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게.

 

#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남자와 결혼한 베트남 여성이 8일 만에 흉기로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다. 나는 그 사건을 경향신문의 사설을 통해서 처음 접했다. 놀랐던 건, 경향의 논조가, 어떻게 정신병자를 결혼시킬 수 있느냐는 질타였다는 것. 다른 언론의 기사를 많이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다. 그리고 엊그제 단속추방 중단 촛불문화제에서도 비슷한 발언을 들었다. "어떻게 정신이상자와 결혼시킬 수 있습니까"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은 결혼을 하면 안될까. 그러면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는 건, 대중목욕탕에 가는 건, 지하철역처럼 사람들이 많은 공간에 가는 건, 또는 가족들이랑 같이 사는 건. ???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이 결혼을 하면 안된다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람들에게 허용되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누구도 그걸 허용하거나 허용하지 않을 권한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된다. 정신질환에 대한 뿌리깊은 편견과, 그로 인한 차별들이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일 뿐.

그러나 '정신이상자'라는 단어만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감수성'의 문제라고만 보기도 어렵고. 이 사건의 문제를 정신질환자와의 결혼이라고 진단하면서, 이미 수많은 결혼이주여성들이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문제는 숨겨져버린다. 결혼이주와 관련된 국적 또는 신분의 문제 때문에 많은 여성들은 구타와 폭언 등에 시달리고 있고, 가정폭력 비율도 비이주여성들이 경험하는 가정폭력 비율보다 높다고 한다. 그렇다면 결혼이주제도의 문제를 지적해야 하는 것 아닐까. 더 파고들려면 할 얘기들이 더욱 많아지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정신질환'의 문제인 것처럼 사건을 분석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이나 정신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더욱 견고해지는 것도 위험하다. 그렇게 누군가를 구분하고 배제하거나 혐오하는 것 때문에 또다른 고통을 겪는 것이 이주여성 아닌가? 그렇다면 더욱더.

 

#

민주노총 논평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가 많은가 보다. 진보불로그에서 말의 공격성 이라는 글을 읽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공감하다가, "'개드립'이 어때서?" 라는 글을 보면서 말들이 많았나 짐작하게 됐다.

단체의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나가는 글을 쓰는 건 확실히 쉬운 일이 아니다. 감정을 얼마나 드러내야 할지 또는 드러낼 수 있을지, 사용하는 단어나 글의 문체는 어때야 하는지, 고민되는 것들이 많다. 그런데, 이번 민주노총 논평에 아쉬운 건 사실 그런 문제에 앞서 내용이 별로 없다는 거다. 민주노총 논평을 읽고 알 수 있는 건, 민주노총이 굉장히 분노했다는 정도 이상은 아니다. 차명진의 황제 운운하는 체험수기에 대해서 민주노총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분노하거나 조소하고 있는데, 거기에다가 분노 한 마디를 보태는 게 민주노총의 논평에 기대되는 것이 아니라면, 많이 아쉬운 논평인 건 분명하다. 이런 분노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불만의 정서에 어떤 전망을 보여줄 수 있는 논평이 나오길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

사실, 난 차명진의 체험수기를 보며 많이 화나고 어처구니없기도 했지만, 내가 어떤 지점에서 분노하는 건지 잘 못 찾았다. 누군가 한 달에 오십 만 원으로도 충분히 잘 살 수 있어요, 라고 말할 때 그 말은 맥락에 따라서 매우 다르게 들릴 수 있다. 소비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자급자족의 구조를 만들면서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 화가 나지는 않을 게다. 또는 자급자족을 못하더라도 자신이 한 달에 오십 만 원으로도 잘 살 수 있도록 지원하는 어떤 네트워크(현물이나 현금이 아니더라도 삶을 지지해주는)가 있고 그것에 기대어 있는 자신의 조건을 성찰하는 사람이라면 화나지 않을 것이다. 차명진이 하루는 살았지만 한 달에 오십 만 원으로 충분히 잘 살 수 있다고 말하지 못할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수기가 화나는 것은 단지 그때문일까.

그가 한나라당 국회의원이기 때문인지, 그가 잘먹고 잘사는 사람이기 때문인지, 그의 전형적인 관찰자적 시선 때문인지, 빈곤에 대한 이해라고는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기 때문인지, 또는 무엇인지. 만약 그가 "어떻게 이런 돈을 가지고 사람이 살 수 있단 말인가!"라고 했다면(그럴 사람은 아닌 듯하지만) 그건 화나는 일이 아니었을까? 나는 최저생계비 체험 희망업 캠페인이, 그렇지 않아도 조금 불편하다. 정말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있구나, 하는 걸 확인하기 위해 누군가의 삶을 '체험'시키는 것은 과연 적절한 전략일까. 우리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방식은 '체험'밖에 없는 것인지, 아니 누군가의 삶이 '체험'될 수 있는 것인지.

누군가 한 달을 최저생계비로 '체험'하고 나서, 살만하다고 얘기하거나 도저히 못 살겠다고 얘기하거나, 과연 큰 차이가 있을까. 차명진의 발언에 분노한 수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어떤 지점에서 불이 붙었을까. 나는 또 어떨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08/01 15:12 2010/08/01 15:12
태그 :
트랙백 주소 : http://blog.jinbo.net/aumilieu/trackback/713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비밀방문자 2010/08/02 10:3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2. 미류 2010/08/02 13:13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아마 그런 심리도 작동하겠지요? 그리고 '적어도 정상적이라면' 이런 일은 없을 거라는 안도를 하게 되고, 하지만 너무나 정상적이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제도적으로 결혼을 금지 또는 제한할 것인가의 문제와는 또 다른 문제가 있는 듯해요. 또 고민 나눠주세요. ^^

  3. 나루 2010/08/07 13:3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몇 년 전에, 명동성당에서 장기수 체험? 감옥살이 체험? 그런 거 했던 기억이 나는데, 그 때도 좀 불편했음. 사방이 뚫린 곳에서 몇 몇 명망가들이 철창안에 있고 기자들이 사진을 여러 매체에 올렸는데, 이 사진 이 체험현장을 옥살이하는 분들이 볼 때 어떨까, 하는 느낌. 하지만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했던.

  4. 미류 2010/08/07 13:4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그랬구나. 내가 활동하기 전인 것 같은데, 그거 왠지 사랑방에서도 같이 한 것이었을 듯하다. 그게 '명망가'들을 앉혀놓은 거라는 점도 불편했을 것 같고, 어떤 인권현실이 '체험'될 수 있는 '이미지'로 고정(? 전락?)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을 것 같아. 근데 나도 때로는, 감방이 구체적인 '이미지'를 머리속에 떠올려내고서야 그 안에서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일지를 겨우 짐작하게 되기도 하고. 이런 게 참 어려워. 그게 삶의 체험일 수는 없는 건데... 같이 얘기하니까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