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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한국, 어디에 있는지를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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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은숙  (2005-07-26 19:12:03, Hit : 364, Vote :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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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펌]한국, 어디에 있는지를 묻다
우리 만원계의 일원이신 유해정씨가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함께 읽어봤으면 해서 퍼왔습니다. 올해 안식년으로 아시아 인권현장을 누비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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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어디에 있는지를 묻다

유해정(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소리없는 자들의 소리’가 되고 싶어 라디오 방송국을 차렸다는 유리코의 사무실은 동티모르의 수도 딜리에 위치해있습니다. 동티모르 4대 방송국 중 하나라고 하기에 택시를 잡아타고 자신있게 방송국 이름을 외쳐봅니다. 하지만 택시는 한참을 헤맨 뒤에야 락카로 ‘라캄비아(RAKAMBIA)’라고 쓰인 허름한 건물 앞에 멈춰섭니다. 방송국으로 사용되는 단층 건물은 인도네시아 군대가 던진 폭탄 흔적이 수리되지 못한 채 남아 커다란 구멍이 군데군데 나있고, 창문은 성한 것보다는 깨진 것이 더 많습니다. 방송국 기자재라곤 1평 남짓한 작은 방송실 하나와 문서작업만 되는 컴퓨터 2대가 전부입니다.

인도네시아를 이슬람 국가로 기억하는 탓에 총리의 종교적 신앙마저 그를 공격하는 근거로 사용되는 현실에서 종교차별해소 운동을 벌이고 있는 안와르의 사무실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식당 겸용으로 쓰고 있는 작은 회의공간과 컴퓨터 한대가 그들의 활동을 지원할 뿐입니다. 빠듯한 단체 운영에 안와르는 학교 선생님으로 일하며 활동을 이어갑니다. 99년 해방이전에 독립운동을 벌였던 대학생들은 버려진 건물은 사무실 삼아 아동과 여성인권을 고민합니다.

한국의 가난한 단체도 이들보다는 호사스럽다 느껴질 만큼 열악함에 고개가 흔들어지지만 이들은 국제연대를 꿈꿉니다. 지원받기위한 연대가 아니라 지원하기 위한 연대를. 63년 인도네시아의 식민지가 된 이래 국민의 1/10이 죽어나간 웨스트 파푸아의 현실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이들은 부지런히 사람들을 모읍니다. 한 시간 사용료가 하루 수입에 맞먹을 만큼 비싼 지출을 감수하며 인터넷 방에서 정보를 모으고 국제사회와 소통하는 수고를 감수합니다. 몇 백 년에 걸친 식민지에서 독립해 정부와 국가를 갖게 된 지 이제 3년. 해서 과거청산부터 사회재건까지 구석구석 해야 할 일엔 끝이 없지만 국제연대를 터부시하진 않습니다. 항상 ‘국외’보다는 ‘국내’사안이 우선이고, 국제연대는 몰라서가 아니라 ‘여력’의 문제라며 뒷전으로 미뤄왔던 이방인에게 이런 광경은 생소하기만 합니다. 유리코가 말합니다. 웨스트 파푸아는 불과 몇 년 전 자신들의 모습이라고. 국제사회의 지원과 연대가 없었다면 독립은 요원했을지 모른다고. 인도네시아와의 독립투쟁에서 아버지와 친구들을 잃은 닌도가 덧붙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루 세끼를 먹는 문제와 정치적 어려움을 토로하지만 그래도 죽음의 공포에선 벗어나 있다”고. 그러면서 묻습니다.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위해 한국은 무엇을 할 거냐”고.

필리핀 분쟁지역에서 만났던 이들도 비슷한 얘기를 했습니다. 25살의 평화운동가 빙은 “언제든 반군 혹은 테러리스트로 몰려 죽을 수 있다”며 두려움을 토로했습니다. 그런 빙에게 외부세계의 ‘연대’란 활동의 방패이자 삶을 지탱시키는 힘입니다. 거듭된 교전으로 농사지을 땅과 가축을 잃고 고향을 떠나온 에모다스에게도 ‘연대’는 희망을 의미합니다. 그는 “우리가 공포에 떨며 살아온 지난 30년 동안 한국은 어디에 있었냐”고 절규하더군요.

어쩌면 이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한국은 인권의식이나 인권시민사회 진영은 발달해있지만 국외 문제에 대해선 인색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간혹 ‘성명서’에서 그 흔적을 발견하긴 해도 물적, 인적 자원을 쏟아 부으며 긴 호흡으로 이들과 동고동락 한 존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끄럽지만 ‘인권운동’을 해왔다는 저 역시 공포에 질린 그들의 눈을 보기 전엔, 그들도 나와 같은 ‘사람’임을 다시금 깨닫기 전엔 ‘조건’만을 탓하며 ‘국제연대’는 특별한 사람, 단체의 몫인 것처럼 생각해왔습니다.

언제쯤이면 ‘국가’라는 공간을 넘어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이들의 절규와 공포에 어깨를 걸 수 있을까요?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그래서 한국이 가지고 있는 자유를 자신들의 자유를 위해서도 사용해달라는 사람들의 호소를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동티모르 딜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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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h-A-Yeh(2)

Name  
   류은숙  (2005-07-19 13:45:23, Hit : 329, Vote :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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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oh-A-Yeh(2)
Doh-A-Yeh (이말은 버마 학생들이 투쟁할 때 쓰는 구호인데, “우리의 목표” 또는 “우리가 원하는 바”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사회를 향한 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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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없는 친구들’에서 보내온 글입니다. 쓴 사람 이름은 Mayachon이네요. Yain이라는 버마 운동가와의 인터뷰입니다.


“우리는 Aung San Suu Kyi가 이끄는 버마민족민주동맹(NLD)을 위해 선거운동을 했어요. 우리 학생조직은 선거에 누구도 내보내지 않았어요. 그렇게 되면 투표가 분산되고 군부가 이길 것이란 걸 알아서죠. 또한 우리는 NLD에 가입하지도 않았어요. 우리는 여전히 지하조직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일부는 이미 정글로 갔고 우리는 그들을 비밀리에 지원했어요. NLD가 투표의 82%를 확보하면서 승리했을 때, 나는 ”아, 자유가 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군부는 굴복하지 않았어요. 대신에 그들은 더욱 폭력적이 됐죠. 나는 Kachin주와 중국간 국경지대로 도망쳤어요. 처음에는 거기에 5-6달 있으면 될줄로 알았는데 그보다 더 오래 걸릴 수 있다는 생각이 곧 들게됐죠. 나는 Kachin 독립군이 하는 군사 훈련에 6개월간 참가했어요. 하지만 93년 경 Kachin 독립군은 군부와 휴전협약을 맺었죠. 그 이후 그들은 정권으로부터 많은 탄압을 받았고, 우리 모두는 국경을 건너 중국 쪽으로 가야했어요. 그후 얼마돼지 않아, 여학생들은 버마여성연합(Burmese Women's Union)을 결성했고, 우리의 첫 번째 회의가 타이-버마 국경에서 열렸어요. 나는 사무총장으로 선출됐고, 그래서 지금까지 여기 머물고 있어요.”

“군대이기 때문에, 버마 학생군은 일종의 권위주의적 규칙하에 있어요. 여성들은 오직 의료, 교육, 공급, 오락 서비스에만 참여할 수 있어요. 나는 무엇이건 많이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어요. 내가 버마여성연합에 가입하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의 목적에 대해 배우고 더욱 선명히 알게됐죠. 처음에는 군부정권을 제거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고, 그러면 우리는 영웅이 되고, 모든 분쟁이 끝날 것이라 생각했죠. 하지만 그 이후로 나는 알았어요. 사람들이 평화롭게 더불어 살 수 있고 존엄하게 살 수 있으려면 해야 할 일이 그보다 더욱 많다는 것을. 진정한 민주주의로 나아가려면, 각 소수민족들의 동등한 권리 그리고 남성과 여성의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강력한 시민사회가 있어야 해요.”

“3-4년전까지만 해도 나는 나자신을 학생이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졸업한 적이 없으니까요. 그렇죠? 졸업은 영원히 연기된 것 같아요. 그런데 어느날 나 자신을 바라보니 거의 40살이 됐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나에게는 아이들이 있고, 함께 일하고 책임져야 할 젊은 동료들이 있어요. 그래서 나는 생각했죠. 대학 때의 수업을 통해서가 아니라 경험을 통해 성숙해야 한다고.”

“망명한 청년 집단은 매우 영리하고, 강하고, 용기있고, 의지가 굳어요. 그들은 우리보다 더많은 교육 기회를 가졌고, 그들은 사물을 분석할 줄 알고 창조성으로 가득차 있어요. 하지만, 이러한 강점이 또한 그들의 약점이기도 해요. 그들이 가진 기회로 인해 그들 중 일부는 끝없이 공부만 하려 해요. 하지만 우리는 이 일을 계속할 새로운 피가 부족하고 영원히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어요. 나는 사람들은 공부만이 아니라 일에서도 배울 수가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뭔가를 시작하기 전에 답을 구하려고 공부할 것을 기대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답을 발견할 수 없을 거예요. 젊은이들은 지금 국제정치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갖고 있어요. 나는 그들에게 자기 자신의 나라에 대해 더 많이 배울 것을 장려하고 싶어요. 제말은, 타인에 대해 배울 수 있는 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야만 당신의 지식이 유용할 수 있다는 것이죠.”

“나는 제 3국에 망명처를 구할 계획이 없어요. 여기에 할 일이 많아요. 버마의 정의는 깊은 뿌리를 가져야만 해요. 어느날 내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해도, 나는 여성들의 정치 참여를 증진하기 위해 이 일을 계속할 거예요. 나는 10년 이상 부모님과 어떤 연락도 갖지 못했어요. 부모님은 내가 이기적이어서 가족을 떠난 것이라 생각하실지도 몰라요. 하지만 나는 모국을 위해 싸우는 자유의 투사인 딸을 자랑스러워 하실거라 희망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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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텍알시디코리아 농성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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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대환  (2005-07-14 13:15:09, Hit : 399, Vote :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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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텍알시디코리아 농성장에서...
하루 자고 왔습니다.
(약칭)하이텍은 사측의 심각한 감시와 감독, 왕따, 각종 폭력행위 등으로 조합원들이 심각한 정신질환 증세를 보여 왔습니다.
2002년부터 민주노조사수를 포함한 노동쟁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들입니다.

들어본 분은 아시겠지만 정신질환 판정을 받았지만 정작 근로복지공단에서는 인정할 수 없다며 산업재해를 인정하지 않고 요양신청을 불승인 했습니다.

그래서 현재 농성투쟁 중입니다.

농성장을 지킬 사람이 부족해서 1주일에 하루라도 가서 있기로 했습니다. 밖에서 자는 것은 역시나 힘들군요.ㅜㅜ


참 중요한 것은 이걸 말하고자 하기 보다는 그 곳에 있으면서 느낀점이 몇가지가 있습니다.

하이텍도 실재 대부분의 생산라인은 국외로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필리핀이 주요한 생산라인이라는 군요.

그래서 우리가 하는 만원계 운동이 다른 방식과 연결되면 또 다른 국제주의 운동의 모습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해 보았습니다.

이곳 만원계에도 있는 필리판 한국기업 노동자들에 대한 지원과 같은 것을 좀더 계획적이고 연계성을 가지고 장기적으로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타이 모임에서는 구체적인 방법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요.

아무튼 그냥 어제 들었던 고민입니다.

요점은 우리에게는 다양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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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h-A-Yeh

Name  
   류은숙  (2005-07-14 11:11:10, Hit : 360, Vote :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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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oh-A-Yeh
Doh-A-Yeh (이말은 버마 학생들이 투쟁할 때 쓰는 구호인데, “우리의 목표” 또는 “우리가 원하는 바”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사회를 향한 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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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없는 친구들’에서 보내온 글입니다. 쓴 사람 이름은 Mayachon이네요. Yain이라는 버마 운동가와의 인터뷰입니다.

“제가 10․14 항쟁 비디오를 봤을 때 처음 받은 느낌은 젊은 사람들의 순수한 힘과 용기에 대한 동질감이었습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권력층에 있는 사람들이 다르고 시간과 장소가 다르다는 것이죠. 10․14 타이 학생 봉기는 독재는 부당하므로 인민의 헌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분명한 목표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외부 세계와 오랫동안 봉쇄돼온 버마 학생들의 각성은 우리 삶에 밀접한 일들-우리의 친구들을 향한 불의와 잔인성-로 인해 촉발됐습니다. 우리는 봉기하고 나서야 불의의 원인을 발견할 수 있었고, 인권침해의 구조와 싸울 방법을 알게 됐습니다.”

20년 전에, Yain은 랑군 대학의 경제학부에 입학하게돼서 기뻐한 여느 소녀들과 같았다. 초등학교 교사인 아버지가 정부로부터 받는 보조금으로는 학비의 1/5밖에 충당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Yain은 한가지 목표는 성공적으로 학위를 끝내고 빨리 Kachin주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남학생과 여학생이 대학에 들어가는 데는 기준의 차이가 있습니다. 여학생이 의학, 공학, 임학을 공부하고 싶으면 남학생보다 훨씬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랑군 대학의 경제학의 경우에는 똑같았지요. 그래서 저는 거기를 선택했지요. 입학 전에는 랑군에 가본적이 없어요. 가족 중 누구도 가본적이 없지요. 저는 수도에 가보고 싶었지요.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것은 내가 공부를 해야한다는 것이었고 그래서 언젠가는 대부분의 여학생들이 하고 싶어하듯이 선생님이 되거나 회계사가 되는 것이었어요.”

“1988년은 나의 마지막 학년이었어요. 처음에 저는 단지 기분이 매우 안좋았고 뭘 해야할지 몰랐어요. 군부가 대학문을 닫고 학생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 했거든요. 그때 저는 옛 친구들을 만나 얘기할 기회가 있었어요. 우리들은 ‘뭔가 해야만 한다’, ‘이건 정의에 관한 일이다. 많은 친구들이 죽었다’는 얘기를 나눴어요. 하지만 어떤 친구들은 말했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부모님을 생각해야지’라고요. 우리는 더 이상 가만있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를때까지 논쟁을 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 도시의 학생 그룹을 조직했고, 다른 도시의 그룹들과 연결했지요. 우리는 큰 도시의 데모와 고향의 운동에 물품들을 보냈어요.”

1988년 8월 8일 8시 8분, 학생, 승려,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총력 시위에 모여들었다. 군부는 폭력적으로 대응했다. 엄청난 탄압과 더불어 군부내에 “자기-혁신”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일당 체제를 끝내겠다고 공포하고 1990년에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약속하게 됐다. (다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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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의 고산족(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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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은숙  (2005-07-11 19:47:47, Hit : 360, Vote :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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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이의 고산족(4-끝)
타이의 고산족(4-끝)
아시아의 선주민-많은 민족들, 하나의 투쟁(Indigenous People in Asia: Many peoples, One struggle)
Asia Indigenous Peoples Pact에서 96년 발간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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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족이 살고 있는 대부분의 지역은 산림부의 소유이다. 공공복지부에 고산족 발전센타가 있기는 하지만, 정부 부처간에 적절한 조정은 전혀 없다. 산림부는 특정 지역들을 지정구역으로 분리해왔고, 고산족들은 그런 지역에서 내쫓겨났다. 때때로 자본가들이 부패한 정부 관료들과 손잡고 고산족들에게 헐값에 땅을 팔도록 강제했다. 고산족들이 땅을 팔기를 거부하면 정부 관료들에게 시달렸다.

산림을 보존하려는 정부정책으로, 고산족들은 철거되어 저지대로 옮겨가고 타이민이 될 것이 장려됐다. Kampangpeth 지방에서 대부분이 몽족에 속하는 5천여명의 사람들이 강제로 이주해야 했다. 이주민들은 거의 석달 동안을 길거리에서 살아야했다. 콜레라가 돌았고, 그로 인해 그들 중 일부는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어떤 고산족들은 오랜세월 타이에서 살아왔지만, 어떤 고산족들은 정치적 혼란 때문에 라오스나 버마로부터 최근에 온 사람들이다. 이러한 고산족에 대한 정부의 정책은 무장세력을 이용해 타이에서 내모는 것이었다. 이들은 진정한 난민으로 고려돼야만 한다.

고산족들에게 채소나 기타 작물을 기르도록 한 정부 정책은 또다른 문제를 일으켰다. 즉, 중간상인의 착취와 시장의 불안정성이다. 또한 정부가 도로를 건설하면서, 고산족들은 평지 사람들과 더 가깝게 접촉하게 되었고, 그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게 됐다. 그 과정에서 정체성을 상실하고, 많은 고산족들은 도시에서 매매춘, 구걸, 또는 소규모 공장에서 착취받는 노동자의 운명을 맞게 됐다.

오늘날, 고산족들은 많은 문제에 직면에 있다. 그들을 타이 사회의 골칫거리로 여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고 비인간적인 처우를 받고 있다. 그들이 응당 받아야 할 관심을 보여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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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의 고산족(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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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은숙  (2005-07-06 22:03:07, Hit : 277, Vote :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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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이의 고산족(3)
타이의 고산족(3)
아시아의 선주민-많은 민족들, 하나의 투쟁(Indigenous People in Asia: Many peoples, One struggle)
Asia Indigenous Peoples Pact에서 96년 발간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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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족에 대한 정부의 정책
1956년 정부는 국경 경찰을 보내 고산족에 대한 조사를 수행하게 했다. 1959년에 내각은 “고산족에 대한 지원위원회”를 임명했다. 1965년, 타이의 공산당이 고산족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보했다. 이에 내무부는 공산주의 운동을 종식시키기 위한 대응 계획을 제기했다.

1973년, 정부는 고산족 발전을 위한 이대 계획을 고안했다. 하나는 단기 계획으로 공산주의자들이 강력한 지지를 획득한 민감한 지역에 들어가 공산주의자들을 괴멸시키고 공무원과 군부로 하여금 그 지역을 개발하도록 지원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장기 계획으로, 고산족들이 영구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땅을 찾도록 돕는 것이었다. 토지개발을 하고, 아편대신에 채소를 기르고, 산림을 파괴하지 않도록 고산족들을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1976년, 정부는 고산족들을 조직화하고 그들의 생활조건을 향상시키려 했다. 또한 “국가 고산족 위원회”를 설립했다.

현재 정부는 3대 정책을 채택했다. 첫째는 고산족들로 하여금 정부 정책을 이해하도록 하는 것, 법률을 준수하고, 그들이 거주할 수 있는 지역의 한계를 정하는 것이다. 둘째는 아편을 심는 것을 중단시키는 것이다. 셋째는 의료서비스와 가족계획조치를 도입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부의 정책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고산족들에게 영향을 끼쳐왔다.

시민권
많은 고산족들은 타이에서 태어나서 성인이 됐다 할지라도 시민권을 증명하는 서류를 얻는데 심각한 문제를 경험한다.

국가신분증은 타이 시민권의 증명물이다. 흔히 타이에서 태어난 고산지대 거주자들은 그 부모 역시 타이에서 태어났으나 시민권 서류를 갖고 있지 못하다. 정부는 수년간 아주 느리게 그들에게 카드를 발급해왔다. 관료제의 성격 때문에 잘못된 신분증 발급은 번창하는 사업이 돼왔다. 등록을 빨리 시키는 것은 자기 주머니를 채우는데 바쁜 이들 공무원들에게 관심사항이 아니었다.

신분증을 갖지 못한 고산족은 여행을 하려면 자기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공공복지관서에서 허가를 받아야만 한다. 토지소유나 사업 허가도 시민권 신분증을 필요로 한다. 신분증 소지는 또한 투표와 고등교육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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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버리 하다가 이제야 가입

Name  
   이윤주  (2005-07-06 18:41:25, Hit : 346, Vote :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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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리버리 하다가 이제야 가입
자동이체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여기도 가입인사 해야되나봅니다.

전달에 잔고가 모잘라 이체가 안된 모양이던데, 시작부터 부실하니 좋은 회원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잘해볼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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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의 고산족(2)

Name  
   류은숙  (2005-07-05 11:58:32, Hit : 284, Vote :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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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이의 고산족(2)
타이의 고산족(2)

아시아의 선주민-많은 민족들, 하나의 투쟁(Indigenous People in Asia: Many peoples, One struggle)
Asia Indigenous Peoples Pact에서 96년 발간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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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족은 다양한 곳에서 왔기 때문에 각 집단은 고유의 언어, 문화, 규범을 갖고 있다. 지도자는 항상 최연장자이며, 마을에서 가장 연고가 깊은 사람이다. 지도자는 자기 마을의 사람들에 대해서만 지도권을 행사한다. 마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장자들은 노인이나 가족들의 가장과 의논한다. 지도자들은 종교 의식을 행하며,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아는 것이 많고 발성력이 좋아야 한다.

Phi Pha(하늘의 령)는 고산족들의 영적인 우두머리로 보인다. 각각의 고산족은 그것에 대해 다양한 이름을 갖고 있는데, Phi Nam(물의 령), Phi Rai(식물의 령), Phi Pookhan(산의 령), 또는 길의 령, 돌의 령 등등이다.

고산족들이 사용하는 도구는 일반적으로 도끼와 칼로 큰 나무를 잘라 산속에서 농사짓기 위한 것이다. 고산족들은 개간한 땅에 벼를 심는다. 농장일은 일년 내내이다. 거의 모든 수확물은 다음 수확기전에 소모된다. 어떤 가족들은 일년 중 6개월에서 8개월동안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흔히 그들은 말려서 구운 옥수수씨나 야생감자로 연명한다. 종종 쌀 대신에 옥수수, 타피오카, 고추, 가지, 오이같은 작물을 재배한다. 이것들은 먹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팔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아편은 이들에게 생활필수품을 사기에 충분한 소득을 가져다주는 유일한 식물이고, 일부는 고된 생활의 고통을 누르기 위해 아편을 피우게 된다.

왜, 얼마나 오래전에 고산족들이 산속에 등장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이 없다. 아마도, 그들은 토지 다툼 때문에, 우세한 종족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신만의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산에 올라갔을 것이다. 그들의 생활방식은 매우 단순하고 고립된 것이다.  

최근 수년간, 산의 생산품이나 심지어 아편을 구입하러 오는 평지 사람들이 고산족에게 큰 영향을 끼쳐왔다. 고산족들 또한 시내를 방문하여 낯설고 유혹적인 많은 것들을 보게되고 그것들을 갖고 싶어한다. 대부분의 장사꾼들은 고산족에게서 물건을 싸게 사고, 그것들을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팔아서 부당한 이익을 취하고 있다.

고산족들은 국경 지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때때로 국경을 건너 라오스와 버마로 간다. 이로 인해 타이 정부는 고산족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국가안보에 위해한 것으로 본다. 정부는 고산족들을 강제로 평지에서 살게 하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적응할 수가 없다.

여전히 산속에서 살고 있는 고산족들은 정부로부터 어떠한 혜택도 받지 못한다. 더욱이, 정부 공무원들은 고산족에게 법적인 시민권을 주기를 거부하고 있다. 정부 공무원들은 당신들은 어떤 신분증도 없는 불법 거주자라고 주장하면서 자주 고산족들을 협박하여 돈을 뜯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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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내린 비....

Name  
   조대환  (2005-07-01 15:02:39, Hit : 336, Vote :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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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에 내린 비....
이틀 전에 한 후배가 들렸다가 가면서 우산을 빌려갔습니다.
그날은 장마 초였는데 비가 오락가락 했죠. 음, 일단 그냥 빌려주면서도 불안 불안 했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와 버렸네요.

그 전에 집에 하나 더 있던 우산을 버렸기에 이제 집에는 우산이 없었죠!

낮 시간에 내리는 비는 소나기나 다른 비라고 하더라도 우산을 미리 준비 못할 상황이 있기 마련이라 비를 맞고 가는 사람이 그리 이상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이른 아침부터 (당연히 비가 내리는데) 집을 나서면서, 그리고 거리를 지나면서 우산이 없어서 신문지로 머리를 가리고 뛰어가는 것은 모습은 좀 납득하기 어렵지 않았을까요?

아침부터 비 맞은 하루였습니다.

아 그리고 제가 송금하기 전에 타이로 송금하셨나보네요. 혹시 간발의 차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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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의 고산족(1)

Name  
   류은숙  (2005-06-29 13:22:29, Hit : 267, Vote : 20)
Subject  
   타이의 고산족(1)
아시아의 선주민-많은 민족들, 하나의 투쟁(Indigenous People in Asia: Many peoples, One struggle)
Asia Indigenous Peoples Pact에서 96년 발간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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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의 고산족(hill tribes) (1)

"Chao Khao"(hilltribes)라는 용어는 3십여년동안 공식적으로 사용돼왔다. 이 말을 쓰기 전에는 타이의 다수민족인 Thai 또는 Tai족과는 다른 독특한 문화를 지니며 고산지대에서 거주하는 다양한 소수민족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가 없었다.

1959년에 고산족 복지 위원회(나중에 고산족 위원회로 바뀜)가 임명된 이후로, “Chao Khao"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게 됐다. 이 용어는 9개의 주요한 민족집단을 포괄하는데, 즉, Moe(Hmong, Mong), Yao(Mien), Musur(Lahu), Lisaw(Lisu), Egaw(Akha), Kariang, Karen(Pa-Ker-Yaw), Lua, Lawa(Lawer), H'tin(mal, Prai), Khamu 족을 말한다. 이들 민족들의 대부분은 타이의 북부지방에 퍼져 살고 있으며, 꽤 많은 수가 타이-버마 서쪽 국경지대에 거주해왔다.

1988년 소주민족 연구소가 수집한 통계에 따르면 고산족 인구는 20개 지역, 5십5만여명에 이른다.

이들 고산족의 민족적-언어적 줄기를 추적하여 분류하려는 노력이 있어왔다. 가장 유행한 분류는 세 개의 주요한 어족에 따라 분류하는 것이었다.
1. 지나-티벳어족(Sino-Tibetan): 이 범주 하에서 두개로 갈라진다. 하나는 Tibeto-Burman으로 Lahu, Lisu, Akha 로 구성된다. 다른 하나는 Karen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2. 오스트로-아시아 어족(Austro-Asiatic): 여기에 속하는 주요 집단은 Mon-Khmer 이고, Lua, H'tin, Kahmu가 포함된다.
3. 오스트로-타이어족(Austro-Thai): Meo-Yao가 그중 하나이다.  

증거들이 보여주는 바는 타이의 북부지역에 거주해온 Mon-Khmer 집단에 속하는 고산족들이 아주 오랫동안 여기에 살아왔다는 것이고, 이 땅의 선주민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고산족들의 선조들은 수백년(어떤 집단의 경우에는 더 적다) 전에 라오스 또는 버마를 통해 이주해온 사람들이다. 따라서, 모든 고산족들에게 이주자라는 낙인을 붙이려 하는 사람들은 아주 옳지 못하다.


대부분의 고산족은 버마, 중국, 라오스, 베트남을 통해 수백년에 걸쳐 타이로 이주했으며 그 수가 점차 늘어났다. 지금은 21개 이상 지역에 5십만 여명에 이른다.

가장 많은수의 고산족들은 “Pakayo"이다. 그 선조들이 수백년전에 버마에서 왔다는 것이다. Pakayo는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버마와 정기적으로 싸웠다.
Lisu, Mong, Akha 족은 한때 독립적으로 자신만의 땅을 소유했으나, 불행히도 중국의 봉건주의자들에게 굴복하여 토지를 잃었고, 현재는 라오스, 버마, 타이에서 발견되고 있다.

“Mien"족은 평화로운 민족이었다. 이들은 동물처럼 취급받고 착취당했지만 중국과 대결하기 보다는 항복하는 걸 선택했다. 이들은 중국어로 ”Yoaw"(인간을 의미)라고 불리웠고, 타이에서는 “Yao"로 바뀌었다.
  
Lao 족은 이 지역에 아주 오랫동안 거주해온 종족이다. 이들의 문화는 매우 고대적이다.

Lahu족은 고산족 중에 가장 신생 구성원으로 2차 대전 직후에 타이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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