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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2/27
    모성의 재구성 -정은 (1)
    반차별팀
  2. 2009/12/21
    메이크업한 자화상(1)
    반차별팀

모성의 재구성 -정은

모성의 재구성

 

 

흔히 자아의식이 정립되지 않은 어린 여자 아이, 혹은 심지어 성인 여성들조차 자신의 꿈을 ‘현모양처(賢母良妻)’라 답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현모, 지혜로운 혹은 어진 어머니, 그리고 양처, 좋은 아내를 일컫는 이 말은 이에 대비되는 남성에 해당하는 단어만 떠올려 보아도 얼마나 남성 억압적 기재의 산물인지, 소위 남성들만의 남성적 언어임을 인식할 수 있다. 양처현모가 아닌, 착한 아내보다 앞서서 중시되는‘현모’, 지혜로운 어머니를 기대하고 강조할수록 그녀들의 뒤편에는 또한 수많은 ‘우모(憂母), 어리석은 어머니’가 있다.

 

 

모성(母性). 어머니됨이 본성이라는 이 두 글자는 사회가 요구하는 현모와 맞닿아 있다. 모성은 흔히 여성이라면 태어날 때부터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는 본성이자 자연적인 현상으로서 아이를 출산함과 동시에 어머니 노릇은 더욱 극대화되는 양상으로 드러난다. 

  

 

모성은 절대적인 본성이 아니다. 부단히 변화될 수 있는 상대적이고 역동적이며, 누구나 선택 가능한 개별적인 기재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헌신적인 ‘모성’은 또다시 그녀들의 딸들에게 되물림 되고, 더욱 더 잔인한 형태로 어머니 노릇에 대한 사회적 기대는 이상화되어 가고 있다. 따라서 어머니 노릇을 경험한 어머니, 그리고 그 ‘모성’을 되물림 받고 싶지 않은, ‘모성’의 헌신을 받고 자라난 우리부터 스스로 ‘모성’에 대한 인식, 의식을 변화시켜야 한다.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는 신과 그 신의 의지에 따라 종속되는, 모성을 위대하게 신성화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대상물로서의 관계가 아니라, 인격 대 인격,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관계로 재정립해야 한다. 자녀는 그 누구의 종속물도 아니고, 어머니가 전적으로 책임져야 할 대상물도 아니다. 그저, 대등한 인격체이자 사람일 뿐이다. 어머니는 자녀를 일류대학에 보내지 않는다하여, 자녀를 사회적으로 성공시키지 못한다하여 ‘모성’을 져버린 나쁜 엄마가 아니다. 어머니 되기를 거부했다 하여, 그리고 사회가 정상가족으로 치부하는 부, 모, 자녀의 가족(사회가 규정한 정상가족이지 결코 이것이 정상가족은 아니라 할 것이다. 절대적인 정상가족이란 없으며, 형태를 불문하고 어떤 가족이든지 존중받아야 한다)을 꾸리지 않았다 하여 그녀들을 비난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주어져 있지 않다.

 

 

또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여성 스스로 무의식적으로 모성을 강조한다는 점에 있다. 일과 양육 속에서 슈퍼우먼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는 여성들은 ‘모성’의 역할을 친정어머니, 혹은 시어머니의 몫으로 전가하고 있다. ‘모성’을 요구하고 요구받는 누군가가 있는 한, 이 지독한 되물림은 결코 종식되지 않음을 여성 스스로 따끔하게 인지해야 할 것이다. 특히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가부장제와 맞닿아 있는 ‘모성’이데올로기는 여성 억압적 기재의 악순환 고리의 핵을 이룬다 하여 이를 배제하는 것만이 해결책이 아니다. 모성 자체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약자에 대한 배려, 유연함, 존중, 보살핌’의 기재로서 분야를 막론하고 사회의 모든 기저에서 재발현 되어야 하며, 이 기재는 남성, 여성 주체를 막론하고 누구나 접근 가능함을 주지시켜야 할 것이다.

 

 

헌법이 보장하는 모성을 보호할 권리는 더 이상 여성의 활동을 제한하고 여성을 가정 내에 고립시키는 요인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모성이 가지는 역량을 남성, 여성의 주체의 구분 없이 누구나 가질 수 있고, 만끽할 수 있는 권리로서 의미를 재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남성 위주로 움직여진 지금까지의 사회문화적 구조에 비추어, 여성의 인력 활용의 중요성과 보육의 문제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끊임없는 인식의 전환, 그리고 모성보호권이란 가만히 있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주장해야 할 권리라는 인식을 누구보다 여성 스스로 인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과 양육의 자유로운 선택과 양립을 할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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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크업한 자화상

 

 

며칠 전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분명 이번에 대학에 입학한 것이 분명한 여학생 둘이 OT에 갔다온 이야기를 들었다. 그 때 나는 mp3를 집에 놓아두고 온 날이었고, 그래서 나는 눈으로는 책을 쫓고, 귀로는 내 바로 뒤에서 그 여자아이들이 말하는 것을 다 쫓는 수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녀들은 지난 신입생 OT에 가서 화장을 다 지우고 '쌩얼'로 잘 준비를 하려는데, 남자애들이 자기들 방에 놀러오라는 바람에 BB 크림을 숨겨서(다른 친구들과 화장하지 않기로 약속했다며) 그걸 몰래 바르곤 남자아이들 방으로 갔던 것이다. 그녀들은 이제 막 화장이 '합법적으로' 허용되는 스무살이 되었고, 남자아이들에게 잘 보이고 싶었을 것이며, 그 녀석들 중의 하나 정도는 마음에 두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다만 '막 스무살이 된, 예뻐보이고 싶은 여자 아이'의 심리를 반영하는 것, 그것 만은 아니다.

 

프랑스어 선생님이 프랑스에 장기간 체류하다가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신기하고 달랐던 건, 한국에 오니 여성들이 너무 '예뻐보이려고' 애쓴다는 것이었다. 아침의 지하철에서도 많은 여성들이 화장을 하고 있고, 굉장히 "예쁘게"하고 다니는데, 프랑스 여성들은 거의 그렇지 않고 비가 와도 우산도 쓰지 않고, 뭔가 묻어도 쓱쓱 그냥 털어버리는 등 자신이 '어떻게 하면 예뻐보이는가'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 보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게 또 프랑스 예찬론이냐고 발끈할 준비를 할 필요는 없다. 그는 프랑스는 이런데, 한국은 이래서 안 좋다는 의도로 말한 것은 결코 아니었으므로. 오히려 그것의 반대였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나는 고맙죠."라고 덧붙혔던 것이다. 거기에 나는 "당연히 그러시겠죠."라고 조용하고 비교적 온화하게, 미소까지 지으며 응수했던가?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내가 지금 묘사하고 있는 이 상황들은, 내게 무엇을 암시하는가? 결혼식이나 웨딩드레스가 화려할수록, 그 나라에서 여성이 결혼 후에 얻게 되는 지위는 낮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예쁘다는 게, 화려하다는 게 늘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리라. 어쩌면 이곳은 단지 '예뻐야만 사는', 그러니깐 못생긴 몬스터들은 행복하게 살 수 없는, 스물만 넘으면 모두들 화장을 하는 메이크업의 공화국인지도 모르므로.

 

나는 그 밤의 지하철에서 조우한 여자 아이들과, 화장하지 않으면 '예의가 없는'게 되어버리는 여자들과, '예뻐보이고 싶은'(혹은 예뻐보여야 하는) 수많은 여자들의 얼굴에서 이 감동적이게 '예쁘고도' 슬픈 자화상을 본다. 이들은 누구인가, 그녀들은 나였던 게 아닌가. 그러나 나는 '예쁘지' 않다. 나는 '예뻐지고'싶은가? 그렇다. 나는 예쁘고 싶었다. 나는 예뻐져야만 하는걸까? 예뻐지면 편하겠지, 나는 굳이 실력에 쏟는 힘을 조금 줄여도 좋을거야. 내가 조금만 좋아하면 남자들은 나를 많이 좋아하겠지. 그래, 내가 조금만 얼굴을 뜯어고칠거라고 마음 먹어도 내 인생은 백 팔십 도 달라질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예쁘게 '변하면' 나는 되는걸까. 아니, 당장 내가 아침마다 아이라인을 그리는 것은 외꺼풀을 가진 나의 인상이 좀 강해보이고 싶다는 그런 '단순해 보이는' 이유에 의한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게 '동 충동'과 구분되는 것이라고 믿으며 자위하고 있는 것 아닌가?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엄기호, 낮은 산) 중에 가장 성형수술을 많이 하는 여성 집단은 여상 졸업생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사실상 누군가에게 '간택'받아야만(물론 자본주의 세상에서 이는 보편적인 현상이지만, 대부분의 그녀들이 취직을 할 직장은 그 정도나 방식이 특기할 만하다는 점에서) 취직이 가능한 직장을 지망하는 이들이, 가장 기본적이고도 적극적이게 수행할 수 있는 취직준비는 바로 성형수술인 것이다. 그래서 이런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돈도 없고, 공부도 못하고, 못생기기까지 한' 여자애들이라고 한다. 돈도, 기술도, 빽도 아무것도 없을 때 여성들이 택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는 바로 그녀들의 몸이니까. '팔 몸'조차 이용할 수 없는 이는, 그 얼마나 불쌍한 여자가 되는 것인가.

 

나는 예쁘지 않으면 안되는, 예뻐야지 인정받고 먹고 살고 사랑도 할 수 있는 현실의 자화상을 이들의 얼굴에서 본다. 한국만큼 여성들이 예쁘고 늘씬하고, 하나같이 옷 잘 입고 다니는 나라가 없다는 것은 칭찬일까? 오히려 그건 이 곳에 대한 흉이며, 그런 곳에서 어떻게 살겠냐는 야유로 들리는 건 나의 지나친 사회학적 결백증에 의한 망상인가. 하아, 예쁘지 않고, 통통하거나 뚱둥하고, 옷을 제멋대로 입는 여자들이 마음껏 자유롭게, 기분좋게 거리를 활보할 수 없는 이 공화국에 대한 기막힌 찬사라고.

 

이는 그녀들의 잘못은 아니다.

남들에게 더 예뻐보이고 싶은 마음,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거의 모든 여자애들이 나이보다 몇 살은 더 나이 들어 보이는 화장을 하고 집을 나서고, 화장 하지도 않은 얼굴은 감히 보이지도 말라는(완벽쌩얼을 가진 연예인들 빼고) 이 시대의 처절한 금기에 철저히 순응하고 있는 이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건 '예쁨 충동' 그 뒤에 '죽음 충동'의 기괴한 얼굴을 하고 내달리고 있는, 그 이 거대하고도 괴기스러운 메이크업의 공화국에 정착하기 위한 필수조건인 것을.

 

 

최근에 내가 발견한, 공부하는 나로서의 치명적인 단점 하나는 종종 내가 일반화를 쉽게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특히 그건 여성과 남성의 문제에 관해 이야기할 때 가장 잘 드러난다. 애써 지금 변명해보자면, 그러한 주제에는 반드시 완벽한 일치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경(성)향'이 있음은 진실이라고 생각되는 경우가 많이 존재하기에 그랬다. 그러나 그 성향은 결코 내게 득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그것을 깨달은 나는 그 치명적인 오류가 나의 사고를 갉아먹지 않도록 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하리라. 그러나 이 글에서 한해서는, 이 나의 '일반화'가 그리 성급하거나 틀린 것 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감히, 이 글에서 나는 용감하게도 이 사회의 메이크업한 자화상으로서의 '일반화'를 감행한다.  

 

 

 

 

 

by 꿈의택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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