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타이 내 버마 이주노동자(6)

Name  
   류은숙  (2005-09-13 23:29:25, Hit : 183, Vote : 17)
Subject  
   타이 내 버마 이주노동자(6)
방금전에 번역한 내용을 클릭 한번 잘못하는 바람에 몽땅 날렸습니다. 우울하지만 지금부터 다시 하려고 합니다. .......추석이 며칠 안남았는데 즐거운 계획들 많이 짜시기를...


타이 내 버마 이주 노동자(6)

타이 내 버마 이주 노동자들의 문제를 다룬 국제앰네스티 보고서(http://web.amnesty.org/library/engasa390012005)의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체포, 구금과 추방

이주노동자들은 "일제단속"과 체포에 취약하다. 노동등록증을 갖고 있지 않아도 그렇지만 때로는 등록돼있다 할지라도 카드를 소지하고 있지 않으면 체포될 수 있다. 일단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면 뇌물을 받아내려고 체포하겠다는 위협이 있다. 일부 버마 이주자들은 말하기를 집밖에 나설 때 200바트(약 6천원)이상을 절대 몸에 지니지 않는다고 한다. 혹여 경찰에게 모든 돈을 뺏기지 않으려고 말이다. Mon 출신의 자동차 기계공은 말했다. 2004년 5월에 근처에서 12살 난 딸이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고 한다. 딸이 등록카드를 제시할 수 없자 경찰은 아버지가 뇌물로 1천바트(약 3만원)을 가져오지 않으면 체포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주자들이 종종 뇌물액수를 깍으려고 경찰과 흥정을 할 수는 있지만 이런 식의 경찰 행동은 이주자 지역에서 전형적인 것이다.


체포되면, 버마 이주노동자들은 대개 비위생적인 환경의 경찰 유치장이나 이주자 구금 센터에 갇힌다. 20살의 Mon 출신 남성은 2004년 6월에 체포된 경험을 얘기했다. "푸켓에서 오늘 길에 체포됐어요. 우리 세명이 같이 오고 있었죠. 타이 경찰은 1만바트(약3십만원)를 가져가고 몸 수색을 해서 모든것을 빼앗았어요. 한 친구는 말을 안듣는다고 해서 발길질을 당했어요. 우리는 경찰 유치장에서 이틀을 그리고 Ranong 이주자구금센터에서 10일을 보냈어요. 거기는 아주 초만원이었어요. 내가 본 어떤 사람들은 움직이지를 못했어요. 거기에 너무 오래 그러고 있어서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어요."

체포되고 24시간 혹은 그이상의 구금 이후에는 매우 초만원인 트럭에 실려서 국경으로 이송된다. 예를 들어 2004년 2월 20일, 106명의 버마 이주자와 그 가족이 트럭에 실렸다. 그 트럭의 안전승차인원은 겨우 26명이었다. 트럭은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도로에서 미끄러졌다. 8명이 죽었고 18명이 중상을 입었다. 106명의 버마인 가운데는 3명의 아이가 있었고 그중 하나는 생후 8개월이었다.  타이 법률가 협회는 이 사건을 제소했는데 피해자나 그 가족에게 어떤 보상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껏 알려진바가 없다.


경찰이 일하는 곳을 급습하면 일부 노동자들은 탈출을 시도한다. 보도에 따르면 버마 이주자들이 타이 지역 경찰관의 아들을 죽였다는 주장에 따라 이민국과 국경순찰경찰이 합동으로 2004년  1월 20일 칸챠나부리에 있는 비타 파인애플 공장을 급습했다. 공장에 있던 버마 이주 노동자들은 잡히지 않으려고 강물로 뛰어들었다. 일부는 잡혀서 경찰에게 구타를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적어도 11명이 강물에 빠져죽었다. 앞의 트럭사고에서나 파인애플 공장사건의 경우에는 피해자가 그 가족에게 어떤 보상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하늘

Name  
   류은숙  (2005-09-06 19:25:37, Hit : 237, Vote : 19)
Subject  
   하늘
저녁 하늘 보고들 계신가요? 정말 너무 멋있고 예뻐서 무슨 형용사를 써야할지 모를 하늘 모양입니다. 제 사무실은 옥탑방이라 하루종일 하늘을 볼 수 있는데 오늘 저녁 하늘은 정말 죽이는군요.

어렸을 때 살았던 산동네 집에서도 하늘이 잘 보였습니다. 빨래를 해서 널다가 하늘빛에 넋이 나갈 때가 많았고, 눈물이 날 정도이기도 했었습니다. 하늘에서 눈을 떼고 둘러보는 주변은 너무 초라했기에 하늘만 쳐다보고 살았으면 하기도 했지요. 그때는 하늘이라는 제목으로만 시도 수십편 썼던 것 같은데, 지금은 뭔가 말라버려서 시는 커녕 뭐라 형용할 만한 단어도 찾지 못하겠네요.

9월은 하늘을 보고 경탄하기에 가장 좋은 달입니다. 힘들고 우울할 때마다 혹은 즐거울 때마다 하늘 보면서 같이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하늘아래 살고 있으니까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타이 내 버마 이주 노동자(5)

Name  
   류은숙  (2005-09-05 22:38:45, Hit : 194, Vote : 32)
Subject  
   타이 내 버마 이주 노동자(5)
타이 내 버마 이주 노동자(5)

타이 내 버마 이주 노동자들의 문제를 다룬 국제앰네스티 보고서(http://web.amnesty.org/library/engasa390012005)의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타이 노동부는 타이 각 지역에 해당하는 최저임금률을 정하고 있다. 하지만 앰네스티가 면담한 대다수는 당국에 노동 등록을 했다 할지라도 최저임금률에 못미치는 임금을 받고 있었다. 이주노동자들은 노동조건 개선과 임금율을 위해 조직화를 시도하면 고용주들에게 흔히 처벌받았다. 처벌은 고용주가 고용하는 지역 갱단에 의한 폭행에서부터 지역 당국에 의한 대량 체포와 버마로의 추방에까지 이른다.

21살의 Shan 출신 남성은 11살 때 Laikha의 고향을 떠났다. 버마군부가 그와 이웃들을 마을에서 내몰고 강제로 이주시키려했기 때문이다. 그는 가족과 헤어지게 됐고 그 이후 타이로 도망쳤다. 처음에 그는 빵집에서 일했는데 한 달에 겨우 300바트(약 9천원)을 벌었다. 그 다음에는 얼음 공장에서 일자리를 얻었고 거기서는 한달에 2천바트(약 6만원)와 잠자리를 제공받았다. 인터뷰 당시에는 플라스틱 가방을 파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타이 북부 치앙마이 지역의 법정 최정임금인 일일 143바트(약 4,290원) 대신에 일일 120바트(약 3천 6백원)를 벌고 있었다. 그는 현 고용주에게 받고 있는 처우에 대해 묘사했다. "잘 대해주지 않아요. 언어로만이 아니라 때로는 신체적으로도 학대해요. 날 해고하겠다고 위협하지만 참아야만 해요. 일자리를 구하기가 정말 어렵거든요. 때때로 주인은 날 밀어제껴요. 일이 끝날 때가지는 밥을 못 먹게 해요."

23살의 Mon 출신의 실업상태의 금세공인은 타이에서 받은 처우에 대해 얘기했다. "버마 노동자들에게 타이 경찰은 큰 위협이예요. 우리가 설사 노동허가증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경찰은 자기 권력을 남용하고 우리를 괴롭히죠. 버마인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몰라서 경찰에게 잘못 취급당하기도 해요. 타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우리를 쓰레기 취급해요. 버마인들이 경제를 돕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는 타이 사람들이 하지 않는 일에서 직업을 가져요. 타이 사람들은 우리를 골칫덩어리로 여기지, 결코 좋은 친구들로 여기지 않아요. 나는 타이에 오고싶지 않았어요. 내 땅과 내 나라를 사랑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경제운영의 그릇됨과 빈곤, 교육의 부족, 특히 농촌사람들에게 열악한 현실 때문에 왔지요. 버마인들이 원하는 것은 더 나은 삶이에요. 하지만 여기에서도 학대받고 있어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5년 9월 후원금 송금내역

Name  
   류은숙  (2005-09-01 10:50:25, Hit : 217, Vote : 28)
Subject  
   2005년 9월 후원금 송금내역
9월이 되었습니다. 힘든 여름을 이겨낸 우리 모두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풍성함을 많이 나눠갖는 우리들의 가을이 되기를 바랍니다.


전달 이월액 165,854원

8월 1일 유해* 1만
8월 3일 조대* 1만
8월 8일 이민* 1만
8월 10일 이윤* 1만
8월 11일 황수* 1만 5천
8월 25일 김재* 1만
8월 25일 김예* 1만
8월 26일 이민* 1만
8월 31일 구태* 2만
8월 31일 류은* 1만
------------------
계: 11만5천원

9월 1일 송금 200달러+수수료 5천원=213,228원
잔액 67,626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타이 내 버마 이주노동자(4)

Name  
   류은숙  (2005-08-29 22:24:14, Hit : 207, Vote : 19)
Subject  
   타이 내 버마 이주노동자(4)
몇 번 글을 올리지도 못하고 8월이 다 갔네요. '국경 없는 친구들'과 함께 하시는 여러분은 어디 계신가요?

제가 너무 자료 위주로 글을 올려서 계원 여러분이 글을 못 올리시는 것은 아닌지 가끔 걱정해봅니다. 제가 자료를 올리는 것은 '함께 한다'고 할 때 처한 상황을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계속 공부하는 심정으로 올리고 있답니다.

여러분의 글이 많아져야 이 게시판이 홍보도 되고, 찾아오는 분들도 늘고, 목표하고 있는 '국경지대의 활동가 한 명 생활 책임지기'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계원 여러분 게시판을 많이많이 찾아주세요.

그런데 궁금한 것은 요즘 조회수가 왜 갑자기 높아졌지요? 혹 학생들 방학숙제에 관련주제가 있기라도 한건가요? 지난달만 해도 조회수가 일 이십명에 불과했는데 이상하지요? 아무튼 8월 마무리 잘하시고 힘찬 9월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타이 내 버마 이주 노동자(4)

타이 내 버마 이주 노동자들의 문제를 다룬 국제앰네스티 보고서(http://web.amnesty.org/library/engasa390012005)의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이주노동자의 노동권 인정 결여-

이주노동자에게 뿐만 아니라 타이동자들에게도 노동조합과 노동권이 제약돼 있다. 타이의 작업장에서의 노조 조직률은 4%가 못되며, 산업노동자의 11%만이 조합원이다. 이렇게 낮은 조직률의 이유는 타이 노동자의 상당수가 비공식부문과 농업에 종사하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각 지방의 최저 임금은 지역위원회가 정하며 일반적으로 노동자와 그 가족에게 적절한 생활 수준을 제공하기에 충분치 않다. 법적 최저임금은 일일 133바트(약 4천원)에서 169바트(약 5천원)이다.

이주노동자들이 주로 일하는 부문은 다음과 같다: 농업, 공장일-특히 의류, 수산물가공부문, 건설산업, 가사도우미. 이런 노동은 상당히 산발적이다. 농업 노동자들은 일년에 특정 시기에만 일하고, 옷공장은 공장이 주문을 받았을 때만 일한다. 산업부문과 개별 고용주에 따라서 임금지불방법도 다양하다. 일부 이주노동자는 성과급에 따라 받고, 일부는 일당이나 월급으로 받는다. 가내 하인은 일반적으로 월급과 주인집에서 숙식을 제공받는다. 공장 노동자들은 일반적으로 월급을 받으며 흔히 건강에 해로운 공장 내에서 산다. 고용주들이 대개 숙식료를 월급에서 공제하는 게 보통이다. 농업 노동자들은 주인들이 살도록 허락한 들판의 오두막에서 지낸다. 대형 과수원 같은 대규모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아주 비좁은 수용소같은데서 지낸다.

버마이주노동자들은 임금 없는 장시간 초과노동, 원래 충분치 못한 최저임금기준보다도 더 적은 급여, 안전하지 못한 작업환경과 생활환경, 조직화를 할 수 없는 것을 포함하여 기본적인 노동권을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권리침해에 대해 얘기했다.

Yangon, Hlegu출신인 24살의 Bama족 남자는 2년간 고용됐던 모직물 공장의 작업환경에 대해 말했다. "아침 8시부터 밤 9시까지 일했어요. 때론 자정까지요. 초과노동에 대한 급여는 없었어요. 우리들 30명이 가로세로 30feet-10feet(약 9m-3m)인 방에서 지냈는데 나란히 붙어서 잤어요." 그는 한달에 3천 바트(약 9만원)를 벌었다. Yangon출신의 35살의 Bama족 남자는 그의 노동, 생활환경을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삯일을 해요. 벌이가 매달 2천바트에서 3천바트(약 6만원-9만원)이고, 아내와 나는 다른 두 부부와 작은 방 한 개를 같이 쓰고 있어요. 사생활은 전혀 없어요. 화장실과 위생시설은 아주 나쁘고 물은 더러워요. 목욕할 만큼 충분한 물은 없어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타이 내 버마 이주노동자(3)

Name  
   류은숙  (2005-08-23 01:09:34, Hit : 224, Vote : 28)
Subject  
   타이 내 버마 이주노동자(3)
타이 내 버마 이주 노동자들의 문제를 다룬 국제앰네스티 보고서(http://web.amnesty.org/library/engasa390012005)의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현재의 등록상황

2004년 6월 16일, 타이 정부와 버마 국가 평화발전위원회(SPDC, 버마의 군사정권)는 타이의 버마이주노동자에 관한 문서에 서명했다. 이 문서의 9조에 따르면, 고용의 기간과 조건은 2년을 초과해서는 안되며 4년까지 연장될 수 있다. 그 이후에는 이주노동자가 버마로 돌아가야만 한다. 18조에서는 "양 당사국(버마와 타이)의 노동자들은 비차별과 성, 인종, 종교의 평등 원칙에 입각하여 지역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임금과 기타의 급여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문서와 또다른 타이 정부의 공식 문서에 따르면, 이주노동자들은 정부에 등록했다면, 법적으로는 타이 국민과 동등한 노동권을 가질 자격이 있다. 보고에 따르면, 버마, 라오스, 캄보디아 출신의 이주자들은 의료검사와 "의료 보험"에 1,900 바트(약 5만7천원)을 지불해야 하고, 이주자들은 추가로 100바트(약 3천원)의 지원비와 1,800바트(약 5만4천원)의 노동허가비(1년간 유효)를 사전에 지불해야 한다. 가족 구성원은 등록해야 하며, 이들은 "타이내에 1년간 임시체류"증을 받는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오직 두 종류의 직업만 종사할 것이 허용되는데 노동자 또는 가사 도우미이다. 하지만 문서는 "노동자"에 대해 명확하게 정의하고 있지 않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고용주를 바꿀 수 있고 그리하더라도 법적으로 1년간 타이에 체제할 수 있다. "일단 외국인 노동자가 등록하면, 정부는 타이 노동자들에게 부여된 것과 마찬가지의 노동 규율 속에서 동등한 권리를 부여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주 노동자들이 법적 최저 임금을 받지도 못하고, 결사의 권리나 단체협약에 대한 권리가 허용되지 않는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등록 과정이 2주간 지체된 후에, 라오스, 캄보디아, 버마 출신 이주 노동자들의 등록이 2004년 7월 1일부터 시작되어 1달간 이어졌다. 마감일은 나중에 2004년 11월 15일까지 연장됐다. 보고에 따르면, 많은 버마 이주 노동자들은 등록 과정이 복잡해서 혼란스러워했다고 한다. 몇몇 민간단체들이 통역이나 번역 서비스 등을 통해 이들을 지원했다.

등록 과정이 시작되기 전에 국제 앰네스티가 인터뷰했던 상당수 이주자들은 등록에 필요한 돈이 없다고 말했다. 56살의 Shan 주 출신 여성의 이야기는 전형적이다. "등록에 대한 얘기를 들었어요. 등록을 하고 싶지만 돈이 전혀 없어요. 밥 먹을 돈도 없는걸요. 여기 머물러야 할지 어쩔지 모르겠어요. 내 딸하고 나는 건강 문제 때문에 적절하게 일할 수가 없어요. 우린 남편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어요. 버마로 돌아가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여기 머무르자 해도 미래가 암담해요."

인터뷰에서 드러난 전반적인 유형은 이러하다. 보다 안정적이고 꾸준한 일을 가진 이주자들은 이전에 이미 등록했던 이들로서 새로운 제도에 따라서도 등록할 계획을 갖고 있다. 그들 모두가 말하는 바에 따르면 고용주가 매번 임금에서 일정액을 공제해왔기 때문에, 사실상 등록 비용을 노동자가 감내하는 것이라고 했다. 임시적인 일을 하거나 타이에 최근에 와서 일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등록할 수 있는 형편이 못돼서 등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현재의 등록 시스템에서는 노동자들이 스스로 비용을 감당해야 하고, 그것이 상당한 부담이 되고 있다. 그들 대다수가 이미 법정 최저임금에 못미치는 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타이 노동부 고용국의 2005년 2월 16일 통계에 따르면, 약 일백 삼십 만 명의 이주자들이 임시 신분증에 등록했으며, 여기에는 그 가족이 포함돼 있다. 약 9십만 명의 등록된 이주자중에 6십만 명이 넘는 숫자가 버마 출신이다. 추가로 수천명의 미등록 버마인들이 타이내에서 "불법적"으로 노옹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2004년의 등록 과정 동안에 발급된 노동허가는 임시적인 것으로 2006년 6월 30일이면 소멸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타이 내 버마 이주노동자(2)

Name  
   류은숙  (2005-08-16 21:12:19, Hit : 317, Vote : 30)
Subject  
   타이 내 버마 이주노동자(2)
타이 내 버마 이주 노동자들의 문제를 다룬 국제앰네스티 보고서(http://web.amnesty.org/library/engasa390012005)의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등록 절차
-배경
지난 몇 년에 걸쳐 타이 정부는 농업, 어업, 공장, 건설, 가사 도우미 등 타이 경제 부문에서 이주 노동자의 고용을 합법화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들을 채택했다. 그러나 이주노동자 등록에 있어서의 이런 노력들은 다수 이주 노동자가 직면하는 핵심적인 문제들을 다루지 않았다. 이주노동자들은 여전히 인신매매범, 고용주들 또는 지역 경찰의 수중에서 착취에 매우 취약하며 특히 금품강요와 신체적 학대에 취약하다.

2001년 8월, 타이정부는 이웃 국가  출신의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등록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 결과 56만여 노동자들이 등록했다. 2002년 말에는 원래 등록했던 노동자들은 재등록을 할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단지 281,162 명이 재등록했다. 왜 재등록을 선택한 수가 그렇게 적은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2003년 8월, 타이 노동부는 4십만명 이상의 기등록 이주 노동자들에게 1년 더 타이에서 계속 일할 것을 허용하기로 내각이 결정했다고 했다. 2003년 9월 동안에는 기등록 이주노동자들이 재등록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등록절차를 밟아본 적이 없는 노동자나 직업을 잃은 노동자들은 자격이 없었다. 더욱이, 농업, 공장 일, 어업 등 특정 경제 부문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에게만 재등록이 허가됐다.

등록 절차에는 몇가지 결점이 있었다. 이주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으면 일주일 후에는 "불법 이주자"가 되어 체포, 벌금, 추방을 당해야 한다는 것이 그중 하나이다. 이것은 특히 이주자들에게 지독한 것이다. 왜냐하면 농업, 어업, 의류공장 또는 서비스업이건 무엇이건간에 이주노동자들이 하는 일의 특성 자체가 계절 노동자로만 고용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용된 사람에게만 등록이 허가될 뿐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많은 노동자들이 가족을 데려왔다. 이주 노동자의 가족들은 타이에서 어떤 법적 지위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버마로 추방될 항상적인 위험에 처해있다. 이들 대다수는 추방이나 거부당할 것을 두려워해서 병원도 학교도 찾으려 들지 않는다. 더욱이 이주노동자의 자녀들은 정부의 의료 보호나 교육에 대한 자격이 없다. 버마 Mon 주 출신의 36살 여인은 자기 아이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남편은 배에서 고기를 잡기 때문에 항상 바다에 있지요. 한달에 4천바트(약 12만원)을 받아요. 아들들은(15-16살) 남편과 같이 일해요. 아이들이 그런 힘든 조건에서 일하는 것이 슬퍼요. 아들들은 한달에 2천바트에서 2천5백바트(약 6만원-7만5천원)를 벌어요. 5살, 12살 난 딸들은 나와 같이 있어요. 애들은 학교에 가지 않아요." 일반적으로 복지기관의 지원을 받는 이주노동자의 가족들만이 공중보건과 교육 시스템에 접근하려 시도한다.

등록노동자들은 이론적으로는 체포나 추방을 면할 수 있지만, 등록카드를 몸에 지니지 않고 발견된 사람들은 여전히 체포에 취약하다. 현실적으로 고용주들이 노동자들의 등록카드를 갖고 있고 노동자들에게는 복사본만 주는 경우가 있다. 이런 복사본으로는 체포를 방지할 수 없다. 고용주들이 고용허가증을 갖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일을 관둘 수도 없다. 더욱이 버마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이 밀집한 지역의 경찰은 흔히 등록노동자건 미등록노동자건 잡아들이고 풀어주기 전에 뇌물을 요구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타이 내 버마 이주노동자(1)

Name  
   류은숙  (2005-08-12 13:22:27, Hit : 287, Vote : 34)
Subject  
   타이 내 버마 이주노동자(1)
타이 내 버마 이주 노동자들의 문제를 다룬 국제앰네스티 보고서(http://web.amnesty.org/library/engasa390012005)의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쓰나미

동남아시아의 2004년 12월 26일의 쓰나미는 타이의 Satun, Trang, Krabi, Phang Nga, Phuket, Ranong 지역을 강타했고, 알 수 없는 숫자의 버마 이주노동자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들은 그 지역의 접객, 농업, 건설, 어업 등에 고용돼 있었다. 쓰나미 액션그룹(TAG, 타이와 지역 이주노동자 지원 집단들로 구성)과 the Law Society of Thai 는 700명에서 2,500명사이의 버마 이주노동자들이 실종됐다고 추정했다. 그들 중 상당수는 타이 정부에 등록돼 있지 않아서 어떤 공식 사망자 명단에도 드러나 있지 않다. 타이 당국의 사망 추정자는 약 5,400명인데 여기에는 타이 국민과 관광객들이 포함된다. 그러나 이 숫자에는 버마 이주 노동자들이 포함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2,000여구의 신원미상의 외국인 노동자 시신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됐지만, 타이 당국의 실종된 버마 이주 노동자들을 추적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쓰나미의 결과 타이의 버마 이주노동자들은 몇가지 주요한 문제에 노출됐다. 지역의 노동활동가에 따르면, 한가지 주요한 문제는 2004년 7월의 등록 정책을 이행하기 위한 지방차원의 지원과 자원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 등록 정책은 임시 신분증, 보건 카드, 노동허가증 발급을 포함하는 것이다. 일부 73,000여 이주 노동자들이 쓰나미 영향 지역에서 2004년 7월에 시작된 노동을 위한 등록을 했고, 1년간의 임시 노동허가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신뢰할만한 소식통에 따르면, 이러한 등록은 “에이전트”나 “브로커”가 이주노동자들을 타이에 데려와 지역 정부와 직접적으로 교섭했을 때만 가능했다고 한다. 이를 위해 이주 노동자 1명당 약 5,000바트를 부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쓰나미가 지역을 강타한 후에 이들 중 수백명의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서류를 파도에 잃었다. 후속조치로서 버마 노동자들을 위해 일하는 민간단체들의 협조로 등록 이주자들의 서류를 재발급하기 위한 타이 당국의 시도가 있었다.

수천명의 버마 이주노동자들은 타이 보안 세력의 체포와 위협을 두려워하여 쓰나미 직후 몸을 숨겼다. 보고에 따르면 일부 버마 이주노동자들은 체포됐고, 실종가족을 찾으려하거나 원조를 구하려는 이들은 위협을 받았다. 또한 이주 노동자들은 쓰나미가 강타한 후에 타이 공중보건 시스템에 접근할 수 없거나 접근하기를 꺼려했다. 2005년 2월 14일의 타이 노동부의 고용과장의 정보에 따르면, 쓰나미 이후 정부는 버마 이주노동자들이 버마로 돌아가도록 도울 것을 지시했다. 적어도 2천여 이주자들이 2005년 초반에 버마로 돌아갔다. 버마 지원 활동가들은 사망하거나 다치거나 실종되거나 버마로 돌아간 이주노동자의 숫자가 결코 밝혀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 중 상당수가 등록돼 있지 않았다는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등록을 한 사람들도 쓰나미 이후 타이 당국에 스스로를 노출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Kaew이야기

Name  
   류은숙  (2005-08-06 00:31:40, Hit : 350, Vote : 34)
Subject  
   Kaew이야기
‘국경없는 친구들’이 발간하는 잡지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Kaew는 39살로 Suratthani 주 출신이다. “공부해서 자본가들에게 봉사”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졸업한 후 10년간 치앙마이에서 인권활동을 했고,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 농부가 되어 지역 풀뿌리 운동에 결합했다. 다음은 Kaew와 대학생 자원활동가 모임과의 대화이다.

-학생 활동에 결합할 때까지는 난 뭘 몰랐어요. 사회와 인생 그리고 우리의 역할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은 도전이었어요. 그로 인해 나는 매일 축구하던 습관이 깨졌지요(웃음). 나는 그때 깨달았어요. 교육은 학위를 얻는 것이 아니라고요. 교실밖의 교육은 더 많은 의미가 있었고, 그로 인해 나는 사회가 어떻게 부자와 빈자로 구성되며, 어떻게 착취가 있는지 등에 대해 이해하게 됐어요. 그건 마치 내가 체제에 대항하는 반역의 정신을 갖기 시작한 것 같았어요. 그때부터 나는 그걸 포기할 수 없었죠(웃음).

Kaew; 반역의 정신은 어떤 운동의 성장에나 매우 중요해요. 그당시에 우리는 국가가 운영하는 시스템보다 우위에 있는 우리 자신의 교육을 조직하는 것 같았어요. 운동은 농민, 토지, 작물 가격 등에 관한 것이었어요. 우리의 목표는 정치적이었죠. 우리는 사회 변화를 목표했어요. 어쨌든 우리의 목표는 컸지만 우리는 어떻게 사회를 분석해야 할지 몰랐어요. 우리에겐 단지 결심밖엔 없었어요. 나는 ‘사회가 공정치 못하고 우리는 구조적 차원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으론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건 너무 쉽고 거칠쟎아요? 하지만 젊은 사람들이 그렇듯, 우리는 강한 결심-자유롭고 순수한 힘-을 갖는 걸 자랑스러워 했어요.

-나는 배우는 걸 좋아하는 것이 또한 우리 힘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요. 지금도 나는 항상 읽고 공부해요. 이건 단지 의지만을 갖고 가는 활동가들과 다른 점이에요.

Kaew; 또한, 우리의 삶은 불의에 맞선 투쟁의 지속적인 역사와 같아요.

-지금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은 시간 보내기나 경력으로서가 아니에요. 그건 자진하여 기꺼이 하는 마음이에요. 우리의 정신이예요. 요즘에 보면, 학생운동은 열중이 약해요. 학생들은 사회 문제에 관심을 덜 기울여요. 일부 학생들은 단지 경험을 얻으려고 우릴 찾아요. 어떤 정신도 없어요. 하지만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어요. 오늘날의 교육제도가 그런 식으로 만들어요. 사회조건과 소비주의가 그들의 반역 정신을 죽이고 있어요. 어쨌든, 나는 여전히 학생들이 희망이라고 생각해요.

Kaew; 나의 희망은 젊은 농민이나 소수민족집단 같은 지역의 젊은이들에게 있어요. 그들 앞에는 문제가 놓여있고 그들은 싸워야 해요. 소수민족 젊은이들이 사회변화를 가져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으려면, 분명한 목적을 가진 그들 자신의 교육 제도를 조직해야 해요. 그래야 젊은이들이 알기 위해 공부할 뿐만 아니라 더불어 일하고 살아가는 법을 사랑하기 위해 공부할 거예요. 더불어 일할 줄을 모르면 사회를 변화시킬 방법도 알 수 없어요.

-지금 자본주의는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식을 제거하고 하나의 동질의 문화를 추구하고 있어요. 우리의 소수민족 형제 자매들이 국가 자본주의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자녀들을 그 체제 내에서 교육시킬 것이고, 그들의 정체성은 완전히 상실될 거예요.

Kaew: 이것을 또한 버마 국경지대의 운동에도 적용할 수 있어요. 70년대 타이의 경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구세대와 다르게 생각하는 새롭고 진보적인 세대가 없다면 운동은 죽을 거라는 겁니다. 나는 현재의 버마의 운동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내가 알고 있는 거라곤 사람들이 도처에 흩어져있고 각 집단이 어떻게 하나로 연결될 수 있는지를 모른다는 거지요. 70년대의 타이 학생들은 도망쳐서 정글속의 공산당과 머무를 뿐이었어요.

-내가 걱정스러운 것은 젊은 투사들이 분해되고 있다는 거예요. 그들이 공유한 투쟁 정신은 약화될 수 있어요. 특히 그들이 소비주의에 직면했을때요. 일부는 해외에 공부하러 갔다 돌아오지만, 일부는 전부를 포기할 수도 있어요. 나는 국제영역에서 싸울 이유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버마 내부에서 싸우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잘 알지만....우리가 우리 땅의 변화를 원한다면 궁극적으로 할 노력은 외국의 압력에 대응하기 보다는 우리의 고향 내부의 운동을 향해 가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Kaew; 내부의 조건이 미래를 결정하죠. 외부의 조건은 원조를 하는 거구요.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인생은 또다른 상품이나 새로운 패션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기 때문에 인생의 가치를 찾아야만 해요.

Kaew; 이 사회는 여러분들의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준비해야만 합니다. 타이와 버마 정부가 우리에게 읽히는 교과서에는 감춰진 정치적 아젠다가 있어요. 권력에 복종하라는 아젠다죠. 부당한 체제에 대항하고 반역하는 걸 추구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자신에 충실한 것이고 젊은 정신에 걸맞는 자유와 용기를 갖게 될 겁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역사의 바퀴를 돌릴 사명을 갖고 있는 거죠(웃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5년 8월 후원금 송금내역

Name  
   류은숙  (2005-08-03 11:15:30, Hit : 343, Vote : 48)
Subject  
   2005년 8월 후원금 송금내역
이번달에는 200달러를 송금했습니다. 100달러에서 150달러로 이제 200달러로 후원금이 늘었는데 계속 유지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한달에 250달러면 한 사람의 활동가가 생활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 모임이 1명의 활동가를 책임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6월 잔액 231,054원

7월 1일 조대* 1만
        김태* 1만
        유해* 1만
7월 11일 이윤* 1만
7월 22일 황수* 1만 5천
7월 25일 최은* 6만
7월 26일 이민* 1만
7월 27일 김재* 1만
7월 31일 류은* 1만
-----------------
             145,000원

8월 3일 송금 200달러+수수료 5천원=210,200원

잔액 165,854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