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한 인간이 자기 시대의 과학적 방법이라는 답답한 장벽을 걷어내고 나름대로 탐구하면서 생각했던 것을 기록했다. ...이 책에 담긴 내용은 발견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 무지의 고백이다. 또한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을 때 종종 찾아오는 궁극적인 깨달음의 기록이다.  (22)

 

# ...'비전문화의 법칙' 이라는 것을......특정한 지질 시대의 가장 고도로 조직되고 지배적인 형태들로부터 후속 시기의 주인이 되는 생명 형태들이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특정한 환경에 좁게 한정되지 않고 새로운 적응 능력을 보이는, 좀더 하등한 일반화된 동물들로부터 지배적인 생명 형태들이 출현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주장이었다.  (79)

 

# 숲의 가장자리 지역에서는 묘하게 생긴 구식 동물이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 그 동물은 인간의 기준으로는 거칠고 마디투성이였으나, 그의 시야에 들어온 세계의 기준으로는 연약한 동물이었다. ... 그는 약간 부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불확실하긴 하지만 아마도 뒷다리를 써서, 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일은 감히 그가 지상으로 내려오는 드문 경우에만 일어났다. ... 그는 유연한 손가락을 지닌 손을 갖고 있었지만, 바람처럼 빨리 달리게 할 정교하게 전문화된 발굽은 갖추고 있지 않았다.  / 설령 그 묘하게 생긴 구식 동물이 새로운 세계에서 경쟁하겠다는 생각을 했더라도, 그런 생각은 아예 잊는 편이 나았다. ... 그는 변변찮았고, 뛰어나지도 빠지지도 않는 그저 그런 능력을 갖고 있었을 뿐이다. .. 어느 날 이 이상한 원숭이들의 - 그렇다, 그들은 원숭이였다 - 작은 무리 하나가 풀밭을 어기적거리며 걷기 시작했을 때,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02-103)

 

# 이것은 과거의 모든 시간을 통틀어 유례없는 사건이었다. 지구에 대한 야수들의 지배가 결국 종말을 고한 것이다. 이제 좋든 나쁘든 숲의 성장이나 파괴, 사막의 확대나 제거는 고작 백만 년에 희미한 녹색 황혼에 싸인 자연 실험실에서 그토록 불가사의하게 슬그머니 빠져나온 저 영악하고 탐욕스런 동물의 변덕에 점점 더 좌우되게 될 터였다.  (152)

 

# 인간은 너무 오랫동안 인간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196)

 

# 그 새들은 까마귀의 무겁게 내리덮이는 그림자 아래에서 노래했다. 정말로 그 새들은 까마귀의 존재를 잊었는데, 그 까닭은 그들이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노래하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232)

 

# 만일 실험실에서 인간의 감독 아래 점액질이 꼬물꼬물 움직이는 날이 온다면, 그때 우리는 더욱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우리가 성취한 것에 자만한다면, 우리는 생명의 비밀이 여전히 우리 손가락에서 빠져나가고 우리를 피해가고 있다는 점을 믿기 어려울 것이다.   (274)

 

미적거리며 읽기 시작한 책. 어느 순간부터, 아마 100페이지 정도를 넘어서면서 완전히 빠져들었다. 책이 끝나갈 즈음 다시 빠져나오게 되기는 했지만 인상적인 책이다. 권해주고 싶은 친구들 얼굴까지 떠오르는 책이었다.

 

지구라는 별 - 그 먼 우주까지 시선을 보내지 못하더라도 - 의 기나긴 시간과 광대한 공간 안에서, 또는 그것을 가로질러 '인간'이라는 종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안내서. 가르쳐주거나 알려주는 게 아니다. 더욱 많이 경탄할 수 있도록, 신비로움보다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도와주는 책.

 

약간 다른 얘기지만, 요즘, 인간의 정신과 정서와 같은 것들에 구체적인 관심이 간다.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이 아니라 정신이나 정서의 물질성에 대한 궁금함. 아마 들뢰즈의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읽다가 문득 시작되었고 금방 묻어둔 궁금함일 텐데 꾸역꾸역 밀려나오는 중이다. 신경학에 마뜩찮은 점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게 설명하지 않고 내버려둘수록 이성이든, 감성이든, 견고하게 권력화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점점더 관심을 두게 되는 것 같다.

 

말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을 말하겠다는 의지,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말하다가 말이 끊어지는 그 자리에서 살짝 고개를 숙일 수 있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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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20 22:09 2007/12/20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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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읽고 싶은 책

    2007/12/21 01:28

    미류님의 [로렌 아이슬리, &lt;광대한 여행&gt;] 에 관련된 글. 진은영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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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라임 2007/12/21 08:21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아 문장이 무척 아름답네요. 많지 않은 인용에도 마음이 설렙니다. 잘 기억해 뒀다가 나중에 찾아서 읽어야겠어요.

  2. 미류 2007/12/24 13:15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네, 내용도 괜찮지만 문장도 좋았어요. 나중에 읽고 라임 님 생각도 들려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