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안도에서 만난 할머니의 노래

 

(081022)

 

물대포처럼 쏟아지던 비가 소안도에 닿을 즈음엔 가늘어졌다. 다니면서 보니 걸어다니면 참 좋을 길들, 비 때문에 차로 다니는 것이 조금 아쉬웠다. 청산도처럼 걸으면서 마을 사이사이를 지나다닐 수도 있고 하루면 넉넉히 섬 한 바퀴를 돌겠다 싶기도 하더라. 제주도에 많은 동백나무와 후박나무(조팝나무)가 상록수림을 이루고 있으니 괜히 왔던 곳 같은 느낌도 들었다.

 

배를 타고 나가기 전 들른 곳은 항일운동기념관. 그저 그런 '관'이겠거니 했는데 여기서 할머니의 노래를 만났다. 전시물은 그리 많지 않고 어쩌면 정말 그저 그런 느낌만 받고 나왔을 수도 있다. 전시실을 죽 둘러보고 나오는데 노래가 하나 나온다. 이별가, 라고 트로트 분위기의 노래다. 소안도 주민들이 일제 시대에 지켜내려고 했던 학교의 선생님이 탄압 때문에 섬을 떠나야 할 때 불렀던 노래라고 한다. 그리고 그 옆 자리.

 

꺼진 모니터 위로 '노래듣기'라고 팻말이 붙어있다. 독립운동할 때 불렀던 노래라고 하니 괜한 호기심이 들어 닫혀있는 문을 열고 컴퓨터를 켰다. 애국가, 행진곡, 학도가, 옥중가, 독립가 같은 노래들이 마우스 버튼을 기다리고 있었다. 순서대로 들어봤다. 여성들을 위해 만들었을 법한 노래(제목은 기억나지 않으나)도 있었는데 가사만 나와있다. 독립가에 마우스를 올리고 버튼을 눌렀다. 클레멘타인의 멜로디에 가사를 바꾼 노래였다. 지공무사 하느님이 세상을 만들 때 남녀노소 귀천 없이 모두에게 자유를 주셨으나... 노래를 듣다가 갑자기 눈물이 울컥했다. 허겁지겁 헤드폰을 다음 사람에게 넘기고 눈물을 다시 삼켰다. 가사 때문인지 뭔지는 모르겠으나, 다시 듣지 못하고 나왔다. 하지만 거기 있었던 노래들을 모두 mp3 파일로 얻어서 나왔다.

 

가끔 들어야겠다. 노래가 좋아서 그런 건 아냐. 그냥 그 할머니의 노래.

 

소안도의 항일운동기념관은 1989년 노인회에서 추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20년대 말 사회주의 운동의 한 자락에 소안도 주민들은, 한 명이 감옥에 갇히면 모두가 이불을 덮지 않고 잤다고 한다. 주민들이 스스로 세워올린 학교를 일본이 폐교시키려고 하자 거세게 항의운동을 펼쳤고 토지반환소송을 해서 일제로 넘어간 땅을 13년 만에 다시 찾았다고 한다. 지역조직으로 '살자회'를 만들어 사상적 기반을 단단히 하면서도 주민들의 경제적 조건을 개선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 강령은 운동의 분열에 대한 단호한 입장도 밝히고 있다.

 

"동지들이 모두 죽기 전에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이 일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독립운동'을 했으나 해방 이후 오히려 숨죽여 지내야 했던 사람들이 말을 꺼내기 시작한 것이다. 집에 몰래 숨겨두고 있던 사진들, 문서들이 하나둘씩 모아졌고 역사를 연구하는 교수를 한 달에 두 번씩이나 찾아가 간청하며 역사를 정리했다고 한다. 당시 불렀던 노래들을 기억해내 녹음하고 채보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기념관이었다. 기념관을 관리하는 분(소안도에서 나고 자란 여성분이었다)의 이야기로 전해들은 것.

 

기념관의 전시물들에는 사회주의나 마르크스주의라는 단어들이 유난히 '날것으로' 드러나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강령도 '살벌'했다. 자료집을 받아와 밤에 읽다보니 20년대를 살았던 주민들은 자신들의 운동이 "그냥 독립운동과는 다른" 무엇이었다고 기억했다고 한다.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사를 제대로 공부해본 적은 없지만, 어쩌면 한번쯤은 지나쳤을 지도 모르는 사건일 수도 있다. 소안도, 라는 섬의 이름을 기억하기란 더욱 어려웠을 테고 면면히 이어졌던 운동의 흐름에서 굳이 섬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한 것도 아닐 테다.

 

하지만 지역의 역사를 주민들이 스스로 기억해내고 기록으로 남기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끝내 가슴을 울린다. '애국지사'라는 말로 가둘 수 없는 살아있는 역사인 것 아닐까. 학교도 못 다녀봤지만 누구보다도 성실했고 총명했다는 한 할머니가, 이제 백 살이 가까워진다는 한 할머니가, 20년 전쯤 밭은 숨으로 부른 노래가 기억에 남는다.

 

(노래를 올리려고 했는데 용량이 커서 업로드가 안된단다... 아쉽지만...)

 

* 081028 용량 줄였는데 재생이 안된다. 파일에는 문제가 없는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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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7 15:33 2008/10/27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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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권신장가

    2008/12/19 16:48

    미류님의 [소안도에서 만난 할머니의 노래] 에 관련된 글. 소안도 항일운동기념관에서 만난 노래 또 하나. 이건 mp3 파일이 없고 가사만 구해졌다. 여권신장가... 1920년대에 이런 노래가 불려졌다는 것도, 여전히 이 노래가 역사 속에 묻힐 만하지 않다는 것도, 놀랍고 씁쓸하고... 여권신장가 1. 천하의 어머니는 여자로구나 여자의 책임은 중하고 크다 책임은 중하나 권세없으니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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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chua 2008/10/27 16:31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아숩다 말하기도 뭐하게 아숩네.

  2. Septimus 2008/10/27 22:0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와~~ 소안도에 다녀오셨군요. 저도 작년 이 때 즈음에 레포트 쓰려고 갔었는데, 박물관 문이 닫혀 있어서 그냥 돌아왔지요.. 부럽네요.

  3. 나동 2008/10/28 01:3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잘 지내지?? 얼마 전 시사인에서 봤음. 20대 주거권. 십분 공감하면서...이제서야 한 번 들러보네.

  4. 미류 2008/10/28 14:25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슈아, 나도 아쉬우... ㅜ,ㅜ

    Septimus,완도 근처의 섬들을 다니다가 들르게 됐어요. 문이 닫혔으면 그냥 그런 데였겠거니 하고 말았을 텐데 마침 관리하시는 분께 이런저런 얘기도 듣고 참 좋은 시간이었어요. 관심있으시면 자료집 등 빌려드릴 수 있어요. ^^

    나동, 잘 지내. 나 10월 안식월 ㅋㅋ. 그대들은 알콩달콩 잘 살고 있나? 어버한테 한번 연락해야지 하면서 못하고 있넹. 잘 살고 있기를~ ^^

  5. 미류 2008/10/28 15:13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엥... 노래 용량을 어찌저찌 줄였는데, 업로드도 되는데, 재생이 안되는 이유를 혹시 아는 분~ ㅜ,ㅜ

  6. schua 2008/10/28 15:57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엥 그러네...누구 알려주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