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을 걷고, 또 걷고

섬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그런지 섬은 편안하다. 섬, 살짝 소리를 내보내고 나서 금새 오무라드는 입술은 살아가는 일에 작은 매듭을 하나 지어놓는 듯하다. 매듭 하나 짓는 마음으로 처음 닿았던 곳이 울릉도였다. 겨울이라 사람들 별로 찾아들지 않는 섬에서 혼자서도 여럿인 양, 혼자라서 혼자인 양 일주일쯤을 걸어 다녔다. 섬에는 무언가 다 말하지 못할 매력이 있다는 걸 확인하고 내게는 ‘섬 프로젝트’가 생겼다. 뭐 그냥 갖다 붙인 제목이다. 어디 여행하게 되면 섬으로 다녀보자는 정도의 마음. 다음해에는 선유도로 갔다. 둘째날인가, 아빠의 암 진단 소식을 듣고 바로 고향으로 날아간 후 다시 섬을 다녀보지는 못했다. 물론 고향이 섬이다 보니 1년에도 서너 번 다닌 셈이기는 하지만, 그걸 여행이라 이름붙이기는 뭣하고.


오랜만에, 안식월을 맞아 섬으로 갔다. 이번에 찾아나선 곳은 완도와, 행정구역으로는 완도군에 속해 있는 여러 섬들이었다. 완도는 오래 전에 다리가 놓여 배를 타고 찾아드는 맛은 없지만 웬만한 곳에서는 바다가 보이는, 섬이었다. 비릿한 갯내음이 별로 없는 것이 좋기도 하지만 아쉽기도 한 완도를 지나 신지도의 명사십리 해수욕장으로 갔다. 너울너울 해가 질 무렵 십리길이라는 모래사장을, 너무 가늘고 고와 발자국도 나지 않는 모래사장을 걸었다. 고기 잡으러 나간 배들이 밝힌 불빛이 수평선에 가물가물 피어오를 때쯤 횟집을 찾아가 저녁을 먹었다. 서울이라면 한 접시에 만 원 이만 원 했을 법한 해산물들이 회에 ‘딸려’ 나왔다. 오랜만에 신나게 회를 먹고 섬에서의 첫날을 마무리했다.


다음날 아침에는 일찍 항구로 나가 청산도 가는 배를 탔다. 서편제를 촬영한 곳으로 알려지기도 한 청산도는 이름 때문인지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쯤에 걸쳐있는 섬 같았다. 국립공원 안내소에서 안내 브로셔를 받고 보니 ‘슬로시티(slow city)'로 지정된 곳이라고 한다. 나오는 배 일정 때문에 택시를 탔을 때 운전하셨던(청산도에 한 대 있는 개인택시) 분도 슬로시티를 강조하셨다. 하루 몇 시간 내어 돌아다니는 사람 눈에 빠르고 느린 것이 가늠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지나다니며 만나는 분들이 모두 반갑게 얘기를 건네시던 게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내 일상이 누군가에게 ‘구경거리’가 된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닐 법도 한데 웃는 마음들이란 아마, ‘나’와 땅과 사람과 일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스며든 마음들이 아닐까 싶다. 그조차도 구경하는 자의 환상일 수 있겠지만.


범바위라고, 산의 능선을 따라 범이 엎드려있는 모양의 바위를 찾아가며 섬을 반 바퀴쯤 돌았고 범바위 위에 올라가서는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날이 화창하면 제주도가 보인다는 곳, 안개로 수평선은 뿌옇기만 했지만 내가 손을 흔드니까 보인다고 하셨다. 나도 엄마의 마음이 보였다.


능선의 반대편으로 걸어 내려올 때쯤엔 벌써 마지막 배 시간까지 한 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멸치철이라 바다를 보면 은빛으로 반짝인다는 국화리에 꼭 들러보고 싶었지만 짐들을 완도에 두고 와서 서둘러 택시를 탈 수밖에 없었다. 하루 동안 걸어 다닌 반 바퀴의 나머지 부분은 택시로 20분도 걸리지 않았다. 시간 단위가 다른 시대를 살고 나온 듯 청산도를 빠져나왔고 완도의 정도리로 갔다. 구계등이라고, 공룡알 같은 돌들이 파도에 밀려 아홉 개의 계단을 이룬 바닷가다. 아홉 개의 계단이 몇 년 전까지 남아있었을지는 짐작하기 어려웠고 굵은 돌들이 부딪치며 우는 소리를 들으며 별 봤다. 까만 밤하늘에 별들이 콕콕 박혀있었다. 같이 다닌 이가 가을철 별자리를 쭈우욱 설명해주었는데 다시 찾아보라면 찾아질 듯한 것은 백조자리 정도.


다시 아침 일찍 항구로 나가, 이번에는 노화도로 가는 배를 탔다. 보길도와는 올해 여름 다리로 연결됐고 근처에 소안도, 당사도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비가 온다는 소식에 차를 싣고 들어갔다. 다리를 지나 보길도에서 민박을 정하고 라면을 끓여먹었다. 전날 청산도에서 하루 종일 먹지를 못해, 아침은 꼭 먹고 길을 나서자고 했다. 하지만 작은 섬들의 가을이란, 낯선 방문객들의 자리를 비워두지 않는 셔터 내린 상점이다. 낯선 방문객이 되지 않기 위해 적당히 눈치껏 다닐 필요가 있다. 컵라면 하나라도 배낭에 넣고 다녀야 한다는 것. 눈치가 없었던 우리는 문 닫은 가게 문을 두드려 겨우 라면을 사서 아침을 해결했다.


섬을 한바퀴 도는 일주도로가 차마 넘지 못한 산을 걸어서 넘었다. 예송리에서 격자봉으로 올라가 뽀래기재로 내려 보옥리로 들어가는 길이다. 역시나 화창한 날이면 제주도까지 다 보인다는 격자봉에서, 역시나 안개로 제주도는 보지 못했다. 대신 상록수림이라 짙은 녹색으로 두텁게 바다를 향해 내려가는 능선을 따라 눈은 바다로 풍덩 빠져보기도 했다. 넓게 퍼져나가며 자라는 제주도의 동백과 달리, 땅에 굵직한 기둥을 내리고 고목처럼 묵직하게 하늘로 자라는 동백의 느낌은 사뭇 달랐다. 흰 꽃이 피는 동백나무들이 자란다는데 꽃이 필 때가 아니라 보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쉬웠지만 햇빛이 들어올 자리도 남기지 않고 숲을 꼭꼭 채워 자란 동백나무들에서 수십 년 넘게 꽃을 피우고 지웠을 시간은 흠뻑 느끼고 왔다. 뽀래기재의 아래쪽은 마치 다른 기후지대의 산처럼 이색적인 느낌이었고 산을 빠져나오자마자 멸치를 찌고 널어 말리는 일들이 한창이었다.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고 고산 윤선도가 만들었다는 세연정에도 들르고, 관광버스를 얻어 타 안내해주시는 보길도 주민 분의 섬 소개도 덤으로 들으며 청별항 근처까지 왔다. 배를 채운 후 다시 예송리까지 걸었다. 해는 벌써 다 지고 캄캄한데 풀벌레 소리만 밤을 지키는 길을 따라 민박집으로 들어왔다. 다음날 비가 온다는 소식에 걱정, 아홉시 뉴스가 전하는 화나는 소식들에 또 괜한 걱정, 그 끝에 잠을 청했다.


아침에 눈을 뜨니 역시나 비. 걸어다니기에는 너무 거세게 쏟아지는 비라, 차를 끌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물대포처럼 쏟아지던 비가 소안도에 닿을 즈음엔 가늘어졌다. 다니면서 보니 걸어다니면 참 좋을 길들, 비 때문에 차로 다니는 것이 조금 아쉬웠다. 청산도처럼 걸으면서 마을 사이사이를 지나다닐 수도 있고 하루면 넉넉히 섬 한 바퀴를 돌겠다 싶기도 했다. 제주도에 많은 동백나무와 후박나무(조팝나무)가 상록수림을 이루고 있으니 괜히 왔던 곳 같은 느낌도 들었다. 비가 가늘어진 틈에 동백 열매와 잣밤을 줍고 있는 할머니들도 있었다. 시장에 내다팔면 한 되에 2만 원은 받는다는데 우리들은 얄밉게도 야금야금 잣밤을 주었다. 내 땅 네 땅이 없는, 자연이 주면 받고 가져가면 내놓고, 그러니 자연스럽게 나누게 되는 사람들이 거기 있었다.

 

 

(이 부분은 전에 블로그에 썼던 글 줄여서 옮긴 거라 생략~ ^^)

 

 

배를 타고 다시 노화도로 왔다. 광산이 있다길래 막무가내로 지도를 들고 찾아갔다. 오래 전에 작업복을 갈아입는 공간쯤으로 썼을 법한 건물이 쓰러지기는 싫다는 듯 녹슨 철문을 안고 서있었고 안으로 안으로 따라 들어가보니... 거대한 땅을 군데군데, 아래로 아래로 파놓은 광산이었다. 사북탄광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옥(여기서 캐는 옥은 주로 자기를 만드는 데 쓰인다고 들었다)을 캐는 곳이라 검게 드리운 그늘은 없었으나 땅속으로 들어가는 구멍을 판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땅 바닥을 무작정 파내 벗기워낸 자리였다. 파다가 남은 땅들은 좁다란 절벽이 되어 쭈뼛쭈뼛 서있었고 오랜 시간 동안 다시 자라난 풀과 나무들이 안타까운 듯 헐벗은 땅을 감싸고 있었다. 자리를 가리지 않고 생명을 피워내는 푸른 열기가, 마치 빼어난 자연 경관인 듯도 느껴지는, 슬픈 자리였다.


다시 하루밤을 묵고 완도로 나왔다가 고금도로 갔다. 굴을 어떻게 양식하는지 듣기도 하고 갯바위들에 붙은 굴을 따는 할머니에게 생굴을 조금 사기도 하면서 약산도로 넘어갔다. 고금도나 약산도는 섬 느낌보다 여느 농촌의 느낌이 더 드는 곳이었다. 청산도가 섬 치고는 논과 밭이 많이 일군 곳이었는데 고금도, 약산도도 그랬나. 시간에 쫓겨 다소 급하게 나오느라 찬찬히 살피지는 못했고 점심을 먹으러 들어간 식당 아주머니의 말이 기억난다. 우리가 산 생굴을 꺼내 먹어도 되겠냐면서 같이 드시자고 했더니 “우리도 바닷가에 살지를 않아 반갑네”라며 좋아하셨다.


그리고 다시 육지. 제주도에서 자란 나는 제주도 밖을 싸잡아 ‘육지’라고 불렀다. 그게 너무 당연했는데 가끔 그 말이 나오면 주위 사람들이 매우 재밌어한다. 섬이라고 크게 다를 것도 없는 곳에서 자랐는데도 ‘섬’은 자연스럽게 내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하다. 어찌보면 지구상의 모든 땅들이 섬이기도 할 텐데 바다를 건너서 닿을 수 있는 섬을 다녀보자는 프로젝트는 계속될 듯하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는데 그 섬에도 언젠가?


 

* 불로그에 찬찬히 써보려던 계획은 놓쳤고, 소식지에 실었던 글 옮겨놓는당 ㅜ,ㅜ

엄마가 소식지 보고 글 잘 봤다고 전화했다. 쫌 좋았다.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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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7 17:11 2008/11/17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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