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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12/21
    메이크업한 자화상(1)
    반차별팀
  2. 2009/11/13
    "루저"들, 웬 이렇게 호들갑?(15)
    반차별팀
  3. 2009/08/21
    결혼 '못'하는 여자? 결혼 '안'하는 여자!- 영롱(12)
    반차별팀
  4. 2009/04/16
    그 첫번째 주제는, "성차별"입니다! (댓글을 달아주세요)(17)
    반차별팀

메이크업한 자화상

 

 

며칠 전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분명 이번에 대학에 입학한 것이 분명한 여학생 둘이 OT에 갔다온 이야기를 들었다. 그 때 나는 mp3를 집에 놓아두고 온 날이었고, 그래서 나는 눈으로는 책을 쫓고, 귀로는 내 바로 뒤에서 그 여자아이들이 말하는 것을 다 쫓는 수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녀들은 지난 신입생 OT에 가서 화장을 다 지우고 '쌩얼'로 잘 준비를 하려는데, 남자애들이 자기들 방에 놀러오라는 바람에 BB 크림을 숨겨서(다른 친구들과 화장하지 않기로 약속했다며) 그걸 몰래 바르곤 남자아이들 방으로 갔던 것이다. 그녀들은 이제 막 화장이 '합법적으로' 허용되는 스무살이 되었고, 남자아이들에게 잘 보이고 싶었을 것이며, 그 녀석들 중의 하나 정도는 마음에 두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다만 '막 스무살이 된, 예뻐보이고 싶은 여자 아이'의 심리를 반영하는 것, 그것 만은 아니다.

 

프랑스어 선생님이 프랑스에 장기간 체류하다가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신기하고 달랐던 건, 한국에 오니 여성들이 너무 '예뻐보이려고' 애쓴다는 것이었다. 아침의 지하철에서도 많은 여성들이 화장을 하고 있고, 굉장히 "예쁘게"하고 다니는데, 프랑스 여성들은 거의 그렇지 않고 비가 와도 우산도 쓰지 않고, 뭔가 묻어도 쓱쓱 그냥 털어버리는 등 자신이 '어떻게 하면 예뻐보이는가'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 보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게 또 프랑스 예찬론이냐고 발끈할 준비를 할 필요는 없다. 그는 프랑스는 이런데, 한국은 이래서 안 좋다는 의도로 말한 것은 결코 아니었으므로. 오히려 그것의 반대였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나는 고맙죠."라고 덧붙혔던 것이다. 거기에 나는 "당연히 그러시겠죠."라고 조용하고 비교적 온화하게, 미소까지 지으며 응수했던가?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내가 지금 묘사하고 있는 이 상황들은, 내게 무엇을 암시하는가? 결혼식이나 웨딩드레스가 화려할수록, 그 나라에서 여성이 결혼 후에 얻게 되는 지위는 낮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예쁘다는 게, 화려하다는 게 늘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리라. 어쩌면 이곳은 단지 '예뻐야만 사는', 그러니깐 못생긴 몬스터들은 행복하게 살 수 없는, 스물만 넘으면 모두들 화장을 하는 메이크업의 공화국인지도 모르므로.

 

나는 그 밤의 지하철에서 조우한 여자 아이들과, 화장하지 않으면 '예의가 없는'게 되어버리는 여자들과, '예뻐보이고 싶은'(혹은 예뻐보여야 하는) 수많은 여자들의 얼굴에서 이 감동적이게 '예쁘고도' 슬픈 자화상을 본다. 이들은 누구인가, 그녀들은 나였던 게 아닌가. 그러나 나는 '예쁘지' 않다. 나는 '예뻐지고'싶은가? 그렇다. 나는 예쁘고 싶었다. 나는 예뻐져야만 하는걸까? 예뻐지면 편하겠지, 나는 굳이 실력에 쏟는 힘을 조금 줄여도 좋을거야. 내가 조금만 좋아하면 남자들은 나를 많이 좋아하겠지. 그래, 내가 조금만 얼굴을 뜯어고칠거라고 마음 먹어도 내 인생은 백 팔십 도 달라질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예쁘게 '변하면' 나는 되는걸까. 아니, 당장 내가 아침마다 아이라인을 그리는 것은 외꺼풀을 가진 나의 인상이 좀 강해보이고 싶다는 그런 '단순해 보이는' 이유에 의한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게 '동 충동'과 구분되는 것이라고 믿으며 자위하고 있는 것 아닌가?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엄기호, 낮은 산) 중에 가장 성형수술을 많이 하는 여성 집단은 여상 졸업생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사실상 누군가에게 '간택'받아야만(물론 자본주의 세상에서 이는 보편적인 현상이지만, 대부분의 그녀들이 취직을 할 직장은 그 정도나 방식이 특기할 만하다는 점에서) 취직이 가능한 직장을 지망하는 이들이, 가장 기본적이고도 적극적이게 수행할 수 있는 취직준비는 바로 성형수술인 것이다. 그래서 이런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돈도 없고, 공부도 못하고, 못생기기까지 한' 여자애들이라고 한다. 돈도, 기술도, 빽도 아무것도 없을 때 여성들이 택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는 바로 그녀들의 몸이니까. '팔 몸'조차 이용할 수 없는 이는, 그 얼마나 불쌍한 여자가 되는 것인가.

 

나는 예쁘지 않으면 안되는, 예뻐야지 인정받고 먹고 살고 사랑도 할 수 있는 현실의 자화상을 이들의 얼굴에서 본다. 한국만큼 여성들이 예쁘고 늘씬하고, 하나같이 옷 잘 입고 다니는 나라가 없다는 것은 칭찬일까? 오히려 그건 이 곳에 대한 흉이며, 그런 곳에서 어떻게 살겠냐는 야유로 들리는 건 나의 지나친 사회학적 결백증에 의한 망상인가. 하아, 예쁘지 않고, 통통하거나 뚱둥하고, 옷을 제멋대로 입는 여자들이 마음껏 자유롭게, 기분좋게 거리를 활보할 수 없는 이 공화국에 대한 기막힌 찬사라고.

 

이는 그녀들의 잘못은 아니다.

남들에게 더 예뻐보이고 싶은 마음,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거의 모든 여자애들이 나이보다 몇 살은 더 나이 들어 보이는 화장을 하고 집을 나서고, 화장 하지도 않은 얼굴은 감히 보이지도 말라는(완벽쌩얼을 가진 연예인들 빼고) 이 시대의 처절한 금기에 철저히 순응하고 있는 이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건 '예쁨 충동' 그 뒤에 '죽음 충동'의 기괴한 얼굴을 하고 내달리고 있는, 그 이 거대하고도 괴기스러운 메이크업의 공화국에 정착하기 위한 필수조건인 것을.

 

 

최근에 내가 발견한, 공부하는 나로서의 치명적인 단점 하나는 종종 내가 일반화를 쉽게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특히 그건 여성과 남성의 문제에 관해 이야기할 때 가장 잘 드러난다. 애써 지금 변명해보자면, 그러한 주제에는 반드시 완벽한 일치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경(성)향'이 있음은 진실이라고 생각되는 경우가 많이 존재하기에 그랬다. 그러나 그 성향은 결코 내게 득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그것을 깨달은 나는 그 치명적인 오류가 나의 사고를 갉아먹지 않도록 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하리라. 그러나 이 글에서 한해서는, 이 나의 '일반화'가 그리 성급하거나 틀린 것 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감히, 이 글에서 나는 용감하게도 이 사회의 메이크업한 자화상으로서의 '일반화'를 감행한다.  

 

 

 

 

 

by 꿈의택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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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루저&quot;들, 웬 이렇게 호들갑?

 

요 며칠 "루저" 발언의 후폭풍이 일파만파 퍼지고 있다. '180cm 이하는 루저에요'라는 H 대학의 '여대생'의 한마디가 파장을 몰고와, 엉뚱하게 그 학교가 다구리 당하는 것은 물론 그녀의 미니홈피와 사적인 개인들이 인터넷에 유포되어 있고(이미 접한 바 있다.) 인터넷 시국의 대세는 "루저의 난"이다. 궁금하시면 검색해보시라. 아까까지만 해도 상위의 랭킹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어렵지 않게 그것을 접할 수 있으실 것이다.

 

이는, 물론 그녀의 발언은 '180 이하'를 분노케 할 수 있는 맥락이 있을 것이다. 키 작은 남자란 것도 억울한데, 너같은 여자애한테 내가 루저라는 말까지 들어야 하냣! 라는 뭇남성들의 툴툴댐 정도는 귀엽게 봐줄 수 있겠다. 하지만 이건 가히 거국적인 분노의 물결로 표현할 수 있을만큼 인터넷이 완전 난리났다. 블로그 한다는 (대부분은 남자)사람들은 다들 포스팅을 이들의 짤샷으로 도배해놓고, 그 밑에 이 여자는 정말 무개념이고 어쩌고 한다는, 분노의 포스팅을 한다.

 

나는 사실 그 기사가 맨 처음 떴을 때, 어디서 "또 한 명 걸렸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이들이 생각없고 '무개념녀'라고 말하기 딱 좋을,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 한 명이 걸려서 옳타꾸나, 남성들은 덥썩! 이 떡밥을 잡아 문 것이다. 그래, 얘 봐. 봐봐, 여자들이 이런 다니까? 남자 키 180 안 넘으면 루저라잖아, 라며 자신들의 '여자들 싸잡아 까기' 딱 좋겠다 싶은 떡밥. 그러면서 많은 그들은, 잘 걸렸다 싶어서 자신들이 몸매 "착한" 여자의 특정 부위를 당당히 밝히는 걸, 또 당당히 합리화 하고 있을 것이다. 봐, 얘네들도 180 이상 남자만 좋다잖아, 내가 '꿀벅지' 좋아하고 가슴 '착한' 여자 좋아하는 거 뭐 나빠? 그건 왜 욕하는데? 초콜렛 복근도 니네는 말하면서, 이거 뭐, 쏘 왓? 그래놓고 우리 욕하지마, 우씨!

 

아니, 대체 왜 이렇게 다들 호들갑인가? 그들, 그렇게 그게 충격인가? 그게 그렇게 못마땅하고 못견뎌 죽겠나? 이건 이제까지 여성들은 '착한' 몸매, 꿀벅지, '명품' 가슴이 이상형이고, '~한 여자는 용서해도 뚱뚱한 여자는 용서 못한다'며, '잘하라는 뜻이었다'는 말들로 원치도 않은 "궁디 팡팡"을 당하고, 술 한잔 따라보라는 강요를 받고, 못생기고 뚱뚱한 여자는 취업도 안되고 사람도 못되는 세상에서, 수많은 여성들은 이미 '루저'였는데, 그래서 나에게 그냥 그런 건 평범하게 인터넷과 일상 속에서 매일 밥 먹듯 접하는 것들인데. "180 이하는 루저에요" 발언 하나로 그 여자가 자신들을 '루저'로 만들어버렸다고 이렇게 광분하고 있는 이들, 대체 뭐가 그렇게 원통하단 말인가?

 

나는 '루저 발언녀'도 뭔가 눈치 없고 안됐다 싶은 짜증이 들지만(이웃 블로거가 쓴대로 심지어, 이건 남자들이 야동 본 이야기를 여자들 앞에서 하지 않듯, 여자들끼리만 하는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발설한, 감없는 한 여자의 실수담 같은 것일수도 있는데) 이런 기회를 잡아서 여자들에 대한 폭력적인 자신의 행위들을 정당화시키고 있을 그 기회주의자 남성들이 더 싫다. 이 이제까지 해온 것들을 너무도 당당하게 정당화하고 합리화할 떡밥을 이들은 보유한 것이다.  

 

난 웃겨서, 묻고싶다. 그럼 너네들이 여자들에게 심심치않게, 심심풀이로 내뱉는 그런 말들이 그렇게 듣기 좋고 것인줄 알았던 것인지!! 그게 맥락적으로 뭐가 그렇게 다를까? 그 한낱 좀 눈치없는 한 여자가 꿈꾸는 남자 취향을 좀 거칠고 요령 없이 말한 것 뿐인데! 이 한마디에 이토록 거국적인 분노를 보이고 분에 못 이기다니. 난 오히려 그 여성의 "루저 발언"같은 건 별로 놀랍지도 않고 이런 수많은 남성들의 과잉 대응, 그게 황당하다. 왠일인지 '키 180 이상의 남자는 진지하게 좋아해 본 적도 없는' 내게는 '180 이하의 키'가 아니라 오히려 그런 반응들이 너희를 '루저'스럽게 만든다는 걸, 그들은 아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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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못'하는 여자? 결혼 '안'하는 여자!- 영롱

 

결혼 '못'하는 여자? 결혼 '안'하는 여자!

 

 

지금 몇 시간째, 배우 누군가가 결혼 3년 만에 이혼을 했다는 기사가 계속 포털 메일에 뜨고 있다. 대체, 그게 뭐라고! 또 무엇이 그리 궁금하여, 사람들은 그 배우의 이름을 검색어 1위에 띄우고 있는거지? 결혼이 있다면, 이혼도 있는데 그게 이토록 아직까지 유난스러운 일(포털 메인에 1위까지 올릴만한)이 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이는 곧, 이혼한 이에 대해, 여전히 어떤 특별한 시선을 내포하고 있기에.

 

어제는 다가오는 11월에 결혼을 한다는 지인에게 반지를 선물 했다. 내가 끼고 있던 반지를 무척 예뻐하길래, 그러면 색깔이 다른 새 반지를 선물하겠다고 했던 것이다. 반지와 동봉한 간단한 메모에는 “저는 결혼 제도의 불합리성 등으로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00씨의 결혼은 축하해 드릴게요. 꼭 행복하세요.”라는 짧은 글을 남겼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의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을 준 것이 되었다. 비혼주의자가 타인의 결혼을 ‘축하’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누군가는 결혼을 반대하기에 가까운 이들의 결혼식이라도 할지라도 그러한 장소에 결코 가지 않는 식으로 자신의 비혼주의적인 실천을 한다. 하지만 나는, 굳이 결혼식에 대한 초대를 거절하지는 않는다. 비혼주의자인 나는, 타인의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만일 누군가가 결혼해서 정말, 가장 행복하다면 나는 그들을 비판하지 않겠다. 정말 그 사람이 결혼을 함으로 해서 행복하다면, 진심으로 난 그 행복을 빌어줄 수도 있다. 어차피 모든 이는 자신의 행복을 향해 사는거니까. 그러나 그 행복이 무엇을 가리고 있는 것인지는 알 필요가 있지 않을까. 결국 ‘결혼 시장’으로 변질되어가는 결혼의 속물성, 사랑을 법적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뭔가 이상한 것, 결혼에서 배제되는 가리어진 존재들, 그 아래에 숨기고 있는 악랄한 여성에 대한 차별(곧, 여성인 내가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동시에 뜻하는).

 

동성결혼은 허용하지 않는 이성애중심, 국가중심적 편협함과, 결혼은 남편의 집안으로의 편입을 의미하는 것(호주제폐지로 덜해지긴 했더라도, 다만 ‘덜’해진 것이며 법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통념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등의 가부장성은 한국의 결혼제도를 떠받치고 있는 아주 기본적인 골격이다. 또한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이러한 한국의 결혼제도와 결혼과 관련된 사회의 담론과 분위기들은 비혼인들을 차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한 결혼제도가 나의 마음을 일찍이 결혼 밖으로 밀어낸다. 결혼하지 않는 (“이기적인”)이는 아직 ‘성인’이 덜 된 것으로 치부되며, 직장에서도 덜 혜택을 누리는 이들이 된다. 가령 기혼인들에게는 비교적 당연하게 주어지는 휴가와 가족 행사와 관련된 보너스가 미/비혼인 자신에게는 ‘눈치 보이는 것’이 되도록 하는 직장 환경에 대해 비판하는 내 친구의 경우처럼 말이다. 결혼을 안 한 사람에게는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결혼 못하는 여/남자(=뭐가 문제가 있을까?를 촉수를 곤두세워 끝없이 탐색하게 되고)”라는 수식어가 붙고, 특히 여성에게는 그녀의 어떤 부정적인 반응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무조건 ‘노처녀 히스테리’라는 말이 끝내 따라붙고야 만다. 아니, 결혼 하나 안 한 게(안 하겠다고 마음 먹는 게) 뭐가 그렇게 큰 죄라고 이렇게까지 난리란 말인가? 그 뿐 아니라, 방송인 허수경 씨가 ‘싱글맘’ 선언을 하였을 때 사람들이 보였던 반응은 또 어떠했는지 기억 하는지? 그녀는 “아이에 대한 집착으로 아이의 장래에 ‘아버지의 부재’라는 큰 짐을 지운 이기적인 처사"라는 비난에 부딪혔다. “아기는 낳고 싶지만 결혼은 쫌....”이라고 말하는 나에 대해 ‘역정의 목소리’를 높이는(주로 "넌 왜 니 생각만 하고 이기적이니, 아이가 당할 고통은..” 운운하는 것이 주내용임) 나의 언니와 엄마가 그 산 증인이시다! 아버지가 있더라도 없는 것보다 못하다거나, 그다지 큰 의미가 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아버지의 부재’라는 것이 그렇게, 완전 그 아이의 모든 것을 결정할 만큼의 큰 문제란 말인가? 한 아이의 부모 중에 한 명이 없는 경우는 이혼, 죽음 등 다양한 이유로 이루어질 수 있는데 늘 한 쪽의(혹은 두 쪽 다) 부모가 없다는 것을 의식하게 만드는 사회의 시선, 부모의 부재는 곧 그 아이의 심각한 결핍을 의미하게 만드는 사람들의 눈, 전적으로 그게 문제다. 또한 생각해보면, 싱글맘에 대한 시선은 남성이 없이 오로지 여성 혼자라는 생각에만 고정되어 있는 듯한데, 결혼을 하지 않고 함께 살며 결혼 제도 밖에서 아이를 낳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래도 이런 경우나, 저런 경우나 사람들의 그런 비판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결혼 밖에서 생겨난 아이라면, 무조건 이상한 눈길로 보는 것이 흔한 경우니까. 누군가 “당신의 이기심으로(결혼을 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만 하는’ 여성의 ‘편의성’ 등에 관해) 아이의 미래의 불행을 모른 척 하는군요.”라고 비판한다면, 나는 그것을 ‘불행’으로 만드는 사회에 내 아이와 당당히 맞서 싸울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며칠 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후, 그의 생전 일기가 공개되었다. 그의 일기에는 현 정권과 그들의 대처방식에 대한 분노, 비판, 경고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정, (김대중 정권의 공과 과는 별도로) 그가 가졌던 민주주의에 대한 책임감과 열정 등이 짧은 문장 속에 담겨있었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내에 대한 관계를 표현한 부분이었다. “점심 먹고 아내와 같이 한강변을 드라이브했다. 요즘 아내와의 사이는 우리 결혼 이래 최상이다. 나는 아내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둘이 건강하게 오래 살도록 매일 매일 하느님께 같이 기도한다.”, “종일 집에서 독서, TV, 아내와의 대화로 소일. 조용하고 기분 좋은 5월의 초여름이다. 살아있다는 것이 행복이고 아내와 좋은 사이라는 것이 행복”이라는, 서거 직전까지도 각별했던 아내를 향한 사랑의 구절들이 그의 일기에는 가득 차있다. 언론들은 연이어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기신 그 사랑의 단상에 관하여 보도하며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언론들의 조악한 플레이를 혐오하는 나에게도 역시 그들의 사랑은 무척 아름답게 느껴진다.

 

나는 생각했다. 내가 꿈꾸는 삶이 그의 일기에 묘사된 삶과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닐 것이라고. 결혼하지 않고 80살이 넘더라도 그 오랜 후의 나의 미래 속에, 다만 바라만 보아도 감사하고, 건강히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만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결혼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과 사랑을 했기 때문에 행복했던 것처럼. 뭐, 갑자기 이런 ‘사랑 타령’은 이 글에서 뜬금없다고? 내가 볼 때 내 주변의 비혼주의자들 중에는 ‘독신’주의자나 사랑과 사람에 대해 거부하는 냉소주의자들보다는 결혼제도의 불합리성에 저항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결혼 속에서는 그들이 행복하게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도 그들처럼 사랑을 원한다. 나의 더 큰 사랑과 행복을 위해, 나는 결혼을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려고 한다. 억압 없고 여성인 나에게 폭력적이지 않은 환경에서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자유로움으로.

 

 

 

written by 영롱 (a.k.a 꿈의택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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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첫번째 주제는, &quot;성차별&quot;입니다! (댓글을 달아주세요)

 

<그 때, 내가 차별했어> 게시판은 비정기적으로 진행되며 여러분의 댓글로 진행되는 코너입니다.

언젠가의 그 때, 내가 차별했던 이야기, 차별인 줄 몰랐거나, 알고도 차별했던 이야기들을

이제 다시 되살려 생각해봅니다.

 

<그 때, 내가 차별했어>의 첫번째 주제는 성차별입니다.

남자, 여자 혹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성(gender) 때문에 누군가를 다르게 보았던 적 있나요?

성(gender/sex)에 따라 그 누군가에게 어떤 일을 부과하거나, 금지했던 적이 있나요?

다르게 말 했던 적이 있나요? 아니, 혹은 속으로라도?

 

그런 기억을 다시 머릿 속에서 키보드 위로, 댓글로 끄집어내보아요.

차별이 반/차별로 이어질 수 있는 실마리를 어디쯤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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