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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차별해? 그것밖에 안되는 인간이라니ㅉㅉ - 돌진| 반/차별 프리즘
2010년 03월 02일 23:02


차별당한 경험은, 언제나 쓰리고 아프다. 그리고 그게 특히나 나의 무언가를 '탁' 건드리는 거라면, 가끔은 꼭지가 돈다. 뭔가 핑~ 하는 느낌과 함께 주위의 세상이 일그러지는 듯한 느낌과 더불어.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그런 '포인트'가 있는 것 같다.
뭐랄까..
누군가에겐
"아줌마! 집에나 가세요!"라는 말이 그럴 수도 있겠고,
"키도 작은게"라는 말이 그럴 수도 있겠고,
"어린 게 뭘 안다고"라는 말이 그럴 수도 있겠고,
"병신"이라는 말이 그럴 수도 있겠고,
"그런 학교 다니면 뭐 하냐"는 말이 그럴 수도 있겠고,
"여자가 어딜~/남자라는 게~"라는 말이 그럴 수도 있겠고,
"드러운 깜둥이 놈들"이라는 말이 그럴 수도 있겠고,
"넌 왜 그렇게 생겼냐!"는 말이 그럴 수도 있겠고...
아아..글로 옮기면서도 이런 걸 글로 옮겨도 되는 걸까 하는 검열에 시달리게 되고,(하지만 이런 말이 오가는 것이 현실인걸) 또한 슬며시 내 안에서 분노와 수치심이 동시에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것도 막을 수 없다.(모두 내 경험?;;)
듣는 순간 꼭지가 돌아버리는 말들은, 너무 많다. 그게 문제다.
억울하다. 누군가 이렇게 쉽게 다른 사람을 엿 먹일 수 있다니. 그것도 단 한 문장으로. 정말, 억울해.
그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멋지게 대응할 수 있는 걸까?
"니가 뭔데!"라고 화를 내거나,
"너도 마찬가지면서!"라고 빈정거리거나,
"너는! 꼴통마초주제에!!!"라고 반격하거나
하는 걸로는, 시원치 않다. 그걸로는 무언가 차별하는 것들을 바꿀 수도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니가 방금 한 말은 이러저러해서 너무 차별적인 말이야"라거나,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난 너의 차별적인 말에 상처받았어"라거나
하는 말은 나만 구질구질해지는 것 같다.
나의 말에 상대방이
"아, 그렇구나. 내가 차별했구나. 미안해"라고 할 리도 없을 테고.(대부분은..)
흐음, 정말 어쩌면 좋을까?
어쨌든 확실한 것은
"너의 그런 말은 차별이야! 날 차별하지마!"
라고 또박또박 말할 수 있는 용기는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차별하지 말라'며 차별을 저지하는 포지션으로서의 나를 넘어서서(물론 이것도 필요하지만) 내가 좀더 능동적인 주체가 되면 어떨까.
난 이런 고민과 더불어 차별이 일어나는 (사회적/인간적, 혹은 둘다) 맥락을 좀더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당신은 결국 그런 차별 안에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구나..ㅉㅉ'하는 생각을 하려고 노력하게 된 것 같다. 차별당해서 억울하다기 보다는 그의 한계가 좀 안타깝게 여겨지는..? 좀더 마음이 상한 상황에서는 "당신 그것밖에 안되는 사람이냐!"라는 식으로도 말이 나오겠지만.(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그게 안되면 뭐, 나도 어쩔 수 없고)
이게 정말 '대안'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 나는 이 방식이 좀더 좋은 것 같다.
그리고 그나마 내가 이런 반응을 고민할 수 있게 된 것은,
내가 '차별당하는 피해자'이기만 한 게 아니라,
'차별에 노출된 '소수자(minority, 권력관계에서의 약자)'이지만 '비주류'이기 때문에 주류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비주류로서 자유로운 사람들의 관계과 공동체 안에서 나는 더욱 주류로부터의 자유의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이전에 나 역시 짓누르고 있던 주류의 압박-성공해야 한다, 남자다워야 한다, 남들처럼 살아야 한다, 취직해야 한다, 결혼해야 한다, 아이를 낳아야 한다 등등등 끝도 없는!-에서 좀더 멀리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벗어난다고 무조건 자유로워지거나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서로 지지해주고 공감해주고 함께 그 상황을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 것, 그 관계망 속에서 함께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진짜 중요한 조건인 것 같다.
함께 비주류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면, 우리 사회도 더 즐거워지지 않을까.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무언가 스스로 인정하기 힘든 것을 인정해내는 것이 출발선이 될 수 있겠지. 그리고 옆에 있는 '동지'들과 함께, 주류 뚫고 거침없이 하이킥~! 하하하.
냄새| 반/차별 프리즘
2010년 01월 26일 10:31


내가 활동하는 인권운동사랑방 반차별 팀에서는 ‘별!똥!별’이라는 블로그를 만들어 우리 사회의 반차별 문제에 대한 고민들을 나누고 있다. 최근에 여기에 노숙인(홈리스) 차별 문제를 다룬 글을 올렸다.
(관련글 http://blog.jinbo.net/banchabyul/?pid=37 )
그런데 여기에 다음과 같은 댓글이 달렸다.
“전철에 딱 탔는데 한 쪽에 노숙인이 앉아 있었어요. 그런데 정말... 냄새를 참기 힘들어서 다른 칸으로 간 적 있어요(보통 참으려고 노력함). 가면서도 이래도 될까 하는 마음과 찜찜함이 많이 들었는데, 이런 것도 차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냥 참았어야 할까요?”
여기에 이런 저런 댓글이 달렸다. 주로 나온 이야기는 냄새에 대한 반응은 신체적인 것인가 심리적인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노숙인 관련 기사들에서도 ‘퀴퀴한’과 같이 냄새와 관련된 수식어가 많이 등장한다.
언제부턴가 냄새, 정확히 말하면 ‘좋지 않은 냄새’를 풍기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 것처럼 이야기되고 있다. 그러면서 냄새는 어느덧 사람을 구분 짓고 ‘냄새나’, ‘더러워’처럼 외국인, 홈리스, 저소득층에 대한 차별의 상징적 표현이 되고 있다.
나도 가끔 길거리에서, 지하철에서 익숙하지 않은 냄새를 맡게 되면 당황하게 된다. 그런데 그 냄새는 ‘나쁜’ 것이 아닌 ‘익숙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외국인들이 우리들의 몸 내음에 익숙하지 않아 싫어하듯이 말이다.
서양에서 목욕이 일반화된 것이 200년도 안 된 일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냄새, 위생에 대한 생각은 원초적인 것이라기보다 ‘만들어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냄새는 사람을 나누는 기준이 되었다. 익숙한 냄새를 풍기는 사람, 좋은 향기를 풍기는 사람, 익숙하지 않은 향기를 풍기는 사람. 화장품 회사들은 이러한 것을 조장하며 성분은 같으면서 농도만 다른 수십 종의 화장품 세트를 팔고 있다. 우리는 점점 ‘기본적인 사람들이 지닌 냄새’를 넘어 ‘좋은 냄새’를 풍길 것을 요구받고 있다. 그 냄새는, 옷, 화장품 등에 돈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된다. 결국 그러한 돈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차별의 시선을 받게 된다. 외국인들, 특히 제3세계(?)에서 이주한 사람들은 익숙하지 않은 체취를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차별적인 말을 듣기도 한다.
이상한 냄새와 색다른 냄새의 차이
언제부턴가 ‘저 사람에게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저 사람은 우리랑 다른 이상한 사람이야’와 동일시 되어버렸다. 하나의 도덕처럼 냄새에도 ‘올바름’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되고, 냄새는 차별과 배제의 기준으로 작동하여 ‘올바른 냄새’로 자신을 포장해야 하고 나아가 그렇지 않은 사람을 배제한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것이기에 그것이 차별 의식에서 나왔다고 여겨지기 보다는 몸이 알아서 반응하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반차별 팀 블로그에 누군가 쓴 댓글처럼 ‘이러한 생각이 신체적인 것인지, 심리적인 것인지’를 묻는다면 그것은 심리적인 것이 신체적인 것으로 내면화되어버린 것이라 말해야할 것이다. 우리가 ‘이상한 냄새’를 ‘색다른 냄새’로 달리 생각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주변을 보는 시선도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2009년 12월 22일 노숙인 추모제가 서울역에서 열렸다. 이날 경찰은 불법집회라며 추모행사에 참여한 10여명을 연행해 갔다.
선긋기의 작동 방식을 뛰어넘으려면
여행을 하다보면 농촌 지역에서는 특유의 거름 냄새가 난다. 어촌 지역에서는 특유의 비린내가 난다. 하지만 그 냄새는 그 환경이 만들어낸 냄새로, 도시인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냄새인 것이지 ‘올바르지 못한’ 냄새는 아니다. 홈리스 문제에 대해서도 그 냄새를 말하기 전에 그 환경을 먼저 말해야 한다. 지금도 3,000원짜리 다방이나 6,000~7,000원짜리 만화방에서 자는 홈리스들이 있다. 거리에서 지하보도에서 추위 속에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옷을 빨고 널거나 몸을 씻을 안정적인 공간을 가질 주거권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 놓여있다. 적절한 의료 행위를 받기 어려운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잃어가고 있다. 그것이 냄새에 묻어난다.
냄새가 이상한 것을 넘어 불결하다면 그 사람은 그 만큼 제대로 된 주거권과 건강권을 누리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이러한 반인권적인 환경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좋은 냄새’를 풍길 것을 강요하는 것은 ‘선 긋기’의 의미만 있을 뿐이다. ‘우리와는 다른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로 누군가를 쉽게 배제하고 선을 그어버린다면 상황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 홈리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올바르지 않은 냄새’를 구분해 낼 코가 아닐 것이다. 그것보다 우리 사회가 누군가에게 건강하고 위생적인 주거 환경이 제공되지 못하는 반인권적인 상황에 대해 이해하고 그것을 함께 고쳐 나가려는 가슴과 작은 움직임일 것이다.
어제 ‘거리에서 죽어간 노숙인 추모제’가 서울역에서 있었다. 올 한해도 많은 이들이 ‘익숙한 냄새’를 풍겨야할 의무를 강요당할 뿐 건강권을 유지할 권리도, 안정적인 주거 공간도 보장받지 못하고 거리에서 죽어갔다. 익숙하지 않은 냄새에 코를 막고 그냥 지나쳐버리는 그 순간 누구나 누려야 할 기본적인 주거권, 건강권을 보장받지 못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모성의 재구성 -정은 | 반/차별 프리즘
2009년 12월 27일 21:43


모성의 재구성
흔히 자아의식이 정립되지 않은 어린 여자 아이, 혹은 심지어 성인 여성들조차 자신의 꿈을 ‘현모양처(賢母良妻)’라 답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현모, 지혜로운 혹은 어진 어머니, 그리고 양처, 좋은 아내를 일컫는 이 말은 이에 대비되는 남성에 해당하는 단어만 떠올려 보아도 얼마나 남성 억압적 기재의 산물인지, 소위 남성들만의 남성적 언어임을 인식할 수 있다. 양처현모가 아닌, 착한 아내보다 앞서서 중시되는‘현모’, 지혜로운 어머니를 기대하고 강조할수록 그녀들의 뒤편에는 또한 수많은 ‘우모(憂母), 어리석은 어머니’가 있다.
모성(母性). 어머니됨이 본성이라는 이 두 글자는 사회가 요구하는 현모와 맞닿아 있다. 모성은 흔히 여성이라면 태어날 때부터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는 본성이자 자연적인 현상으로서 아이를 출산함과 동시에 어머니 노릇은 더욱 극대화되는 양상으로 드러난다.
모성은 절대적인 본성이 아니다. 부단히 변화될 수 있는 상대적이고 역동적이며, 누구나 선택 가능한 개별적인 기재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헌신적인 ‘모성’은 또다시 그녀들의 딸들에게 되물림 되고, 더욱 더 잔인한 형태로 어머니 노릇에 대한 사회적 기대는 이상화되어 가고 있다. 따라서 어머니 노릇을 경험한 어머니, 그리고 그 ‘모성’을 되물림 받고 싶지 않은, ‘모성’의 헌신을 받고 자라난 우리부터 스스로 ‘모성’에 대한 인식, 의식을 변화시켜야 한다.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는 신과 그 신의 의지에 따라 종속되는, 모성을 위대하게 신성화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대상물로서의 관계가 아니라, 인격 대 인격,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관계로 재정립해야 한다. 자녀는 그 누구의 종속물도 아니고, 어머니가 전적으로 책임져야 할 대상물도 아니다. 그저, 대등한 인격체이자 사람일 뿐이다. 어머니는 자녀를 일류대학에 보내지 않는다하여, 자녀를 사회적으로 성공시키지 못한다하여 ‘모성’을 져버린 나쁜 엄마가 아니다. 어머니 되기를 거부했다 하여, 그리고 사회가 정상가족으로 치부하는 부, 모, 자녀의 가족(사회가 규정한 정상가족이지 결코 이것이 정상가족은 아니라 할 것이다. 절대적인 정상가족이란 없으며, 형태를 불문하고 어떤 가족이든지 존중받아야 한다)을 꾸리지 않았다 하여 그녀들을 비난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주어져 있지 않다.
또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여성 스스로 무의식적으로 모성을 강조한다는 점에 있다. 일과 양육 속에서 슈퍼우먼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는 여성들은 ‘모성’의 역할을 친정어머니, 혹은 시어머니의 몫으로 전가하고 있다. ‘모성’을 요구하고 요구받는 누군가가 있는 한, 이 지독한 되물림은 결코 종식되지 않음을 여성 스스로 따끔하게 인지해야 할 것이다. 특히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가부장제와 맞닿아 있는 ‘모성’이데올로기는 여성 억압적 기재의 악순환 고리의 핵을 이룬다 하여 이를 배제하는 것만이 해결책이 아니다. 모성 자체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약자에 대한 배려, 유연함, 존중, 보살핌’의 기재로서 분야를 막론하고 사회의 모든 기저에서 재발현 되어야 하며, 이 기재는 남성, 여성 주체를 막론하고 누구나 접근 가능함을 주지시켜야 할 것이다.
헌법이 보장하는 모성을 보호할 권리는 더 이상 여성의 활동을 제한하고 여성을 가정 내에 고립시키는 요인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모성이 가지는 역량을 남성, 여성의 주체의 구분 없이 누구나 가질 수 있고, 만끽할 수 있는 권리로서 의미를 재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남성 위주로 움직여진 지금까지의 사회문화적 구조에 비추어, 여성의 인력 활용의 중요성과 보육의 문제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끊임없는 인식의 전환, 그리고 모성보호권이란 가만히 있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주장해야 할 권리라는 인식을 누구보다 여성 스스로 인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과 양육의 자유로운 선택과 양립을 할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 말이다.
메이크업한 자화상| 반/차별 프리즘
2009년 12월 21일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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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분명 이번에 대학에 입학한 것이 분명한 여학생 둘이 OT에 갔다온 이야기를 들었다. 그 때 나는 mp3를 집에 놓아두고 온 날이었고, 그래서 나는 눈으로는 책을 쫓고, 귀로는 내 바로 뒤에서 그 여자아이들이 말하는 것을 다 쫓는 수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녀들은 지난 신입생 OT에 가서 화장을 다 지우고 '쌩얼'로 잘 준비를 하려는데, 남자애들이 자기들 방에 놀러오라는 바람에 BB 크림을 숨겨서(다른 친구들과 화장하지 않기로 약속했다며) 그걸 몰래 바르곤 남자아이들 방으로 갔던 것이다. 그녀들은 이제 막 화장이 '합법적으로' 허용되는 스무살이 되었고, 남자아이들에게 잘 보이고 싶었을 것이며, 그 녀석들 중의 하나 정도는 마음에 두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다만 '막 스무살이 된, 예뻐보이고 싶은 여자 아이'의 심리를 반영하는 것, 그것 만은 아니다.
프랑스어 선생님이 프랑스에 장기간 체류하다가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신기하고 달랐던 건, 한국에 오니 여성들이 너무 '예뻐보이려고' 애쓴다는 것이었다. 아침의 지하철에서도 많은 여성들이 화장을 하고 있고, 굉장히 "예쁘게"하고 다니는데, 프랑스 여성들은 거의 그렇지 않고 비가 와도 우산도 쓰지 않고, 뭔가 묻어도 쓱쓱 그냥 털어버리는 등 자신이 '어떻게 하면 예뻐보이는가'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 보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게 또 프랑스 예찬론이냐고 발끈할 준비를 할 필요는 없다. 그는 프랑스는 이런데, 한국은 이래서 안 좋다는 의도로 말한 것은 결코 아니었으므로. 오히려 그것의 반대였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나는 고맙죠."라고 덧붙혔던 것이다. 거기에 나는 "당연히 그러시겠죠."라고 조용하고 비교적 온화하게, 미소까지 지으며 응수했던가?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내가 지금 묘사하고 있는 이 상황들은, 내게 무엇을 암시하는가? 결혼식이나 웨딩드레스가 화려할수록, 그 나라에서 여성이 결혼 후에 얻게 되는 지위는 낮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예쁘다는 게, 화려하다는 게 늘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리라. 어쩌면 이곳은 단지 '예뻐야만 사는', 그러니깐 못생긴 몬스터들은 행복하게 살 수 없는, 스물만 넘으면 모두들 화장을 하는 메이크업의 공화국인지도 모르므로.
나는 그 밤의 지하철에서 조우한 여자 아이들과, 화장하지 않으면 '예의가 없는'게 되어버리는 여자들과, '예뻐보이고 싶은'(혹은 예뻐보여야 하는) 수많은 여자들의 얼굴에서 이 감동적이게 '예쁘고도' 슬픈 자화상을 본다. 이들은 누구인가, 그녀들은 나였던 게 아닌가. 그러나 나는 '예쁘지' 않다. 나는 '예뻐지고'싶은가? 그렇다. 나는 예쁘고 싶었다. 나는 예뻐져야만 하는걸까? 예뻐지면 편하겠지, 나는 굳이 실력에 쏟는 힘을 조금 줄여도 좋을거야. 내가 조금만 좋아하면 남자들은 나를 많이 좋아하겠지. 그래, 내가 조금만 얼굴을 뜯어고칠거라고 마음 먹어도 내 인생은 백 팔십 도 달라질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예쁘게 '변하면' 나는 되는걸까. 아니, 당장 내가 아침마다 아이라인을 그리는 것은 외꺼풀을 가진 나의 인상이 좀 강해보이고 싶다는 그런 '단순해 보이는' 이유에 의한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게 '동 충동'과 구분되는 것이라고 믿으며 자위하고 있는 것 아닌가?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엄기호, 낮은 산) 중에 가장 성형수술을 많이 하는 여성 집단은 여상 졸업생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사실상 누군가에게 '간택'받아야만(물론 자본주의 세상에서 이는 보편적인 현상이지만, 대부분의 그녀들이 취직을 할 직장은 그 정도나 방식이 특기할 만하다는 점에서) 취직이 가능한 직장을 지망하는 이들이, 가장 기본적이고도 적극적이게 수행할 수 있는 취직준비는 바로 성형수술인 것이다. 그래서 이런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돈도 없고, 공부도 못하고, 못생기기까지 한' 여자애들이라고 한다. 돈도, 기술도, 빽도 아무것도 없을 때 여성들이 택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는 바로 그녀들의 몸이니까. '팔 몸'조차 이용할 수 없는 이는, 그 얼마나 불쌍한 여자가 되는 것인가.
나는 예쁘지 않으면 안되는, 예뻐야지 인정받고 먹고 살고 사랑도 할 수 있는 현실의 자화상을 이들의 얼굴에서 본다. 한국만큼 여성들이 예쁘고 늘씬하고, 하나같이 옷 잘 입고 다니는 나라가 없다는 것은 칭찬일까? 오히려 그건 이 곳에 대한 흉이며, 그런 곳에서 어떻게 살겠냐는 야유로 들리는 건 나의 지나친 사회학적 결백증에 의한 망상인가. 하아, 예쁘지 않고, 통통하거나 뚱둥하고, 옷을 제멋대로 입는 여자들이 마음껏 자유롭게, 기분좋게 거리를 활보할 수 없는 이 공화국에 대한 기막힌 찬사라고.
이는 그녀들의 잘못은 아니다.
남들에게 더 예뻐보이고 싶은 마음,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거의 모든 여자애들이 나이보다 몇 살은 더 나이 들어 보이는 화장을 하고 집을 나서고, 화장 하지도 않은 얼굴은 감히 보이지도 말라는(완벽쌩얼을 가진 연예인들 빼고) 이 시대의 처절한 금기에 철저히 순응하고 있는 이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건 '예쁨 충동' 그 뒤에 '죽음 충동'의 기괴한 얼굴을 하고 내달리고 있는, 그 이 거대하고도 괴기스러운 메이크업의 공화국에 정착하기 위한 필수조건인 것을.
최근에 내가 발견한, 공부하는 나로서의 치명적인 단점 하나는 종종 내가 일반화를 쉽게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특히 그건 여성과 남성의 문제에 관해 이야기할 때 가장 잘 드러난다. 애써 지금 변명해보자면, 그러한 주제에는 반드시 완벽한 일치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경(성)향'이 있음은 진실이라고 생각되는 경우가 많이 존재하기에 그랬다. 그러나 그 성향은 결코 내게 득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그것을 깨달은 나는 그 치명적인 오류가 나의 사고를 갉아먹지 않도록 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하리라. 그러나 이 글에서 한해서는, 이 나의 '일반화'가 그리 성급하거나 틀린 것 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감히, 이 글에서 나는 용감하게도 이 사회의 메이크업한 자화상으로서의 '일반화'를 감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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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의택배
그 때, 내가 '노숙인' 차별했어! | "그때, 내가 차별했어!"
2009년 11월 13일 15:31
서울역사. 아침에 딱 마주친, 노숙인에 대한 여러분의 첫인상은?
1. 더럽다. >_<
2. 불쌍하다. ㅠ_ㅠ
3. 뭔가 도와줘야 할텐데.... ~.~
4. 우리 같이 힘모아 투쟁하자? ! .!
5. 기타 등등.
여러분의 답변은 무엇인가요?
무엇이 그것을 당신에게 선택하게 했을까요?
이번의 "그 때, 내가 차별했어!" 의 주제는 '노숙인 차별' 입니다.
1번부터 5번까지의 선택지 중
여러분을 선택하게 만든 그 선택지에, 차별이 있나요? 있을까요? 없을까요? 뭐가요?
그 때, 우리 노숙인 차별했던 적. 여러분,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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