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나는 '내집'을 꿈꾼다

작년 이맘때쯤 엄마와 집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인권운동이니 뭐니 하기 전에 평생 살 집 한 칸은 마련해놓고 나서 하라는 엄마의 다그침은 익숙해진 참이었다. 나름 주거권운동을 하는 나는 주거불평등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러다가 엄마는 집을 여러 채 가진 사람들이 “집 없는 사람들 대신해 집을 사서 살게 해주는 거”라고 말했다. 당혹스러운 논리에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엄마의 말은 그리 틀린 말도 아니었다.

주택보급률 100%가 넘어도 집 없는 사람들은 집 없는 채로

한국의 주택보급률이 100%를 넘은 것은 2002년부터다. 그때까지는 집이 필요한 가구 수에 비해 집이 부족했다는 말이다. 한 집에서도 방마다 세를 따로 놓거나 ‘집’이 아닌 건축물, 즉 지하실이나 쪽방이나 비닐하우스와 같은 곳들이 집이 부족한 시대 사람들이 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갔던 곳이다. 그러면 주택보급률이 100%를 넘은 지금은 다를까. 그렇지 않다. 2005년에도 지하방, 비닐하우스, 쪽방, 심지어 움막이나 동굴까지도 사람들은 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가 살고 있고 그 인구가 전 국민의 20%를 넘는다.
주택보급률이 오르는 동안 공급된 주택의 절반 이상을 이미 집이 있는 사람들이 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집들의 대부분은 중대형 아파트다. 당장 집이 절박한 사람들이 들어가 살 수 있는 집이 아니다. 하지만 집을 빌려주는 사람들에게는 세제 혜택까지 제공된다. 집을 수 채 가지고 있어도 임대사업자로 등록하면 종합부동산세나 양도소득세가 덜 부과되는 것이다. 집은 거주를 목적으로 한 것이어야 한다는, 1가구 1주택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이렇게도 비껴갈 구멍이 있다. 이런 정책의 배경이 되는 인식이 바로 돈이 있는 사람들이 투자를 해서 주택을 공급해야 전체적으로 내집마련의 기회가 높아지는 것이라는, 엄마의 평범한 생각인 것이다.

가난할수록 ‘내집’ 마련의 꿈은 절박해

가계대출액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전세자금이든 주택구입자금이든 주택 관련 비용이라는 점이나 가계지출에서 역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주거비라는 점을 보면 우리 삶에서 집 걱정만 덜어져도 숨통이 크게 트일 것이다. 기초생활보장수급액 30여만 원을 받아 20~25만 원을 쪽방 월세로 지출하는 사람들에게 ‘내집’은 전혀 다른 삶을 기획할 수 있는 토대가 될 수도 있다.
비용만 문제가 아니다. 한국의 주택임대차제도는 임차인에게 매우 불리하다. 2년의 계약기간을 보장하는 임대차보호법이 있지만 현실에서는 그마저도 무력하다. 집주인이 임대료를 올려달라고 하면 나가야 하고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 한다. 세입자가 집주인에 우선해 권한을 갖는 경우도 나가겠다고 할 때뿐이다. 이때 보증금을 돌려받기 어려운 것도 큰 문제지만 중요한 건 세입자에게 사실상의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이다. 오직 집주인의 ‘자비’가 있을 때만 세입자는 임대차기간을 연장하고 부담할 만한 임대료로 집을 ‘사용’할 수 있다. 세입자들에게 맘 놓고 편안히 지낼 수 있는 ‘거주’의 공간이란 꿈같은 얘기일 뿐이다.
개발이 추진될 때는 더욱 ‘내집’이 그립다. 한몫 챙기지 못하는 것이 억울해서가 아니다. 그 동네에서 수십 년을 살아와도 세입자들에게는 개발사업의 내용을 결정할 아무런 권한이 없다. 어제 집을 산 집주인이 조합원이 되어 개발사업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보면 재산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했던 근대국가 초기와 다를 바가 없다. 세입자가 70%가 넘는 뉴타운에서 임대주택은 17%밖에 지어지지 않고 세입자들의 대부분은 아무런 대책 없이 내쫓긴다. 일부 세입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임대아파트는 임대료 수준이 높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림의 떡이 된다. 돈으로 나오는 주거이전비는 개발사업이 추진되면서 치솟을 대로 치솟은 주변의 집값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다. 개발사업의 눈부신 청사진의 이면에서 세입자들은 더욱 좁고 낡은 집이나 살던 곳과 멀리 떨어진 낯선 동네의 집이라는 흑백사진만 볼 수 있다.

누구를 위해 집은 지어지나

집 없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으니 집이 더 지어져야 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정부는 늘 집 없는 사람들의 꿈을 부풀리며 주택공급을 외친다. 집값이 오르면 집값을 내리기 위해 주택을 공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집값이 떨어질라치면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주택을 공급해야 한다고 한다. 사실상 역대 정권들은 여기에서 한치도 벗어난 적이 없지만 이명박 정부는 주택 공급을 위해 각종 규제를 완화하는 데에 더욱 거침이 없다. 투기수요로 인해 집이 적극적으로 공급되는 시기에 수요도 늘어나고 집값도 올라가는 부동산 시장에서 주택공급은 정부나 건설자본이 주장하듯 만병통치약이 아니라 만병의 근원이다. 이렇게 지어진 집들이 결국 집 있는 사람들에게로 돌아가고 가난한 것도 서러운 사람들은 2년마다 눈물을 쏟아내야 했던 것이다.
자, 집은 지어져야 하는데 주택공급정책은 답이 아니다? 무엇이 문제일까. 집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집이 지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정부는 집 없는 사람들을 들러리 세우면서 사실상 건설자본과 돈 있는 사람들에게만 유리하도록 규제를 완화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살만한 집에 살 권리가 있고 정부가 그 의무를 져야 한다는 인권의 원칙이 확립되어야 한다. 그것이 주거공공성의 첫걸음이다.
비슷한 경제적 수준의 국가들은 이미 공공임대주택을 20~40% 가량 보유하고 있다. 현재 5%에 못 미치는 공공임대주택의 비율은 획기적으로 늘어나야 한다. 새로 짓는 것만이 방법은 아니다. 기존의 주택을 매입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공공임대주택을 확보할 수 있다. 건설자본이 땅만 사놓고 분양을 시작했다가 팔리지 않아 미분양으로 남은 아파트들을 국민의 세금으로 사주기까지 하는 정부다. 들어가 살 사람도 없는 아파트 짓도록 내버려둬서 땅 버리고 돈 버리기 전에 들어가 살 사람들을 고려한 집을 짓도록 하는 것은 더욱 쉬운 일 아닌가.
민간주택시장에도 공공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은 있다. 우리가 원하는 ‘내집’은 발 뻗고 잘 수 있는 곳, 내발로 나가기 전에는 아무도 쫓아낼 수 없는 집이다. 세입자의 주거권을 보장하기 위해 임대차계약기간을 갱신할 때 유리한 조건을 부과하고 집주인이라고 하더라도 퇴거를 요청하기 어렵도록 만들면 된다. 임대료도 적정 수준으로 정부와 지자체가 관리하면 된다. 말로는 뭘 못하냐고 물을 일이 아니다. 많은 국가들에서 수십 년 전부터 시행해온 제도들이다.

나는 오늘도 ‘내집’을 꿈꾼다

정부가 의무를 회피하면서 민간주택시장만 엄청나게 키운 결과가 바로 지금의 주거현실이다. 극단적인 주거불평등과 상상 그 이상의 주거빈곤. 방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힘이 부족한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오늘도 ‘내집’을 꿈꾼다. 등기부등본에 내 이름이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 내가 부담할 수 있는 수준의 임대료와 99년 정도의 임대기간이 보장되는 집이면 된다. 엄마 말대로 집 한 칸 마련하고 나면 인권운동을 할 시간은 남아있지 않을 테고 차라리 인권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이 더욱 빨리 ‘내집’을 마련할 수 있는 길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평생 집에 치여 사는 것보다 차라리 사람에 치이며 사람답게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천주교인권위원회 소식지에 실었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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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07 09:16 2008/12/07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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