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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4/23
    PAPER 기사에서의 이장혁의 “정치”를 비판함 (14)
    반차별팀

PAPER 기사에서의 이장혁의 “정치”를 비판함

2009년 2월 24일에, 2호를 읽고 제(영롱 A.k.a '꿈의택배') 개인 블로그에 올렸던 글입니당.
제 블로그에선 나름 논란이(?) 됐던?^^  ㅎㅎ
반차별, 페미니즘, 호모포비아, 차이.. 등에 관해 같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올려요^.^
-
PAPER 기사에서의 이장혁의 “정치”를 비판함
(...)
전에 “표현 욕구를 억누르면 죄책감이 느껴진다”는 말을 하셨는데요.

(...) 지금은 그런 기준이 명확하게 섰지만, 혼자만의 얘기가 아니라 관계에 대한 얘기하면, 그 사람은 내가 노래하는 것도 모르고 있을텐데, 내가 상처 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어요. 공지영 작가는 그런 거 상관없이 옛날 만났던 남자들 얘기를 소설로 만들어내지만.(웃음) 저는 그런 것에서 죄책감을 많이 느꼈어요.

 

 

(중략)

 

 

그럼 인터뷰 같은 거 별로 안 좋아하시겠어요. (웃음) 하고 나면 꼭 말이 와전되잖아요.

그렇지는 않아요. 물론 그럴 때도 있기도 하지만, 하나하나 신경 쓰다보면..

 

 

피곤하죠?

네.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다는 걸 감안하고 가야죠. 저는 솔직히 까놓고 호모포비아(homophobia : 동성애 혐오증)라고 말하고 다니는데, 그런 걸 빌미로 저를 공격하는 사람도 많았구요. 제 음악 잘 듣다가 뒤늦게 알고 CD를 부셔버렸다는 사람도 있었어요.

 

 

<아무밴드>의 <호모포비아>라는 노래 듣고 싫어졌다는 사람 꽤 있더라구요.

좀 웃긴 것 같아요. 늘 말씀드리지만 음악을 음악으로 받아들였으면 좋겠어요. 제 정치적인 성향이라든가, 그런 거 상관없이 음악은 음악이잖아요. 제가 한나라당 지지자는 아니지만 (웃음) 제가 한나라당 지지한다고 해서 제 음악적 가치가 변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런 기준으로 재단하려는 게 이해가 안 돼요. 저는 호모포비아지만 게이들 음악도 좋아해요. 이나 루퍼스 웨인라이트 같은. 아마도 동성애자 인권운동 쪽에 계신 분 같은데 ‘이장혁은 호모포비아니까 그 사람 음악 들으면 안된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봤어요. 그 사람들이 원하는 건 다양성을 인정하자는 거잖아요.

 

 

호모포비아도 어떻게 보면 다양성의 하나일 수 있잖아요.

그렇죠. 다양성인데 인정 안 하잖아요. 우리나라는 좀 심하죠. 정치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노무현 욕하면 ‘명빠’가 되고 이명박 욕하면 ‘노빠’가 되는 거, 웃기잖아요. 이런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 답답해요. 그걸 왜 제 음악에 적용시키는지 모르겠어요. 그런 부분은 정말 고쳐져야 할 거 같아요.

 

 

그럼 <호모포비아>가 나왔을 당시에는 지금보다 공격을 더 많이 받았겠네요?

많이 받았는데, 제가 그럴 만한 부분을 던지기도 했으니까. ‘사랑한다고 말하면 널 죽여버릴거야’ 같은 가사도 있으니까(웃음) 그럴 수도 있겠구나 받아들여요. 근데 정치에 민감한 분들은 수용 못 하시더라구요. 솔직히 전 그런게 되게 웃겨요. 물론 이제 별로 신경 안 써요. 제 할 일은 음악 제대로 만드는거고, 그럼 거리낄 것 없다고 생각하니까.

 

 

-PAPER 2월호, <뮤지션 이장혁 -이 험한 세상에서, 휩쓸리지 않기> (인터뷰어: 최승우) 중에서

 

 

 

 

 

 


이장혁이라는 뮤지션을 알게 된 지가 나는 얼마 되지가 않았다. ‘스무살’이라는 곡이 꽤 좋고 음악성이 높은 뮤지션이라고 많이 이름을 듣고서 ‘나도 한 번 들어볼까?’ 궁금해하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이었다. 내가 저걸 읽은 것은 말이다. 몇 주 전, 지하철에 서서 그보다 더 얼마 전에 꽤 오랜만에 구입한 PAPER를 읽다가 정말 혼자서 화나 죽는 줄 알았다. 그걸 어떻게 풀어내지 못하고 그러고 있다가, 그날 저녁 교보문고에서 J에게 이 얘기를 열라 흥분해서 막막 다 쏟아냈더랬다.

 

난 저 기사에서, 그리고 이장혁에게서 ‘다양성’의 함정을 알게 되었다. 그건 정말 무서운 것이었다. 그래, 맘에 안 들지만 그는 호모포비아일 수 있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대체 어디다 ‘다양성’을 갖다 붙이는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널 죽여버릴’거라는 협박에 가까운 증오를 보이면서, 그 증오와 폭력에 대해 어떻게 ‘다양성의 시혜’를 베풀수가 있는가! 나는 정말 다양성이 그의 입 위에서 쓰이는 용법을 지켜보며, 나는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오 마이, 오 마이, 오 마이 갓!

 

 

 

너는 나의 좋은 친구

나는 너의 좋은 친구

거기까지가 아름다워

거기까지가 아름다워

 

 

너는 나의 좋은 친구

나는 너의 좋은 친구

니가 이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 전까진

 

 

사랑한단 말을 하면 널 죽여버릴거야

내게 입맞추려 하면 널 때려줄거야

 

 

난 너의 애인이 아니야

 

 

-이장혁,

 

 

그렇게 본다면 앞선 질문에서 “혼자만의 얘기가 아니라 관계에 대한 얘기하면, 그 사람은 내가 노래하는 것도 모르고 있을텐데, 내가 상처 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어요. 공지영 작가는 그런 거 상관없이 옛날 만났던 남자들 얘기를 소설로 만들어내지만.(웃음) 저는 그런 것에서 죄책감을 많이 느꼈어요.”라고 말 하는 그의 생각들은 일관적이지가 않다. 저렇게 깊은 호모포비아적인 성향을 보이면서 그것은 타인에게 상처 주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걸까? 저렇게 말 하는 사람이, 그가 증오하는 “호모”들은 그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을 뿐 아니라 그저 그 사람들 나름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건데, 그것에 관하여 그에게는 모욕할 ‘다양성’이 주어져 있는가? 그에게 그건 완전히 다른 문제일까? 내가 묻는다면, 그는 그렇게 대답할까? 그리고 공지영 작가를 끌어온 것에도 동의할 수가 없다. 이는 부적절한 예시다. 그녀의 소설은 자신이 입은 상처 앞에 자유롭고자, 과거 ‘피해자’이던 자신의 자리에서, 거기서 자신이 겪은 부자유와 ‘피해’를 극복하고자했던 글쓰기 작업이며 그 소설들은 이장혁이 일방적으로 호모포비아적인 강한 메시지를 담은 노래와는 완전히 다르다.

 

만일 나는 이 인터뷰에서 이장혁이 말했던 그런 게 다양성이라면, 나는 차라리 다양성이라는 말을 옹호하지 않겠다. 그 다양성은 부정할 수 밖에 없다. 어떻게, 운동에서 그 좋게 쓰이던 다양성이라는 말이 이렇게도 쓰일 수가 있는지. 하지만 그것이 정말 다양성일까? 타인을 죽이면서, 타인을 상처입히면서 만들어진 음악을 “그저 그건 음악일 뿐이에요. 나와 상관지으려고 하지 말아요.”라고 변명할 수 있을까? 그건 완벽히 폭력이다. 나는 부디 앞으로 저런 맥락에서 ‘다양성’이라는 말이 사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굳이 내게 있어서 저 인터뷰 기사의 의미를 찾는다면, 그런 다양성의 무섭고 깊은 함정을 본 것을 나의 유일한 수확이라고 말하겠다.

 

그는 음악과 뮤지션의 정치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고, “웃긴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의 방식대로 하자. 나는 지금 그의 음악이 아닌 “정치”를 비판하는 것이다. 그 개인을 비판하는 것이다. “음악과 별개로”. 내가 영영 그의 음악을 비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면, 과거에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내가 그의 음악은 들을 일이란 없을테니까.

 

하지만 다시 문제는 내게 남았다. 그가 그토록 주장하는 것처럼 과연 정치와 그의 작품은 전혀 별개인가? 이 면에서는 내게도 좀 더 많은 생각이 필요할 것이다. 그건 그의 문제 제기처럼 어려운 문제이며, 어떤 면에서는 애매한 문제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까지의 아주 사적인 나의 철학에서는, 극도로 호모포비아적인 사람이 만든 음악이라는 것을 알고는, 그의 음악을 전혀 듣고 싶지가 않아졌다.(그럼, 이건 나의 “다양성?”) 예술은 어떤 식으로든 그 사람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위에 인용한 인터뷰 뒤에 이어지던 말들에서 관찰한 그는 굉장히 냉소적이고, 어두운 사람이었고 그게 어떤 식으로든 음악에 보여지고 있겠지. 그리고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불합리적인’ 증오와 (이른바) 소수자에 대한 태도가 저렇게 독단적이며 폭력적인 사람이 만든 음악이, 이제 더 이상 내게 얼마나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을까? 그리고 호모포비아 노래는 그가 가지고 있을 아주 다양한 모습들의 매우 단적인 예일 것이고, 내가 이 인터뷰글 외에 이장혁이라는 인물에 관해 아는 것은 거의 없다. 그 약점은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긴 글로 지금 그를 비판하고 있는 까닭은, 그건 명빠냐 노빠냐, 한나라냐 진보신당이냐의 차이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매우 근본적인 문제로 내게는 느껴지기 때문이다. 단순히 좌냐 우냐의 문제보다, 그에게 지난 촛불시위가 “냄비근성”이라서 "웃긴다"고 했다거나 하는 그런 문제보다도 이건 더 밑바닥의 것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말이다. 우리가 ‘인권’이라고 부르는 게 있는거니까. 그리고 나는 그것이 한 사람 한 사람의 감성과 감수성과 깊이 연결되어있다고 생각하니 말이다. 그런 면에 있어서 예술에게는 아무런 혐의도 있을 수 없다고, 난 말 할 수가 없다. 예술은 그저 '순수'하고 실재와, 현실(real)과 떨어져서 존재하는 그 "환상의 무엇"이라고 말 할 수 없다. 예술도 사람이 있어서 하는거다. 사람이 하는 거고, 사람을 향해있는 것 아닌가? 아닌가?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그래, 그렇다면 그건 당신의 "다양성"??!! 아무튼 그의 ‘호모포비아’ 노래를 그 관점에서는 난 완전히 말도 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이장혁 본인이 그렇게 끌고가기도 했지만, “호모포비아도 어떻게 보면 다양성의 하나일 수 있잖아요.”라고 맞받아치는 페이퍼 기자라니, 두 번째 ‘오 마이!!’ 이번 호부터 이석원의 글이 연재된다고 하기에 샀던건데 PAPER가 원래 좋아하는 취향도 아니였거니와, 아무튼 앞으로 내가 이 잡지를 사서 보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이제 나는 내가 사랑하지만 잘 모르는 이들의 정치적/인권 감수성이 저렇게 낮지 않기를 부디 바랄 뿐이다.(오 제발, 이건 좀 비겁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죽을 때까지 내가 그 사실을 알게 되지 않게 하시길!) 예술이 타인의 마음을 건드리는 일이 아니었더라면, 그 마음들과 대면하는 일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이렇게까지 열 내지는 않았을 거다. 적어도 아직 나에게 있어, 결코 그건 용납되지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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