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김> 성매매, 본질을 보자

* 이 글은 미류님의 [성매매를 둘러싼 권력관계를 삶의 현장에서 드러내기]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후배가 소식지에 보낸 글. 남성이면서 이런 고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지역의 성매매여성들을 직접 만나고 있기 때문일 것임. 색깔입힌 부분-생각해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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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 나오는 기사들이 연일 시끄러운 것은 어제오늘 일만은 아니지만 이 세상에는 마치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침묵으로 일관해 오다 최근에서야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이슈가 있다. 9월 23일 이후로 시행된 성매매특별법이후 세상이 조금 더 시끄러워진 셈이다. 그러나 그 기사들의 일면을 잘 살펴보면 성매매가 왜 근절되어야 하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지기 보다 과연 근절될 것인가, 아니면 더 나가서 결코 근절될 수 없다는 듯 딴지걸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라 여전히 권력의 역학관계를 꿰뚫어 보고 있는 언론의 현실을 새삼 느끼게 된다. 짜증이 날 뿐이다.



1961년 윤락행위방지법이 만들어진 이후부터 성매매는 줄곧 불법 즉 범죄였다. 그러나 이것은 피해자 없는 범죄였다. 도덕적 타락을 뜻하는 ‘윤락’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성매매피해여성은 피의자로 취급되어 처벌되었고, 성구매자는 현장에서 훈방되기 일쑤였으며, 업주대신 대리인이 처벌받게 하는 손쉬운 편법이 가능했고 벌금이나 영업정지의 피해를 성매매피해여성들에게 빚으로 부과하는 등 성매매의 모든 죄는 여성들에게만 씌워졌다. 성매매가 범죄라는 사회적 합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은 굳이 더러운 유착관계가 아니더라도 단속기관이 단속할 이유조차 알지 못하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명백히 불법이지만 처벌되지 않는, 피해여성만 처벌받는, 거대한 시스템이지만 침묵에 가려진 현실.
이러다가 성매매특별법, 정확하게는 ‘성매매알선행의등의처벌에관한법률’과 ‘성매매방및피해자보호등에관한법률’이 시행되면서 시끄러워진 것이다. 변화는 크게 3가지이다. 첫째 ‘성을 파는 여성’을 피해자로 규정, 처벌대상인 피의자에서 보호대상인 피해자로 바뀌게 된 것이다. 둘째 성매매피해여성을 성매매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만들었던 선불금 등의 업주에게 진 빚은 그 계약 형식이나 명목에 관계없이 무효가 된다. 셋째, 성매매 알선행위에 대한 처벌 강화이다.
무엇보다도 큰 의의는 성매매 시스템속의 여성을 피해자로 규정했다는 점과 국가가 성매매 근절의지를 처음으로 보여준 계기라는 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성매매가 근절되어선 안 된다는 사람, 또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만큼이나 근절되어야 한다는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이 법만으로 성매매가 근절될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폭발적으로 늘어난 성매매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교묘하게 때로는 노골적으로 성매매의 불가피함만이 주장되어지고 있을 때,  셀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돈으로 성을 사고 파는 폭력 시스템 속의 유일한 피해자였던 여성들의 비참한 현실이 폭로되지 못하고, 성매매가 ‘남자라면 누구나 갈 수 있고 남자의 의리를 확인하는 놀이문화고, 회사일을 성사시키기 위한 접대’일뿐이라는 지극히 사적인 성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리도록 만든 남성중심 권력을 폭로하지 못한다면 기껏 고양시킨 논의는 물거품이 될 뿐일 것이다. 오히려 합법화하자고 난리 치는 퇴보의 길을 걸을 것이 뻔해 보인다.

그럼 우리 사회가 보는 성매매에 대한 시각 중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일까.
우선 거대한 성매매 시스템속에 성매매한 여성만 본다는 점이다. 소위 ‘함부로 몸을 놀리는 여성들에게 일침을 가하고 싶었다’는 연쇄살인범의 끔찍한 소리에 박수치는 사람뿐 아니라 이에 덩달아 언론에서 피해자 유발론을 강조하는 현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성매매 구조를 볼 때 성산업을 성행시키는 성구매자와 알선업자는 어디간 듯 없고, 오로지 ‘몸파는’ 여성만 있는 구조로 보고 있다. 또 하나는 성욕에 관한 남녀의 편견이다. 이는 과학이라는- 역시 권력관계와 무관하지 않으나 권력과 전혀 무관 해보이는- 장치의 도움으로 더 힘을 얻고 있는데, 즉 매순간 주체할 수 없는 남성의 성욕을 배출하기 위해 여자의 몸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임신해서 섹스가 힘든 부인이 남편의 성매매를 권한 것이 미담이 될 정도로 가족구성원들에게조차 허용되는 이 성매매가 여성들에게만 사회에서 매장되어야 하는 Stigma가 되어야 했는가? 성매매가 불법화되면 이 시대 남성의 성욕을 분출할 곳이 없고 성폭력이 난무할 것이라 한다. 성폭력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이유로도 여성의 몸이 대상화되어서는 안 되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것이다. 물건 사듯이 여성의 몸을 마음대로 사고 파는 사회에서 여성을 온전히 대등한 인간으로 보는 시각이 제대로 설리 만무하다. 오히려 성폭력이 광범위하게 확대될 것이 뻔하고 합법화시킨 나라에서 이미 일어나는 일이다.
끝으로 성매매 여성의 자발성에 관한 문제다. 언론이나 많은 성매매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본질을 호도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랜 시간동안 성매매를 묵인해오면서 성매매와 함께 자행되어온 온갖 성적 학대와 인신매매가 은폐되어 왔음에도 아직까지 문제  삼는 것이 ‘여성이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하느냐, 강제로 하느냐’이다. ‘힘들어도 건전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 노래방 도우미를 할 수 있느냐’에만 관심 있을  뿐 누가 왜 어떻게 노래방 도우미를 고용하고 누가 구매를 하는지는 관심이 없다. 가출한 십대여성에게 집에 돌아가라는 말말고 사회에서 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사회가 철저하게 성매매에 침묵하는 동안 성산업은 여성들을 흡수할 온갖 기제를 만들도 있는데. 명백히 국가, 사회, 국민이 지금까지의 성매매를 흥행시킨 책임을 물을 일이지 한 여성에게 강제냐 자발성이냐를 구분할 일이겠나?

사람은 자신의 비난에 약한 것 같다. 자신의 옳고 그름을 떠나 자신에 온 비난의 화살에 반성할 것을 찾기 보다 발끈하고 불쾌해지기 쉽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타락한 여성, ‘윤락녀’라는 수십년의 비난에 침묵하다가 이번의 성매매의 논란 속에 또다시 사회의 비난을 맞게 되는 여성들은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비록 업주의 폭력에 -분명 폭력이고 협박이다- 시위를 한다고 하지만 스스로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성구매자들은 9월 23일 이후 이 잠시동안의 비난에도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어쩔 수 없는 필요악이니, 성욕이 어떠니, 타락한 성매매 여성이 문제니 하면 화살을 돌리려 하고 있다.
이번 논의로 성매매를 보는 사람들의 장벽은 높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지금까지 성매매에 대한 자신의 생각에 그리고 자신의 과거행적 대해 자기비판을 해보자. 사회적 약자이고 피해자로 성매매피해여성을 보지 않고선, 그러지 못했던 남성으로 살아온 스스로를 반성하지 않고선 결코 성매매 근절을 주장할 수 없다. 그렇담 성매매 안하기 선언같은 것을 시작으로 이리저리 높이 솟은 장벽을 깨기 위해 다니자. 한 달간의 특별단속기간이 끝난 후에 이 사회가 다시 침묵으로 빠져들지 못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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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16 09:19 2004/10/16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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