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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합시다

2009년 6월. 성스러운 성이야기 (이재형) 강의 (1) | 사후현장중계

 

 

 

 

성 혹은 섹스라 하면, 바로 딱 연상되는(오래 생각하면 반칙입니다) 단어나 느낌은 어떤 것인가요?

 

 

 

(청중답변) 즐거운 거. 쑥스러움.. 야동... 쾌락... 여자... 욕구... 사랑... 말하기 어려운 것....

 

 

 

어떤 분들은 신음소리, 끈적한 어떤 거 이렇게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구요, 사랑, 사랑의 확인, 관계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밤일이라고도 하던데, 저는 그 단어에서 낮에도 일하고 밤에도 일해야된다는 부담으로 와닿기도 하더군요.

 

 

 

아무튼, 아주 다양한 것들이 있습니다. 이 다양함들이 모두 성의 범주에 들어있습니다. 성이라는 개념의 스펙트럼이 아주 넓다는 이야기입니다. 쾌락임을 부정할 수 없죠. 큰 기쁨입니다. 소통하고 연결하는 사랑의 확인, 어떤 분들은 뭔가 성스러운 것으로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쾌락부터 성스러운 것까지, 모두를 관통하는 개념이 성에 있습니다. 가볍게 얼른 던진 질문 속에서도 쉽게 확인이 됩니다.

 

 

 

성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에 대한 이미지나 인식들을 하나씩 살펴보면, 사회적인 윤리나 관습, 이데올로기 등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서양 중세 시대에는 여성이 자위 모습을 들키게 되면 마녀라고 화형당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 시대에 산다면 ‘성, 섹스하면 뭐가 떠오르세요?’라는 질문 자체가 너무 무서운 질문이 될 겁니다. 여러 이데올로기가 물처럼 공기처럼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고, 우리는 자유롭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이라는 것 속에서 몇 가지 필터를 거둬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사회적 관습입니다. 서양 중세시대에는 의자 다리가 여성의 다리를 연상시킨다해서, 의자 다리에도 옷을 입혔습니다. 저는 그러면 오히려 더 생각이 날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하면 대단히 우스꽝스럽죠. 그러나 그때는 그게 너무 당연했습니다. 사회적 이데올로기와 성에 대한 인식은 매우 연관이 깊습니다.

 

 

 

두 번째 필터는 개인적인 경험입니다. 어려서 성에 대해 굉장히 엄한 교육을 받았다거나, 특히 우리나라에 연세가 좀 되신 여성분들은 더 심했습니다. 성이라는 말을 입 밖에 내서도 안되고, 욕구를 먼저 비치면 큰일납니다. 천박하게 이해당하니까요. 크든 작든 성에 대한 상처들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기억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 본 제 경험에 의하면, 성폭력이나 강간 이런 큰 상처들이 아니더라도, 성과 관련한 상처가 없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여성은 무의식 깊이, 강간을 당할 것 같은 두려움의 원형이 기본적으로 있습니다. 남자는 강간당할 것 같은 두려움이 없잖아요. 여성들은 항상 그런 두려움과 조바심이 있거든요. 그러다보니 사소한 것에도 성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상처들이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밑그림이 거기서 벌써 제한되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저런 필터를 거둬낸 후, 성의 본질은 무엇일까에 대해 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동양의 전통에서 그것을 참 잘 밝혀놨다고 생각합니다. 성이라는 도구를 궁극적 진리를 찾는 도구로까지 활용할 만큼 연구가 잘 되어 있거든요. 물론 현교가 아니라 좌도쪽에서 하긴 했지만, 인간 본성 깊은 본바탕에서 성이 무엇인가 연구가 잘 되어 있습니다. 동양의 전통에서 성의 본질을 찾아보는 것은 분명히 타당한 원리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에 앞서 먼저, 섹스라는 단어부터 한번 보겠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로 많이 인용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간은 원래 남녀 한 몸이었는데, 능력과 지혜가 많아지니, 신이 시기하여 반을 짤라서, 그 후로 서로 반쪽을 찾아다니게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녀가 서로 끌리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section이라는 단어, 나눈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그것과 같은 어원으로 sex라는 것은 둘로 나뉜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서양에서도 근원적인 진리를 통찰하는 여러 영역이 있는데, 그 중 천문점성학이 있습니다. 이 천문점성학에서 sex를 어느 범주에 두었냐면, 깊은 무의식, 죽음, 재탄생 이런 범주였습니다. 이건 분명 매우 중요한 통찰입니다. 성이 왜 이런 범주에 속해 있는 걸까요?

 

이런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둘이 서로 말도 잘 통하고 위해주는 것 같은데 속궁합이 안 맞아서 거의 성생활을 안 하고 사는 부부와, 심하게 싸우고 심지어 폭력도 가끔 쓰는 것 같고 곧 큰일 날 것 같은데 속궁합이 잘 맞아서 어찌 보면 닭살 맞게 좋아하고 오히려 더 생명력있게 사는 부부가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에, 우리가 주로 내리는 평가는 ‘그 여자는 그게 그렇게 좋은가봐’, ‘도대체 속궁합이 뭔지’, ‘천박해서’, ‘색골이어서’ 이런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래서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여러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에 대한 원리를 알게 되면, ‘천박해서’ ‘색골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이라는 것은 빙산위로 올라와 있는 부분이고, 무의식이라는 것은 수면 밑으로 잠겨 있는 큰 빙산의 덩어리입니다. ‘서로 언어적 소통이 잘된다’라는 것은 ‘의식’의 요소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행동의 본원적 동기부여가 되는 무의식의 요소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향력이 더 크며, 성은 이 무의식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성생활이 좋다’라는 것은 깊은 무의식을 서로 소통하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매우 깊은 유대감을 나눕니다. 좀 더 깊이 말하자면, 죽음을 같이 나누는 것 같은 연대감이 생깁니다. 인간관계 중 가장 친한 관계가 전쟁터에서 죽음을 같이 나눈 전우라고 합니다.

 

 

 

죽음을 같이 나눈 것 같은 아주 깊은 관계에서는, 설사 그 사람이 나를 버리고 엉뚱한 짓을 했다하더라도, 내 돈을 떼먹혀도, 뭔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라는 너그러움과 관용이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죽음을 같이 나눈 것 같은 소통, 거기에 성의 중요한 이유가 담겨있습니다.

 

 

 

자, 그러면 성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깊은 무의식을 낳는단 말인가, 무엇으로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우리 존재의 본질을 결정하는 것은(시작할 때 말씀드렸던 사회적 이데올로기나 개인적 경험에 의해 왜곡된 편견, 이런 필터를 제거하고 보면) ‘구조’라고 생각합니다. 구조, 생김새. 상징.

 

 

 

동양학에서는 상징과 숫자, 상수학을 가장 수승한 경지의 학문으로 많이 이야기합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일이 벌어지기 전에, 조짐, 상징을 보고 상태를 압니다.

 

 

 

우리 몸에서 성과 관련된 모양새를 보겠습니다. 성기가 자리 잡고 있는 위치는 상체와 하체의 중간입니다. 좌와 우의 중간이기도 합니다. 통상 상체를 밝은 것(양, 의식, 영), 하체를 어두운 것(엄, 무의식, 육)으로 봅니다. 나름대로 다 일리가 있는데요, 성은 양자의 접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의식과 무의식이 소통하는 가장 중간, 센터에 위치한 현상, 이것이 성입니다. 그래서 성이야말로 가장 심오한 현상이라고도 합니다. 우리 삶에서 생명의 탄생은 매우 심오하고 신비한 현상이잖아요. 성은 생명의 신비와 바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이 들어서 성에 대한 공부해서 뭐하느냐고 말씀하실 일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본질을 공부하려면, 성의 현상에 대한 통찰과 이해가 있어야합니다. 출처가 어디인지 정확하게 기억안납니다만, 아주 유명한 좋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행운’과 ‘불운’이라는 자매가 있는데, 비가 오는 어느 날 그 자매가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하룻밤 재워주길 요청하였습니다. 그때 집안에 있던 사람이 ‘행운만 들어와라, 불운은 필요없다’고 하니, 자매가 답하길 우리는 쌍둥이라 둘 중 하나만 들어갈 수는 없다고 했답니다. 이 우화가 의미하는 바는 성의 이야기와 거의 일맥상통합니다.

 

 

 

빛이 있으면 반드시 그림자가 있습니다. 그것이 따로 분리되는 존재란 이 세상에 없습니다. 「파우스트」에 보면 악령에게 영혼을 판 존재가 아니고서는 그림자 없는 사람이란 없다고 합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 생명이 바로 이원성입니다. 음이 있으면 반드시 양이 있다는 것, 의식이 있으면 반드시 무의식이 있다는 것,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수련법이나 종교들이 추구하는 것을 종합해보면, 그 이원성을 초월하거나 합일하자입니다.

 

 

 

저는 부부상담을 하면서도 이 빛과 그림자같은 우리 삶의 이원성을 많이 느낍니다. 같이 사는 게 괴로워서 이혼하겠다는 분들이 오면, 어떤 점이 그토록 싫은지에 대해서 듣게 됩니다. 그리고나서 저는 두 분은 어떤 점이 좋아서 결혼했냐고 물어봅니다. 그러면 그때 좋았던 이유가 나중에 헤어지는 이유와 똑같습니다. 사람이 참 무던하고 편하고 뭐든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니 맘에 들어서 결혼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싫은고 하니, 사람이 변화가 없고 재미가 없고 물에 물탄듯 술에 술탄듯 한 것 같아서 싫다고 합니다. 또, 남자답고 리더십있고 씩씩하고 박력있어서 결혼했다고 했는데, 지금은 지맘대로이고 예측불가능하고 독단적이라서 이혼하려고 한답니다. 사실 같은 내용인데 빛과 그림자로 보이는 것이지요.

 

 

 

이것은 우리가 항상 한쪽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입니다. 칼 융이라는 유명한 심리학자는 ‘나는 선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고,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선과 악, 옳고 그름, 빛과 그림자를 모두 내 안에서 어우르면서 소통할 수 있는 인격이 되고 싶지, 좋은 쪽으로만 간다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이 분도 통찰한 거지요.

 

 

 

음양은 이런 이원성을 가장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는 대표적인 표현입니다. 성을 근원의 진리를 탐구하는 수단으로 썼던 이유도 이런 근거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추상적인 개념으로 음양의 합일을 보려 애쓰는 것보다, 결혼해서 부부생활을 하는 입장이라면 가장 가까운 길벗인 배우자와 함께 음양의 합일을 찾는 현실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드러난 존재가 있는데, 그것을 회피하고 엉뚱한데서만 찾으려한다면 대단히 소모적이고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어릴 때 저는 막대자석을 보면서, 반은 N극 재료이고, 반은 S극 재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반을 자르면 0.0001초도 안되서 그 반에서 다시 N극과 S극이 나뉩니다. 반을 또다시 반으로 나누면, 그 반이 또다시 N극과 S극으로 나뉩니다. 빛과 그림자처럼 자석은 단극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N극만 존재하고 S극만 존재하는 것은 이 지구상에 없다는 것입니다. 양극이 항상 같이 다닌다고 합니다. 의식과 무의식, 선과 악도 같이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저는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타지마할을 구경하였는데, 정말 감탄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더 불가사의하다고 느끼는 게 있는데, 지구상의 인구 전부를 산하제한조절을 하는 것도 아닌데, 거의 남자 반, 여자 반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 원리와 비추어 제가 세운 가설입니다. 검증해보기가 쉽지 않긴 한데, 만약 이 시간에 여기에서 아들을 한명 낳으면, 이 지구상 어디에 딸이 똑같이 태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자석은 아무리 짤라도 N극 S극이 같이 있듯이, 음양은 항상 같이 다닌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음양의 이원성은 우리가 추구해야하고 또 극복해야할 무엇입니다. 음양을 어떻게 하면 합일할 수 있을 것인가. 수련법과 연결짓는 일반론적인 이야기는 다른 분들이 많이 하시니까, 저는 조금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한의학에서는 성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동의보감」 첫 장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촛불의 비유를 듭니다. 촛대가 있고(초의 몸체), 촛불이 있고, 촛불로 인해 주변이 환하게 밝아진 것, 이것을 세가지 큰 보물이라고 합니다. 정기신(精氣神) 삼보라고 합니다.

 

 

 

 

 

 

 

 

 

 

 

 

 

 

 

신神(상)

 

 

 

기氣(중)

 

 

 

정精(하)

 

 

 

 

 

 

 

 

 

 

 

 

 

 

 

정 에너지는 하처에 해당하고 가장 밑에 있기 때문에 바탕과 토대, 기초입니다. 그래서 근원적 힘 에너지가 있는 곳이라 보고, 좀 더 구체적으로는 성에너지의 센터라고 합니다. 가슴으로 올라가 중처인 기 에너지는 사랑과 감성에 해당하고, 상처로 올라가면 지혜의 에너지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성에너지라는 것을, 삶의 전체에서 분리해서 생각하는 경향들이 더러 있습니다만, 이런 원리로 보면 온당하지 않은 생각입니다. 촛대가 없으면 촛불도 없고, 주변이 환해지는 것도 없거든요. 그리고 이 촛불과 주변이 환해지는 것에 근원적 에너지를 전부 이 촛대에서 끌어다 쓰고 있습니다. 우리의 근원적 힘의 에너지는 전부 정 에너지에서 가져다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 남녀간의 사랑, 인류애, 자비심 모두 같습니다. 한 재료입니다. 얼음과 물과 수증기처럼 모양새는 달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비교를 하자만, 촛대는 고체니까 좀 더 투박하고 좀 더 거친 에너지입니다. 이것이 기름으로 변하면서 액체로 되는 것이, 가슴에서 사랑과 감성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기체를 통해서 주변이 환해지는 거잖아요. 정 에너지가 조금 더 미묘해지고 더 변형된 것이 가슴에서 사랑이고, 좀 더 미묘해지고 변형되면 영성과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좀 더 미묘해지고 정화된 에너지일 뿐, 근원적 에너지는 정에서부터 시작되며 매우 중요합니다.

 

 

 

동의보감에서는 이 세 가지 보물 중에서 근원 중의 근원을 하나만 고르라고 하면 정이라 했습니다. 정 에너지를 잘 응용해야한다, 그것이 건강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아끼고 또 아끼고 잘 응용할 줄 알아야한다는 것입니다. 精에 力을 붙이면 정력이 되지요. 정력이란 성에 대한 스태미너 포함, 모든 일에 정력적이다라는 표현을 쓰잖아요. 모든 일에 원기가 있고 저력이 있고 든든하고 흔들림없고 이런 것을 우리는 정력적이라고 합니다. 精에 液이 붙어 정액이 되고, 뼈골 髓가 붙어 정수가 됩니다. 에센스. 뼈골 빠지게 일했다 그러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일했다라고 금방 이해가 되는데, 精을 쏟았다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精神(spirit)도 이렇게 쓰지요. 우리 정신은 이 근원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이미 단어에서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정신은 이렇게 합쳐진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한 쪽으로 치우친 게 아닙니다.

 

 

 

성이라는 것이 남녀에 따라 어떤 차이가 있는지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 가지 필터들은 일단 조금 물려 내주시고 한번 들어주십시오. “성생활 40년 해봤는데, 안그렇던데?”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것은 내 안의 틀에서 작동하는 성일 수 있습니다. 조금 넓게 마음을 열고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비행가가 선물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비행가가 뭔 지 모르는 마을이었는데, 사람들은 이것이 뭐에 쓰는 물건인고, 만져보고 뒤지면서 살펴봅니다. 문이 열었다 닫혔다하니, 창고로 쓰면 좋겠다해서, 물건을 보관해두고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호기심과 탐구심 많은 사람이 보니, 앞에 바퀴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앞에 끈을 매달아 몇 사람이 끌고 갔더니 조금씩 움직이는 겁니다. 창고가 움직일 수 있으면 더 활용도가 많잖아요. 훨씬 좋네 그러면서 달구지처럼 끌고 다녔다고 합니다. 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 막 뒤지다보니 엔진실에 가서 뭘 만지작거리게 되고, 시동이 걸리면 씽씽 가는 걸 보고, 이렇게 잘 나가는 걸 그동안 창고로, 달구지로만 썼네~ 그러면서 자동차처럼 막 타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 중에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그 가치를 다 해서 창공을 훨훨 날아다니는 비행기로 썼다고 합니다. 성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한 비유로 인용해본 이야기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제가 상담해본 경험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창고로 쓰는 경우이고, 달구지로 쓰는 사람이 그 다음으로 많습니다. 자동차나 비행기로 쓰는 사람은 10% 미만인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한의원에서 침 맞는 사람들과 좀 친해지면, 성에 대한 부분도 진단해서 물어봅니다. 동의보감에는 사람을 진단할 때 네 가지 축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잘 먹느냐, 두 번째가 먹은 만큼 잘 배설하느냐, 셋째, 잠을 잘 자느냐, 넷째가 성생활을 잘 하느냐 입니다. 그런데 앞의 세 가지는 누구든지 잘 물어보고 편한데, 라뽀가 형성되기 전, 성생활은 좋으세요? 라고 물으면 바로 뜨악해지고 얼굴 빨개지고 긴장하는 분들이 계셔서 안물어봅니다. 서로 친해지고 신뢰가 쌓이면 물어봅니다. 한의원 환자들 중 많은 분들이 여성인데(20대부터 50대 너머까지) 굉장히 놀랍게도, 10명 중 6명이 평생 한 번도 좋은 걸 못 느꼈다고 합니다. “나는 그렇게 좋은지 모르겠던데... 영화나 소설책 그런거 다 뻥이죠?” 그럽니다. 제대로 된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에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

 

 

 

기존에 내가 알고 있던 성에 대해서 아닐 수도 있다 생각해보고, 다시 한 번 하나하나씩 풀어나가봅시다.

 

 

 

남녀는 어떻게 다른가. 앞서 잠시 상수학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구조, 형상, 상징, 숫자의 의미.

 

 

 

요즘 젊은 친구들 중 겉으로 봐서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헷갈리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헤어스타일도, 옷도, 유니섹슈얼해서 못 알아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에 알 수 있는 방법은 옷을 벗고 신체검사를 통하는 것입니다. 성의 상징, 심벌을 확인해봐야죠. 음경을 가지고 있는지, 질을 가지고 있는지, 성기를 확인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성기가 상징하는 바가 있습니다. 남성은 한 토막으로 생겼습니다. 고환까지 해서 세토막이라 해도, 어쨌든 홀수로 생겼습니다. 여성은 두토막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짝수로 되어 있습니다. 홀수는 뭐고 짝수는 뭡니까? 동양에서 양은 남자를 의미합니다. 해, 빛, 햇볕, 밝은 것, 동적인 것, 움직이는 것, 가벼운 것, 뜨거운 것, 강인한 것, 홀수............ 음은 여자, 달, 그림자, 그늘, 어두움, 정적인 것, 무거움, 차가움, 부드러움, 짝수.

 

 

 

홀짝이 왜 양과 음인지 익숙치 않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홀수는 홀로된 숫자입니다. 하나든 셋이든 하나가 비어 있기 때문에 채우려고 하는 동적인 특성이 생깁니다. 짝수는 짝이 맞는다, 둘, 넷, 그러니 그대로 정적인 특징이 생기는 겁니다. 재미있게도 쌀과 보리도 꼭 이렇게 생겼습니다. 쌀은 봄에 씨앗을 뿌려서 여름에 폭염과 많은 일조량을 받아야 자라는 곡물입니다. 즉 양의 기운을 많이 받고 자랍니다. 생긴 것이 한통으로 되어 있습니다. 보리는 가을에 씨앗을 뿌려 겨울의 냉기를 받고 자랍니다. 음의 속성을 닮아 둘로 나눠져 있습니다. 그래서 보리쌀은 오래 끓여야 익습니다. 본성이 차기 때문에 속이 찬 사람들이 먹으면 쉽게 설사를 합니다. 당뇨병 같은 것들은 뭔가 막 조바심을 내고 안달을 내서 진액을 바짝 말리는 병으로 보는데, 그래서 음의 속성, 촉촉함의 속성, 차가운 속성을 보해주기 위해 보리를 많이 먹으라고 권합니다. 양방에서는 당뇨병에 칼로리 계산해서 그러지만, 동양에서는 음양에 대한 통찰력으로 보리가 당뇨에 좋다고 합니다. 제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약재 고르고 분석할 때도, 성분이 아세트알데히드다 뭐 이렇게 분석하는 게 아니라, 생김새를 보고 통찰하는 패러다임이 많습니다. 잎사귀가 셋이냐 여섯이냐. 셋이면 양적인 속성이 있을 수 있겠구나, 여섯이면 음적인 속성이 있을 수도 있겠네. 물론 거기에 색깔도 함께 봅니다. 실재로 이런 통찰이 잘 맞습니다. 한의학이 엉터리라면 이런 말도 엉터리이겠지만, 한의학에서 그대로 인간의 병에 적용이 되는 걸 보면 이건 정말 훌륭한 통찰력의 도구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음과 양이 다릅니다. 물론 남자 중에도 좀 더 여성적인 남자고 있고, 여자 중에도 좀 더 남성적인 여자가 있습니다. 변화는 있지만 기본은 그렇다는 겁니다. 다름의 구조를 통해서 무엇을 통찰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남녀는 이렇게 성기가 다르기도 하고, 가슴의 구조 생김새도 다릅니다. 남자는 아래(성기)가 튀어나와 있습니다. 여성은 위쪽(가슴)이 튀어 나와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머리, 가슴, 배입니다. 상초, 중초, 하초 /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 / 머리형, 가슴형, 장형(애니어그램). 동양에선 3이란 숫자를 소선수라고 합니다. 뭐라도 조그만거 하나 하려면 삼세판은 해봐야하지 않느냐고 합니다. 3으로 대개 봅니다. 인간도 그렇게 생겼습니다. 머리(지혜), 가슴(감성), 배(힘과 용기, 존재의 센터). 그렇다면 남자는 아래가 튀어나왔고, 여자는 가슴이 튀어나왔습니다. 튀어나왔다는 걸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잘 발현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튀어나왔으니까 잘 보이잖아요. 그러니 남성은 힘과 용기, 결과와 생존 이런 쪽의 에너지가 잘 발현되는 그런 존재입니다. 거기에 비해 가슴은 감성, 사랑, 관계 중심입니다. 그걸 조금 전문적인 심리학의 용어를 빌어 표현하자면, 튀어나온 것이 ‘우월성향’입니다. 남자는 결과중심, 힘 중심, 용기중심, 생존중심이 우월하게 드러납니다. 남성들에게는 감성이 없는가. 없지는 않죠. 있는데 대신 좀 들어가 있습니다. 좀 더 열등성향이라 속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여성은 가슴이 우월하게 드러난 ‘우월성향’이고, 힘과 용기, 결과 이런 것들 ‘열등성향’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완전한 일깨움을 추구하면 내 우월성향과 월등성향이 소통할 수 있고 통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심리학에서도, 명상에서도 추구하는 바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려면 이완이 필요합니다. 편안하고, 이완되고, 관대해질 때, 남성도 여성성이 잘 발현됩니다. 남성미가 있으면서도 따뜻해지고, 부드럽고, 젠틀해집니다. 여성도 인격이 통합되고 이완되면서 소통이 잘 되면, 여성스러우면서도 쿨하고 용기있고, 남성성과 같이 소통이 되는 겁니다.

 

 

 

우리의 구조를 통해서 알아 볼 수 있는 두 번째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튀어나온 것이 플러스이고, 들어간 것이 마이너스라면, 플러스가 마이너스로 무언가를 주기가 쉽게 되어 있습니다. ‘주기가 쉽다’는 것이 좀 지나치면 ‘공격하기’가 되기 쉽습니다. 남성의 성기에서 여성의 성기쪽으로 준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이런 표현에 대해서 여성운동하시는 분들 중에서는 이견을 가지고 있어서 ‘삽입’이라는 표현이 맘에 안든다고 ‘흡입’이라는 말을 쓰자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욕구는 이해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남녀차별도 많았고, 여성을 너무 도구화하는 문화가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삐뚤어진 걸 바르게 하려다가 반대쪽으로 너무 끌어다놓은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여성은 가슴으로 감성을 줍니다.

 

 

 

이렇게 주고 받는 특성 때문에, 대개 남녀간에 상처를 주고받고 지지고 볶고 사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여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해서 저렇고 저렇게 해서 속상했고 막 그래가지고.....’ 이러면, 남자는 대뜸 ‘결론이 뭔데’, ‘그래서 어쩌라고’ 라고 합니다. 여자가 보기에는 무심하게 보입니다. 남자는 결과가 잘 드러나는 구조입니다. 결론이 뭔지 중요합니다. 부부동반모임있을 때, 남자들끼리 이쪽에서 놀고, 여자들끼리 저쪽에서 모여 놉니다. 여자들이 웃고 떠드는 걸 보면서 남자들이 주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자들이란 뭐 아무 쓸데없는 얘기 하루종일 떠들어도 뭔 할 얘기가 또 많아’...... ‘아무 쓸데없는 얘기’라는 것은 ‘결과가 없는 얘기’라는 것입니다. 남자는 ‘그럼 어떻게 해야되겠는가, 대책이 무엇인가’ 이것이 그냥 본능적으로 나오는 존재입니다. 여자들끼리 한시간 이상씩이나 통화하고 나서는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만나서 하자’ 이러면, 남자들은 전화비도 아깝고 갑갑합니다. 그래서 여자들에게 뭐라고 한소리하면서 상처를 줍니다. 여성의 특징을 그대로 못보니 그러는 겁니다. 여자분들도 남자들의 이런 특징과 구조를 좀 이해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여자분들의 입장에서 남자들은 어떻게 보일까요. 남자들이란 애나 어른이나 늙으나 다 애들같다고 합니다. 다양한 감성을 나누는 즐거움을 모르는 진화가 덜 된 종족으로 보는 거죠. ‘그래서?’, ‘어쩌라고?’, ‘뭔데?’... 뭔 일이 있으면 그것만 대라고 합니다. 여자들은 이런 것도 나누고 저런 관점도 나누고 그래야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서로 자신이 의도하지 않게 상처를 주고 받고 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남자가 밖에서 일하고 왔어요. 피곤해서 왔는데, 여성이 감성을 얼마나 나누고 싶겠습니까? 집에서 남편이 좋아할 것 같은 이쁜 걸 만들어봤어요. 오자마자 ‘당신 기다리면서 이거 만들었는데 어때?’ 그러면 남자는 ‘어, 예쁜데’라고 합니다. 여자는 신이 나서 두 번째 작품을 가져오면서 ‘이건 어때?’ ‘응, 예뻐예뻐...’ 세 번째까지 가지고 오면 남자는 ‘거기다 놔.. 좋아좋아...’ 눈도 안마주치고 건성으로 대답합니다. 그래서 싸웁니다.

 

 

 

그런데 남자들의 경우 그럴 때 되게 부담스러워집니다. 다음 비유를 들어보면, 남자들의 이런 부담을 조금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성생활에서 여자분들이 되게 불편해하는 것이, 여자의 성기가 충분히 준비되어 있지 않은데 성기를 삽입했을 때 약간 공격당하는 것 같고 움찔하고 그래서 긴장된다고 합니다. 충분히 준비되도록 서서히 다가오면 존중받는 것 같고 고맙고 편안할텐데, 남자들이 그걸 모르는 것 같다고 이야기를 많이 하십니다. 그런데 그때 남자들이 여자를 무시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오해를 하는 겁니다. 발기를 왕성하게 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남자답고 씩씩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끔 여성들이 신음을 지르면, 무지 좋아해서 그런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픈거와 좋은 거를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을 서로 모르고, 그만하자면 상처받을 것 같아 말 못하고, ‘내가 참자. 이 남자는 이게 좋은가보다’ 그러면서 여자는 참고, 남자는 여자가 소리를 지르니까 ‘이걸 훨씬 좋아하는구나’ 그러면서 이미 힘껏 다했지만, 여자 좋으라고 더 세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자는 좀전에도 아팠는데, 남편이 이렇게 하면 좋은가보다 하면서 이를 악물고라도 참아줘야겠다.... 그럽니다.

 

 

 

남성이 ‘결론이 뭔데?’ 라는 식으로 공격하듯이, 여성이 남성에게 공격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건 바로 ‘감성의 공격’이고 ‘가슴의 공격’입니다. 남성의 성기가 여성의 성기에 들어와 움찔하듯이, 남성도 여성들의 감성 공격이 버겁고 부담스럽습니다. 서서히 해야합니다. 이것이 열등성향이기 때문에 충분히 이완되서 천천히 들어와줘야합니다. 그러니 집에 들어오면 먹을 것부터 먼저 주세요. 남자에게는 아래 생존의 센터가 발달한 지라, 먹을 것이 급합니다. 배고픈데 이쁜 작품들 내봐야 짜증만 납니다. 그러니 먹을 것을 주고 시급한 우월성향쪽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중간에 한숨 좀 돌리고 그럴 때, 그때 첫째 작품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남자는 ‘이쁜데~’ 그럽니다. 또 과일먹고 TV 잠깐 보다 두 번째 이쁜 작품을 또 보여줍니다. 남자는 ‘멋있다~’ 그럽니다. 여자가 ‘하나 더 보여줘보까?’ 그러면 남자는 ‘가져와봐. 당신 대단한데~ 우리 전시회라도 할까’ 이러면서 굉장히 소통을 잘 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남자도 서서히 이완될 필요가 있습니다.

 

 

 

연애시절의 갈등도 비슷한 경우가 많습니다. 남자가 좋다고 따라다닐 때, 여자는 마음의 문을 열지 않다가, 어느 순간 이 남자와 함께하자 결심하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또 몸의 문을 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감성을 막 퍼부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남자는 갑자기 뒷걸음질치고 뭔가 다르게 행동하는 것 같습니다. 그때 여성들이 배신감을 많이 느낀다고 합니다. 잡아놓은 고기에게 미끼 안준다고 하더니, 마음을 여니 남자가 줄다리기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뭐 사실 그렇게 나쁜 놈들도 더러 있습니다. ^^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여성들의 색안경으로 남자를 보는 것일 뿐입니다. 감성을 퍼부으면 그 사람도 당연히 좋아하리라고 생각하는데, 그 부분에서 남성은 열등성향이라는 것을 아시고 속도 조절을 하셔야 합니다.

 

 

 

남성도 힘과 용기, 결과를 이야기할 때, 여성에게 조금씩 천천히 해야합니다. “그래서 뭔데?”, “결론만 얘기해” 이렇게 이야기하지 마시고, 여성의 감성을 몇가지 읽어주셔야합니다. “아, 그때 속상했겠구나”, “그랬겠네”, “억울했겠네” 이렇게만 해도 됩니다. 당신이 잘했다 못했다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잘했든 못했든 억울할 순 있거든요. ‘억울했겠네~’ 이렇게만 해주시는 것이 좋습니다. 더러 어떤 여성분들은 자기 속상한 거 남편에게 얘기해서 풀려다가 더 화가 나서 더 싸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이래가지고 저래서 어떻게 저떻게 했는데.... ”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남편은 “그러면 내일부터 직장 그만 다녀”라거나, “내가 당신 상사라도 그렇게 하겠네”라고 응수합니다. ^^

 

 

 

남편은 ‘남의 편’이여서 남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성분들은 내가 옳았다는 것을 인정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때 속상했겠다’ 이것만 읽어달라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어떤 여자분은 남편과의 대화속에서 너무 소통이 안되니까, 밖에서 화나는 경우가 발생하면 남편에게 “여보, 지금부터 내가 속상해서 막 이야기를 할텐데, 절대 뒷말 달지 말고, 끝에 ‘그랬구나’만 해. 알았지?” 그러기도 한답니다. ^^

 

 

 

그런데 남자 입장에서는 ‘그랬구나’만 해서 100점 맞으면 되는데, 120점 맞으려고 ‘그랬구나’ 하고 나서는, “그런데 그때는 이렇게 저렇게 요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내가 자세히 찾아봤어” 라고 결론내다가 도루 빵점되버립니다. “내가 그런 거 모를 줄 알아? 나도 할만큼 해!”라고 여자가 버럭 화를 내는거죠. 그럴 때 남자는 되게 억울해요. 좀 더 잘 보이려고 그랬는데, 무심하게 ‘그랬구나’만 할 때가 더 좋았으니, 헷갈리는 겁니다.

 

 

 

 

 

그런 혼돈은 우리의 생긴 구조에서, 우리 존재의 음과 양에서 이해해보세요. 두 개는 조화롭게 합일되어져야할 어떤 과제입니다. 성교라는 것도 음과 양의 에너지를 서로 교류하는 것입니다. 대단히 멋진 일이고 근원에 대한 욕구입니다. 나의 본질을 찾기 위해서 남녀가 서로 그렇게 끌린다고 아서도 말씀드렸습니다.

 

 

 

왜곡된 성의식을 갖고 있는 남자분들은, 섹스리스의 문제를 해결해보자고 하면 바로 “뭘 그렇게 밝혀?”,“뭐가 그렇게 좋아?” “그렇게 좋으면 그런 놈하고 가서 살던가” 이러면서 크게 상처주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별 걸 다 밝힌다, 주책이다 이렇게 볼 일이 결코 아닙니다. 수련의 목표는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의 변화입니다. 무의식의 소통을 밝혀보려는 것이고, 그것은 영적 성장에 대한 의지입니다. 몸과 마음과 영혼의 소통에 성은 매우 좋은 도구입니다. 성은 생명을 일으키기 때문에 매우 심오한 것이며, 또한 인간이 느끼는 가장 큰 즐거움을 표현하는 말도 성에 있습니다. 제가 젊은 친구들과 얘기를 많이 나누는데, “좋아요”, “킹왕짱 좋아요” “슈퍼울트라캡짱 좋아요” 뭐 이런 표현들을 쓰더군요. 그렇게 좋고좋음을 형용하는 최고의 표현이 ‘무아지경’입니다. 무아지경이란 말이 좋음의 최고봉임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무아지경을 능가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소유하기 때문에 좋은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내가 없어지는 경지이지요. 무아지경이, 내가 없어질 때, 최고로 즐겁다는 겁니다. 그 무아지경을 섹스의 오르가즘에서 느낍니다. 물론 잠깐 느끼죠. 오르가즘을 통해서 에고(작은 나, 거짓된 나, 아상 등등)가 사라지는 느낌이 들고, 사람들이 잊지 못하는 큰 즐거움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명상가는 인간이 명상을 시작하게 된 이유가 오르가즘을 겪고 나서부터라고도 합니다. 내가 사라지니까 이렇게 좋더라는 겁니다. 나를 내놓고 맡기고, 내 안에 불성이든 심성이든 도든 공이든 모든 것이 넉넉하고 모든 것이 지극의 상태임을 잠깐 느끼는 겁니다. 너무 좋은 이 오르가즘을 24시간 경험할 수 없을까해서 명상이 시작되었다는 겁니다. 부처님과 예수님 같은 성인들은 24시간 오르가즘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어디 예수님에다가 오르가즘을 갖다 붙이냐고 매우 불경스럽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저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것은 양보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에고가 사라진 분들입니다. 존재와 하나되는 분들이기 때문에 그것이 오르가즘입니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우리가 성을 추구하는 것이 쑥스러운 것이 아니라, 심오하고 근원적인 현상이므로, 좀 더 깊이, 좀 더 오랜 시간을 두고 배워야 될 종목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히려 성을 천박하고 지엽적이고 말초적이고 표피에 그친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앞서 촛대와 촛불의 비유에서 언급했듯이, 가장 밑에 있고 근원에 있는 에너지가 성이기 때문에, 성을 공부하는 것은 근원을 공부하는 것과 아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양의 성의학도 종합학문적 성격이 가장 강한 학문이라고 합니다. 사회학, 철학, 의학, 심리학이 결합되어야 성의학을 할 수 있습니다. 몸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동양에서는 여기서 더 나아가 근원적 진리를 깨우치는 수단으로까지 쓸 정도였기 때문에, 인간 본질의 저 밑바닥까지 파고드는 통찰의 의미가 성 속에 많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동서양 성의학의 차이는 이런 것이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인간의 성이란 억누를 수 없는 큰 본능이니, 억누르긴 어렵고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또 가장 효율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이 없는가를 연구하는 경향성이 있습니다. 어디가 성감대이고 어떻게 하면 더 좋고 이런 경우를 많이 발전시켜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줍니다. 조금 더 나아가 성관계가 남녀간 감성의 소통에 매주 중요하다는 정도까지 진행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동양의 전통처럼 도를 닦는 수단, 궁극적 진리를 추구하는 수단이라는 수준까지는 가 있지 않습니다. 동양의 성의학은 이미 몇천년의 역사를 통해서 성의학의 매우 깊은 영역까지 연구해왔지만, 근대에 들어 왜곡되게 잘못 이해되는 문화 때문에, 성에 대해 훨씬 모른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과 2~300년전만해도, 서양에서는 동양의 성을 매우 부러워했습니다. 동양의 서적들이 성에 대해서 훨씬 잘 나와 있습니다. 성을 자연의 일부로 보고 정말 깊은 영역까지 아주 거리낌없이 다루었습니다.

 

 

 

성은 서양이 훨씬 발달하지 않았나?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서양에서는 성을 본능적 욕구로 인정하되, 너무 밝히고 너무 좋아하면 감당할 수 없으니까 판도라 상자를 열듯이 대충 어느 정도에서 적당히 하자~ 이런 경향이 있어왔습니다. 동양에서는 끝까지 가보자입니다. 삶과 죽음의 본질 밑바닥까지 가서, 성을 어떻게 적절하게 할 것인가를 연구한 것입니다. 서양은 성을 대할 때 약간의 두려움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감당할 수 없어지면 안된다는. 그러나 동양에서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보물중의 보물인 에너지이므로, 이렇게 저렇게 활용하면서 쓰면 된다고 합니다.

 

 

 

동양의 성의학 원리들은, 일상의 여러 사례들 속에서, 구체적인 피드백을 통해서 충분히 검증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제가 상담한 분들 중에 이런 표현을 쓰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결혼 15년동안 내 아내의, 내 남편의 몸을 가졌다고 생각을 했는데, 최근에는 몸과 마음을 다 같이 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결혼 15년만에 처음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죽음을 같이 하는 것 같은 소통, 교류가 되니까 그런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부인은(매우 총명하고 야무진 분이셨어요. 직장생활도 오래하고 영업실적이 서울시내에서 항상 5등안에 들었으니 얼마나 잘하셨겠습니까. 조금이라도 빈틈을 허용치 않는 분이셨는데, 상담올 때 성생활이 좋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성생활이 바뀌고 나서, 이런 이야기까지 하셨어요. “참 신기해요. 옛날같으면 어느날 갑자기 경찰서에서 전화가 와서 남편이 간통으로 현장범으로 잡혀와있다고 하면, 택시타고 가는 내내 이 인간을 아주 그냥 가진 것 하나 없이 알거지로 쫒아버리겠다고, 죽일놈 나쁜놈... 했을텐데, 성생활이 바뀌고 3개월, 6개월, 1년 시간이 흐르다보니, 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고 상상해봐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맘이 드는 겁니다. 이런 큰 변화가 제가 생각해도 놀라워요” 이것이 바로 죽음을 같이 나눈 것과 같은 소통, 무의식의 소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관계 중, 꽃 중의 꽃이 부부관계입니다. 왜냐하면 밖에서는 근사하고, 부드럽고, 세련되고, 매너있는 사람이 집에 와선 안 그런 경우가 꽤 많습니다. 집에 와선 게으르고, 폭압적이고, 폭력도 쓰고, 그런 경우 의외로 많습니다. 그 부인들의 경우는 어디 가서 자기 남편 흉보기도 어려워요. 밖에서는 모두 남편을 최고라고 평가해주니 말입니다. 밖에서 칭찬을 들을수록 더 약이 오르고 화가 납니다.

 

 

 

물론 병리적인 문제로 그런 이중성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다음과 같이 이해하실 필요가 있어요. 사회생활에서는 ‘사회적 나’라고 하는(심리학 용어로는 ‘페르소나’) 것이 있습니다. 일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 가면을 쓰고 생활하는 겁니다. 그런데 집에 가면 그걸 벗고 싶어져요. 밖에서 가발을 쓰고 있는 사람이 집에서 잠잘 때까지도 가발을 쓰겠습니까? 집에서는 가발 벗고 홀가분하게 널부러지고 싶을 겁니다. 페르소나는 빛과 그림자처럼 같이 존재합니다. 집에 가면 자신의 그림자가 나옵니다. 자신의 무의식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친한 사람, 가족 특히 부부간에는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밖에서는 인격적으로 대우를 받아도 가족에게는 대우받기 참 어렵잖아요 ^^ 저도 밖에서는 명의란 소리 듣는데 가족한테는 잘 못듣습니다. 말이 잘 안 먹어지더군요. 그래서 예전에 명의들도 자기 가족은 친구한테 보내고 그쪽 가족은 이리로 보내고 그랬답니다.

 

 

 

 

 

밖에서는 인정받는데, 집에서 원숭이 취급당하는 분들(남자든 여자든) 참 많이 있습니다. 무의식, 내 그림자를 서로 많이 봐서 시원찮게 생각하는 경향 때문입니다. 부부관계가 정말 좋은 사람은, 의식의 관계, 무의식의 관계를 모두 잘 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부부관계란 나의 인격적 성장을 위한 수련의 장입니다. 배우자는 내 무의식, 내 그림자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좀전에 남편은 남의 편이어서 남편이라 했는데, 배우자는 ‘배우자’입니다. 배우려고 만난 존재입니다. 인간은 내 얼굴을 내가 못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구조가 결국은 남을 통해서 나를 알 수 밖에 없는 존재이므로, 의식과 무의식 모두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내 배우자야말로 성장의 제일 중요한 도반이고 길벗입니다. 부부관계는 놔두고, 도닦고 완전한 인격을 이루어 오겠다면, 가까운 보물을 놔두고 엉뚱한데서 찾는 격일 수도 있습니다. 아전인수격 해석일 수도 있지만, 그런 측면도 있다는 정도로 이해하고 들어주십시오.

 

 

 

남녀의 구조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해왔는데, 구조에 대한 다른 이야기 하나만 더 해볼까요? 광우병 파동이 있었습니다. 육식사료를 소에게 준거잖아요. 소는 원래 육식을 하면 안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서양의 영양학으로 보니 육식사료를 주어 단백질로 살찌우는 것이 효율적이겠다싶었던거죠. 얼마간은 별 문제없이 진짜 그렇게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의 본질을 놓친 것이므로, 필히 큰 문제가 따릅니다. 소가 미치게 되었지 않습니까? 소가 무엇을 먹어야하는가는 소의 구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먹이는 이빨의 구조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소의 이빨은 다 어금니처럼 생겨있습니다. 곡물을 갈거나 풀을 뜯어서 갈기 좋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육식동물은 송곳니가 필요합니다. 잡아뜯고 찢어갈기고 이런 역할을 할. 그런 송곳니가 소에게는 없어요. 이 존재가 상징하는 바는, 곡물을 갈고 풀을 뜯는 것입니다. 육식을 하라는 존재적 명령이 없습니다. 그걸 어겼습니다.

 

 

 

인간의 육식에 대해서도 저는 보통 인간의 치아를 보라고 얘기합니다. 인간의 치아는 28개~32개인데, 송곳니가 4개입니다. 7분의 1, 8분의 1 정도면 적절한 것 같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쯤 육식을 하는 것이 적절하고, 하루량으로는 8분의 7정도는 곡물로 하고 나머지를 육류로 하는 것입니다. 먼 시절이 되면 송곳니가 한 개 더 늘어날 수도 있고 더 줄어들 수도 있겠죠. 적어도 지금 여기에서 우리 존재의 본질은 그렇고, 진화의 상징은 이렇습니다. 이외에도 여러분들 생활속에서 구조를 보면서 본질을 항상 통찰해보고 염두에 두시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되실 겁니다. 구조의 생김새를 범상치 않게 한번 보게 되면 새로운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출처] 2009년 6월. 성스러운 성이야기 (이재형) 강의 (1) (우리는선우) |작성자 sunwoo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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