에 질식당하지 않으려면 좀더 많은 사람들과 마음을 나눌 수 있어야 할텐데 어디에서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하다.

 

촛불집회에서 사회자가 평택에 있는 군인들을 독도로 보내자고 할 때

나는 어쩔 수 없이 움추러들고 말았어.

황새울을 지키고 싶은 이유는

그 곳에서 땅과 함께 호흡하며 사는 이들이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

독도를 아쉬워하는 이유는

그 땅에서 살아 숨쉬는 괭이갈매기와 바다제비들과

섬과 소근대며 살아가는 풀꽃들이 눈 앞에 아른거리기 때문.

'우리나라'의 땅이라고 땅따먹기하자는 게 아니었어. 우리의 저항은

내 것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우리의 것을 나누기 위한 싸움.

제국의 정중앙에서 포악스럽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미국을

정면으로 응시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우리 군대를 바로세우는 자주국방은 그 제국의 변두리일 뿐.

당신들을 좋아할 수 없다는 사실에 용서를 구하지는 않을 꺼야. 

그냥 나는, 내가 살기 위해, 내가 평화롭게 살기 위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무들이 평화롭게 살기 위해,

평화로운 질서 위로 하늘이 언제나 투명하기를 바라며 한걸음 내딛을 꺼야. 

 

유쾌함으로 안개를 걷어낼 꺼야. 흰 페인트를 지워갈 꺼야.

우리가 걸어가는 길이 서로에게 투명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우리를 억압하는 것들을 에워싸고 춤을 출 수 있도록

피비린내의 기억보다는 핏빛 진달래의 향기를 쫓아

아수라의 기억보다는 황새울에 빼꼼히 고개를 내민 여린잎들의 손짓을 따라

 

말할 수 없었던 것들을

다르게 말할 것이다.

그게 투쟁.이다.

 

[5.11. 덧붙임. 나에게]

다르게 말하는 것이 다만 다른 감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어야.

핏빛 진달래의 향기가 좋고 여린잎들의 손짓이 그립다면

무엇이 그 향기와 손짓을 짓밟고 있는지

어떻게 그 향기와 손짓을 만날 수 있는지

이야기해야 할 것.

잊지 마. 힘내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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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09 23:52 2006/05/09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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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루 2006/05/10 00:0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맞네요, 공감 공감

  2. 리우스 2006/05/10 01:55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감수성이 진짜 남다르시네요...저처럼 팍팍시런 인생은 첨에 무신 말씀인지 못알아듣다가 겨우겨우 왕 공감...

  3. outwhale 2006/05/10 02:1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웃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천성이 웃음이 헤픈 걸 어쩌겠어요. 그리고 노순택의 사진영상처럼 웃음으로 이길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해요. 유쾌하게 싸워요. 우리 ^^

  4. 산오리 2006/05/10 09:11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반성.... 공감....

  5. 아침 2006/05/10 18:5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그래요, 다르게 말해요. 사랑하기 위한 몸부림이죠. 내가 살고 있고 다른 생명들도 살고 있음을 인정하는 예의바른 몸짓이죠. 우리의 것을 나누기 위한 살림이죠.

  6. 여진 2006/05/10 23:0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시..같다.

  7. 여진 2006/05/10 23:1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참, 미류미류미류!! 우리가 이틀만에 자유를 만끽하는 사진이 나한테 있는데..메일주소 알려주면 보내주지요~ 미류가 잘 나온 사진도 있삼..흐흐흐

  8. 미류 2006/05/11 16:2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나루, 우리 울지 말아요. 혼자 울지는, 더욱 말구요. 같이 웃어요. ^^

    리우스, 공감해줘서 좀더 힘이 나요. 리우스의 감수성과 그걸 풀어내는 이야기들 배우고 싶을 때가 많아요. 일욜에 뵈요~ ^^

    outwhale, 웃을 수 있는 시간들을 조금씩 쌓아가는 길이 늘 유쾌하지는 않을 지 몰라두 우리 웃기 위해 싸운다는 것만은 잊지 말자구요. ^^

    산오리, 길을 걷다보면 만날 것 같은 사람~ ^^

    아침, 아침이 써놓은 글 보면서 많은 생각 했어요. 평화롭게 살기 위해 싸운다는 것이 어떤 것일지 같이 고민해요.

    여진, 줄을 띄어서 그런갑다. ^^ 멜 주소는 phyting골뱅이파란닷컴. 히.

  9. 윤영 2006/05/11 16:5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아, 음..어어 ㅠㅠ
    근데 이거 언니글 퍼가도 되남?
    같이 읽고 싶은 사람들이 있당, 숨도 그렇고 우리 학회도 그렇고..

  10. 미류 2006/05/11 23:5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퍼가는 거 안 물어봐도 돼. 정보공유 라이센스를 참고하3 ^^;
    일요일에는 평택에서 보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