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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울산대학교 교지 「문수」에 실린 글입니다.
   지난 8월 초에 글을 보냈는데, 얼마 전 책이 나왔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제목 : 이주노동자, 우리와 다를 바 없는
글쓴이 : 서민식 | 대전이주노동자연대 대표


   이웃?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이주노동자'라고 할 때 먼저 어떤 생각이 떠오르십니까?
   저와 만나는 사람들은 제가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겠지만, "이웃"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비록 국적은 다르지만 살던 곳을 떠나 고생하고 있으니 돌봐야 할 대상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당연히 "참으로 좋은 일을 하신다"는 말이 뒤따릅니다.
   여러분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이주노동자들이 이 나라에서 지내는 상황을 속속들이 알지 못하더라도 '집 떠나 고생'일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고, 각종 언론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내용들을 보더라도 여러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은 맞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주노동자들의 고단한 삶
   실제로 이주노동자들의 삶은 고단합니다.
   가장 먼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저임금입니다. 이주노동자들과 상담을 해 보면 대부분 법정 최저임금에서 약간 웃도는 임금을 받고 있습니다. 돈을 그렇게 적게 받으면서도 노동 강도는 센 일을 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이네들이 일상적으로 지내는 환경이 대단히 열악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공장에서 일만 하는 것이 아니고 집에 와서 휴식을 취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네들의 숙소는 쉬는 곳이 아니고 그냥 잠만 자는 곳이 대부분입니다. 재래식 화장실에, 방 천장엔 백열전구 하나 달랑 달려있고, 기름때에 절은 가스레인지에 프라이팬 하나로 모든 반찬을 만들어 먹어야 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개인적으로 얻어서 지내는 방이 이런 환경이라면 더 괜찮은 방을 얻으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회사에서 제공하는 '기숙사'가 이런 환경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끼리 이야기할 때, "거저 줘도 지내지 않겠다"고 하는 방을 기숙사라고 제공하곤, 밖에서 다른 방을 얻으면 월세 이십만 원을 줘야 하네, 삼십만 원을 줘야 하네, 하면서 월세를 받는 회사들도 있습니다.
   세 번째, 몸이 아플 때 제대로 치료받질 못합니다. 이 나라 사업주들은 이주노동자들을 일하는 기계로 보는지 몸이 아프다고 해도 제때 병원에 보내주질 않습니다. 이주노동자들 대부분이 육체노동을 하면서 지내는데, 몸 어디가 아프다고 해도 "일 하다보면 다 그렇다", "꾀병 부리지 마라"는 식으로 무시하기 일쑤입니다. 이네들이 참다못해 우리 단체까지 연락을 하고(회사에서 병원에 데려다 주지 않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병원에 갈 시간도 주지 않으니), 자원활동가들이 회사에 항의하고 이주노동자를 데리고 병원에 가보면 의사들은"이렇게 되도록 왜 병원에 오지 않았냐?"고 합니다.
   네 번째, 이주노동자들은 사업장에서 일상적인 폭언과 폭행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 새
끼, 저 새끼 하는 욕은 물론이려니와 뒤통수 한 대 치는 것은 일상입니다. 이 년쯤 전에 우리 단체에서 이주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회사에서 관리자나 한국노동자들에게 맞은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구십팔 퍼센트 넘는 이주노동자들이 "맞은 적이 있다"고 답을 했습니다. 빗자루로 맞고 발길질을 당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네들이 한국에 와 일을 시작할 때 얼마나 욕을 듣는지 "새끼"가 사람을 부르는 호칭으로 알고 있는 이주노동자도 있었습니다.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이렇듯 이주노동자들이 이 나라에서 말도 안 되는 대우를 받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이네들은 그 나라에서 꽤 고급스러운 처지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많이 다르진 않지만 박정희 정권 때 아메리카로 유학을 가거나 이민 갔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길거리에서 좌판 벌려놓고 나물 팔던 집에서 이민 가지 않습니다. 고등학교 다니면서 꼴찌를 다투던 동무가 유학가지 않습니다. 그래도 도시락에 달걀 반찬이라도 싸오던 집(제가 국민학교 다닐 때 반 동무들 육십 명 중에 도시락을 싸 온 동무는 다섯 명도 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달걀이라니), 이른바 스카이에 들어갔던 동무들이 지금 아메리카에 있습니다. 아메리카에선 세탁소를 하는 사람들도 다 서울대학교 나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잖습니까?
   이주노동자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 나라에서 최고로 뽑혔고, 본인이 돈을 벌어 고국에 있는 가족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거나, 더 많은 일을 배워 조국에 봉사하고자 온 사람들입니다. 이네들이 원래 고국에서 괜찮은 환경에서 지냈기 때문에, 똑똑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 나은 대우를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이네들의 '수준'이, 우리가 욕하고 때리고 무시할 만하지 않다는 겁니다.
   하긴 누군들 욕먹고 맞을 만합니까? 집이 가난하면 욕먹어도 되고 공부를 못하면 맞아도 됩니까?

   이주노동자들이 이 나라에서 받는 처우가 안 됐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관련된 많은 단체들이 이주노동자 사업을 하면서 "돕는 일"에 집중합니다. 이른바 '복지'와 관련된 사업들인데, 이를테면 특정한 날을 잡아 에버랜드 같은 놀이동산에 다녀온다든지 바닷가에 갔다 온다든지 합니다. 무료진료소를 만들어 이주노동자들이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각종 프로그램을 운영해 타국에서 지내는 외로움을 달래주기도 합니다. 우리 단체도 이런 사업들을 진행합니다.

   사슴과 돼지
   그러나 저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무엇이 있다고 봅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할 것 없이 구조적으로 약자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했던 이십 년쯤 전에 이야기할 땐 그 약자들이 여성, 어린이, 장애자였습니다. 이젠 그 세 부류에 이주노동자를 더해 이야기하곤 합니다.
   이들이 왜 약자인지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다만 이 점은 분명하게 짚어야 하겠습니다. 흔히 평등을 이야기하면서 동일한 분량의 짐을 지우는 것, 동일한 분량의 혜택을 주는 것을 평등이라 하는데, 기계적인 평등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어리석고 폭력적인 것이 있을까 싶습니다. 상식적으로 초등학교 일학년인 어린이와 이십대 청년이 같은 시간에 같은 분량의 벽돌을 나를 수 없으며,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같은 빠르기로 걷거나 뛸 수 없습니다. 어린이에겐 더 많은 시간과 더 적은 벽돌을 줘야 하고 장애인에겐 더 많은 시간을 주던지 전동휠체어 등 별도의 장비 - 곧 혜택 - 를 줘야 그나마 비등한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겐 다른 조건을 부여하는 것, 이게 평등의 첫걸음입니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 중 이주노동자와 우리가 서로 평등할 수 없는, 어떤 노래에 나오는 가사처럼 "마치 사슴과 돼지들"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 나라 근로기준법 제5조엔 "사용자는 근로자에 대하여 남녀의 차별적 대우를 하지 못하며 국적, 신앙 또는 사회적 신분을 이유로 근로조건에 대한 차별적 처우를 하지 못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비록 국적은 다르지만 임금이나 노동 조건 등에서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겁니다.
   이 나라 법이 이러하고, 국제노동기구(ILO)가 고용 및 직업 차별에 대한 협약(제111호 협약)을 정해 국적에 따른 임금차별을 금지하고 있는 데도 사업주들은 자신들의 이익만 생각하면서 이주노동자들을 차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6월 22일, 중소기업경영자총연합회에선 "외국인근로자들을 동일하게 대우하는 것이 부당하다"며 이주노동자들에게 최저임금을 적용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정부에 요구하기도 했답니다.
   최저임금을 주며 이른바 쓰리디 업종의 일에 이주노동자들을 부려먹는 것도 모자라 그 돈도 주지 못하겠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동일 노동, 동일 임금" 그 당연한 권리
   "이주노동자들도 이 나라 노동자들과, 보다 넓게 이주민들도 이 나라 사람들과 동일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이게 우리 단체에서 주장하는 내용입니다.
   이주노동자를 이야기할 때, 우리의 주장은 "동일 노동, 동일 임금"으로 압축됩니다. 일상적으로 지내는 환경이야 이 나라 사람들도 천차만별인데 똑같은 환경에서 지내도록 하자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다만, 가장 중요하게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같은 임금을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주노동자에게만 적용되는 말은 아닙니다. 또, 이주노동자 문제가 이 나라의 모순점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지점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극명한 지점은 아니더라도 이 나라 모순의 한 축인 것은 사실입니다. 여성 문제, 장애인 문제, 어린이 문제 등과 맞물려 그냥 놔두면, 별도의 제도적 장치를 갖추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차별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이 글을 읽은 여러분이, 앞으로 어떤 자리에서든 이주노동자들을 만날 때 이들이 우리보다 못한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한 그런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주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든다고 할 때, 여러분이 대학을 졸업한 후 취직한 회사의 노동조합에서 이주노동자들을 조합원으로 받아들인다고 할 때, 오히려 그게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길 바랍니다.
   지금은 사업주들이 "최저임금도 못 주겠다"고 떠들어대지만 최저임금 뿐 아니라 이 나라 노동자들과 같은 수준의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토끼
   토끼를 키우긴 고사하고 가까운 사람 중에 토끼를 키우는 사람도 없으니 토끼의 속성이나 능력에 대해 모를 일이지만, 예전엔 잠수함에 토끼를 태우고 다녔다고 합니다. 예전 잠수함은 지금같이 괜찮은 장비를 갖추고 물 속을 헤집고 다니지 않았을 터, 여러 위험이 닥칠 수 있었겠지만 가장 중요하게 함 내에 있는 사람들이 숨 쉴 수 있는 공기가 충분하게 있어야 했습니다. 잠수함 타고 바다 속으로 다니는 것이 목욕탕에서 잠깐 물 속에 머리 담그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느끼기에 공기가 부족하다 싶으면 이미 늦은 것, 숨 쉬기 힘들기 전에 빨리 알아차리고 부상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문제는 그걸 어떻게 알아내느냐는 것인데, 왜 그런지 모르겠고, 굳이 토끼여야만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토끼는 사람보다 빨리 알아차린다고 하니 예전엔 잠수함에 토끼를 태우고 다녔답니다.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린 C.V.게오르규는 다른 대상을 두고 말했지만, 저는 '잠수함의 토끼'를 다소 넓게 특정한 사회 - 또는 조직 - 에서 그 사회의 부패,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 등을 바로잡는 계기로 이해합니다.

   모든 차별과 억압에 예민해지자
   작업 중 손가락이 잘려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된 이주노동자에게 치료비 줄 테니 빨리 귀국하라고 하는 사업주가 있습니다. 그 이주노동자가 미등록일 경우, 출입국관리소에 신고한다고 협박하며 내쫓기도 합니다. 물론 이 나라 노동자들도 그런 일을 겪습니다.
   일 년 남짓 일을 시키곤 퇴직금을 주지 않으려 그 다음날 쫓아내기도 합니다. "원래 너네는 퇴직금 같은 거 없다"고 큰소리치기도 합니다. 물론 이 나라 노동자들도 그런 일을 겪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저는, 이주노동자들을, 대한민국이라는 잠수함이 어떤 상태인지, 사람이 숨 쉬고 지낼 수 있는 곳인지 측정하는 토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이 이 나라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면서 "이주노동자들이니까... 당연한 거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대우와 고통이 곧 자신들에게까지 올 것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이주노동자들과 비교하여 한 줌도 안 되는 혜택을 누리면서 그 혜택이 천년만년 갈 것이라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노동자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 그래서 모두가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 깊이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중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면, 저와 자원활동가들이 하는 일들이 "참으로 좋은 일"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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