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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대학원(준비) - 강좌 정리

2007년 9월 부터 12월까지 사화과학대학원 준비모임의 강좌를 들었다. (사회과학대학원(준)이 최근 사회과학아카데미로 이름을 바꾸긴 했다. ) 그리고 지금은(1~2월)은 '천개의 고원' 세미나를 하고 있다. 세미나도 재밌고 강의도 재밌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세미나가 좀더 분위기도 좋고 참가의 열의도 생기는 것은 무엇일까. ^^

 

아래의 내용은 참세상 편집팀 및 사무처에 제출한 강좌 보고서 이다. 참세상에서 교육비 지원및 중요 회의 결석을 용인해 줬기 때문이다. 덕분에 2007년 하반기는 널럴했다. 얻은 만큼 잃은게 있다.  단지 그 잃은 것이 지금은 아쉽지 않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정식적인 보고가 아니라 약식으로 정리한 거라 좀 어색하거나 거시가한 부분도 적지 않지만..

 

관련한 강의는 올 3월에도 개설될 예정이다.

그리고 기타 관련된 강의 자료는 까페에서 볼 수 있다.

까페: http://cafe.daum.net/ReturnMarx



 

 

강좌 보고

 

해당 강의 : 사회과학대학원준비모임 정치경제학 강의

 

기간 : 9월 14일부터 매주 금요일 15주 동안 진행

 

강사 : 김상조(한국 경제 진단), 강남훈(정치경제와 IT산업), 정성진(마르크스와 트로츠키), 장시복(세계경제 진단), 김계환(소련 경제와 러시아 경제) 등 한 강사 당 3회 강의 진행

 

1. 강의별 내용 정리

 

김상조 교수의 강의 주제는 한국 경제 진단과 당면 과제이다. 한국은행과 강사가 만든 지표 자료를 근거로 한국사회를 설명했다. 강의의 결론을 정리하면, 중소기업의 경우 정부의 막대한 지원속에서도 장기적으로 살아남지 못하며 규모와 생명력에 있어서 양극화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중소기업 육성책이 필요하다), IMF 이후 한국 경제는 재벌에 의한 집중이 더욱 심화 됐다는 것(전 산업에 걸쳐 5대 재벌의 집중도가 50%에 이르고, 이중 삼성의 장악도 단연 1등), 한국의 기업 양극화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내용은 삼성에 대한 일갈이다.

 

삼성에버랜드, 삼성생명, 삼성전자, 삼성카드로 구성되는 순환출자 고리가 비상장 금융보험회사를 중심으로 삼성에버랜드의 금융지주회사 논란과 삼성생명 및 삼성카드의 금산법 제 24조 위반 논란, 공정거래법 11조의 문제들 뿐만 아니라 '기업하기 힘든나라', 규제 철폐의 이데올로기를 반박했다.

 

스스로 한국의 대안 경제 모델이 북구 유럽일 수밖에 없다고 강조하지만, 사회적 합의를 주장하는 장하준 교수와는 인식 차이를 드러냈다. 장하준 교수가 주장하는 사회적 합의의 틀은 노조조직률, 사회운동의 특성, 합의 주체인 자본가들의 낮은 인식차이, 사회문화역사성 등을 근거로 한국사회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 김상조 교수는 '정부 관료'의 혁신과 자신이 가진 권리에 대한 참여 운동이 확산 돼야 한다는 주체적인 부분을 강조했다. 또한 경제적 대안으로 투기화를 조장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 투자로 환원될 수 있는 국내기관 투자자를 건전하게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남훈 교수는 기술발달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접근 및 해석을 강의했다. 그는 정보혁명에 의해서 새롭게 형성되어가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배제적 축적체제라고 규정하고, 이를 정보혁명 더하기 신자유주의라고 정리했다. 정보혁명이 양산하고 있는 광장으로의 정치, 프리커먼즈 운동과 리눅스 토발즈와 같은 공유 운동, 구성원 모두가 정보의 제공자이며 소비자가 된다면 네트워크 형태의 수평적 조직으로의 강점을 들었다.

 

문제는 강점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운동에 종속되고 신자유주의적 조절양식과 결합되어 배제적 축적체제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이고 이는 지적재산권, WTO나 FTA 와 같은 국제 기구를 통해 확산, 정당화 되고 있음을 설명했다.

 

강남훈 교수는 지식의 상품화는 사회 발전을 촉진하고 사회 전체의 이익이 되는 한에서 허용되어야 하며, 그 이득을 사회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력한 독점금지법을 만들어서 승자독식 경향에 제동을 걸고 경쟁을 촉진하여야 하고, 지대와 금융소득 등과 같은 불로소득에 대해서도 통제 기구를 만들어야 하며, 금융자본의 국제적 이동에 대해서는 제한을 가하고 투기성을 억제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과제를 남겼다. 개인적으로 강남훈 교수가 제기한 인터넷 공간에서의 '광장'이라는 개념이 재미있었다.

 

정성진 교수는 '마르크스와 트로츠키(한울아카데미)' 책을 기반으로 강의를 진행했다. 러시아에서 1905년과 1917년 혁명이후의 소련 그 과정에서 트로츠키가 전개했던 논쟁의 유의미성을 지적했다.

 

우선 절대적 기준이 트로츠키의 이론에 있는 만큼 정성진 교수는 소련의 내전과 계속된 스탈린 집권 과정에서 소련사회가 변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을 지적했고, 소련의 시장사회주의 모델은 자본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노동의 군대화와 노동조합의 국가기관화는 '비극적인 필요'의 부분이 있었음을 전제했다.

 

또한 시장을 활용하고, 노동자들의 자율적인 통제를 확대해야 하고, 노동자 민주주의가 확립되는 세상에서의 혁명을 말할 수 있다고 강조하며, 연속 혁명의 유효성 강조했다. 그는 노동자계급이 주체가 돼야 할 것과 민주주의 개혁의 요구 등 노동자 사회주의 주장 등 트로츠키의 주장이 여전히 유효다고 결론을 맺었다.

 

장시복 교수는 프랑수아 셰네가 지은 '자본의 세계화'를 교재로 3강을 진행했다. 장시복 교수는 최근 '금융화', '금융 주도의 세계화'에 대한 자신의 개념을 설명하며 강의를 시작했다. 관건은 금융자본이 산업자본을 지배하는 '금융화'가 아니라 여전히 산업자본의 이윤 창출 구조에 기생하며, 산업자본을 기반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금융자본의 특징들을 지적했다. 금융자본의 독자적인 현상이 아님을 강조했다. 아울러 초국적 기업과 관련한 기업분석에 착목하고 있는 자신의 논문 주제들과 관련해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또한 최근 '축적체제'로의 금융화를 제기하고 있는 단위들이 가진 논리적 한계, '체제'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금융화의 현상, 그리고 산업자본에 기생해 이윤을 낼 수 밖에 없는 금융자본의 태생적 한계 등을 이유를 들어 설명했다. 아울러 최근 발발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건이 세계적으로 확산될 수밖에 없는 구조, 파생상품의 시장 구조와 미국에서 발생한 다양한 기업 사건들, 미국 내 발생하고 있는 갖가지 경제 문제들에 대해 강의했다.

 

강의 순서가 뒤바뀌긴 했으나 김계환 교수는 '소련 경제시스템'을 중심으로 현재의 러시아 사회를 분석했다. 특히 프랑스에서 공부한 영향으로 조절학파의 분석 방법에 근거해 소련 사회를 분석하며 소련 경제시스템을 짜르에서 혁명의 소련, 그리고 지금의 러시아까지 단절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지표에 근거 해 연장선상에서 해석했다.

 

김계환 박사는 소련이 계획경제임에도 경기 변동이 굉장히 심했고, 경제 발전에도 가계소비가 확대 되기 보다는 감소하는 역행하는 모습이 역력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방비 지출은 상대적으로 높았고, 그와 비슷하게 R&D 투자 비용이 많았던 지점들을 지적했다. 소련경제를 보여주는 핵심은 80년대까지 기술진보에 의한 총요소 생산성(TFP)이 점점 낮아져 붕괴선언 직전에는 마이너스를 기록하는 지표를 들며 소련 경제의 침체를 설명했다.

 

소련경제는 내적으로 경제 공간의 이질성과 국민경제의 섹터별 구분한 동원경제, 대량 자원과 양질 자원구분하고, 우선제도를 둬 국방산업을 육성하고, 통제구조에 있었다는 사회 경제적 특질도 설명했다.

 

최악의 인플레와 경기침체 속에서 푸틴체제의 러시아는 오히려 박정희 식의 경제 정책들 통해 발전주의적 아시아 모델과 비슷하지만 러시아의 역사적 특성에 기반 한 경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마지막 강의였으나 듣지 못하고 예고 설명만 들음. 가지 못해서 아쉬움)

 

 2. 전체 총괄 평가

 

1) 강사들의 특징이 분명히 드러났다.

 

대부분의 강사들이 현직에서 그 영역에서 활동을 하는 주제로 강의를 진행했기 때문에 서브프라임, 삼성, FTA 등 현실의 주제들이 활용 됐고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특히 강사들이 바라보는 문제점과 운동에 대한 평가 및 학계 논쟁 및 야사 등 동네 에피소드들이 더해져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강의의 특징, 강사들이 주력하고 있는 연구의 특징 그리고 강의 방식의 특징까지

 

 

2) 주제별 강의의 내용적인 아쉬움

  

한 강의 당 3회에 불과해 사실상 수박 겉 핧기 식의 강의가 될 수밖에 없었다. 강사의 특징에 따라 강의 분위기가 좌우되고, 내용이 단편적으로 전달되거나, 강의를 듣는 다양한 활동가들의 격차에 의해 강의의 질을 담보하기는 쉽지 않았다. 결국 질의 응답으로 구체적인 내용이나 좀더 자세한 내용을 들을 수 있었으나 강의 시간의 제한으로(너무 늦게 끝나니까-정성진 교수 강의는 늘 11시 넘어서 끝났다)으로 내용을 풀기가 쉽지는 않았다.

  

3) 강사들의 다양한 고민을 만날 수 있었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각 영역의 사회운동을 하고 있는 강사진들의 다양한 고민을 들을 수 있었다. 현재 북한 경제를 연구하고 있는 김계환 박사의 고민, 소액주주운동에 대한 직설적인 평가를 하더라도 재벌에 대한 지배구조를 깨야 한다는 확신을 전파한 김상조 교수, 한국 사회 운동 단위들의 경제 현상에 대한 접근 방식을 설파한 장시복 교수 등 강의 과정과 뒷풀이 자리에서 나름의 현장을 일구고 있는 사람들의 다양한 고민을 접할 수 있었다.

  

4) 사회과학대학원 준비모임의 특성

 

올해 퇴임한 김수행 선생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는 사회과학대학원 준비모임 구성 자체가 자본론과 김수행 선생을 중심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는 특징이 있다.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자치회를 구성하거나, 강의지기, MT, 설명회 등 학생들과의 연계 고리를 높이려는 시도가 있었다. (난 정치경제학 강의만 들어서 다른 강의는 어떤지 모르지만 정치경제학 강의는 고정 멤버를 제외하고는 다 듣고 뒷풀이 하고 빨리 빨리 집에 가는 분위기였다) 본 대학원 출범을 의욕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나 대학원이 제대로 출범할 수 있을지는 좀더 지켜 봐야 할 것 같다.

  

3. 총평

  

사회과학대학원 수강 목표는 현재 운동 사회의 쟁점이 되고 있는 경제학의 내용들을 정리하고, 활동하는 교수들과의 인맥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두 가지 측면으로 본다면 내용적인 측면에서의 아쉬움은 있으나 두 목표를 일정정도 달성했다고 생각한다. 뒷풀이가 적었던 관계로 개인적인 친분을 확대하지는 못했지만 강의지기로 활동하면서 교수들과의 접촉을 통해 강사들이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특징들을 많이 알 수 있었다. 내용에 대한 아쉬움은 예습의 부족과 커리큘럼상의 한계 강의 계획에 따른 구조적 문제로 생각하고 더불어 강의를 들은 학습자가 지속적으로 채워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강의를 통해 학습하는 강좌를 통해 기자 활동가로 기사 작성에 도움을 받는 것은 사실이나, 직접적으로 도움을 받은점을 찾기는 어려울 거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기고글 섭외가 아니라 기사 작성에 있어 오히려 생각할게 많아졌다는 점은 오히려 좋은 점이라 생각한다.  전 보다 기사 작성함에 전문성이나 신중할 수 있게 됐다는 점, 사회적 이슈(특히 삼성이나, 서브프라임 등)들에 대해 다층적인 생각을 하게 됐다는 점을 강의의 성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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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 1~3강 김상조

사회과학대학원 준비모임에서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강의는 금요일 저녁에 하는 ‘정치경제학’. 한 교수가 쭉 강의를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교수들이 몇 강의들을 나눠 맡아 돌아가면서 관련 주제들에 대해서 강의하는 시스템이다. (까페: http://cafe.daum.net/ReturnMarx)

지금까지 세 번의 강의가 진행됐고, 1강부터 3강 까지는 ‘한국 경제의 당면 과제’라는 주제로 한성대 김상조 교수가 강의를 진행했다. 김상조 교수의 특유의 강의 스타일과 강의 내용이 맞아 떨어져 정말 재밌게 진행됐다.

통계 자료와 숫자가 주는 묘미와 한국 경제의 구성을 표로 분석하는 자료, 그 맥락에서 이어지는 자신의 운동까지. 일전에도 본적 있지만 김상조 교수가 한국의 재벌에 대해 열변을 토할 때는 정말 정말 재밌다. 아.. 그 특유의  삑사리...^^ (사담으로 자신의 제자가 취직 추천서를 받으러 왔을 때 진지하게 말했다고..너 나한테 추천받으면 될 취직도 안된다고 ^^)



14일 진행된 1강은 ‘한국의 산업구조와 기업경영의 현실’이라는 주제로, 산업구조의 변화, 특히 산업간 연관관계 단절의 현황과 원인 그리고 기업들의 재무구조, 수익성, 성장성의 변화를 살펴 봤다.

자료로는 (1) 한국은행(2007.4), ‘2003년 산업연관표(실측표) 개요’, 한국은행, “조사통계월보”와 (2) 한국은행(2007.6), ‘2006년 기업경영분석’, “조사통계월보”, (3) 한국은행(2006.10.2), ‘주요 업종별 국내외 대표기업의 경영성과 비교’ 자료였다. 보도자료 외에 이런 실물 자료를 꼼꼼히 본 적이 없어서, 이 자료들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신기했다. 

제2강은 '한국의 재벌, 대중소기업 관계'를 중심으로 봤고, 재벌은 '삼성'을 콕 찝어서, (1) 김상조(2005), ‘삼성의 지배구조: 금융을 통한 지배와 배임을 통한 승계’, 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 2005가을 (2) 김상조(2007), ‘대=중소기업 관계의 변화: 양극화 심화 및 연관관계 약화’, 한국사회경제학회, “사회경제평론”의 자료를 봤다. 자료를 보면서 경제학자가 숫자로 무엇을 증명하고, 규명해 내야 하는가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3강은 '외국바노과 개방, 대안모델'이란 주제로 진행됐지만, (1) 김상조(2006), ‘경제위기 이후 경제구조 및 금융구조의 변화와 (2) 대통령보고서(2005.2), ‘투기성 외국자본 유입의 영향과 대응방향’의 자료 내용을 중심으로 (3) 김상조(2006), ‘개방에 따른 대내외적 위험과 갈등의 조정방안’, 한국국제경제학회 2006년 하계정책심포지엄 발표논문 (4) 신정완(2006), ‘한국경제의 대안적 체제 모델로서 한국형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 구상’의 자료는 참고자료로 활용했다.

1~3강 까지 들은 결과는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의 재벌 집중은 더욱 심화 됐고, 경제의 허리 역할을 해야 할 중소기업들은 더욱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는 것. 문제는 정부 관료들이 정신차리고 자기 역할 해야 하는데 오히려 재벌 한테 손들어 주고, 규제완화만 하고 있어서 앞날이 깜깜하다는 것. 그 와중에 수출 효과는 재벌들이 독식하고 한국 경제로 환원되지 않아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정책을 펼칠 정부 관료들을 견제할 강제 절차 규정들을 만들어 내야 하고, 자신이 가진 권리에 대한 운동을 다양하게 펼쳐야 한다는 것인 거 같다. (그래서 본인은 재벌 규제, 소액주주 운동을 하는 거라고...)

[1] 2003년 한국은행 산업연관표(실측표)(일정기간 동안 각 산업부문간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 및 처분과 관련돼 일어난 모든 거래를 일정한 원칙과 형식에 따라 기록한 행렬 형식의 통계표)를 보면 한국 경제의 상황을 각 산업, 업종별로 숫자로 보여준다.

2003년 자료이기는 하지만, 총공급 또는 총 수요에서 수출과 수입이 차지하는 대외의존도는 2000년에 비해 낮아졌지만 일본에 비해는 크게 높은 수준이다. 중간투입률이 제조업의 71.5%로 가장 높은데 이는 글로벌 아웃소싱의 효과로 해석했다.

부가가치 비율(노동 등의 생산요소에 대해 지급되는 임금, 고정자본소모, 영업잉여 등)은 일본에 비해 상당히 낮게 나타났다. 일본은 2000년 55.2%임에 반해 한국은 43.0%로 부가가치 항목 구성에서 피용자보수, 영업잉여, 고장자본소모 등 피용자보수 만큼 양국의 경제격차가 있는 것으로 해석.

'내수진작'이 대안이라는 말을 통계로도 볼 수 있었다. 최종수요항목별 구성비를 보면 소비 비중이 51.3%, 수출이 26.3%, 투자가 22.4% 순으로 나타난다. (물론 민간소비지출 품목중에서 교육, 보건, 의료, 통신 등 삶의 질을 규정하는 것 들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난다) 산업연과 효과를 보면 소비>수출> 투자의 형태로 소비에 의해 유발된 생산액이 835조 5,072억원으로 총생산유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48.0%로 나타났다.

 

당연히 부가가치 유발하는 최중수요 항목별 의존도도 소비>투자> 수출의 순으로 나타난다. 비율은 높아지거나 낮아지거나 변동은 있지만 여전히 순이 그렇다. 그러니 내수를 살려야 경기가 산다는 주장이 증명되는 셈이다. 상대적으로 일본의 부가가치유발의 최종수요항목별 의존도를 보면 경우 2000년 자료를 보면 소비가 67.9%, 투자가 22.3%, 수출이 9.9%로 나타난다. 국내 내수가 강하다는 지표는 일본의 전형을 보여주는 자료였다. 

좀더 세부적으로 들어가 보면 '산업별 부가가치유발계수'에서 삼성전자가 포함된 전기및 전자기기가 2003년 0.552이고 자동차와 조선이 포함된 수송 장비 0.702로 나타난다. 수출과 투자가 높어져도 국산화율이 낮기 때문에 사실상 국내로 소득이전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삼성 반도체 하나 팔면 절반의 소득이 해외로 나가니 국민경제의 확산 효과로 나타나기가 어려운 구조를 나타내는 통계로 전체적으로도 부가가치 유발계수가 소비는 0.849, 투자가 0.819, 수출이 0.647로 수출이 제일 낮다. 수출에 열을 올리는 것은 기업이겠지만, 국민 경제를 고려할 때는 소비를 진작시킬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함 알 수 있다.

전후방연쇄효과로 후방연쇄효과(남의 것을 중간재로 쓰는)의 영향력 계수와 전방연쇄효과(내 것을 중간재로 쓰는)의 감응도 계수의 그림표를 보면 좀 더 분명해 진다. 사업서비스의 경우 감응도 계수가 높다. 사업서비스는 통신, 금융, 법률, 회계 등 독자적인 산업으로 의미와 더불어 경제 질서 근간을 이루는 인프라이다. 다른 산업과의 연쇄효과가 큰 산업이라는 것이다. 포스코가 포함된 철강 산업의 경우 영향력 계수와 감응도 계수가 둘 다 높게 나타나 있고, 삼성전자가 포함된 전기및전자기기의 경우 감응도 계수나 영향력 계수가 1.0~0.9사이로 별 영향력이 없는 것으로 나온다. 마치 섬와 같은 존재인 셈이다. 전체 분류표를 봄년 제조업, 서비스업이 분류 구분 돼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계돼 있음을 알 수 있다.

'2006년 기업 경영 분석'의 자료에서는 기업의 성장성, 수익성, 재무구조 등을 볼 수 있다. 익히 알려진 대로 부채비율인 하락하고 있음을 자료로 알 수 있다. 문제는 각론이다. 이 자료에서 한국 기업들의 개별재무재표를 사용하고 있다. 100대 기업안에 삼성 전자, 삼성 생명, 삼성 카드가 다 들어 있어도 개별 기업으로 분석되기 때문에 부채율이 낮게 나올 수 밖에 없다. 미국의 경우 연결재무재표를 사용하기 때문에 총괄적인 분석이 가능하다.

국내 기업의 부채비율이 낮아진 것은 사실이나 국제적인 수준에 비한다면 여전히 부채 비율이 상당하다는 것과 부채비율이 낮아진 것도 중요하나 그 분포가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질문을 남겼다. 평균이 낮아 졌다고 해서 개별 기업들이 다 낮아진 것이 아니라 과연 이 평균치를 올리고 있는 기업들을 봐야 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3강에서 좀더 분명해 진다)

공정거래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10대, 50대, 1000대 기업의 일반 집중도는 2002년 이후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산업집중도의 경우도 단순평균에 비해 가중평균이 높게 나타나고, 시장규모가 큰 시장이 평균적으로 집중도가 높아진 것으로 나타난다. 사실상 외부 충격으로 인해 기업들이 망하고 정리되니 더욱 재벌의 집중도가 높아진 셈이다.

김상조 교수가 기업 집단 전체를 측정 단위로 하는 별개의 집중도 지표(재벌집중도)를 만들어 따로 살펴본 결과, '8대 재벌의 매출액 및 총자산액의 GDP 대비 비중 추이'는 05년 8대 재벌의 집중도는 56.8%, 4대 재벌의 집중도는 49.2% 15년 동안 시장집중도, 산업집중도, 일반집중도, 재벌집중도 등이 외환위기 이전에는 시장집중도와 산업집중도가 하락한 반면, 일반 집중도와 재벌집중도가 상승했다. 외환위기 직후 집중도가 급상승했다가 다시 하락한 것은 모든 지표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데 2003년 변화 추이를 보면 시장집중도<산업집중도<일반집중도<재벌집중도 순으로 즉 집계화 정도가 높을수록 집중도가 상승 추세로의 반전한 것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재벌의 경제 집중도는 더욱 심화됐다는 것이다.

투자집중도의 경우도 절대적으로 설비투자율이 낮은 것이 아니라, 외환위기 직후 구조조정시기는 물론최근 투자 확대 역시 상위 4대 재벌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특징을 잡아냈다. 예를 들어 (범) 삼성그룹은 2005년 총 14.1조원의 투자를 기록했고 8대 재벌이 전체 투자의 42.4%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 재벌의 투자 규모나 비중은 증가했지, 중소기업이나 서비스 업체의 투자가 부족한 상황이라는 지적이다. 이는 국내 중소기업의 현실과도 맞물린다. 

기업의 분포를 보면 1990년대 300인 미만의 중소기업의 기업수, 고용, 부가가치, 유형자산 비중이 하락한 반면 5~19인의 영세기업의 경우는 빠르게 증가했다. 통계청의 광공업체의 종사자규모별 비중 추이, 광공업체의 현황 등을 보면 그래프는 극단적으로 기울어진 'V'자 'U'자 형으로 볼 수 있다. 5~9인의 영세기업의 기업수와 고용 비중이 급격히 늘어난 반면 300인, 500인 이상의 중소기업의 숫자는 더욱 줄었기 때문이다. 이런 중소기업의 영세화는 기업규모별 양극화로 이어졌다. 김상조 교수는 이는 투자 양극화로, 대중소기업간 격차 확대로 사업간 연관관계의 단절을 나타내고 사회양극화 현상의 근본 배경임이라고 지적했다. 

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1993년 중소기업에 속했던 사업체는 56,472개였으나, 10년 후인 2003년 까지 생존한 사업체수는 14,315개로 생존율이 25.3%로 나타났다. 이들 가운데 종사자수가 300인 이상인 업체로 성장한 기업은 75개로 0.13%에 불과하며 500인 이상으로 성장한 기업은 8개로 0.01%에 불과하다. 신규진입한 업체들의 대다수는 초기에 퇴출되고, 업체들의 2년 후 생존율은 42~59%에 불과한 상황이다.

 

경제의 중층을 이뤄야 할 중간 규모의 중소기업의 생존율은 낮고, 영세한 중소기업들만이 짧은 생명력을 보이며 사라지고 있는 상황에서, 블랙홀 처럼 상위 재벌 집단으로 경제가 흡수가 되고 있는 상황이고, 글로벌 아웃소싱과 중간투입재 수입으로 인해 경제가 성장하고 수출이 늘어나도 경제로 그 효과가 확산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2007년 한국 경제의 현실의 그림이라는 것이다. 

물론 강의 과정에서 삼성, 재벌에 대한 문제는 빠지지 않았다. 특히 삼성의 경우 기업으로 경기규칙에 따라 행동하는 '선수' 이어야 함에도 스스로 경기규칙을 정하고, 필요에 따라 규칙을 바꿀 수 있는 경제환경을 지배하는 권력자로 변모한 현실을 보여주는 사회, 정재계와 관련한 모든 문제들이 거론됐다.

 

특히 표로 보는 2002년 삼성그룹의 국민경제의 비중(금융보험업)을 제외하면 30대 재벌이 15.1%, 5대 재벌이 10.8%, 삼성이 4.1% 인 상황의 자료나, 2005년 삼성이 증권, 카드, 투자신탁운용 등 9개의 금융계열사의 총자산이 117.6조원으로 삼성그룹 전체 총자산 209.1조원의 56.2%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과 공정거래위원회가 제시한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내 금융보험업 자산비중 분포 자료를 보면(2005년) 삼성의 경우 56.2%로, 태광, 한화(대한생명), 동양을 제외하면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다. 현대증권을 가진 현대 그룹의 경우 34.5%, 현대케피탈과 카드를 가진 현대자동차가17.9% 임을 고려할 때 삼성의 경우 반도체 보다 금융업의 파워가 더 센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그러니 금산분리 해체가 사실상 삼성을 위한 조처라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삼성에버랜드, 삼성생명, 삼성전자, 삼성카드로 구성되는 순환출자 고리가 비상장 금융보험회사를 중심으로 삼성에버랜드의 금융지주회사 논란과 삼성생명 및 삼성카드의 금산법 제 24조 위반 논란, 공정거래법 11조(재벌의 계열 금융기관이 보유한 계열사 주식에 대한 의결권 행사를 제한하는)의 문제들이 야기 됐다. 물론 정부가 봐주는 과정도 있고, 이재용 씨의 승계 과정에서 불법 배임 문제 까지 하나의 소설 처럼 쫘악 엮이는 내용이 술술 풀어진다. 

2강까지 재벌에 대해 봤다면 3강은 보수나 자본의 '경기 침체'를 놓고 벌이고 있는 이데올로기 전략을 해석했다. 1차 반도체 호황 이후 고임금, 고지가, 고금리, 고물류비, 과잉규제, 과소비 등이 국제경쟁력을 떨어뜨린다고 하면서 정부가 원인제공자로 정치권력으로 부터의 자본의 독립을, 기업이 피해자다라는 논리로 모든 요소를 기업의 입장, 비용의 입장에서만 접근하는 방식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

김상조 교수가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단적인 예로 기업의 금융시스템의 경우 이미 90년대 초반 은행중심체제에서 시장중심체제로 이전하는 경향성을 나타낸다. 또한 비금융부문(가계+기업+정부) 부채 잔액 중 각부문별 비중 추이에서 한국은 유독 기업의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다. 정부의 부채비율이 적다는 것은 그 만큼 사회 공공 사업을 적게 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기업이 기형적으로 사회적 비용을 기업이 소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재밌는 것은 주식시장이었다. 투기자본을 비판할 때 수익률에 따른 단기 거래에 대한 비판도 있는데 증권거래소의 자료, 소유자별 주식분포 추이와 소유자별 주식 거래 회전율을 보면 오히려 외국인 투자자가 국내 기관투자가나 개인 투자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거래 회전율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다. 외국인 투자자가 국내 투자자들 보다 더 장기 투자를 한다는 것이다. 외국인들의 경우 평균 1년 이상을 투자하는 반면, 국내는 기관투자자들 조차도 월 단위 투자를 하고 있다는 것. 단기 투기 형태는 오히려 국내 기관투자자나, 국내 시장에서 오히려 두드러지게 나타날 뿐이라는 것. 김상조 교수는 주식시장의 기둥을 세우기 위해서는 국내기관투자자를 건전하게 육성할 것이 필요하다는 제언을 덧붙였다.

강의 끝나고 그날 주말에 정리한다고 계획을 세웠었는데 늦어지는 바람에 이렇게 얼렁 뚱당 정리하게 됐다. 3강을 들으면서 그간 추상적으로 알았던 내용들을 좀더 구체적인 지표로 알게 됐다는 것, 그리고 그런 현실을 보기 위해서는 어디의 어떤 자료를 활용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것으로 한국 경제를 모두 다 알 수 는 없었지만, 이후의 내용을 통해 좀더 자세히 알 수 있지 않을까.

다음 강의는 5일 날 정성진 (경상대) 교수의 강의로 진행된다. 완전 질적으로 다른 이들의 강의가 어떤 차이의 빛을 바랄지 기대 만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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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네팔(7)-안나푸르나 트레킹(2)

걸어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다 보니 잘 걷는다. 두 다리가 유독 튼튼한 이유도 있다. 가이드 디카는 나에게 'strong leg'을 가졌다고 칭찬할 만큼 잘 걸어다녔다. 산 이라서 좋았고, 여유있게 이동하는 사람들 틈 속에서 이것 저것 내 맘대로 할 수 있는게 많아서 좋았다. 숨 틔임 이랄까.

 

안나푸르나 트레킹은 사실 눈빨 날리는 곳에 가지 않고서는 뒷동네 등산하는 기분이다. 이정표가 뚜렷한 것도 아니고 한국의 등산로 처럼 아스팔트가 깔려 있는 것도아니고 .. 네팔 고산족이 사는 곳을 지나치며 이동하고, 코스가 어렵지도 않다. 상황에 따라 산 하나 전체가 증계이거나, s 라인으로 쭉 파진 길 때문에 바들바들 떨어야(고소공포증이 있는 경우) 하기도 하고, 간당간당한 줄 다리 건너는 스릴도 있지만 내가 간 코스까지는 그냥 뒷동산과 같은 동선이었다.

 

-> 산 밑에 있기에 일출을 볼 순 없지만 해가 떠오르면서 생기는 산 그림자는 볼 수 있다. 산..정말 좋다.

 

 

-> 산에 있는 로지나 고산족들의 생필품은 이 녀석들이 책임지고 있다. 목에는 종 달고, 일렬로 걸어다니는 당나귀들. 트레킹 하다 보면 하루에 두세번은 만난다. 이녀석들은 지구력은 있지만 속도가 늦기 때문에 이들을 만나면 먼져 보내주거나 아예 앞질러 가야한다. 먼져 보내주면 당나귀 똥을 계속 밟으면서 가게 되는 단점이 있다.

 

나야풀에서 시작했지만 둘째날은 고레파니(Ggorepani)에서 묵었다. 고레파니 정도 올라오니 사실 공기가 달라짐이 느껴졌다. 사실 첫 날은 땀이 나서 반팔입고 올라왔는데 이제 부터는 긴팔입고 다녀야 할 만큼 더워도 일상의 공기가 차졌다.



고레파니에서 새벽에 일어나서 이동하면 푼힐(punhill) 전망대에서 멋진 일출을 감상할 수 있다. 왕복 5시간 정도 걸린다.

 

 

 

그리고 아직은 낮은 수위였지만 일행중에 고산병 증세를 나타내는 사람이 생겨서 느릿느릿한 이동은 더욱 속도를 늦췄다. 고산병은 해발 2500m 이상이 돼 산소가 부족해서 나타나는 증세라고 하는데 어지럼증이나 구토나 소화불량 두통등의 증세가 나타난다고 한다. '인덕'이가 고산병 소화불량과 어지러움의 고산병 증세를 나타내니 스님들이 평소 들고 다니는 침을 활용해 손을 따기 시작했다. 로지에서 난로에 옹기 종기 앉아서 10손가락에 10 발가락까지.. 구경하던 외국인 뭐하는거냐 물어 보고 .. 물론 나 같은 사람은 고산병 '고'짜의 증세도 없이 씩씩하게 잘 다녔다.

 

이동하던 중 카트만두에서 포카라로 같이 왔던 녀석들을 만났다. 푼힐까지만 짧고 굵게 갔다올 계획이라던 녀석들은 힘들어서 죽으려고 했다. 어찌나 반갑던지 .. 내 첫인사말은 "너네 살아있었구나" 였다. ㅋㅋ 이 녀석들은 심지어 인도 바라나시 길거리에서도 만난다.

 

 

 

-> 어딘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 로지를 배경으로 찍어본 사진.

 

고레파니 숙소에서는 가무의 판이 벌어졌다. 네팔 사람들 특히 산에 다니는 사람들은 음주가 없이도 가무를 즐기는 듯 했다. 호기심 쟁이 '진경' 스님이 벽에 걸린 악기를 건드렸다가 시작된 노래 공연. 네팔 노래도 처음 들었거니와 육성으로 듣기는 정말 처음이었고, 그 노래에 맞춰 다들 춤도 추고..

산에 올라오는 동안 흘리는 땀만큼이나 흥겨운 놀이다.

 

 

-> 같이 다닌 일행 중 한 명과 함께. 난 트레킹을 할 계획도 없었는데 배낭 여행을 준비하면서 등산복과 등산화를 챙겨왔다.. ㅋㅋ 선견지명이랄까...^^ 모자를 쓰고 있는 이유는 추워서가 아니라 햇볕이 너무 강했기 때문..

 

-> 동선 자체가 네팔 사람들이 사는 집을 지나갈 수밖에 없게 돼 있다. 지나가다보면 아이들을 많이 만난다. 카메라만 들이대면 알아서들 V자를 그린다. 워낙 한국인 등산객들도 많고 사진을 같이 찍는 경우도 많아서 아이들이 매우 반응이 좋다. 나중에 만난 네팔 친구 '부릉'은 아이들에게 사탕이나 초콜렛을 주지 말라는 말을 했다. 여행객들은 하나 둘 주는 거지만 여기 아이들이 치과를 가기 힘들거니와 양치도 꼬박꼬박 챙기기 어려워 이빨이 썩는다는 거다.  아이들에게 좋지 않으니 주지 말라는 경고.

 

-> 이런 정경을 보고 있노라면 머리가 백지가 돼 버리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얼굴에 베어나와 버린다.

 

=>트레킹을 하면서 고지를 향해 올라갈 수록 모든 음식, 물값이 비싸진다. 손님이 일상적으로 있는게 아니기 떄문에 사실 점심 식사 한번을 하려 해도 한시간 이상이 걸린다. 그래서 보통 트레킹 하는 사람들은 식방에 쨈을 챙겨와서 점심은 짜이와 함께 간단히 먹고 이동하고 아침 저녁을 든든하게 먹는다고 한다. 물론 우리 일행들은 3끼 모두 천천히 밥 다 챙겨 먹었다. 난 아침과 저녁은 무조건 라이스로 먹고, 공갈빵 처럼 생긴 네팔빵을 점심으로 많이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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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네팔(6)-안나푸르나 트레킹

다시 여행일지를 펴 들고 ^^;

가물가물한 기억의 끝을 정리해 볼까나..

이렇게 더운 날씨에 더욱 그리워 지는 네팔..

그립다..

지금 한 참 예쁠텐데..

 

네팔의 포카라에는 한국식당이 많다. 결국 현지에서 일행을 구하지 못했던 나는 혼자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하기로 결심했다. 가이드 겸 포터 한 명을 구하고, 두툼한 오리털 침낭을 빌리고, 모자와 장갑을 구입하고 내일의 트레킹을 위해 늦으막히 저녁을 먹으며 힘다지기를 하고 있었다.

 

네팔에서 천금같은 삼겹살을 먹는 것은 너무 호사이고..

그래도 보신을 해야 겠기에 '한국 사랑'이라는 한국음식 전용 식당에 가서 닭도리탕을 시켜먹었다. 저녁 9시가 넘은 시간 손님도 없고 한적한 식당에서 혼자 열심히 닭다리 뜯으며 다음날 부터 시작한 트레킹을 상상했다. '혼자여도 괜찮아' 주문을 외우며 열심히 먹고 있던 찰라 '삼겹살을 먹자'며 한국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한국 사람들은 음.. 우르르 몰려 다닌다)

 

포카라에서 고기 먹는 사람들은 십중 팔구 산에 올라갈 계획이 있거나, 아님 오늘 산에서 내려 온 사람들이다. 그들 얘기에는 관심도 없거니와 난 먹는데 완전 몰입한 상태였다.

 

'한국사랑'에서 먹은 닭도리탕. 네팔에서 이런 음식을 만난다는 건 .. 정말.. ㅡㅜ

-> 정말 양호하지 않은가..네팔에서 먹는 닭도리탕.. 한국과 맛이 똑같았다.  

 

갑자기 일행중 한명이 내 옆 벽에 걸린 지도를 향해 걸어왔다.

"이렇게 가는 일정이라니까"라며 지도를 보고 일행들과 얘기를 한다.

 

그러더니 갑자기 나한테 말을 시킨다..

 

"트레킹하셨나봐요.. 고기 드시게.. 어떠셨어요?"

"아..(먹던 고기가 걸려서..) .. 아뇨 .. 내일 가려구요.."

"설마.. 혼자가세요?"

"네 .. 그럴려구요..일행을 구하다가 못구했거든요..."

"아? 그래요.. 잘됐다.. 우리 일행 구하고 있었는데.. 일정 맞으면 저희랑 같이가요.."

 

무슨 드라마 처럼 혼자 몸보신하다가 일행들을 만나게 됐다.

졸라 기뻐하며 포터 예약 취소하고, 이들과 어울려 짐도 다시 챙기고 ..

날 버리고 애인찾아 떠난 친구한테 메일 보내고 그 밤이 너무 짧았다.

   

그렇게해서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같이 하게 된 일행은 1년 동안 트레킹을 준비해 왔다는 나이 지긋한 선생님 한 분, 유학을 앞두고 추억여행을 하고 있는 커플 그리고 불교 성지들을 여행하고 있는 스님 2분.




일지를 보니 07년 1월 12일 부터 17일까지 안나푸르나(annapurna) 트레킹을 했다.

트레킹을 하려면 우선 공식적으로 네팔 정부로 부터 허가, 퍼밋(permit)을 받아야 한다.

절차나 요건이 까다롭지 않다. 중간 에이전시를 통하면 10~20Nrs의 수수료를 받지만 직접 가서 신청서 작성해서 제출하면 수수료는 들지 않는다. 사진과 퍼밋 요금 2,000Nrs를 신청서와 함께 작성해서 제출하면 10분만에 나온다.  난 출발당일 택시 타고 가서 받아서 출발했다.

 

그리고 안나푸르나 트레킹 하는 입구에서는 마오이스트들이 트레킹하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요금을 받는다. 이에 대한 관광객들의 반발이 적지 않는데, 가이드 설명에 따르면 마오이스트들과 정부가 합의해서 입장료를 걷을 수 있게 했다는 것과, 이 돈이 주요하게 마오이스트들의 활동 자금으로 쓰인다고 설명을.. 음.. 하루에 100Nrs로 책정해서 트레킹 일정 동안의 요금을 받는데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하기도 한다.

 

-> 큰 가망을 짊어진 사람이 우리 가이드 '디카' . 입장료 협상 중인 셈.  허술하게 보이지만 뒤에 앉은 사람들이 마오이스트들. 레닌과 마오의 사진이 걸려 있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은 일정을 짜기 나름인데 우리는 나야풀(nayapul)에서 시작해, 고레파니, 푼힐, 촘롱(chhomrong), 안나푸르나 베이스 켐프로 이동하는 동선으로 10일+알파의 일정으로 이동하는 동선이었다. 워낙 구성 멤버들이 무리하지 말자는 주의여서 일정이 빠뜻한 나 같은 사람만 조바심 나는 상황이었다.

 

12일 오전 9시 부터 트레킹을 히작하려 했지만, 늘어지고 늘어져 점심 때 쯤에나 트레킹을 시작할 수 있었다. 포카라에서 나야풀까지는 버스로 이동할 수도 있지만,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택시는 정액인데 음.. 가격이 잘 기억나지 않고, 난 할당된 200 Nrs를 냈던 기록만 남았다.

 

 

 

사랑곶 사전 탐방을 잘한 셈이다. 안나푸르나의 초입은 마오이스트들만 지나쳐 오면 화살표 하나 없이 그냥 산이다. 로지(lodge)들이 곳곳에 있다고 하지만, 나야풀 초입의 상가들을 지나쳐 오면 그 뒤로는 산과 들과 물만 있을 뿐 어디가 어딘지 전혀 알 수가 없게 돼 있다. 혼자 다니는 외국인들이 있기는 하지만 결국 가이드나 포터가 없이는 이동하기 쉽지 않게 돼 있다.

 

짜이 한잔을 마시고 시작한 트레킹. 첫날은 나야풀에서 시작해 비레탄티, 힐레를 넘어 티르케둥자와 울렐리(ulleri) 중간에서 일정을 마무리 했다. 늦게 시작했기도 하지만, 산이라 해가 일찍 지기 때문에 3시에 이날의 일정을 마무리 했다. 거짓말 처럼 4시 부터는 해가 지기 시작하는데.. 정말 놀라울 뿐이었다.

 

밤은 일찍오고 할일은 없고..

모여서 오손 도손 통성명 하며 얘기도 들으며 ..

 

시트콤 같은 스님들의 불가 생활얘기와 왜 트레킹을 하게 됐는지.. 그 이전 여행 코스는 뭐 였는지.. 그들은 이미 서로를 알고 있었지만 제일 늦게 합류한 나에게는 그들의 정보가 없으니..마냥 들으면서 웃고 떠들고.. (이날 사람들은 나에게 반드시 '룸비니'를 가볼 것을 강권했다. 결국 막판에 난 팔랑귀가 돼 급 하산하게 된다 ) 이런 표현은 그렇지만 ... 난 트레킹 내내 스님들의 신념과 의지에 감동했다. 정말 세상에 좋은 사람들이 참 많다는 것을 느낀 날이다.

 

밤이 되니 산의 추위가 느껴졌다.

말로만 듣던 그 추위.. 아직은 산 밑이라 경미한 수준이라고 하지만.. 

추위에 약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치명적일 정도였다.  

보온 물병도, 보온통도 가져오지 않은 나는 hot water만 시켜 먹을 뿐이다.

 

다행이 내 얇은 침낭 1개와 빌려온 오리털 침낭 1개로 밤의 추위는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최후의 보루로 카트만두에서 나의 등산 욕구를 자극 시킨 녀석들이 준 쑥 보온 팩을 남겨 뒀다.  

'화상주의'라고 경고를 할 만큼 효과가 뛰어나다고 하니 정말 너무 추운 극적인 그 날 난 이 팩을 쓰리라 마음을 먹으며..

 

정말 일찍 잠이 들었다. 해가 뜨는대로 움직여야 하니..

 

=>트레킹 멤버는 6명이지만 스님들은 각자의 짐을 직접 들었다. 그러니 4명의 인원이 한명의 포터와 한명의 가이드와 동행한 셈이다. 가이드 '디카'는 포터로 자신의 부인 '머누'를 데리고 왔다. 아이들은 할머니가 맡고 있다고 말했다. 머누는 사탕과 초콜렛을 나눠 먹을 때는 아이들이 생각난다는 말을 영어로 하며 따로 챙기기도 했다.  여행 내내 이들의 가족, 결혼, 미래의 꿈 등 많은 얘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 트레킹 할 때 꼭 챙겨야 할 것. 한국 사람들은 꼭 스틱 챙기는데, 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안나푸르나 일정에 스틱은 필수품은 아닌거 같다. 북한산 등반보다 더 쉬운 코스여서.. 대신 꼭 필요한 것은 보온병이나 보온통. 추워지면 난로처럼 사용하기도 하고, 목이 마를때는 찬 물보다 따뜻한 물이 더 좋다는..  그리고 물수건과 따뜻한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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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춤극

 

내가 가진 정보가 어느 정도 사실일까...

남들이 사실이라고 하고, 사실이란 얘기를 듣고, 인터넷에서 보고, 가장 믿음직 스럽게 TV에서 까지 확인해버리면 여지 없이 100% 사실로 믿어버리는 얇은 귀를 가진 나 같은 사람.

때론 소문도 사실로 둔갑해 버린다.. 얇은 귀만 탓할 순 없겠지...


최근에 나의 역사적 지식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꽤나 있었다.

이러고 있으니 내가 뭐 좀 알거 같은 느낌이 드는지, 소감도 물어보고, 그게 사실이냐고도 묻는데..글쎄 ..난 뭐 별로 할 말이 많지 않다. 가진 지식도 미천하거니와..

심지어 그냥 내 느낌을 너무 솔직히 얘기하면 상대방이 당황하기도 한다..

딱히 정리되지 않는 느낌만이 내게 남아있기 때문인 거 같다..

2007년의 하반기를 넘어가면서 왠지 나사 하나 빠진 듯, 시대적 감흥과 사명을 잃은 나의 좌표 때문일 수도 있겠다 싶다.

여전히 미숙한 나의 말투 때문일 수도 있고..

술독에 빠진 다음날 술 냄새 풀풀 풍기며 ‘화려한 휴가’를 봤다.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연락온 후배녀석의 배려로 ‘꽃은 피어 웃고 있고’를 봤다. ‘화려한 휴가’는 논쟁이 불붙은 영화이고, ‘꽃은 피어 웃고 있고’는 춤극이다. 사실 난 춤극이 처음이었다.

 



‘화려한 휴가’는 워낙 유명하니까.

술기운에 감상적인 호르몬이 발동했는지 몰라도 영화 내내 그렇게 눈물을 닦아냈다. 사무실에서 ‘나 화려한 휴가 보고 정말 많이 울었다’고 말했다가 ‘어떻게 그 영화를 보고 그럴 수 있냐’는 응답을 받기도 했다. 사실 그런 반응은 적지 않았다. 왠지 운동권은 그 영화를 보고 울면 안될 것 처럼..머슥하게..

그렇지만 난 정말 슬프게 그 영화를 봤다. 애초에 기대가 없어서 그랬나. 정말 덜 깬 술 탓인가..너무 많은 기대를 걸지 않았기 때문에 난 그 자체를 하나의 드라마로 봤던 거 같기도 하다.


그냥 가족을 잃은,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도청을 지켰을 그밤에 느꼈을 그들의 무서움과 답답함, 살아남은 아니 후대의 사람으로 그 원흉과 여전히 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짐. 그냥 영화 내내 모든 것이 서러웠다.


항쟁의 주체였던 ‘열사 윤상원’이 아니라 ‘퇴역 공수부대 대령’이 도청을 마지막까지 사수했고, 배신을 때린 것으로 알고 있는 시민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나오는, 천주교 신부가 마지막 도청 사수 하러 오는 모습을 보면서. 사실과 소설이 넘나드는 사이, 역사적 사실과 픽션의 영화가 뒤엉켜 버린다. 사실은 지워지고 픽션만 가슴에 담아서 난 그렇게 슬펐나 보다.


‘꽃은 피어 웃고 있고’는 일제 시대를 살아간 여성들, 일본군 위안부(이 표현도 적절치 않다고 하지만 달리 뭐라 적어야 할지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 피해자들에 관한 춤극이다. 보러 가기 전에는 ‘춤’으로 뭐가 제대로 이해가 될까 싶었는데 보는 내내 그들 손짓 하나, 고개 떨림 하나 하나에  내 가슴을 쓸어 내렸다. 음향에 심장이 떨리고, '엄마'라는 외침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관객들은 공연자들의 지인도 많았지만, 관련 단체 활동가나 할머니들도 꽤나 많았다. 행사 소개서에 보면 ‘일제 36년 압제와 굴욕의 질곡 속에 희생양이 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한을 풀기 위한 계기로, 민족의 정서가 담겨있는 한국 춤을 통해 역사를 재인식하고 몸짓 속에서 민족의 뿌리의식을 되살리고자 마련되었다’는 요지의 소개가 있다.

글쎄 민족의 뿌리까지는 모르겠고...

안타깝게 보내는 조선 청년들의 머뭇거림도 모르겠고..

근데 그들의 몸부림을 보고 있자니 한 없이 마음이 꺼져 들어갔다.

어떻게 그렇게 살아오셨습니까...

그런 세월 어떻게 살아 지금 그렇게 싸우고 있습니까.

나라면 어땠을까.

내가 그리 좋아하지 않는 ‘아리랑’이 수십번 나오고, 과거의 영상이 수도 없이 나오고, 피해자들의 육성과 영상, 부서지듯 이어지는 춤사위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주르륵.

 

워낙 이런 것들에 취미가 없는지라. 즉자적인 감정 반응에 약한거 같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 당황 해 더 눈을 크게 뜬다. 

 

'화려한 휴가‘를 보고난 누군가 내게 감상평을 묻는다. 


“정말 애국가가 울릴 때 총을 쐈단 말이야?”캬아.. "비극적인 세상이야.."

"음..  글쎄...”

"퇴역 공수부대 대장? 대령?이 정말 현장에 있었어?"

"음... "

‘꽃은 피어 웃고 있고’의 마지막 장면은 일본 천왕이 사과하는 장면이다.

“정말 사과했나?”

“글쎄....”

 

내 모든 답은 ‘글쎄’였다.

도대체 제대로 아는 사실이 하나도 없다.

알 수 없을 수도 있는데..뭔가를 뒤집어 까고 싶기도 하고, 명쾌하게 정리하고 싶기도 한데 뭔가의 끈적한 줄에 메여 있는 느낌이랄까.

 

내 뒤 통수를 잡는 건.

나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무지함이 아니었다.

두 작품을 보고 난 내 느낌은 사실..

내가 그 시대에 살지 않아서 다행이다. 아니 설령 살다가 죽었을지도 모르겠지만 ..

지금의 내 삶의 스토리에 군대가 없고, 총을 들고 나서지 않아도 되고, 사막에서 물을 길으러 가지 않아도 되니 .. 이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스스로에 대한 위안 뿐이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이 나와 동떨어진 제 3자의 쑈 처럼 보였던 게다.

감정 이입하고, 몰입해서 눈물이나거나 슬프고 안타까운게 아니었던게다....

병에 걸린 거 같다..이건 아닌데.. 싶은 병..

요즘은 자판만 두드려서 그러나

나이 먹어서 그런가

눈으로 읽히는 그 비극의 대상에 내 얼굴이 끼어 있지 않은 것 만으로도 다행이란 생각이 드니..

내가 사는 이 세상에서 나 또한 싸우고 있는데..

왠지 그게 꽤나 멀리 있는 거 같고..

난 제 3자의 관객이 돼 있는 느낌이다..

내가 작품을 보고 운 것은 작품에 대한 감동 때문이 아니라서 미안하기도 하고..

냉철한 평가도 못하고 ..

그저 이렇게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는 내 모습이 땅 으로 꺼졌으면 좋겠다

싶을 만큼 창피하기도 하고...

기억해야 할 것도 많고 넘치는 것도 많다.

나 같은 사람이 해야 할 역할은 그런 것들은

민중의 시각으로 기억하고 기록하는 역할일 거라고.... 

이제는 무게감을 짐작하고만 있을 뿐이지만..

마치 ‘화려한 휴가’에서 윤상원 열사를 과거의 책속에서 찾는다면, 

최근 세상을 달리한 고 윤한봉 선생을 기억해야 하는 것 처럼. 

어여 나사를 조여야 할 텐데..

스물스물 나를 물들이는 것들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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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일을 받았다..


블로그가 어색하네..

이렇게 오래간만에 들어오다니..

이런 내용들을 적어놨었구나... ..... .....



어색한 정체성으로 어정쩡하게 보내고 있는 요즘.



뜬금없이 왠 스펨 메일 같은 것이 하나 와 있었다.

"꼭 읽어주세요" 느낌표 팍팍!!



음... 읽을까 ... 말까...



읽을까 ... 말까 ....



혹시 바이러스라도 옮기면 성능 좋은 컴퓨터 맛 가는거 아닌가 싶어..

그렇게 그냥 지나쳤다.


다시 메일을 확인하다가 다시 '읽어달라'는 메일이 눈에 띄었다...

"도대체 무슨 광고를 이리도 유치하게 하냐"

중얼거리며 메일을 열었는데...



장문의 편지였다.

지역에 사는 고등학생이 보낸. 

최근에 반전 집회에서 만나는 녀석들을 같은 고딩이다. 


'도덕'(난 이런 과목을 배웠다는 것 자체를 잊고 지냈는데..) 과목 숙제란다...

자신의 꿈과 관련된 사람을 인터뷰 해오라는...( 심지어 요즘에는 이런 숙제도 내주나 ..세상 많이 달라 졌다..)

어찌된 인연인지 그 고딩은 날 찍어서 메일을 보냈다...

어찌나 정중하게 질문지를 보냈던지..

그 질문지를 확인하고서는 한 참을 멍하게 있었다.


그 고딩의 꿈은 '기자' 였다..

그리고 관심있게 봤던 몇몇 기자들에게 메일을 보냈다고 한다..


내가 ...

사춘기도 아닌데..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내가..

이 친구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멍먹한 마음에 한 참을 망설였다.

 


고딩의 숙제 덕분에

내 고민에 대해 내가 답하는 형태가 됐다..


내가 지고 있는 짐 꾸러미를 다시 살펴 보게 됐다.

지웠다 썼다가

 

쩔쩔 매면서 답을 적었다.

아..내가 왜 참세상에 다시 오게 됐을까..

내 활동은 뭘까.


내가 여기서 느끼는 보람은 뭘까...

내가 느끼는 어려움이 뭐지..

 

 

많은 것들이 그리워 지고 많은 것들이 후회가 되고

웃음도 묻어났다가 갑자기 우울해 지기도 했다가..

과거의 시간 속에서 원맨쑈를 하며 답메일을 보냈다.


그러고 보내던 그 날은

내 문제에 휩싸여 기사도 제대로 쓰지도 못했다.


"어떻게 저 한테 메일을 보내셨어요? 참세상을 읽는 고등학생은 못본거 같은데..?"

고딩이 관심있게 봤다는 몇개의 주제를 줬다.

가슴이 턱 막힌다..

음...

나.. 이런 식으로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호흡하고 있었구나..

 

나의 찌끄리는 찌라시...

음...

반성해야겠군...

낯 모르는 고딩의 메일 덕분에

책임감과 감흥의 일주일을 보내고 있다.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자문하면서.. ...

너무 오래간만에 블로그에 들어왔다...

내 껀데도 글이 내 꺼 같지 않다...

내팔의 푸른 산이.. 안나 푸르나..음...

 

음... 글고 블로그도 좀 손 보고..
삶도 좀 추스려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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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가장 많이 들은 얘기

아직도 배낭을 짊어져야 할 것 같은 .. 아직은 꿈 같은 일상의 연속이다.

 

사실상 잘 적응이 안된다는 말이다.

 

내가 그리 부르짖었던 한국말임에도 불구하고

즉각적인 대답이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 생각이 제대로 언어화 되서 표현되지도 않는다..

역시 .. 어이 없는 생활의 연속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 저것 기사들을 쓰고 있다..

훈련이기도 하고 어차피 버리고 갈 수 없다면 부딪히자는 고민의 발현이다.  

 

오늘 간만에 여기 저기 돌아다녔다..

오전에 들은 얘기는 ..

 



"안 올 줄 알았는데 그래도 복귀했네?"

"하하...제가 소심해서요.. 보복 당할까봐 약속 지켰어요 ^^:"

 

그 이후에는

"어랴 복귀했네요"

"복귀해야죠.. 갈 곳이 있나요 ^^;"

 

그 다음에는

"한 동안 안보여서 활동 접은 줄 알았지?"

"(참세상 회원이 아니구만..참세뉴스를 통해 다 알려진 사실이구만...쩝 ㅡㅡ') 무슨 그런 말씀을.. 강호의 도가 땅에 떨어져도 강호를 벗어나선 살 수 없지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아.. 돌아왔군요.."

"네.. 저 한테는 참세상 밖에 없더라구요"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 다음에는

"야..벌써 2달 갔어? 벌써 복귀야"

"네..올해는 제가 참세상에서 꼭 하고 싶은게 있어서요.. "

 

...

 

물론 반응은 이랬지만, 전해 듣는 얘기는 거의 우울증을 동반할 만큼의 내용이다.

세상 밖에서 구부정한 어깨가 아닌

당당히 어깨 펴는 방법을 배웠다.

정말 어이없게 뻔뻔하리 만큼 근성있게 덤벼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2007년  그리고 이후의 내 삶도 그렇게 근성있게 살아가자고 다짐하고 왔다.

근데 생각보다 주변 사람들이 참이나 힘들어 한다는 것을 느낀 오늘이다.

 

누구의 말 처럼..

내가 배낭 짊어지고 히히낙낙 돌아다닌 동안

각종 선거를 통해 소위 말하는 민주노조의 좌파 운동이  끝장을 보고

우울증의 모드로 급 전환한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내가 있었다 한들 나아질 게 있었다는 게 아니라 

함께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다..

 

오늘 가장 많이 들은 얘기는 '복귀한거냐?'는 질문이다.

 

나, 복귀했다.

민중언로 참세상으로

다시 좌파의 담론과 언론으로의 고민을 담고..

물론 많은 사람들이 '참세상'의 질과 양 그리고 역할에 대해 상대적인 의문을 표한다.  

난 같이 가는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난 아직 포부로만 가슴을 채웠지만

나이도 있는 만큼(^^;) 구체적인 내용들을 만들어 갈 계획이다.

다소 더디더라도 여유를 갖자는 주문도 늘 외우고 있다.

약빨이 언제까지 갈까가 사실 걱정이긴 하지만 그리 부정적이지는 않다.

혹시나 하는 걱정에 주변에 동기부여의 요소들을 숨겨놨기 때문..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이다. 

걱정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자..

잘 될 꺼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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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네팔(5)-포카라:sarangkot

본격적인 트레킹을 시작하기에 앞서 테스트에 들어갔다. 포카라에서 가장 가까운 전망대인 사랑곷(sarangkot) 전망대를 가기로 한 것. Prano Bazar 방면으로 가거나, 레이크 사이드 방면 두 길 모두 사랑곷으로 통한다. 난 레이크 사이드 방면에서 올라가기로 하고 오전 8시 길에 나섰다.

 

자전거를 빌리지 않았기 떄문에 숙소에서 부터 걸어서 나 선 것. 다행히 난 여행을 준비하며 등산화를 신고 출발을 했기 때문에 좀더 용이한 상황이었다. 시작은 좋았다. 폐와호수에 피어오르는 물안개도 보고, 장사를 시작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는 네팔 사람들도 만나고, 이미 자전거 타고 관광에 나선 외국인들도 만나고.. 그 무엇보다 호수의 풍경이 정말 최고 였다.

 

  

 

문제는 내가 가지고 있던 가이드 북에는 '레이크 사이드 방면'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만 나와 있을 뿐 그외 설명이 없었던 것.

 

우선 가보지 뭐..

 

이 무모한 시작이 이날 골반 뼈가 아플 만큼 걸어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우선 레이크 사이드 방면에서 사랑곷으로 향하는 공식적은 입구를 못찾았던 것. 여기 저기 물어도 손가락만 가리킬 뿐 결국 올라가는 입구를 찾지 못하고 현지인들이 오고가는 능선을 타기 시작했다.

 

 



능선이라 함이 바로 이런 밭과 밭 사이를 이어 놓은 길. 그리고 전망대 이기 떄문에 45도 각도로 이어진 능선은 가히 공포스러운 수준.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 같은 경우 몸이 뒤로 떨어질 것 같은 공포감과 계속적인 싸움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산에서 만난 아이들은 낯선이를 반가워 하면서도 거짓말로 길을 알려주거나, 엉뚱한 길을 알려주며 마구 웃기도 한다. 아이들이 반갑기도 하지만 정말 이런 상황에서는 괘씸하기 이를데 없다는..

 

 

결굴 길을 찾다가 마을로 들어가게 된 상황. 마을의 모습도 좋고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좋다. 가끔 쉬면서 보이는 풍경도 좋고 길만 제대로 찾을 수 있다는 확신만 있었다면 더 즐거웠을 시간..

 

어찌나 헤멨는지, 올라갔다 내려갔다 기어갔다 뛰어갔다...심지어는 마을 아낙네들 목욕하는 곳까지 멋모르고 갔다가 서로 당혹해 하는 사건아닌 사건도..

 

공사중인 길을 넘어 기다시피해 올라란 곳에서 발견한 사랑곷 푯말이 그리 반가울 수 없다. 전망대 밑에는 음료수나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많고, 이 곳에서 일출을 보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숙받도 가능하다. 계란볶음밥이 80Nrs 정도. 사랑곳 전망대에서도 입장료를 받는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는데 30Nrs 정도 였던 거 같다.

 

 

전망대의 정상은 다소 황량하다. 무슨 군부대에 온 것 처럼 철조망이 설치되 있고, 벙커 같은 곳들도 있고, 군인들도 있다. 그렇지만 내려다 보는 경치는 죽여 준다는 거.. 한쪽으로는 폐와호수의 경치가 한 눈에 다 내려다 보이고, 다른 한 쪽에서는 트레킹의 예정지인 산의 경치가 그대로 보인다. 다행이 날씨가 좋아서 .... 흘린 땅방울과 쏟아 버린 욕들에 비해 엄청 감동을 먹었다는 것.

 

-> 사랑곷에서 바라본 폐와호수 경치.. 사진기가 꼬져서 그렇지 정말 경치가.. 구름과 그 사이로 보이는 호수의 전경과..

 

 

특히 사랑곷 주변에서는 헹글라이더(맞나?)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초보 훈련만 받으면 혼자서도 탈 수 있도록 해 준다고. 타봤다는 사람의 말에 따르면 한번 타는데 70Nrs(싼 편이라고)정도 드는데 바람도 많이 불고 경치도 좋아서 정말 좋은데, 헹글라이더 탈때는 반드시 귀마게 하라고..정말 귀가 시려워서 정신이 없다고 ..

 

전망대에서 헹글라이더 출발하는 사람들과 하늘에서 날고 있는 사람들을 보는 것도 덩달아 덩실 덩실이다. 심지어는 근처의 새(난, 매로 추정하는데)가 이들과 같이 나는 모습이 정말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사랑곷은 바람이 많이 불고 차량으로 이동이 가능하기 때문에 외국인들이 많이 즐긴다고. 한 번 쯤 시도해 봐도 좋을 것 같다. 여행사에서도 추천해 주고, 숙소에서도 쉽게 같이 하는 멤버들을 구할 수 있다. 혼자 타기 정 무서우면 가이드와 같이 탈 수도 있다고 한다.

 

 

사랑곷 한편에서는 히말라야의 정경을 한 눈에 다 볼 수 있다. 가이드북의 사진에 참고해서 이름을 끼어 맞춰 보면 오른 쪽 맨 끝이 안나푸르나 사우스, 그 옆 이 안나푸르너 1. 가운데 빼쪽한 산이 마차푸츠레,  옆의 둥근 산봉우리가 안나 푸르너 3 등등의 순이다. 정말 사진기가 거시기 해서 그런데 정말 한눈에 다 보인다.

 

 

그리고 올드마켓(Prano Bazar) 방면으로 쉽게 내려왔다. 이 길은 차량으로 이동할 수 있게 돼 있어서 도로가 잘 나 있는데 이쪽 방면은 히말라야 풍경을 구경하면서 오를 수 있는 코스다. 400-500Nrs 주면 택시를 하루 대절해서 포카라에서 올드 마켓 방면으로 해서 사랑곷을 구경할 수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레이크 사이드 방면에서 올라가는 것은 네팔 고산족들의 삶을 미리 보는, 견학하는 즐거움이 있고 올드 마켓 방면에는 히말라야 풍경을 계속 감상하며 오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포카라에서 만난 한국 사람들의 다수는 올드마켓 방면에서 올랐다가 1박 하면서 일몰과 일출을 감상하고 레이크 사이드 방면으로 걸어내려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마 내가 이런 방법을 알았다면 나 엮시도 그 방법을 택했을 것이다.

 

레이크 사이드에서 멋모르고 사랑곷 올라가는 방법은 택하지 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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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네팔(4)-포카라

사람 복을 타고 났다. 정말 기가 막히게 사람들이 나타나서 도움을 주니..

카트만두에서 그랬다. 절박하게 찾아갔던 숙소에, 유일하게 남은 침대 한켠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과 추억을 만들고 ..그들이 그려준 지도와 설명서 그리고 가이드북을 손에 쥐고 혼자만의 여정을 시작했다.

 

카트만두->포카라

 

포카라는 호반의 도시다. 폐와호수를 중심으로 한적한 쉼터가 있다. 아침이면 물안개가 뿌옇게 피어오르고, 호수를 둘러싼 산의 정경 또한 죽여준다.

 

 

 



특히 카트만두에서 포카라로 이동하는 방법은 보통 오전 7시에 출발하는 버스. 6-7시간 정도 소요되기 떄문에 포카라에는 오후에 도착하게 된다. 보통은 직접 스텐드에서 효부 처서 티켓을 살 수도 있다. 6시 30분 부터 tourist bus stand 에는 네팔 각지로 흩어지는 버스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스텐드에서 얼굴을 비추면 곳곳에서 차장 격의 사람들이 나타나서 행선지를 묻는다. 거기서 직접 버스 티켓을 사도 된다. 나 같은 경우는 스텐드 근처에 있는 여행사에서 버스 티켓을 구입했다. (300 Nrs)  

 

이동하는 버스는 무조건 다 채워서 출발하기 떄문에 운전석 옆좌석(좌측 1인석)에 앉게 될 경우 좋은 전망을 통째로 구경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많은 네팔인들 틈에서 끼어서 가야할 수도 있다는 단점이 있다. 대신 카트만두에서 포카라로 이동하는 버스에서는 반드시 운전석 방향의 차창 쪽으로 앉기를 권한다. 어찌나 경치가 감동적인지..정말..정말..눈물이 날 정도로..졸다말고 깜짝 놀라서 무의식적으로 카메라를 찾을 정도다. 대신 버스는 아무리 tourist bus 라 해도 엉성한 쿠션의 직각 의자 이기 때문에 엉덩이와 허리에 상당한 통증을 느끼게 될 것이라는 점도 ...

 

내가 출발할 당시 아직 파업(그들 표현대로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이 진행중이었기 때문에 거리에 한 시간 가량 차량이 멈춰 선 것을 빼면

-> 가는 길에 버스가 멈춰 섰다. 길 따라서 길게.. 누구하나 짜증내거나 화내는 사람이 없다. 오직 나만이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는 듯. 외국인들은 흥미 진진해 하고, 사람들은 구경 나서듯 버스에서 내려 이곳 저곳을 살피고 다닌다. 아는 사람도 만나고, 미처 못먹고 나온 아침을 챙겨 먹는 사람도 있고.. 주변 식당만 완전 노 난 상황. 1시간 가량 이렇게 시간을 보낸 후 모든 차량들이 출발을 알리는 경적을 울리고 서서히 움직이면 흩어졌던 사람들이 곳곳에서 튀어나와 환한 얼굴로 버스에 올라탄다. 나름 인상적이었다..

 

포카라에서는 특별히 한 일이 없다. 카트만두에서 부탁받은 메세지들을 전하러 다니고, 안나푸르나 트레킹 참여를 위해 여행사를 통해 준비를 하고, 호수 주변을 어슬렁 거리다가 티벹 아주머니들이 접근하며 잽싸게 피하고, 주변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거나 책을을 읽거나 정도.. 어쨋든 포카라에서는 트래킹 준비가 핵심이었다.

 

-> 포카라 레이크 사이드의 지도. 버스에서 내린 후 그냥도 이동할 수 있지만 길을 모르는 관계로 택시 타고 이동. 레이크 사이드까지 80Nrs. 포카라의 경우 한국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포카라 짱' 게스트 하우스와 '엔젤 호텔'에 한국 사람들이 많이 머물고 있다. 포카라 짱에 머물 경우 레이크 사이드 입구에 있는 '푸마 에이전시'를 통해 트레킹 계획을 세우게 되고, 엔젤 호텔에 머물 경우 호텔 자체에서 사람을 구해 트레킹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준다.

 

폐와 호수 주변에는 배를 타고 힌두 사원에 갈 수도 있고, 자전거를 빌려서 (하루 50Nrs) 호수 주변 및 동네를 구경 다녀도 좋다. 사실 전망대에 많은 사람들이 호수 구경 가지만, 티벹 아주머니들이 인생사를 풀면서 악세사리 구입을 강요하기 때문에 혼자 즐기기에는 만만치 않은 장소이다. 오히려 사랑kot 방면으로 좀더 들어가면 시골의 풍경과 호수가 어우러져 한적하게 쉬운 장소들이 많이 나온다. 그쪽 방면에는 '천지' 등 한국어로 간판이 써있는 찻집도 많다.

 

포카라는 특히 인터넷 가격이 비싸다. 카트만두에서 1시간에 30Nrs 음에도 불구하고 포카라는 모든 인터넷 가격이 담합된 듯 99Nrs로 통일 돼 있다. 그나마 한국사랑 식당 밑에 있는 '하나로 PC방' 그나마 속도도 젤 난 편이라고..

 

포카라에는 한국 식당이 꽤 많다. 그리고 맛도 정말 정말 지대로다. 우선은 가장 큰 규모와 한국인 아주머니가 직접 요리를 한다는 장점이 두드러진 서울 뚝배기. 현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고 레이크 사이드에서 전망대 반대 편으로 퍼밋 받는, 사무소 가는 길에 있다. 삼겹살 1인분에 300 Nrs로 눈물나는 가격이지만 소주에 삼겹살, 김치 를 고려한다면 비용이 아깝지 않을 만큼이다.(난 트레킹 마친 저녁에 눈물의 소주를 마셨다..ㅡㅡ;)

 

그리고 서울 뚝배기에서 전망대 쪽으로 오는 길에는 식당이 많은데 특히 '홍금보 식당'의 자장면이 지대. 그리고 서울 뚝배기와 홍금보 식당 중간길에 있는 '소비따네' 식당은 네팔 아주머니가 한국인에게 음식을 전수 받았다고 하는데 정말 정말 맛있다. 여기서는 김치를 팔기도 하는데 같이 트레킹 한 사람이 산에 김치 싸 들고 와서 어찌나 고마웠던지..한국에서 김치나 고추장 소중한지 모르지만 외국나가면 한 젓가락에 눈물 콧물 다 뺄 지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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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네팔(3)-카트만두

카트만두의 여행자 지구인 타멜 지구의 의미는

 

T - to

H - homely

A - Atmosphere &

M - more

E - enjoyable

L - livibg

 

 

 

태국의 카오산 로드와 비교는 안되지만, 그에 준하게 여행자들을 위핸 공간들이 많다. 사진으로 보다시피 골목은 비좁고 상가들을 많고, 상인들의 인사도 하루 종일 계속된다. 저녁 8시 이후에는 모든 제과점의 빵들이 25%~50% 세일판매를 하고, 환전은 어디서든 할 수 있다. 실용품을 살 수 있는 마켓을 비롯한 등산용품점과 여행사들이 집중돼 있다. 물론 모두 짝퉁임을 전제로...

 

그리고 환전도 표시된 환율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환전상들과 거의 deal에 가까운 흥정을 하면서 환전을 할 수도 있다. 내 경우 푯말에는 69라고 돼 있었지만, 여행자 수표임에도 불구하고 70에 환전을 했다. 물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그러니 환전하는 곳을 여러곳 거친 후 적당한 곳에서 흥정하며 환전해 보는 것이 더 좋을 듯..

 

카트만두에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 유산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스와얌부나트 라고 네팔의 상징인 스투파가 언덕 꼭대기에 위치해, 시내를 한 둔에 구경할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달발광장. 물론 두 곳 모두 타멜지구에서 가까워서 걸어서 이동이 가능하고, 두 곳 모두 입장료를 받지만, 입장료를 내지 않고 갈 수 있는 꼼수들도 있다.

 



 

몽키 템플이라는 예명 답게 원숭이 들이 굉장히 많다. 수 많은 층계를 올라가면 계단 끝 정면에 스투파가 보이고, 그 뒤로 많은 불상들과 원숭이 들이 있다. 먹을 것을 가지고 있으면 원숭이 들이 쫓아오는데, 공격을 하기도 한다니 먹을 것을 들고 있는 사람은 조심하는게 좋을 것 같다. 특히 안경 같은 경우도 뺏어가기 때문에 조심하라는 경고도 받았다.

 

몽키템플의 경우 수 많은 계단의 막판에서 외국인들에게 100Nrs의 입장료를 받는다. 인도인과 네팔인들의 경우는 5~10Nrs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이 나는데..그러나 몽키템플의 입구는 주변에 즐비하게 많기 떄문에 이 중앙 계단만 아닌 다른 곳으로, 다른 계단을 통해 들어가면 입장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 내려오는 길에는 티켓을 확인하지 않으니..권장하는 바는 아니지만 주머니 사정이 궁하다면 어쩔 수 없을 것.

 

 

어쩃든 카트만두 시내 전경을 이렇게 다 볼 수 있는 곳은 몽키템플 밖에 없으니 올라가는 길이 힘들어도, 티켓값도 아깝지 않을 정도. 물론 안에도 수 많은 네팔사람들이 때문에 그들이 불경을 외는 모습이나, 원숭이들에게 먹거리를 나눠주거나, 작은 불상 및 탑들을 볼 수도 있다.

 

 태국과 네팔의 카트만두 모두가 불교 국가라는 공통점 때문인지, 불교지역과 문화제 그리고 생활 터전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특히 카트만두의 경우는 문화제와 생활 터전이 완전 뒤섞여 있는데.. 달발광장이 바로 그런 예라고 할 수 있다. 세계문화 예산으로 지정된 곳이라 할 만큼 다양하고 넓은 곳이지만 시장과 바로 연결 돼 있어서 수 많은 길들이 광장으로 통한다(입장료의 경우도 마찬가지. 200Nrs의 입장료를 내야 하지만, 수 많은 길들이 광장과 연결되기 때문에 골목길이나 시장을 통해서 들어가면 입장료를 내지 않을 수 있다).

 

달발광장은 수많은 사람들이 광장에서 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고, 조잡하리 만큼 세밀한 건출장식이 인상적이다.

 

 

 

달발 광장에서 유명한 곳은 쿠마리가 살고 있는 쿠마리 사원. 쿠마리는 네팔에서 신성한 여신의 존재로 추앙받는 존재로 현재는 9살 짜리 여자아이이다. 9월 인드라 축제 때는 주인공으로 네팔의 높은 사람들도 이 어린아이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를 할 정도로 신성성을 인정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초경 이후에는 천민이 되는 비참한 삶은 살게 된다고 하니 내 눈에는 불쌍하게 보일 수밖에..매일 오후 4시경 10초에서 15초 정도 창문을 통해 사람들에게 인사하는 시간을 갖는다. 딱히 인사라 할 것은 아니고 창문을 내다보는 정도라 할까. 암튼 눈 화장이 인상적인 어린 아이라는 것만 기억에 남는다.

 

카트만두에는 올드시티 등 다수의 볼거리가 더 있지만 난 이정도만 다녔다. 사실 타멜 지구를 중심으로 맛집을 찾아다니며 새로 만난 일행들과 정을 쌓아가는 기간이었고.. 당시 네팔 노동자들이 파업인 관계로 다른 지역으로 이동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타멜 지역을 어슬렁 어슬렁 걸어다니며 지리 익히기를 했다.  

 

참.. 스크린쿼터 싸움때 만났던 배우 정진영씨가 같은 숙소에 머물게 됐다. 잠시 휴가차 여행 왔다고.. '나도 밖에 나와 있는데 저 사람도 저리 밖에 나와있네..'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진 찰나, 같은 일행이 정진영씨 한테 싸인을 받아왔다. 각자의 이름이 적혀 있는..그간 한 번도 받지 않은 싸인을 네팔에서 받으니 기분이 생소했다. 음..네팔의 경우 최근 트레킹을 하기 위해 방문하는 한국인들이 증가하고 있고, 배우들도 쏠쏠히 온다고 한다.

 

다니면서 감동 스러웠던 맛집은..길은 잘 기억이 안나는데,

피크닉(한국말로 소풍이라고 간판이 있다) 식당은 한국음식을 그대로 먹을 수 있을 만큼 맛이 비슷하다. 일본인들이 많이 가는 식당이라 돈까스 같은 음식은 지대 깨끗하게 나오고 떡볶기와 김밥들도 정말 맛있다.

경복궁 타멜지구 중앙에 릭샤들이 많이 서 있는 갈라지는 길에서 간판을 찾을 수 있다. 음식이 한국과 똑같고, 한국 책들이 많이 비치돼 있어 시간 때우는 사람들도 많다.

에베레스트 스테이크 물어물어 찾아가면 절대 후회 안할 집. 스테이크가 싼값에 지대로 나온다. 모은 음식이 다 맛있고 심지어는 아이스크림에 빵까지..ㅡㅜ

small star (간판에는 '작은별'이라 씌여 있음.) 싼 네팔 음식점. 짱 게스트하우스 골목에서 나와 한국인이 운영하는 pc 방이 있는데 이 주인의 추천으로 알게 된 집. 가격의 감동이 밀려오지만, 우선 쥔장이 한국말을 나름 할 수 있다는 것도 강점. 지대로 된 네팔 음식을 먹을 수 있다.

핑거칩스 간식으로 먹기 좋다. 짱게스트 하우스에서 나와 숙소를 등지고 왼쪽 방향으로 나와 첫번째 골목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스낵가게. 감자 튀김도 예술이지만 특별 소스가 진미. 일행중이는 이 소스만 마시는 녀석도 있을 정도..

 

네팔 경험이 많지는 않지만 우리와 입맛이 비슷한 거 같다. 모모=만두, 툭바=수제비 는 완전 임맛에 지대로이고, 길거리 음식도 물론 가끔 물소 고기나 양고기가 맛이 빗나가기도 하지만 대충 입맛에 맞춰 먹을 수 있는 군것질 거리도 상당히 많다.

 

그때 만나게 된 일행들인데.. 이들이 들고 있는 통나무 통이 네팔의 전통주는 퉁바라는 것. 저 큰 통에 수수 같은 것을 넣어주고, 뜨거운 물로 3-4회 리필해서 빨대로 빨아 마시는 술이다. 맛은 막걸리 맛이 나는데 저 한통만 마셔도 배가 든든, 알딸딸 해짐. 락시(^^:)라고 해서 각 집에서 담그는 술도 있다고 하는데 이 것은 못 마셔 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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