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모성의 재구성 -정은

모성의 재구성

 

 

흔히 자아의식이 정립되지 않은 어린 여자 아이, 혹은 심지어 성인 여성들조차 자신의 꿈을 ‘현모양처(賢母良妻)’라 답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현모, 지혜로운 혹은 어진 어머니, 그리고 양처, 좋은 아내를 일컫는 이 말은 이에 대비되는 남성에 해당하는 단어만 떠올려 보아도 얼마나 남성 억압적 기재의 산물인지, 소위 남성들만의 남성적 언어임을 인식할 수 있다. 양처현모가 아닌, 착한 아내보다 앞서서 중시되는‘현모’, 지혜로운 어머니를 기대하고 강조할수록 그녀들의 뒤편에는 또한 수많은 ‘우모(憂母), 어리석은 어머니’가 있다.

 

 

모성(母性). 어머니됨이 본성이라는 이 두 글자는 사회가 요구하는 현모와 맞닿아 있다. 모성은 흔히 여성이라면 태어날 때부터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는 본성이자 자연적인 현상으로서 아이를 출산함과 동시에 어머니 노릇은 더욱 극대화되는 양상으로 드러난다. 

  

 

모성은 절대적인 본성이 아니다. 부단히 변화될 수 있는 상대적이고 역동적이며, 누구나 선택 가능한 개별적인 기재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헌신적인 ‘모성’은 또다시 그녀들의 딸들에게 되물림 되고, 더욱 더 잔인한 형태로 어머니 노릇에 대한 사회적 기대는 이상화되어 가고 있다. 따라서 어머니 노릇을 경험한 어머니, 그리고 그 ‘모성’을 되물림 받고 싶지 않은, ‘모성’의 헌신을 받고 자라난 우리부터 스스로 ‘모성’에 대한 인식, 의식을 변화시켜야 한다.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는 신과 그 신의 의지에 따라 종속되는, 모성을 위대하게 신성화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대상물로서의 관계가 아니라, 인격 대 인격,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관계로 재정립해야 한다. 자녀는 그 누구의 종속물도 아니고, 어머니가 전적으로 책임져야 할 대상물도 아니다. 그저, 대등한 인격체이자 사람일 뿐이다. 어머니는 자녀를 일류대학에 보내지 않는다하여, 자녀를 사회적으로 성공시키지 못한다하여 ‘모성’을 져버린 나쁜 엄마가 아니다. 어머니 되기를 거부했다 하여, 그리고 사회가 정상가족으로 치부하는 부, 모, 자녀의 가족(사회가 규정한 정상가족이지 결코 이것이 정상가족은 아니라 할 것이다. 절대적인 정상가족이란 없으며, 형태를 불문하고 어떤 가족이든지 존중받아야 한다)을 꾸리지 않았다 하여 그녀들을 비난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주어져 있지 않다.

 

 

또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여성 스스로 무의식적으로 모성을 강조한다는 점에 있다. 일과 양육 속에서 슈퍼우먼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는 여성들은 ‘모성’의 역할을 친정어머니, 혹은 시어머니의 몫으로 전가하고 있다. ‘모성’을 요구하고 요구받는 누군가가 있는 한, 이 지독한 되물림은 결코 종식되지 않음을 여성 스스로 따끔하게 인지해야 할 것이다. 특히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가부장제와 맞닿아 있는 ‘모성’이데올로기는 여성 억압적 기재의 악순환 고리의 핵을 이룬다 하여 이를 배제하는 것만이 해결책이 아니다. 모성 자체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약자에 대한 배려, 유연함, 존중, 보살핌’의 기재로서 분야를 막론하고 사회의 모든 기저에서 재발현 되어야 하며, 이 기재는 남성, 여성 주체를 막론하고 누구나 접근 가능함을 주지시켜야 할 것이다.

 

 

헌법이 보장하는 모성을 보호할 권리는 더 이상 여성의 활동을 제한하고 여성을 가정 내에 고립시키는 요인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모성이 가지는 역량을 남성, 여성의 주체의 구분 없이 누구나 가질 수 있고, 만끽할 수 있는 권리로서 의미를 재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남성 위주로 움직여진 지금까지의 사회문화적 구조에 비추어, 여성의 인력 활용의 중요성과 보육의 문제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끊임없는 인식의 전환, 그리고 모성보호권이란 가만히 있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주장해야 할 권리라는 인식을 누구보다 여성 스스로 인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과 양육의 자유로운 선택과 양립을 할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 말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