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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동안 고생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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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은숙  (2005-12-28 14:53:56, Hit : 290, Vote :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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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해동안 고생많으셨습니다
고통은 그 순간이 제일 고통스럽고 시간이 가면 잊혀진다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한해동안 정말 고생많았다고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고통스런 것들은 다 잊으라고 얘기하고 싶군요.

좋았던 것들은 같은 노력을 더해야 계속 좋은 것으로 유지되고 기억될 수 있을 겁니다. 만원계 여러분 모두에게 좋은 일들이 계속되길 바라며, 새해에는 좀더 부지런하게 이 사이트를 운영했으면 합니다. 올 한해 우리가 1명의 국경지대 활동가를 지원한 일이 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 사람의 친구가 되준 일이라면 내년에는 더욱 든든하고 따뜻한 친구가 되길 바랍니다.

만원계 여러분 모두에게 여유로운 연말연시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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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러퍼허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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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은숙  (2005-12-20 13:11:19, Hit : 317, Vote :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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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펌]러퍼허 아이들
만원계 게시판 초기에 러퍼허 난민학교 아이들의 글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 직접 다녀오신 유해정 님이 쓰신 글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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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아름답다" - 버마 파안(pa-an)의 아이들



선배에게  


아이들의 모습이 사라진 곳에서 한참을 떠나지 못하고 엉엉 울기만 했습니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그 해맑은 웃음과 고운 마음들을. 불과 4일을 함께 지냈을 뿐인데, 통하는 말이라곤 ‘하이’라는 인사짓 밖에 없었는데 헤어지던 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저와 아이들은 부둥켜안고 소리 내 울고 말았습니다.


레퍼허에서는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하루 두 끼, 반찬이라곤 나물 두 접시. 평소 때 같으면 ‘배고프다’를 연발하며 식사시간만 기다렸을 텐데 여기서는 그 두 끼를 챙겨먹는다는 것마저 목구멍에 가시라도 걸린 듯 언짢았습니다. 마치 가난한 자의밥그릇을 빼앗은 듯 한 기분으로 내 몫으로 차려진 밥상을 받아 들 때면 기도라는 것을 하지 않곤 배길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계신다면 이 마을에 꼭 오셔야 합니다. 소년들은 소년병이 되지 않게 하셔야 하고, 여자아이들은 강간당하지 않게 하셔야 합니다." 아이들을 떠나보낸 날부터 저는 한 가지 소망을 더 보탰습니다. “혹여 이마저 욕심이라면 어떻게라도 좋으니까 제발 아이들이 살아남게는 해주셔야 한다”고. “총을 들고, 몸이 불구가 되고, 강간을 피해갈 다른 도리가 없다면, 그건 어쩔 수 없다고 하셔도 그래도 제발아이들이 살아남게는 해주셔야 한다”고. “그래야 단 하루라도 이 아이들이 공포와 굶주림에서 벗어나 그들의 땅에서 마음껏 웃을 수 있는 날을 맞이할 수 있지 않겠냐”고.


- 강하나로 교차되는 희비

태국 북부 메솟에서 차로 3시간을 달려 검문소 6곳을 통과하고 나니 차는 좁은 산길로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강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폭이 50m나 될까요? 이 작은 모에이(Moei)강을 경계로 땅은 태국과 버마로 나뉘고, 사람들의 운명도 희비가 엇갈립니다. 차에서 내려 보트로 강을 건너고 가파른 언덕을 지나 레퍼허 마을에 도착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10분 남짓. 뜨거운 태양 아래로 우리나라의 오두막을 닮은 대나무로 지은 버마의 전통가옥들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레퍼허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은 건 5년 전.


버마의 민주화 문제는 국제사회에서 낯설지 않은 화두지만 버마 소수민족들이 겪어온 인권침해의 역사와 이들의 자유를 향한 긴 여정은 그 참혹성에도 불구하고 아직 생소하기만 합니다. 버마는 인구의 68%를 차지하며 권력을 장악한 버마족 이외에 샨족·카렌족·카친족·몬족 등 130여 개의 민족이 공존하는 땅입니다. 버마의 침략자 영국은 이런 민족적 특성을 악용해 버마족 위주의 소수민족 통제정책을 폈고 이러한 통치 이데올로기는 1948년 독립 후에도 계속됐습니다. 독립 전부터 버마족을 또 다른 식민통치자로 받아들였던 소수민족들은 이듬해 카렌족의 ‘토운구(Toungoo) 독립국가’ 선포를 기점으로 독립과 연방을 요구하며  저항을 시작했습니다.

설사가상으로 62년 네윈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소수민족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정책을 시작하면서 사태는 더욱 격화됐고요. 들불처럼 번진 독립요구와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소수민족들의 외침은 무장투쟁 등을 통해 지난 반세기 동안 계속되고 있습니다. 버마군에게 있어 소수민족은 모두 반군의 추종자일 뿐입니다. 해서 그들은 반군세력이 미칠만한 곳이라고 판단되면 그곳을 철저히 파괴했습니다. 총과 칼 앞에서 법은, 군사독재 정권 앞에서 인권은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군인들은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죽이고 고문하고 강간하고 폭행했습니다. 버마군에 의한 강제노동의 과정에서 죽거나 고향을 등진 이들의 수는 헤아릴 수조차 없습니다. 그 참혹한 역사, 버마 민중들의 고통을 어떻게 다 설명할 수 있을까요. 파안에 사는 카렌민들 모두가 그렇게 가족을 잃고, 고향을 빼앗기고, 가슴과 몸에 깊숙한 상처를 안고 여기까지 밀려온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정말 우둔한 저는 보이는 평화에 속았습니다. 건물은 보잘 것 없고, 입성과 행색은 초라했지만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는 동네에 사람들이 모여 아이들의 장기자랑에 함박웃음을 터트리는 것을 보면서, 아이들이 서로를 아끼며 노래하는 것을 보면서 저는 이 마을이 ‘평화롭다’ 생각했습니다.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아이들이 이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카렌군(Karen National Union 카렌민족연맹)의 호위를 받으며 마을회관에 모였다는 것을.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카렌민족의 해방가’임을. 그 노래를 자칫 잘못 흥얼거렸다간 버마군에 의해 아이는 물론선생님과 가족까지 나아가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몰살을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도. 아이들 모두가 아는 이 간단한 사실을 저는 뒤늦게 서야 알았습니다.


- 목마르기만 한 사람들


레퍼허는 파안에 속한 12개 마을 중 하나입니다. 파안의 전체 인구는 2천여 명. 어른들은 밭을 일구고 물고기를 잡고 사냥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가고, 8백여 명의 아이들은 작은 학교에서 꿈을 키워갑니다. 하지만 정부에 의해 반군 동조세력으로 낙인찍히면서 지원은 물론  심지어는 필요한 학용품을 구해 올 통로마저 막혀버렸습니다. 학교라고는 하지만 대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나뭇잎으로 지붕을 덮어 놓은 큰 공간에 낡은 칠판 3개와 의자가 전부입니다. 교재는 항상 모자라고, 연필이나 공책 같은 간단한 학용품도 이곳에서는 귀하기만 합니다. 기타 하나만 있으면 음악수업이 가능하고, 들에서 나무로 엮은 공을 차는 것이 체육시간 입니다.


평생 학교 문턱조차 넘어보지 못한 마을 이장님이 국어를 가르치고, 영어 몇 마디를 안다는 이유로 동네 아저씨가 영어선생님이 됩니다. 언뜻 보면 친자연적이라, 아름답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선택이 아닌 강요된 상황에서, 이것 이외엔 허락되지 않은 조건에서 배워야 하는 아이들도 가르쳐야 하는 선생님들도 목마르기는 마찬가집니다. 오랫동안 계속된 분쟁에서 인생과 꿈을 잃어버린 어른들이기에 태어나 정상적인 생활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아이들에게 더 많은 것들을 주고 싶지만 이들은 가난하고 동네는 위험합니다. 해서 태국인이나 고등교육을 마친 버마 난민캠프의 카렌민들을 선생으로 청해보아도 찾는 이는 드물기만 합니다. 다른 지역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교전이 계속되고 있는 미얀마 동부 지역의 아이들 중 11%만이 정상적인 학교에 갈 수 있답니다. 심지어는 종전지역에서도 예산부족과 정부의 강제노동 때문에 학교가 문을 닫아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 하고요.  

- 내꿈은 소년병
"군인이 될 거예요" 꿈이 뭐냐는 질문에 한 꼬맹이가 자랑스럽게 답합니다. 옆에 있는 친구의 꿈도 같습니다. 이제 열 살이나 되었을까요? 머리가 멍해지면서 다리에 힘이 빠집니다. 허를 찔린 기습에 "왜"라는 반문도 못했습니다. 마을 이장 레인보우의 꿈도 군인이 되는 거였답니다. 배꼽친구로 자라 지금은 교장선생님이 된 마이크로와 함께 16살에 군대에 자원했었다고 그가 말합니다. 배불리 먹고 싶어서, 가족들을 죽이고 때린 버마군을 혼내주기 위해서 그는 군인이 되길 바랐답니다. 하지만 절친한 친구가 교전 중 죽는 것을 경험하면서 그는 꿈을 바꿨습니다. 누군가를 죽이는 군인이 아닌 사람들을 돌보고 더불어 사는 사람이 되겠노라고. 그는 사람들을 모으고, 마을을 건설하고 학교의 지붕을 올렸습니다. 몇 년간의 노력 끝에 마을이 조금씩 변하고 사람들은 활기를 띄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그가 바꾸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아이들의 꿈입니다.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복수를 위해 군인이 되고 싶다는 아이들의 꿈을 바꿔내기에는 언제 버마군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은, 아이들의 열악한 현실을 알면서도 버마정부와 태국정부와의 관계를 고려해 어떠한 지원도 불가능하다는 국제원조 기구와 NGO들의 한결 같은 답변은 그의 절망을 더욱 깊게만 만듭니다. 그래서일까요? 억지로 끌려간 아이가, 강압을 못이긴 아이들이 더욱 많겠지만 서도 버마 정규군에만 18세 미만의 소년병이 5~8만 명에 이른답니다. 반군진영엔 어느 정도의 소년병이 있는지 확인되지 않지만 채 10살도 안된 아이들이 소년병이 되겠다며 군 막사를 기웃거리는 것은 여기서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항상 똑 같은 밥과 찬, 고기는 생일날이나 볼 수 있는 귀한 동네에서 개떡은 어른 아이 모두에게 ‘별미’ 중 별미이지만, 합창대회 상품으로 탄 손바닥만 한 개떡을 누구랄 것도 없이 엄지손가락만큼 떼어 스무 명의 친구들과 나눠먹으면서도 웃을 줄 아는 아이들이기에, 그들의 꿈에 마음이 무너집니다. 머리빗이, 칫솔이, 크레파스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아픈 친구, 몸이 불편한 친구랑 손잡아 놀아주고, 내어준 코코아 한잔 마시고는 컵을 닦아 돌려주는 아이들이기에 심장이 저려옵니다.

처음이었습니다. 부자가 되고 싶었던 것은. 한 명의 아이가 5천원만 있다면 1년 동안교육 받을 수 있는 현실에서, 5천원만 있다면 1년에 3~4번씩 말라리아에 걸려 의식을 잃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주머니가 빈곤한 것이 너무나 싫었습니다. 초콜릿을 사오지 않았음을 후회했습니다. 악마의 유혹 같은 달콤함이기에 한 번도 아이들에게 주어본 적이 없지만 맛이라곤 쌀과 야채가 전부인 아이들에게, 또 다른 세상이 있음을 보여주고 싶어 세상의 단맛을 선물로 주고 싶었습니다. 도둑질을 하고 싶었습니다. 마치 구세주라도 되는 냥 의시되며 가끔 영사기를 가지고 산간마을 아이들에게 영화를 틀어준다던 한 사내가 생각났습니다. 이 아이들이 영화를 통해 화면을 통해 보다 넓은 세상을 알게 된다면 혹여 그 꿈을 달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 사내의 친구가 되지못했음이 아쉬웠고, 할 수만 있다면 영사기를 훔쳐오고 싶었습니다.  


- 아이들을 꿈꾸게 하자

동행했던 친구가 아이들에게 주문을 알려주었습니다. 쿰바야 마이 로드(Kumbaya my lord). 어렸을 적 교회에서 배운 노래라고 하던데 내용인 즉, 아메리카 대륙으로 끌려간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부른 노래였다고 합니다. ‘주님 여기 오소소. 고통과 절망이 가득한 땅에’. 눈물은 그럴 때 나는거나 봅니다. 친구와 아이들이 그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동네를 거니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버마 정부의 소수민족 배제 정책에 순응하며 폭력에 조금만 비굴해지면 지금보단 편히 살 수 있을 텐데, 고국을 버리고 태국으로 넘어가 난민캠프에서 살면 조금 갑갑해도 배불리 먹고 언제 버마군이 쳐들어오나 맘 졸이지 않아도 될 텐데 그들은 자유와 버마를 갈망합니다. 5년 동안 3번의 버마군 침입을 경험하면서 마을은 전소되고, 정글에서 몇 일간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두려움에 떨었으면서도, 그들은 카렌의 언어와 문화를 지키고 위해, 자신들의 존엄성과 해방된 세상을 아이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오늘을 견디고 내일을 준비합니다. 삶이 위대하다는 것과 가혹하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차이일까요? 너무나 참담한 환경에서 희망을 져 버리지 않는 그들을 보며, 고운 결로 커나가는 아이들을 보며 새삼 삶이 참 가혹하단 생각을 하면서도 그들의 위대함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더군요.



태국에는 이런 노래가 있더군요. ‘전쟁은 수천 번 일어났지만 여전히 아이들은 아름답다’는. 왜냐고 물어보니 누군가 답하더군요. 아이들은 꿈을 꾸기 때문이라고. 그 꿈을 파안의 아이들이 꿀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군인이 되고 싶어 하지 않고, 배고프지 않아도 되고, 도망가는 악몽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매일 아침에 일어날 때면 학교가 문을 닫았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그저 보통의 아이들처럼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마을에서 평온히 뛰어 놀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의 입에서 다양한 꿈들이 쏟아져 나오고 버마를 위한 새로운 세상을 위해 버팀목으로 자라나 주면 좋겠습니다.


아직 그 아이들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전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 속에 속하지 못한 제가 어떻게 그 맑은 눈동자를, 곱디고운 결속에 숨겨진 삶의 고단함을 다 설명할 수 있을까요? 대인지뢰에 다리를 잃고도 다른 친구들에게 다시는 그런 불행이 닥치지 않기를 기도한다는 14살 서투루의 마음을 제가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요?


한해가 저물어갑니다. 죽어가는 농촌 앞에서, 경찰의 폭력 앞에서 농민들이 죽어나가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습니다. 아직도 이라크와 수많은 국가들이 전쟁 중이고, 국가보안법도, 테러방지법도 그 어느 하나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습니다. 마음은 분주하고 몸과 정신은 힘겹고. 그 고단함, 나눠지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만은 그래도 이 글을 읽는 동안에는 파안의 아이들을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만나지 못했지만, 보지 도 못했지만 절망 속에서도, 전쟁 속에서 웃음을 잃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는 아이들을요.


* 이 글의 원고료 전액은 파안 아이들의 교육비로 쓰입니다. ‘원고료 보내기’ 다음 주자는 민변의 이상희 변호사입니다. (파안 아이들에 대한 지원을 기다립니다. 국민은행(예금주 유해정레퍼허  076901-04-007849)/ yhj-bear@hanmail.net)


- 월간 <사람>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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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 후원금 송금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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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은숙  (2005-12-05 14:49:41, Hit : 276, Vote : 52)
Subject  
   2005년 12월 후원금 송금내역
지난 주에 제가 좀 엎어져 있는 바람에 이번달 송금이 늦어졌습니다. 송금내역은 아래와 같습니다. 12월 오프라인 모임은 핌과 상의를 한 후에 공지하도록 하겠습니다. 날씨가 어제오늘 많이 추워졌습니다. 손은 얼어도 마음은 얼어붙지 마십시오. 그래도 햇볕은 참 따뜻하네요.


11월 1일 김태* 1만
        3일 조대* 1만
        10일 이윤* 1만
             유해* 1만
        23일 김예* 30만
        25일 이민* 1만
        26일 연상* 1만5천
        28일 이민* 1만
        28일 황수* 1만5천
        28일 김재* 1만
        30일 구태* 2만
        30일 류은* 1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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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만원

지난달 잔액 2,519원
12월 5일 송금 150달러+수수료 5천원=166,861원
잔액 235,658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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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하나- '만주와 샤말'에 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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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은숙  (2005-11-25 11:50:13, Hit : 225, Vote :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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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하나- '만주와 샤말'에 관한 이야기
우리 게시판 132번에 있는 ''꽃필라 운동-만주와 샤말 이야기'가 기억나십니까? 그분들의 운동을 지원하자는 호소 편지를 얼마전에 받았습니다. 편지 주신분은 이주노동자, 특히 이주여성지원연대 활동을 오래 해오신 이금연 선생님입니다. 아래 글 보시고 관심있으신 분은 개별적으로 동참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금연 선생님은 만주를 '먼주'로 샤말을 '사말'로 쓰셨는데 그거야 별 상관없는 문제니까 그냥 넘겨서 읽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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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있는 분들, 제게 조금씩 힘을 보테주시면 좋겠어요!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건강하신지요?
안녕하세요 안양의 이금연 세실리아입니다. 긴급하게 또다시 도움을 요청드릴 일이 있어 조심스럽게 연락을 드립니다.
오늘, 2005년 11월 23일 저녁, 저는 네팔의 Gefont(노동조합 연맹)에서 아동노동자들과 일하고 있는 먼주 타파씨와 인터넷을 한 후 이 메일 모금을 하자고 결심 했습니다. 한달 전, 저는 네팔에서 연필대신 망치를 들고 살기 위해 돌을 깨고 있는 아이들의 실태를 접하고 돌아왔습니다. 7,8세의, 심지어 5살짜리가 엄마옆에 앉아 먼지속에서 돌을 깨고 있는 아동들에게차마 카메라를 들이 댈 수 없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밤 늦도록 자갈을 깨면 하루 20루피정도를 받는데 한달에 300루피 쯤 수입이 된답니다. 10달라가 네팔돈으로 700루피이구요 쌀 1킬로그램에 40루피 정도 입니다. 200여명의 돌깨는 아이들을 글자 해독정도 할 수 있도록 ILO의 지원을 받아 지난 3년간 직접 돌보아 왔던 먼주씨는 지금 ILO의 지원이 당장 이달 말로 끝나 안타까와 하고 있다! 저에게 연락을 한 것입니다.
또한 겨울에는 일이 그마저 사정이 좋지 않습니다. 제가 누구보다 그 실태를 잘 알고 있기에, 먼주씨는 당장 겨울 추위를 견딜 옷과 담요가 필요하다 연락을 하여 왔습니다. 하여 긴급 구호를 하자고 둘이 결정하고 말았습니다. 네팔도 여느때와 달리 지금 날씨가 아주 추워지고 있다 합니다. 옷가지 하나 없이 허름한 비닐 천막속에서 살고 있는 그 아이들이 눈에 어른거리고 무엇보다도 먼주씨가 발을 동동구르며 다니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하늘에 계신분의 지지를 믿고 모금을 시작합니다. 모금이 잘 되어서 아이들의 학비도 나올 수 있으면 더욱 좋지요.
먼주씨와 같이 일하는 사말 타파씨도 역시 아동 노동들을 돌보고 있는데 염소를 한 마리씩 사주고 젖을 팔아 학교에 가는, 자립형 학생을 만드는 프로젝입니다. 그런데 추워서 염소도 많이 병들고 죽어 아동들이 이만 저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밥먹을 시간도 없이, 이리저리 일하는 어린이들을 찾아 분주히 뛰어 다니는 먼주와 사말, 한국에서도 열심히 일하며 활동 했던 두 아우들이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두사람의 활동은 국내 신문에서 여러번 소개 되었기에 검색어를 쳐보시면 정보를 읽으실 수 있습니다)
연말이네요.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데 마음을 다하는 시기인 것 같습니다. 국경이 무의미해진 지금, 히말라야 산자락의 아동들에게 담요 한 장, 옷 한 벌 선물해 주시길 청합니다. 제가 직접 만주와 사말씨랑 같이 공동으로 아동들에게 물품을 구입하여 전달할 것입니다. 결과는 다시 이메일로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송금하시면 메일이나 문자로 꼭 연락처를 남겨 주세요. 담요 한 장에 시장에서 5천원이더군요.


저의 은행계좌는 외환은행입니다. 069-19-63008-4 예금주 이금연,


2005년 11월 23일 저녁 무렵, 안양에서 이금연 세실리아 드림 (011-243-2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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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Name  
   연상희  (2005-11-24 18:53:40, Hit : 258, Vote : 18)
Subject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유령회원이 될지도 모르지만 작은 도움이 될까해서 찾아뵙습니다
그럼 입금하고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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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된 것(2)

Name  
   류은숙  (2005-11-23 19:03:46, Hit : 202, Vote : 16)
Subject  
   변화된 것(2)
--->변화된 것(1)에서 이어지는 글

난민 캠프에서의 삶에서는 식량을 재배하거나 수확하는 일이 없다. 그저 주어진다. 도정된 쌀, 강화 밀가루, 어묵, 말린 고추, 소금, 기름이 인도주의단체들에 의해 주어진다. 난민캠프에 살고 있지 않은 사람들 눈으로 보면 음식을 위해 돈이 필요하지 않다는 이유로 캠프 밖에서 일자리를 찾는 일을 제한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그러나, 난민들의 수중에 돈이 있다할지라도, 그들의 ‘오랜 벗들’ 같은 계절음식이나 채소들은 난민들의 부엌에 등장할 일이 결코 없다. Muga의 입에서는 둘째딸이 태어난 이후로 채소나 열매의 이름이 떠난 날이 없다. 하지만 아이들은 카렌족 음식에 사용되는 재료들의 이름을 결코 배울 수가 없다. 아이들이 볼 수 있는 건 오로지 식량을 제공하는 인도주의 단체들의 영어 이름일 뿐이다.  

우리는 그녀가 여전히 최고 요리사라고 말하면서 Muga를 위로하려 했지만 그녀는 말했다. 요리가 제한돼 있기 때문에 그녀의 영감을 잃어버린 것 같다고. 난민캠프에서의 20년간의 생활에서 가뭄, 비, 태양, 겨울 바람 같은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이런 것들은 고향에서 농사짓고 살 때 의미가 있던 것들이다. 계절마다 찾아오던 자연의 오랜 벗들을 기다릴 희망이 없다. 오로지 희망은 언젠가는 고향에 가서 그 오랜 벗들을 찾아본다는 것이다.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Muga는 고향 쪽 절벽에서 눈을 떼고 바라봤다. 야생 버섯이 든 큰 바구니를 가진 검은 얼굴의 남자가 버섯을 좀 사겠느냐고 물었다. 야생버섯을 구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버섯 채취자들은 국경을 넘어 버마 쪽에 가야하고, 그래서 한명은 최근에 대인지뢰에 왼쪽 다리를 잃었다.  

오랜 벗과 같은 야생버섯을 부엌에 들이려면 돈이 필요하다. 다행히도 Muga에게는 딸이 교사라서 벌어들이는 돈이 있다. Muga는 기쁜 마음으로 야생버섯을 샀다. 내일 그녀는 손님들에게 그녀의 오랜 벗인 야생버섯을 소개시켜 줄 수 있을 것이다.

앉아서 버섯 다듬는 일을 도우면서, 우리는 Muga의 얼굴에서 한줄기 미소를 봤다. 서쪽 절벽을 바라보니 비에 젖고 있었고, 우리의 마음은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었다.

카렌족 출신의 또다른 아저씨는 가지의 경험을 얘기했다. 어렵게 구한 고산지대 쌀을 가지고 시내에 사는 아들을 만나러 갔던 얘기였다. 아들은 전기밥통으로 그 쌀로 밥을 지었다. 그리고 나선 뾰루퉁하게 아버지에게 물었다고 한다. “아빠, 왜 우리 카렌족 쌀은 이렇게 짧고 딱딱해요? 가게에서 파는 쟈스민 쌀 같지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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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된 것(1)

Name  
   류은숙  (2005-11-21 16:49:10, Hit : 266, Vote : 18)
Subject  
   변화된 것(1)
난민캠프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냥 배급되는 것만 타먹어야 한다고 합니다. 카렌 난민들이 고향에서의 농사일의 추억을 얘기하는 글인데, 모르는 채소나 곡물 이름은 그냥 영어로 놔뒀습니다.


변화된 것

(글쓴이: Chana Damnoen)

“그건 절벽 끝에서 떨어지는 것 같고 정신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는 것 같아.”

카렌 난민 캠프에서 나온 한 P'thee(삼촌)은 언젠가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린 딸을 데리고 난민캠프를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국경선을 따라 걷는 동안, 그의 어린 딸은 길가의 연록색 채소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빠, 저게 뭐야?”

"그날 저녁, Muga(아줌마)는 우리를 위한 식사를 정성껏 준비했어. 그녀는 난민캠프에서의 음식이 좋을 수가 없다는 점에 미안해하며 연신 부엌을 드나들면서 우리가 음식 맛에 만족해하는지 보려했어. Mae Sot에서 온 신선한 식품을 팔고 있는 캠프 시장에 많은 돈을 갖다 주고 산 것들이지만 그녀는 만족할 수가 없었어. "

"아줌마의 요리는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었어. 우리는 그 집을 나와서 무릎을 꼭 끌어안고 앉아서 바라봤어. 아줌마는 여전히 서서 국경 서쪽의 절벽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어-카렌주에 있는 그녀의 고향이 있는 쪽을. 그녀의 마음은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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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처럼 Salween 숲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카렌주 마을들 주변에 초록은 기쁨을 몰고 왔다.

“이렇게 날마다 비가 내릴 때는 쌀도 풀도 빨리 자라지. 우리는 날마다 김매기를 해야돼. 하지만 채소와 벼를 파종한 후에 집에 돌아오면 피곤함은 녹은 듯 잊혀지지” 한사람이 즐겁게 말했다.

또다른 소녀는 그녀의 대나무 바구니에서 꺼낸 잎사귀들을 보여주었다.

“여기 모든 게 음식이에요. 보세요. 양상추, khi-oon 잎사귀, polanisia, sweet basil, 봄양파, 호박줄기, 고구마 줄기. 들판에 나갈 때면 쌀하고 누룩만을 챙기고, 우리가 좋아하는 채소는 뭐든지 들판에서 얻을 수 있어요. 내가 어렸을 때 나는 정말로 이 계절을 좋아했어요.” 미소가 그녀 눈에 비쳤다. “비가 오면, 엄마는 갖가지 고산족 간식들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멜론 케잌, 옥수수 과자, taro, 감자, 단호박...”

“채소들이 자라기 전에는 숲에서 야생 식량을 채취했어요. 비가 내리면 버섯과 대나무가 자라나길 기다렸죠. 지금부터 몇 달후면 옥수수, 야생 감자, 산 taro, 고구마, 호박, 오이, 멜론, 수세미 열매...정말 정말 많아요!” 덩치큰 남자가 열심히 설명했다.  

--->다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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핌에게서 온 편지

Name  
   류은숙  (2005-11-04 19:53:13, Hit : 236, Vote : 22)
Subject  
   핌에게서 온 편지
한국의 친구들에게

지난번에 편지 쓴 이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군요. 저는 여느때처럼 여행을 많이 다니고 있습니다. 지난 달(9월 초)에는 타이의 최북단에 갔습니다. 거기는 버마 Shan주의 국경지역입니다. 무역과 관광을 위해 사람들이 매일 드나드는 공식적인 국경 입구가 있습니다.

Shan 주에 대해서 들어보신적이 있나요? Shan은 버마에서 가장 큰 소수민족 주이고 그 안에도 다양한 소수민족 집단이 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무장집단을 갖고 있지만 대부분은 버마 군사정권과 휴전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곳 상황은 다른 지역보다 더 나을바가 없습니다. 여전히 국경지대와 휴전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고, 인신매매, 마약거래, 벌채․댐건설, 채굴같은 환경착취와 관련된 문제가 심각합니다.

‘국경없는 친구들’이 하는 대부분의 일은 Karen과 Karenni 주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Shan 주 출신의 Ak-kha & Lahu 소수민족 집단이 우리의 지원을 얻고자 해서 그들의 기초적인 인권훈련 프로그램을 위해 우리를 초청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버마 출신의 Kachin과 같이 그곳에 갔습니다 Kachin은 제 말(타이어)을 버마어로 통역하는 일을 도왔습니다.

아무것도 계획한대로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감명깊은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처음에 주최측은 Ak-kha 공동체 지도자, 여성집단, 청년집단을 위한 일주일 프로그램을 계획했습니다. 하지만 국경을 넘어와야 하는데 타이쪽 국경에서의 안전 문제 때문에 그들은 참가자들이 이쪽에서 밤을 보내는 것이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참가자들은 날마다 국경을 넘었다가 되돌아오는 일을 되풀이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게 되면 국경 경비대가 그들의 얼굴을 일주일동안 매일 보게 됩니다. 그래서 프로그램은 3일로 축소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가자들이 국경을 넘는데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프로그램을 늦게 시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가자들은 2-3명씩 따로 떨어져서 국경을 넘어야 했고 한번에 다같이 올 수 없었고, 밤에는 국경 문이 닫히기 전에 서둘러 돌아가야 했습니다.

이런 모든 어려움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 프로그램을 위해 온다는 사실 때문에 저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버마에서 온 사람들은 특히 휴전지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배를 채우는 일밖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누굽니까? 이 사람들은 아주 적극적입니다. 버마 내부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는 것을 배우려고 아주 열심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사회를 위해 뭔가 하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외부인들은 대개 이렇게 생각합니다. 처벌에 대한 공포와 억압 때문에 안에 있는 사람들이 뭔가 할 수 없다고요. 하지만, 제가 본 바로는, 그들이 공포 속에 살고 있는 것은 맞지만, 자신들이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할 만큼 용감합니다. 여러분은 두려워하는 것과 동시에 아주 용감할 수 있지 않습니까?

또다른 감명은 여성 참가자들이었습니다. Ah-kha 문화에서 여성의 지위는 Karen이나 Karenni의 여성들보다 훨씬 낮습니다. 성과 인권과 관련된 세션이 있었는데 제 Kachin 친구(남성이었습니다)가 진행했습니다. 남성이 진행해서인지 남성 참가자들은 더 마음을 여는 것처럼 보였고 문제를 발전적으로 분석했습니다. 한 여성 참가자가 종결 프로그램에서 말했습니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인간이라는 말을 들은 건 처음이었습니다. 그말을 들으니 너무 행복합니다. 인간 사랑을 정말로 이해해보긴 처음이었습니다.’ 저는 그녀의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리는 걸 봤습니다.

이 여행을 마친후, 저는 몇가지 일을 위해 다시 Karen 국경지대로 갔습니다. 여기서 있었던 일은 다음 편지에서 얘기하겠습니다. 또한 다음주에는 Ah-kha 집단 사람들을 다시 만나서 프로그램 후에 참가자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보고 싶습니다. 다음에 또 얘기하지요.

‘국경 없는 친구들’의 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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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없는 친구들과 연대하는 모임 소개

모임소개


타이의 '국경 없는 친구들(Friends without borders)'과 연대하는 모임을 소개합니다. 1달에 만원으로

3세계 인권단체와 함께 한다는 취지로 2004년 11월 게시판을 열었습니다. 다른 여러 만원계의 활동이

중지되면서 만원계 사이트가 폐쇄되어 타이계만 2007년 9월 진보넷 블로그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

아래 소개글은 2004년 작성된 것입니다.

 


'국경 없는 친구들'에 대한 연대를 호소하면서 먼저 세가지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첫 번째는 제가 왜

이 일에 나서게 됐는지에 대한 개인적 동기, 두 번째는 '국경 없는 친구들'이 맞서고 있는 인권상황,

세 번째는 '국경 없는 친구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입니다. 국경 없는 인권에 대한 여러분의 애정과

연대를 기다립니다.

후원계좌; 국민은행 류은숙 031601-04-065545

1. 나와 핌(Pim), 샤론(Sharon)


나는 92년 여름부터 인권운동사랑방에서 활동가로 일해왔다(2007년 현재는 인권연구소 '창'에서

활동하고 있다). 99년 봄, 나는 미국 뉴욕에 있는 컬럼비아 대학 인권연수프로그램 참가자로 선정돼,

팔자에 없는 미국 구경을 하게 됐다. 인권프로그램의 내용은 국제인권법에 대한 그렇고 그런 강의들

이었고, '인권'을 주제로 하고 있지만 별로 인권적이지 못한 환경 탓에 우울한 몇 달을 보내야 했다.

거기서 나는 핌과 샤론을 만나게 됐다. 핌은 버마난민 관련 활동을 하는 타이 여성이었고, 샤론은

인권문제에 관심이 많은 컬럼비아대 학생이었다. 기숙사에서 같은 층을 쓰게된 핌과 나는 성장하면서

여성으로서 느꼈던 문제들, 가족과의 관계, 조직에서 느끼는 문제, 서로가 처한 인권상황에 대한 얘기

들로 밤을 지새는 일이 많았다. 수업 때문에 우연히 알게된 유태계 미국인 샤론은 미국에 대한 비판

의식이 강해서 동료 미국인들에게 곱지 않은 눈초리를 받는 학생이었다. 우리 셋은 의기투합이 되어

학교 앞 맥주집과 기숙사 방을 오가며 연일 토론을 벌였다.
프로그램이 끝나고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기 위해 헤어지던 날, 우리는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몰랐지만, 서로가 처한 상황에서 인권에 대한 열정을 안고 살아가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핌은 서류 일에 치중하는 거대 단체를 그만두고 좀더 현장에 가까운 일을 시작하겠다고 했고(그래서

만든 것이 '국경 없는 친구들'이었다), 샤론은 네팔에 가서 아동인권과 관련된 일을 하겠다고 했다.

그들은 곧 자기들의 뜻대로 일을 시작했고, 우리는 서로 메일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일을 격려했다.

나는 사랑방으로 돌아와 변함없이 일을 계속했다.

그러던 어느날 새벽, 나는 짜증스럽게 울리는 전화벨에 잠을 깼다. 놀랍게도 핌의 전화였다. 메일은

늘상 주고 받았지만, 전화가 온 것은 처음이기에 무척 놀랐다. 그리고 전해 온 소식은 샤론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위암이었다. 불과 서른의 나이였다. 피부색과 국적이 달랐지만, 동료를 잃은 슬픔은 마찬가지

였다. 우리는 샤론의 죽음으로 오래오래 우울했다. 샤론의 아버지는 딸에 대한 회상을 담아 '나의 딸,

샤론'이라는 책을 만들어 전세계에 있는 샤론의 친구들에게 보내줬다. 나와 핌도 그 책을 받았다.

샤론이 품었던 꿈은 '세계 시민'이 되는 것이었다는 것, 네팔에서 아이들과 보낸 시간들, 마지막 날들에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에 대한 얘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나와 핌은 이런 저런 일로 힘들 때

마다 '살아남은 자의 책무'를 공유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핌을 재회한 것은 그 후 세 차례였다. 타이에서 열리는 인권워크샵이나 회의가 많은 까닭에 재회의

기회가 생겼던 것이다. 그때마다 핌은 국경지대의 열악한 상황, 버마 난민들이 타이에서 이주노동자

로서 겪는 문제 등에 대해 '나날이 심각해지고 더 나빠지고 있다'고 했다. 가장 최근의 재회는 지난

여름(2004)이었다. 이번에는 핌의 상황이 너무 나빴다.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재원이 바닥났다는 것

이었다. 사무실도 임대료 때문에 시내에서 벗어나 인적 없는 교외로 옮긴 후였다. 지금 상황으로는

단체의 문을 닫고 국경지대에서 자원활동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고, 연말까지는 문을 닫을

생각이었다. 지배층이 오랜 세월 조성해온 버마에 대한 악감정 때문에 타이 내부에서의 모금이

어렵고, 1세계에서 오는 지원은 대개 풀뿌리 조직보다는 유명세를 가진 거대 조직으로 가는 상황에서

자구책은 없어 보였다. 핌이 하고 있는 일은 난민, 이주노동자, 아동노동자로 살아가는 민중들에게

꼭 필요한 일인데, 그 일이 돈 때문에 중단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서글픈 일이었다. 어렵게 인권운동

사랑방 살림을 꾸려온 나로서는 한 조직을 운영한다는 것이 정말 힘든 일임을 잘 알고 있다.

나는 핌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문을 닫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했다. 이곳 형편도 어렵지만, 작은 지원

이라도 여기서 조직하면 환율차이 때문에 그곳에서는 큰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사랑방의 몇

몇 동료들이 나서주었고, 이미 사랑방을 후원하고 있는 자원활동가들도 힘을 보태기로 했다. 그래서

 '국경 없는 친구들'과 연대하는 모임을 꾸리게 됐다.

배제와 탄압과 억압은 지금 어디에서나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에 맞서는 사람들이 있는 한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우리가 가본 적 없는 밀림에서 만나본 적 없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지금 우리가 겪는 인권문제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맞서는 사람들이 갖는 희망은

우리의 희망이고, 우리를 인간이게끔 한다.

2. 현재 상황


타이에서 고무돼온 인권이데올로기는 "모든 사람"을 위한 "모든" 인권('All' human rights for 'All')의

개념이 아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모든 인권'이 의미하는 바는 민족, 성, 종교, 국적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를 포함한 모든 인권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타이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특히 소수민족과 버마 난민들이다. 이들의 인권은 오랫동안 부인되거나 무시돼왔다.

인종차별주의와 외국인혐오는 다양한 형태의 차별을 낳았고, 이들을 인권에 대한 정보에서 고립시

키고, 또한 서로를 고립시켰다. 이러한 압력, 의사소통과 이해의 부족이 흔히 갈등을 일으킨다.

버마와 국경을 이루고 있는 타이 북부지역의 고산지대에는 적어도 8십여만명의 소수민족이 살아가고

있다. 현재, 버마의 정치·경제적 폭력에 부가된 버마군사정권과 소수민족간의 내전 때문에, 타이에는

백만명이 넘는 버마난민이 있다. 이들 중에서, 약 14만 명의 소수민족 난민에게 타이-버마 국경에

인접한 캠프에 일시적으로 머물 것이 허용되고 있다. 반면에 다른 많은 사람들은 국경지대에 숨어

살고 있으며, 이들은 대개 카렌(Karen), 카레니(Karenni), 샨(Shan) 같은 소수민족 출신이다.

이처럼 버마에서 쫓겨나 타이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난민'이라는 진짜 상황에도 불구하고, 타이

정부에 의해 '불법 이주자'로 간주되고 있다. 동시에, 타이에서 살고 있는 적어도 4십만명의 소수민족

사람들은 타이 시민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이들 중 거의 절반은 불법으로 간주되며, 그들과

상관없는 나라로 추방될 위험에 취약하다. 그러나, 소수민족출신으로서 타이국적을 취득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타이 사회가 가진 태도는 부정적이기 때문에 이들도 마찬가지의 차별에 직면해 있다. 난민에

대해 그러한 것처럼, 국가 당국에 의한 인권침해와 비국가행위자에 의한 인권침해가 벌어지고 있다.

더욱이, 정부와 주류언론의 선전에 영향을 받은 타이 사회의 부정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이들 취약한

소수집단은 인권의 존중을 향한 투쟁을 지향할 수 있는 유익한 정보로부터 고립될 뿐 아니라, 잘못된

선전 때문에 서로를 구별하고 나누게 되고, 서로간의 갈등에 빠지고 있다.

따라서, 서로의 인권문제에 대해 상이한 집단의 사람들을 교육할 필요가 있다. 소수집단과 난민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이 직·간접적으로 접촉함으로써, 고립되고 배제된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리와 책임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며, 타이 사회를 이해할 수 있고, 인권과 평화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일을 함께 하기 위한 지식과 기술을 가질 수 있다. 경험 있고 우호적인 타이 시민사회

조직과 더불어 당사자들 자신이 결정하고 실행할 때야 이런 프로그램은 가장 잘 성취될 수 있다.

난민과 소수민족에게 법률자문, 인도주의적 원조, 개발 프로젝트를 제공하는 단체들이 있지만, 인권에

관심을 가진 단체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더욱이, 이들 소수의 단체들조차 타이의 국가정책과 관련된

일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난민과 소수민족 당사자들은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할 기회를

거의 가질 수는 없다.

인권교육 프로그램(human rights capacity building programs)을 난민과 소수민족이 살아가고 있는

지역 차원에서 시행하고 있는 단체는 거의 없으며, 이들 대부분의 활동은 99년부터 지금까지 '국경

없는 친구들'에 의해 펼쳐지고 있다. 또한 국경 지대에서 상이한 소수민족간에 인권과 평화를 증진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이끌 수 있는 단체도 없다. '국경 없는 친구들'은 소수민족과 난민의 인권에 특정하여

활동을 벌이고 있는 유일한 타이 단체라고 할 수 있다. 풀뿌리 지역 민중들 자신에 의해 성취되고

유지될 때에만이 인권과 평화가 보장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국경 없는 친구들'은 다양한 소수민족과

난민 집단간의 네트워크를 건설하고 있다.

3. 국경 없는 친구들


'국경 없는 친구들'은 치앙마이(타이의 북부도시)에 있는 타이의 민간단체이다. 99년 7월에 설립되었고,

사무실은 국경지역에도 있다. 치앙마이의 사무실은 주로 문제를 알리기 위한 대안언론활동을 하는데,

여기에는 잡지, 비디오, 책 등이 포함된다. 국경지역에 있는 지역사무실은 난민과 소수민족간의 네트

워크 건설 프로그램과 인권교육활동을 벌이고 있다. 활동가들 자신이 난민과 소수민족 출신으로서

'국경 없는 친구들'의 교육프로그램의 참가자들이었던 사람들이다.

<목적> 타이인, 소수민족, 버마난민 사이의 인권과 평화의 증진
주요목표
1. 난민들의 인권에 대한 타이 대중의 이해와 인식의 향상
2. 타이내의 소수민족과 버마 난민들의 인권에 대한 지식과 능력의 강화
3. 평화로운 인권사회를 향해 함께 일할 수 있도록 타이 대중, 소수민족, 버마 난민간의 화해, 네트

워크의 건설과 강화

<계획하고 있는 활동들>
1. 소수민족과 난민의 목소리를 타이 대중에게 전달하기 위한 잡지 발간; 타이어와 영어가 동시

, 2달마다 발간, 그 외 책 발간, 교육 비디오와 캠페인 자료 발간; 이 잡지는 치앙마이 내의 주요

업소(미장원, 식당, 찻집 등)에 비치됨.
2. 국경지대에서의 소수민족 문화 행사
3. 인권과 평화 훈련 워크샵; 버마 내에서 활동하는 지역지도자들에 대한 훈련을 포함한 10여 차례의

워크샵
4. 난민 캠프에서의 아동교육 프로그램; 그들 자신이 난민인 선생님들이 난민아동의 상황과 문화에

적합한 커리큘럼과 교재를 개발
5. 교환 포럼; 타이인, 타이내의 소수민족, 난민간의 관련 인권주제에 대한 교환 포럼, 타이청소년과

타이 내에 사는 버마 청소년간의 교환 포럼

계좌번호

국민은행 031601-04-065545 (류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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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1월 후원금 송금내역

Name  
   류은숙  (2005-11-02 10:33:44, Hit : 189, Vote : 21)
Subject  
   2005년 11월 후원금 송금내역
10월에 모인 후원금을 다음과 같이 전달했습니다.

11월5일이 '국경없는친구들'과 함께하는 만원계가 만들어진지 1년이 되는 날입니다. 원래 이날 오프라인 모임을 할까 했는데 이런 저런 일에 바쁘다보니 계획도 못세우고 공지도 못했습니다. 핌이 11월에 한국에 올 수도 있을 것 같아 핌의 한국행에 맞춰 만원계 여러분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다는 희망도 있었는데, 무슨일이 있는지 핌에게서 확답이 오지 않아서요. 핌과 일단 연락을 취해보고 적절한 시간과 장소를 정해 오프라인 모임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몸도 마음도 건강한 11월 되십시오.




9월 잔액 20,170 원

10.4 김태* 1만
        유해* 1만
        이민* 1만
        조대*1만
10.10 이윤* 1만
10.25 김나* 1만
        김재* 1만
10.26 이민* 1만
10.31 황수* 1만 5천
10.31 류은* 5만
---------------
계 165,170원

11월 2일 송금 150달러+수수료 5천원=162,651원
잔액 2,519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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