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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니카_정태인

 * 이번 주 피디저널에 실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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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인(경제평론가)

 

 


게르니카 



내 공부방에는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걸려 있다. 1937년 스페인 내전, 인민 전선(공화군)이 장악하고 있었던 바스크 지방의 게르니카에 대공습이 있었다. 아비규환을 이렇듯 절절하게 표현하는 예술가가 또 나올 수 있을까? 공포에 질려 초점을 잃은 눈들이 사면팔방에 불안을 전염시키고 있다. ‘입체파’의 기법이 한껏 효과를 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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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 때 세계경제는 말 그대로 공포에 떨었다. 끝없이 솟아오르던 글로벌 금융시스템의 바벨탑은 마비됐고 이미 갈갈이 찢어진 세계가 불통의 언어로 대립하는 일만 남은 것으로 보였다. 30년대 대공황이 결국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 것 처럼... 

다행히 인류는 1930년대의 어리석음을 되풀이 하지 않았다. 전 세계의 중앙은행이 달러와 자국 통화를 대대적으로 쏟아 부어서 패닉이 붕괴로 이어지는 것을 막았고 동시에 재정 지출을 늘렸다. 1년 만에 세계는 패닉에서 “불안 속의 낙관”으로 돌아섰다. 아니, 한국에선 낙관이 흘러넘치고 있다. 코 앞에 내외의 위기가 닥쳐 있는데도 7% 경제성장을 내걸었던 이명박 대통령은 치매걸린 노인처럼 또 다시 토건의 성장신화를 외치고 있다(임기 말에는 기어코 7%를 달성한단다). 

과연 그럴까? 내년 5% 내외의 성장을 예측하고 있는 정부나 민간기관은 모두 3% 정도의 세계경제전망을 전제로 하고 있다. 불행히도 붕괴 직전의 바벨탑은 설계가 변경되지 않았다.  대형금융기관이 위험한 투자를 감행해서 성공하면 이익을 챙기고 실패하면 납세자가 손실을 떠안는 “대마불사”의 구조는 여전하다. 위험 분산의 묘약으로 믿었던 파생상품에 대한 규제도 구체화되지 못한 채, 상업용 부동산이나 자동차 대출 등 서브프라임 모기지와 똑같은 성격의 폭탄들이 과잉 유동성 밑에 숨어 있다. 더구나 더 장기적이고 더 풀기 어려운 글로벌 불균형 역시 아무런 대책 없이 지금도 부풀어 오르고 있다. 또한 세계경제가 현재의 예측대로 순조롭게 돌아 간다면 지금 같은 유가나 원자재 가격을 기대하기도 힘들다. 먹잇감을 찾는 과잉 유동성이 원자재 선물시장으로 몰려갈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한국 또한 마찬가지다. 현재의 낙관적 성장률은 전 분기 대비라는 형식이 큰 몫을 했다. 작년 4/4분기와 금년 1/4분기가 워낙 나빴기 때문에 정부의 온갖 정책이 다 쏟아진 금년 2/4분기와 3/4분기의 성장률이 플러스로 돌아선 건 당연하다(이른바 기저 효과). 그러나 지난 3분기 동안, 즉 봄, 여름, 가을 동안의 경제성장율은 지난 해 같은 기간에 비해 여전히 -1.8%에 머무르고 있다(한은 3/4분기 국민소득(잠정), 12.4). 민간소비는 -1.5%, 설비투자는 -15.5%였고 내수 전체로 -6.8%였으니 서민들의 체감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다만 수출감소(-5.3%)보다 수입감소(-13.2%)가 더 커서 GDP의 폭락을 막았을 뿐이다. 

그런데 내년에 어떻게 갑자기 4.6%(한국은행, 2010년 경제전망, 12.11)의 성장이 가능하다는 것일까? 민간소비가 금년에 비해 3.6%나 늘어나고 설비투자 역시 두자릿 수 감소세에서 11.4% 증가로 급반전할 것이라는 예측이 그 비밀이다. 금년 소비가 이 정도에 머무른 것도 자동차 세제혜택 등 특수 요인에 의한 것이었는데 과연 사람들이 이제 살만 하다며 내구재 소비를 늘릴까? 세계의 불확실성이 여전한데도 기업인들은 갑자기 대대적 설비투자를 시작할까? 불행히도 중장기 기대의 급반전은 케인스의 용어로 “확률관계 0”에 가깝다. 

물론 이들 기관의 예측이 조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지 현재의 수치들을 과거의 모형에 넣어서 나온 결과이고, 그것은 최근의 호전 기미를 단순 연장했다는 걸 의미한다. 정말 상황이 호전되고 있다면 한국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체계적으로 부동산 거품을 빼는 일이다. 그런데 정부는 오히려 4대강 등 토목건설에 목을 매달고, 반면 가장 효율적인 장기 투자인 교육과 의료 등 복지의 비중은 줄이고 있다. 게르니카의 공포는 그다지 먼 곳에 있지 않다.  

잉그릿드 버그만의 청순한 미소는 스페인 내전 속에서 피어났다(“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게르니카의 바스크 지역에서는 세계적 경쟁력을 지닌 몬드라곤 협동조합이 확고히 뿌리를 내렸다. 경쟁과 독선이 아닌, 협동과 사랑이 우리의 희망이다. 또 다시 뉴타운과 특목고 등 나와 내 가족만은 성공할 수 있다는 맹신의 주문에서 빠져 나올 때 비로소 우리 아이들을 게르니카의 공포로부터 구할 수 있다. 
***

다 못 쓴 얘기.  나이 50줄에 들어서서 그럴까? 중환자실에 입원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내가 세상에 진 빚을 생각한다.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진 그 수 없는 빚들... 이제 내 능력을 벗어난 일을 다 접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진 빚부터 남은 생애까지 갚아야겠다. 그래도 못 갚을 것이 너무나 뻔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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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 31일 일명 노랑풍선 사건 최혜원 선생님 무죄 인터뷰

 

 

작년12월31일 타종 때 "선생님을 돌려주세요"가 쓰여진 노란풍선 기억하시죠?

 

그 때 풍선이 시위용품이란 걸 경찰이 처음 일깨워줬잖아요. 

 

당시 전경의 다리를 붙잡았다고 공무집행방해죄와 집시법 위반 혐의를 받은 

 

최혜원선생님이 오늘 무죄선고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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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강 삽질을 하면 삶에 질이 좋아 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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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1일 “진보의 재구성, 2010 진보대연합의 길” 토론회 풀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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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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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 보 최상재 , 사랑을 담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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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경제 (1) - 인간은 이기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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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인(경제평론가)

 

 

 

 

* 이 글은 작은책 1월호에 실릴 예정입니다. 

여러분도 이 글에 나온 실험에 참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실제로 돈을(심지어 실제로 1000만원쯤 주고 한 실험도 있습니다) 가질 수 있는 상태에서 나라면 어떻게 하겠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

사랑의 경제 (1) - 인간은 이기적일까? 



1

늘 하는 소리라 아무런 감흥도 없겠지만, 올해도 정신없이 지나갔습니다. 특히 경제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너무나 큰 일이라서 앞 날을 짐작하기 어려운 일(세계금융위기)이 벌어지는 가운데, 너무나 뻔하게 망조의 정책만 펴는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려니 그야말로 눈 코 뜰 새가 없었습니다. 하여 지난 1년간 어떤 때는 상당히 긴 호흡의 글을 연재하고(예컨대 석달에 걸쳐 ‘연재’된 스웨덴 모델) 또 어쩔 수 없이 짧은 호흡의 현실 분석을 싣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들쑥 날쑥한 글을 써서 죄송할 뿐입니다. 

또 이미 사멸하고 있는 경제학인데도 뭔가 어렵다는 이유로(단순히 수학을 많이 쓴다는 데서 비롯된 관념일텐데) ‘진실’을 독점한 듯 제 생각을 일방적으로 고지하는 짓을 자행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해서 금년에는 열두달 내내 특별한 경제 이론이나 통계에 관한 지식이 필요 없는 얘기, 아니 오히려 그런 ‘쓸모없는’ 지식이나 선입관 없이 맨 눈으로 내 주위의 평범한 일상을 관찰하는 사람들이 더 나은 통찰력을 발휘할 수 있는 얘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말하자면 저는 매달 기본적인 문제와 기존의 답만 던지고 여러분의 비판이나 의견을 모아서 다음 달에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소통’을 실천해 보려는 거죠. 작은책의 게시판이나 하종강선생님의 홈페이지(hadream.com)에 있는 제 방에서, 그리고 진보신당 게시판에서  토론을 하려 합니다.

2.

앞으로 1년간 주제는 “사랑의 경제”입니다. ‘네모난 세모’처럼 들리시죠? 경제야말로 사랑이라는 낱말이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경제 생활에도 사랑은 적용됩니다. 예컨대 아이들에게 학비와 용돈으로 500만원을 줄 때 우리는 언젠가 이자까지 쳐서 정확히 돌려 받겠다고 마음먹지 않습니다. 또 우리 아이들이 언젠가는 부모에게 돌려 주겠다고 마음 먹는 것 같지도 않고, 나아가서 고마워 할 일도 아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거래와는 전혀 다른 거죠. 물론 경제학자들은 그 돈을 지출하지 않아서 아이들이 잘 못 됐을 때 더 들어갈 비용(기회비용)을 계산한 결과라고 가르칠지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의 기대는 우리들에 대한 보상보다는 우리 아이들이 자신들의 아이들(손자들)에게 비슷하게 하는 것일텐데 이건 경제학의 등가교환과는 전혀 다릅니다. 

물론 자기 새끼니까, 조금 더 넓혀서 친족이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우리는 사랑을 실천합니다. 작년에 세계가 위기의 구렁텅이로 급전직하하고 있을 때 아마도 가장 걱정을 많이 한 곳 중 하나가 구세군었을 겁니다. 그러나 모금액은 2007년보다 오히려 늘어났습니다. 다소 비싸도 공정무역 커피를 찾는 ‘착한 소비’도 이런 이타적 행위에 속합니다. 이미 눈치 챈 분도 있겠지만 작년 초에 제가 썼던 ‘세박자 경제론’ 중 풀뿌리 경제(학문 용어로는 사회경제, social economy)는 이렇게 이기적이지 않은 사람의 속성에 기초합니다. 만일 세상이 전부 사랑으로 가득찰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럴 때  신나서 일하니까 오히려 생산성도 올라가지 않을까요? 뿐만 아니라 후대를 사랑하는 당연한 마음이라면 자연을 더 잘 가꿔야 하고(최소한 그대로 남겨둬야 하고), 또 내 이웃들도 잘 살 수 있도록(최소한 범죄를 저지를만한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분배에 훨씬 더 신경쓰지 않을까요? 그렇게 하면 모두 행복해질텐데 왜 날로 세상은 각박해지기만 할까요? ‘사랑의 경제는 원래 불가능한 걸까요?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라서 그런 세상은 올 수 없다는 답이 떠오를 겁니다. 실제로 경제학이라는 논리체계는 완벽하게 이기적인 인간을 전제로 구성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를 지속시키기 위해서 ‘이기적 인간’이 더 유리하도록 사회경제 제도를 만들어내고 학교에서, 또 가정에서 이기심을 훈련시킵니다. 말로는 ‘협동’이 중요하다고 가르치지만 협동하는 능력을 완벽하게 말살하고 경쟁만을 몸에 아로새기는 우리의 교육체제를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인간은 원래 이기적일까요, 아니면 우리 스스로 그렇게 만들고 있는 걸까요? 분명 세상이 변한다는 말 속에는 이런 학습과정이 들어 있습니다. 제 초등학교 시절,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될래, 아니면 배부른 돼지가 될래?”라는 선생님의 질문에 친구들은 대부분 자못 비장한 표정으로 소크라테스 쪽에 손을 들었습니다. 과연 이 질문을 지금 아이들에게 하면 어떻게 대답할까요? 또 여러분의 솔직한 대답은 어떻습니까? 

3. 

꽤 많은 경제학자들이(물론 전체로 보면 극소수이지만) 이런 문제를 고민해 왔습니다. 특히 게임이론과 실험경제학, 진화경제학을 활용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기적 인간을 가정한 게임의 논리적 답(즉 이기적 인간이라는 가정하에서 도달한 가장 합리적인 행위)과 실제의 실험의 결과가 같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 중 세가지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최후통첩게임이라고 알려진 겁니다. 하늘에서 1000원이 뚝 떨어졌습니다(또는 제가 줬다고 해도 좋습니다). 승연(제 큰 딸 이름입니다)이가 다연(둘째입니다)이에게 이 중 얼마를 제시합니다. 예컨대 100원을 준다고 할 때 다연이가 “언니 고마워”하고 받으면 이 게임은 끝납니다. 승연이가 900원, 다연이가 100원을 갖게 되는 거죠. 그런데 만일 다연이가 어떤 이유로든 “싫어”라고 하면 하느님이(또는 옆에서 보던 제가) 1000원을 회수합니다. 합의를 이뤄내지 못한 데 대한 벌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승연이와 다연이가 철저하게 이기적인 인간이라면 승연이가 얼마를 주겠다고 하는 게 답일까요? 다연이는 또 얼마를 받을 때 만족할까요? 여러분이라면 얼마를 제시하겠습니까?

둘째는 독재자 게임입니다(게임 이름이 다 거시기하죠?). 최후통첩게임과 다 같은데 이번에는 다연이가 거절할 권한이 없습니다. 승연이가 200원을 주겠다고 하면 다연이의 의사와 관계없이 그대로 분배가 결정됩니다. 이 게임의 논리적 답은 얼마일까요? 또 여러분이 이 게임을 한다면 얼마를 제시하겠습니까?

셋째는 공공재게임이라고 알려진 겁니다. 5명(10명도 좋고 100명도 좋습니다만)에게 200원씩을 줍니다. 각각 얼마씩 내 놓으면 그 돈은 모두를 위해서, 예를 들어 가로등을 세우는 데 쓰입니다. 요즘 정부가 흔히 지자체에 제시하는 매칭펀드 정책처럼 사람들이 내 놓은 액수만큼 돈을 불려줍니다. 예컨대 사람들이 300원을 내 놓으면 300원을 더 붙여서 600원이 됩니다. 공공을 생각하는 마음에 대한 보답인 셈이죠. 그리고 나서 5명에게 똑같이(위 예에서는 120원씩) 나눠줍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얼마씩 내놓을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제 ‘사랑의 경제’를 만들기 위한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우리가 활발하게 토론할 수록 사랑의 경제가 만들어질 가능성은 높아집니다. 여러분의 의견을 모아서 다음 달에 함께 ‘정답’을 찾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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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 만평]I'm Not R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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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 Not R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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