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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날

가끔 이렇게 이상한 날이 있다.

온 세상이 나한테 적대적인 날.

내가 가는 구석구석에 머피의 법칙이 숨어있다가

쑥, 발을 내밀어 나를 걸어 넘어뜨리는 것 같은!

 

그래도 오늘은 귀엽지. 이정도면.

 

어젯밤, 12시에서 3시 사이는 환자가 올만한 시간이라,

잠을 청하지 않고 글을 읽느라고 한밤중이 되었다.

이제 환자가 안와야 되는 시간인데 그때부터 띄엄띄엄, 아침까지 환자가 온다.

그런식으로 밤을 새고 새가 짹짹 우는 아침이 되었는데,

이때는 정말정말 응급실에 환자가 없어야 되는데,

계속 온다.

잠이 들만하면 깨고, 꿈 꾸기 시작할 때쯤 깨고,

이러다보니 정신이 혼미하고 지남력이 떨어질 지경이 된다.

 

최고 절정은,

소변이 안나와서 아침에 소변 뽑아드린 분이 아예 폴리(거치용 소변줄)를 끼러 오셨다.

근데 이런 망할놈의 폴리가 불량품이었던 것이다.

요도에서 안빠지게 부풀리는 풍선같은 부분이 있는데,

그놈이 샌거다.

그러니 폴리가 쑥~ 빠지면서

빵빵하게 차있던 방광이 '아~ 살았다' 이러면서

그 물줄기가 폴리 제조 회사를 불신할 리 없는, 완전 방심한 나한테...

 

오.... 초 당황스러웠으나,

얼굴에는 애써 '이런일 쯤이야' 표정을 띄고 나의 임무를 완수한 뒤,

주섬주섬 샤워도구를 챙겨 커텐도 없는 통유리가 달린 샤워실로 올라갔다.

사실 이 샤워실은 4층이라는 점을 빼면 햇살이 환히 들어오고 은폐물도 없는 곳이라,

맘만 먹고 들여다보려고 하면 그 뜻을 이루는 데 전혀 지장이 없어,

왜 샤워실을 요따구로 해놨는지 이해가 안가는 곳이다.

웬만하면 여기서 샤워를 안하려고 하지만, 이번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온몸에 물을 뒤집어 쓰고 머리에 샴푸 거품을 한아름 이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우리 병원 응급실로 오는 소리가 아닐거라고, 애써 달리 해석 해보려 하지만,

회피본능으로 하는 헛수고일 뿐이다.

이 주변에 불이난 것 아니고서야 저건 나에게로 오는 환자의 소리다.

게다가 웬만한 응급이 아니고서는 저렇게 싸이렌을 울리고 오지도 않는다.

심지어 싸이렌 소리가 가까워 오는 속도가 빛의 속도다. 저 환자... 대박이겠다.

나도 모르게 그 통유리 창가로 가서 엠뷸런스를 확인하고는,

'아 왜!!!'  하고 절규했다.

아니나 다를까, 응급실 간호사한테 전화가 왔다.

나는 최대한 빨리 내려가도 시간이 걸리니 환자 상태를 봐서 바로 과장님을 호출해달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귓가에 뭉게뭉게 붙어있던 거품이 내 손전화를 살포시 휘감고 있었다. (제길제길)

 

나는 입으로 욕 위주의 주문을 중얼중얼 읊으면서 후딱 비눗기만 제거하고

물 발자국을 찍으며 응급실로 내려왔다.

이미 과장님이 와계셨는데, 내 몰골을 보고 바로 다 이해하신 표정이다.

과장님 왈, 'DOA(death on arrival)야~'

 

당연히 이미 죽은 사람한테는 해줄 것이 없다. 사망선고 내리는 것 말고는.

내 꼴이 사망선고 내리기에는 너무 진지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사망진단서를 쓰고,

전화기에 대고 남편의 사망소식을 판소리로 가족들에게 알리고 있는 할머니를 뒤로한 채

당직실로 들어와 머리를 말렸다.

밖에서는 속속 도착한 사망자의 가족들이 곡소리를 점점 더 키우고 있었고

나는 린스를 못해서 뻣뻣해진 머리를 털면서 점점 우울감에 빠져들다가

문득 소변을 맞은 몸에는 비누칠도 못했다는 것을 떠올리고

정말 무서운 것은 수면부족도, 소변도 아니고, 과장님도 아니고, 죽음도 아닌, 

삶의 불확실성이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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