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7/08

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8/26
    2007네팔(7)-안나푸르나 트레킹(2)
    랄라^^V
  2. 2007/08/25
    2007네팔(6)-안나푸르나 트레킹(1)
    랄라^^V
  3. 2007/08/20
    영화와 춤극
    랄라^^V
  4. 2007/08/17
    메일을 받았다..
    랄라^^V

2007네팔(7)-안나푸르나 트레킹(2)

걸어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다 보니 잘 걷는다. 두 다리가 유독 튼튼한 이유도 있다. 가이드 디카는 나에게 'strong leg'을 가졌다고 칭찬할 만큼 잘 걸어다녔다. 산 이라서 좋았고, 여유있게 이동하는 사람들 틈 속에서 이것 저것 내 맘대로 할 수 있는게 많아서 좋았다. 숨 틔임 이랄까.

 

안나푸르나 트레킹은 사실 눈빨 날리는 곳에 가지 않고서는 뒷동네 등산하는 기분이다. 이정표가 뚜렷한 것도 아니고 한국의 등산로 처럼 아스팔트가 깔려 있는 것도아니고 .. 네팔 고산족이 사는 곳을 지나치며 이동하고, 코스가 어렵지도 않다. 상황에 따라 산 하나 전체가 증계이거나, s 라인으로 쭉 파진 길 때문에 바들바들 떨어야(고소공포증이 있는 경우) 하기도 하고, 간당간당한 줄 다리 건너는 스릴도 있지만 내가 간 코스까지는 그냥 뒷동산과 같은 동선이었다.

 

-> 산 밑에 있기에 일출을 볼 순 없지만 해가 떠오르면서 생기는 산 그림자는 볼 수 있다. 산..정말 좋다.

 

 

-> 산에 있는 로지나 고산족들의 생필품은 이 녀석들이 책임지고 있다. 목에는 종 달고, 일렬로 걸어다니는 당나귀들. 트레킹 하다 보면 하루에 두세번은 만난다. 이녀석들은 지구력은 있지만 속도가 늦기 때문에 이들을 만나면 먼져 보내주거나 아예 앞질러 가야한다. 먼져 보내주면 당나귀 똥을 계속 밟으면서 가게 되는 단점이 있다.

 

나야풀에서 시작했지만 둘째날은 고레파니(Ggorepani)에서 묵었다. 고레파니 정도 올라오니 사실 공기가 달라짐이 느껴졌다. 사실 첫 날은 땀이 나서 반팔입고 올라왔는데 이제 부터는 긴팔입고 다녀야 할 만큼 더워도 일상의 공기가 차졌다.



고레파니에서 새벽에 일어나서 이동하면 푼힐(punhill) 전망대에서 멋진 일출을 감상할 수 있다. 왕복 5시간 정도 걸린다.

 

 

 

그리고 아직은 낮은 수위였지만 일행중에 고산병 증세를 나타내는 사람이 생겨서 느릿느릿한 이동은 더욱 속도를 늦췄다. 고산병은 해발 2500m 이상이 돼 산소가 부족해서 나타나는 증세라고 하는데 어지럼증이나 구토나 소화불량 두통등의 증세가 나타난다고 한다. '인덕'이가 고산병 소화불량과 어지러움의 고산병 증세를 나타내니 스님들이 평소 들고 다니는 침을 활용해 손을 따기 시작했다. 로지에서 난로에 옹기 종기 앉아서 10손가락에 10 발가락까지.. 구경하던 외국인 뭐하는거냐 물어 보고 .. 물론 나 같은 사람은 고산병 '고'짜의 증세도 없이 씩씩하게 잘 다녔다.

 

이동하던 중 카트만두에서 포카라로 같이 왔던 녀석들을 만났다. 푼힐까지만 짧고 굵게 갔다올 계획이라던 녀석들은 힘들어서 죽으려고 했다. 어찌나 반갑던지 .. 내 첫인사말은 "너네 살아있었구나" 였다. ㅋㅋ 이 녀석들은 심지어 인도 바라나시 길거리에서도 만난다.

 

 

 

-> 어딘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 로지를 배경으로 찍어본 사진.

 

고레파니 숙소에서는 가무의 판이 벌어졌다. 네팔 사람들 특히 산에 다니는 사람들은 음주가 없이도 가무를 즐기는 듯 했다. 호기심 쟁이 '진경' 스님이 벽에 걸린 악기를 건드렸다가 시작된 노래 공연. 네팔 노래도 처음 들었거니와 육성으로 듣기는 정말 처음이었고, 그 노래에 맞춰 다들 춤도 추고..

산에 올라오는 동안 흘리는 땀만큼이나 흥겨운 놀이다.

 

 

-> 같이 다닌 일행 중 한 명과 함께. 난 트레킹을 할 계획도 없었는데 배낭 여행을 준비하면서 등산복과 등산화를 챙겨왔다.. ㅋㅋ 선견지명이랄까...^^ 모자를 쓰고 있는 이유는 추워서가 아니라 햇볕이 너무 강했기 때문..

 

-> 동선 자체가 네팔 사람들이 사는 집을 지나갈 수밖에 없게 돼 있다. 지나가다보면 아이들을 많이 만난다. 카메라만 들이대면 알아서들 V자를 그린다. 워낙 한국인 등산객들도 많고 사진을 같이 찍는 경우도 많아서 아이들이 매우 반응이 좋다. 나중에 만난 네팔 친구 '부릉'은 아이들에게 사탕이나 초콜렛을 주지 말라는 말을 했다. 여행객들은 하나 둘 주는 거지만 여기 아이들이 치과를 가기 힘들거니와 양치도 꼬박꼬박 챙기기 어려워 이빨이 썩는다는 거다.  아이들에게 좋지 않으니 주지 말라는 경고.

 

-> 이런 정경을 보고 있노라면 머리가 백지가 돼 버리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얼굴에 베어나와 버린다.

 

=>트레킹을 하면서 고지를 향해 올라갈 수록 모든 음식, 물값이 비싸진다. 손님이 일상적으로 있는게 아니기 떄문에 사실 점심 식사 한번을 하려 해도 한시간 이상이 걸린다. 그래서 보통 트레킹 하는 사람들은 식방에 쨈을 챙겨와서 점심은 짜이와 함께 간단히 먹고 이동하고 아침 저녁을 든든하게 먹는다고 한다. 물론 우리 일행들은 3끼 모두 천천히 밥 다 챙겨 먹었다. 난 아침과 저녁은 무조건 라이스로 먹고, 공갈빵 처럼 생긴 네팔빵을 점심으로 많이 먹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7네팔(6)-안나푸르나 트레킹

다시 여행일지를 펴 들고 ^^;

가물가물한 기억의 끝을 정리해 볼까나..

이렇게 더운 날씨에 더욱 그리워 지는 네팔..

그립다..

지금 한 참 예쁠텐데..

 

네팔의 포카라에는 한국식당이 많다. 결국 현지에서 일행을 구하지 못했던 나는 혼자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하기로 결심했다. 가이드 겸 포터 한 명을 구하고, 두툼한 오리털 침낭을 빌리고, 모자와 장갑을 구입하고 내일의 트레킹을 위해 늦으막히 저녁을 먹으며 힘다지기를 하고 있었다.

 

네팔에서 천금같은 삼겹살을 먹는 것은 너무 호사이고..

그래도 보신을 해야 겠기에 '한국 사랑'이라는 한국음식 전용 식당에 가서 닭도리탕을 시켜먹었다. 저녁 9시가 넘은 시간 손님도 없고 한적한 식당에서 혼자 열심히 닭다리 뜯으며 다음날 부터 시작한 트레킹을 상상했다. '혼자여도 괜찮아' 주문을 외우며 열심히 먹고 있던 찰라 '삼겹살을 먹자'며 한국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한국 사람들은 음.. 우르르 몰려 다닌다)

 

포카라에서 고기 먹는 사람들은 십중 팔구 산에 올라갈 계획이 있거나, 아님 오늘 산에서 내려 온 사람들이다. 그들 얘기에는 관심도 없거니와 난 먹는데 완전 몰입한 상태였다.

 

'한국사랑'에서 먹은 닭도리탕. 네팔에서 이런 음식을 만난다는 건 .. 정말.. ㅡㅜ

-> 정말 양호하지 않은가..네팔에서 먹는 닭도리탕.. 한국과 맛이 똑같았다.  

 

갑자기 일행중 한명이 내 옆 벽에 걸린 지도를 향해 걸어왔다.

"이렇게 가는 일정이라니까"라며 지도를 보고 일행들과 얘기를 한다.

 

그러더니 갑자기 나한테 말을 시킨다..

 

"트레킹하셨나봐요.. 고기 드시게.. 어떠셨어요?"

"아..(먹던 고기가 걸려서..) .. 아뇨 .. 내일 가려구요.."

"설마.. 혼자가세요?"

"네 .. 그럴려구요..일행을 구하다가 못구했거든요..."

"아? 그래요.. 잘됐다.. 우리 일행 구하고 있었는데.. 일정 맞으면 저희랑 같이가요.."

 

무슨 드라마 처럼 혼자 몸보신하다가 일행들을 만나게 됐다.

졸라 기뻐하며 포터 예약 취소하고, 이들과 어울려 짐도 다시 챙기고 ..

날 버리고 애인찾아 떠난 친구한테 메일 보내고 그 밤이 너무 짧았다.

   

그렇게해서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같이 하게 된 일행은 1년 동안 트레킹을 준비해 왔다는 나이 지긋한 선생님 한 분, 유학을 앞두고 추억여행을 하고 있는 커플 그리고 불교 성지들을 여행하고 있는 스님 2분.




일지를 보니 07년 1월 12일 부터 17일까지 안나푸르나(annapurna) 트레킹을 했다.

트레킹을 하려면 우선 공식적으로 네팔 정부로 부터 허가, 퍼밋(permit)을 받아야 한다.

절차나 요건이 까다롭지 않다. 중간 에이전시를 통하면 10~20Nrs의 수수료를 받지만 직접 가서 신청서 작성해서 제출하면 수수료는 들지 않는다. 사진과 퍼밋 요금 2,000Nrs를 신청서와 함께 작성해서 제출하면 10분만에 나온다.  난 출발당일 택시 타고 가서 받아서 출발했다.

 

그리고 안나푸르나 트레킹 하는 입구에서는 마오이스트들이 트레킹하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요금을 받는다. 이에 대한 관광객들의 반발이 적지 않는데, 가이드 설명에 따르면 마오이스트들과 정부가 합의해서 입장료를 걷을 수 있게 했다는 것과, 이 돈이 주요하게 마오이스트들의 활동 자금으로 쓰인다고 설명을.. 음.. 하루에 100Nrs로 책정해서 트레킹 일정 동안의 요금을 받는데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하기도 한다.

 

-> 큰 가망을 짊어진 사람이 우리 가이드 '디카' . 입장료 협상 중인 셈.  허술하게 보이지만 뒤에 앉은 사람들이 마오이스트들. 레닌과 마오의 사진이 걸려 있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은 일정을 짜기 나름인데 우리는 나야풀(nayapul)에서 시작해, 고레파니, 푼힐, 촘롱(chhomrong), 안나푸르나 베이스 켐프로 이동하는 동선으로 10일+알파의 일정으로 이동하는 동선이었다. 워낙 구성 멤버들이 무리하지 말자는 주의여서 일정이 빠뜻한 나 같은 사람만 조바심 나는 상황이었다.

 

12일 오전 9시 부터 트레킹을 히작하려 했지만, 늘어지고 늘어져 점심 때 쯤에나 트레킹을 시작할 수 있었다. 포카라에서 나야풀까지는 버스로 이동할 수도 있지만,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택시는 정액인데 음.. 가격이 잘 기억나지 않고, 난 할당된 200 Nrs를 냈던 기록만 남았다.

 

 

 

사랑곶 사전 탐방을 잘한 셈이다. 안나푸르나의 초입은 마오이스트들만 지나쳐 오면 화살표 하나 없이 그냥 산이다. 로지(lodge)들이 곳곳에 있다고 하지만, 나야풀 초입의 상가들을 지나쳐 오면 그 뒤로는 산과 들과 물만 있을 뿐 어디가 어딘지 전혀 알 수가 없게 돼 있다. 혼자 다니는 외국인들이 있기는 하지만 결국 가이드나 포터가 없이는 이동하기 쉽지 않게 돼 있다.

 

짜이 한잔을 마시고 시작한 트레킹. 첫날은 나야풀에서 시작해 비레탄티, 힐레를 넘어 티르케둥자와 울렐리(ulleri) 중간에서 일정을 마무리 했다. 늦게 시작했기도 하지만, 산이라 해가 일찍 지기 때문에 3시에 이날의 일정을 마무리 했다. 거짓말 처럼 4시 부터는 해가 지기 시작하는데.. 정말 놀라울 뿐이었다.

 

밤은 일찍오고 할일은 없고..

모여서 오손 도손 통성명 하며 얘기도 들으며 ..

 

시트콤 같은 스님들의 불가 생활얘기와 왜 트레킹을 하게 됐는지.. 그 이전 여행 코스는 뭐 였는지.. 그들은 이미 서로를 알고 있었지만 제일 늦게 합류한 나에게는 그들의 정보가 없으니..마냥 들으면서 웃고 떠들고.. (이날 사람들은 나에게 반드시 '룸비니'를 가볼 것을 강권했다. 결국 막판에 난 팔랑귀가 돼 급 하산하게 된다 ) 이런 표현은 그렇지만 ... 난 트레킹 내내 스님들의 신념과 의지에 감동했다. 정말 세상에 좋은 사람들이 참 많다는 것을 느낀 날이다.

 

밤이 되니 산의 추위가 느껴졌다.

말로만 듣던 그 추위.. 아직은 산 밑이라 경미한 수준이라고 하지만.. 

추위에 약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치명적일 정도였다.  

보온 물병도, 보온통도 가져오지 않은 나는 hot water만 시켜 먹을 뿐이다.

 

다행이 내 얇은 침낭 1개와 빌려온 오리털 침낭 1개로 밤의 추위는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최후의 보루로 카트만두에서 나의 등산 욕구를 자극 시킨 녀석들이 준 쑥 보온 팩을 남겨 뒀다.  

'화상주의'라고 경고를 할 만큼 효과가 뛰어나다고 하니 정말 너무 추운 극적인 그 날 난 이 팩을 쓰리라 마음을 먹으며..

 

정말 일찍 잠이 들었다. 해가 뜨는대로 움직여야 하니..

 

=>트레킹 멤버는 6명이지만 스님들은 각자의 짐을 직접 들었다. 그러니 4명의 인원이 한명의 포터와 한명의 가이드와 동행한 셈이다. 가이드 '디카'는 포터로 자신의 부인 '머누'를 데리고 왔다. 아이들은 할머니가 맡고 있다고 말했다. 머누는 사탕과 초콜렛을 나눠 먹을 때는 아이들이 생각난다는 말을 영어로 하며 따로 챙기기도 했다.  여행 내내 이들의 가족, 결혼, 미래의 꿈 등 많은 얘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 트레킹 할 때 꼭 챙겨야 할 것. 한국 사람들은 꼭 스틱 챙기는데, 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안나푸르나 일정에 스틱은 필수품은 아닌거 같다. 북한산 등반보다 더 쉬운 코스여서.. 대신 꼭 필요한 것은 보온병이나 보온통. 추워지면 난로처럼 사용하기도 하고, 목이 마를때는 찬 물보다 따뜻한 물이 더 좋다는..  그리고 물수건과 따뜻한 옷.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영화와 춤극

 

내가 가진 정보가 어느 정도 사실일까...

남들이 사실이라고 하고, 사실이란 얘기를 듣고, 인터넷에서 보고, 가장 믿음직 스럽게 TV에서 까지 확인해버리면 여지 없이 100% 사실로 믿어버리는 얇은 귀를 가진 나 같은 사람.

때론 소문도 사실로 둔갑해 버린다.. 얇은 귀만 탓할 순 없겠지...


최근에 나의 역사적 지식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꽤나 있었다.

이러고 있으니 내가 뭐 좀 알거 같은 느낌이 드는지, 소감도 물어보고, 그게 사실이냐고도 묻는데..글쎄 ..난 뭐 별로 할 말이 많지 않다. 가진 지식도 미천하거니와..

심지어 그냥 내 느낌을 너무 솔직히 얘기하면 상대방이 당황하기도 한다..

딱히 정리되지 않는 느낌만이 내게 남아있기 때문인 거 같다..

2007년의 하반기를 넘어가면서 왠지 나사 하나 빠진 듯, 시대적 감흥과 사명을 잃은 나의 좌표 때문일 수도 있겠다 싶다.

여전히 미숙한 나의 말투 때문일 수도 있고..

술독에 빠진 다음날 술 냄새 풀풀 풍기며 ‘화려한 휴가’를 봤다.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연락온 후배녀석의 배려로 ‘꽃은 피어 웃고 있고’를 봤다. ‘화려한 휴가’는 논쟁이 불붙은 영화이고, ‘꽃은 피어 웃고 있고’는 춤극이다. 사실 난 춤극이 처음이었다.

 



‘화려한 휴가’는 워낙 유명하니까.

술기운에 감상적인 호르몬이 발동했는지 몰라도 영화 내내 그렇게 눈물을 닦아냈다. 사무실에서 ‘나 화려한 휴가 보고 정말 많이 울었다’고 말했다가 ‘어떻게 그 영화를 보고 그럴 수 있냐’는 응답을 받기도 했다. 사실 그런 반응은 적지 않았다. 왠지 운동권은 그 영화를 보고 울면 안될 것 처럼..머슥하게..

그렇지만 난 정말 슬프게 그 영화를 봤다. 애초에 기대가 없어서 그랬나. 정말 덜 깬 술 탓인가..너무 많은 기대를 걸지 않았기 때문에 난 그 자체를 하나의 드라마로 봤던 거 같기도 하다.


그냥 가족을 잃은,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도청을 지켰을 그밤에 느꼈을 그들의 무서움과 답답함, 살아남은 아니 후대의 사람으로 그 원흉과 여전히 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짐. 그냥 영화 내내 모든 것이 서러웠다.


항쟁의 주체였던 ‘열사 윤상원’이 아니라 ‘퇴역 공수부대 대령’이 도청을 마지막까지 사수했고, 배신을 때린 것으로 알고 있는 시민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나오는, 천주교 신부가 마지막 도청 사수 하러 오는 모습을 보면서. 사실과 소설이 넘나드는 사이, 역사적 사실과 픽션의 영화가 뒤엉켜 버린다. 사실은 지워지고 픽션만 가슴에 담아서 난 그렇게 슬펐나 보다.


‘꽃은 피어 웃고 있고’는 일제 시대를 살아간 여성들, 일본군 위안부(이 표현도 적절치 않다고 하지만 달리 뭐라 적어야 할지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 피해자들에 관한 춤극이다. 보러 가기 전에는 ‘춤’으로 뭐가 제대로 이해가 될까 싶었는데 보는 내내 그들 손짓 하나, 고개 떨림 하나 하나에  내 가슴을 쓸어 내렸다. 음향에 심장이 떨리고, '엄마'라는 외침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관객들은 공연자들의 지인도 많았지만, 관련 단체 활동가나 할머니들도 꽤나 많았다. 행사 소개서에 보면 ‘일제 36년 압제와 굴욕의 질곡 속에 희생양이 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한을 풀기 위한 계기로, 민족의 정서가 담겨있는 한국 춤을 통해 역사를 재인식하고 몸짓 속에서 민족의 뿌리의식을 되살리고자 마련되었다’는 요지의 소개가 있다.

글쎄 민족의 뿌리까지는 모르겠고...

안타깝게 보내는 조선 청년들의 머뭇거림도 모르겠고..

근데 그들의 몸부림을 보고 있자니 한 없이 마음이 꺼져 들어갔다.

어떻게 그렇게 살아오셨습니까...

그런 세월 어떻게 살아 지금 그렇게 싸우고 있습니까.

나라면 어땠을까.

내가 그리 좋아하지 않는 ‘아리랑’이 수십번 나오고, 과거의 영상이 수도 없이 나오고, 피해자들의 육성과 영상, 부서지듯 이어지는 춤사위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주르륵.

 

워낙 이런 것들에 취미가 없는지라. 즉자적인 감정 반응에 약한거 같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 당황 해 더 눈을 크게 뜬다. 

 

'화려한 휴가‘를 보고난 누군가 내게 감상평을 묻는다. 


“정말 애국가가 울릴 때 총을 쐈단 말이야?”캬아.. "비극적인 세상이야.."

"음..  글쎄...”

"퇴역 공수부대 대장? 대령?이 정말 현장에 있었어?"

"음... "

‘꽃은 피어 웃고 있고’의 마지막 장면은 일본 천왕이 사과하는 장면이다.

“정말 사과했나?”

“글쎄....”

 

내 모든 답은 ‘글쎄’였다.

도대체 제대로 아는 사실이 하나도 없다.

알 수 없을 수도 있는데..뭔가를 뒤집어 까고 싶기도 하고, 명쾌하게 정리하고 싶기도 한데 뭔가의 끈적한 줄에 메여 있는 느낌이랄까.

 

내 뒤 통수를 잡는 건.

나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무지함이 아니었다.

두 작품을 보고 난 내 느낌은 사실..

내가 그 시대에 살지 않아서 다행이다. 아니 설령 살다가 죽었을지도 모르겠지만 ..

지금의 내 삶의 스토리에 군대가 없고, 총을 들고 나서지 않아도 되고, 사막에서 물을 길으러 가지 않아도 되니 .. 이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스스로에 대한 위안 뿐이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이 나와 동떨어진 제 3자의 쑈 처럼 보였던 게다.

감정 이입하고, 몰입해서 눈물이나거나 슬프고 안타까운게 아니었던게다....

병에 걸린 거 같다..이건 아닌데.. 싶은 병..

요즘은 자판만 두드려서 그러나

나이 먹어서 그런가

눈으로 읽히는 그 비극의 대상에 내 얼굴이 끼어 있지 않은 것 만으로도 다행이란 생각이 드니..

내가 사는 이 세상에서 나 또한 싸우고 있는데..

왠지 그게 꽤나 멀리 있는 거 같고..

난 제 3자의 관객이 돼 있는 느낌이다..

내가 작품을 보고 운 것은 작품에 대한 감동 때문이 아니라서 미안하기도 하고..

냉철한 평가도 못하고 ..

그저 이렇게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는 내 모습이 땅 으로 꺼졌으면 좋겠다

싶을 만큼 창피하기도 하고...

기억해야 할 것도 많고 넘치는 것도 많다.

나 같은 사람이 해야 할 역할은 그런 것들은

민중의 시각으로 기억하고 기록하는 역할일 거라고.... 

이제는 무게감을 짐작하고만 있을 뿐이지만..

마치 ‘화려한 휴가’에서 윤상원 열사를 과거의 책속에서 찾는다면, 

최근 세상을 달리한 고 윤한봉 선생을 기억해야 하는 것 처럼. 

어여 나사를 조여야 할 텐데..

스물스물 나를 물들이는 것들이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메일을 받았다..


블로그가 어색하네..

이렇게 오래간만에 들어오다니..

이런 내용들을 적어놨었구나... ..... .....



어색한 정체성으로 어정쩡하게 보내고 있는 요즘.



뜬금없이 왠 스펨 메일 같은 것이 하나 와 있었다.

"꼭 읽어주세요" 느낌표 팍팍!!



음... 읽을까 ... 말까...



읽을까 ... 말까 ....



혹시 바이러스라도 옮기면 성능 좋은 컴퓨터 맛 가는거 아닌가 싶어..

그렇게 그냥 지나쳤다.


다시 메일을 확인하다가 다시 '읽어달라'는 메일이 눈에 띄었다...

"도대체 무슨 광고를 이리도 유치하게 하냐"

중얼거리며 메일을 열었는데...



장문의 편지였다.

지역에 사는 고등학생이 보낸. 

최근에 반전 집회에서 만나는 녀석들을 같은 고딩이다. 


'도덕'(난 이런 과목을 배웠다는 것 자체를 잊고 지냈는데..) 과목 숙제란다...

자신의 꿈과 관련된 사람을 인터뷰 해오라는...( 심지어 요즘에는 이런 숙제도 내주나 ..세상 많이 달라 졌다..)

어찌된 인연인지 그 고딩은 날 찍어서 메일을 보냈다...

어찌나 정중하게 질문지를 보냈던지..

그 질문지를 확인하고서는 한 참을 멍하게 있었다.


그 고딩의 꿈은 '기자' 였다..

그리고 관심있게 봤던 몇몇 기자들에게 메일을 보냈다고 한다..


내가 ...

사춘기도 아닌데..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내가..

이 친구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멍먹한 마음에 한 참을 망설였다.

 


고딩의 숙제 덕분에

내 고민에 대해 내가 답하는 형태가 됐다..


내가 지고 있는 짐 꾸러미를 다시 살펴 보게 됐다.

지웠다 썼다가

 

쩔쩔 매면서 답을 적었다.

아..내가 왜 참세상에 다시 오게 됐을까..

내 활동은 뭘까.


내가 여기서 느끼는 보람은 뭘까...

내가 느끼는 어려움이 뭐지..

 

 

많은 것들이 그리워 지고 많은 것들이 후회가 되고

웃음도 묻어났다가 갑자기 우울해 지기도 했다가..

과거의 시간 속에서 원맨쑈를 하며 답메일을 보냈다.


그러고 보내던 그 날은

내 문제에 휩싸여 기사도 제대로 쓰지도 못했다.


"어떻게 저 한테 메일을 보내셨어요? 참세상을 읽는 고등학생은 못본거 같은데..?"

고딩이 관심있게 봤다는 몇개의 주제를 줬다.

가슴이 턱 막힌다..

음...

나.. 이런 식으로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호흡하고 있었구나..

 

나의 찌끄리는 찌라시...

음...

반성해야겠군...

낯 모르는 고딩의 메일 덕분에

책임감과 감흥의 일주일을 보내고 있다.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자문하면서.. ...

너무 오래간만에 블로그에 들어왔다...

내 껀데도 글이 내 꺼 같지 않다...

내팔의 푸른 산이.. 안나 푸르나..음...

 

음... 글고 블로그도 좀 손 보고..
삶도 좀 추스려야 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