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나는 오늘도 싸우러 간다

나는 오늘도 싸우러 간다
- 시그네틱스 노조 김명화 조합원

글 이정원(월간 작은책 기자)

280일 동안의 투쟁

요즘 들어 부쩍 장기투쟁 사업장이 늘고 있다. 지난 4월30일 시그네틱스 노동조합의 투쟁도 280일이 되었다. 김명화 조합원을 만나러 시그네틱스 어린이집을 찾아가다 본 공장은 모두 헐려있었다. 공장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선다고 한다. 김명화 조합원은 허물어진 공장을 보면 눈물이 난다고 한다.
"그 동안 고생도 많이 했는데 아무 보상도 못 받고, 조합원들이 한 두 명씩 떨어져 나갈 때가 제일 힘들었어요."
처음엔 시그네틱스 조합원 160명이 투쟁을 같이 하다가 지금은 96명이 남아 싸우고 있다. 김명화 조합원은 힘들게 싸웠던 조합원들이 하나둘 떠나갈 때 붙잡지 못하고, 같이 싸우자고 얘기 못하는 게 힘들고 마음이 아팠다.

낯설기 만한 붉은 머리띠

김명화 조합원은 95년, 아이가 학교 들어갈 때 처음 일을 시작했다. 남편이랑 별거를 하고 아이와 함께 먹고살기 위해서 시작한 일이다. '몰드'라고 반도체 칩 위에 글씨를 씌우는 부서에서 줄곧 일했다.
"처음 출근했을 때 임단협 중이었어요. 머리에 붉은 띠를 매고 있는데 왜 저러나 싶더라구요. 나라도 힘들고 경제도 힘든데 왜 데모를 하나 그랬어요. 사실 처음에 저는 노동조합에 협조적이지 않았어요. 아이 데리고 먹고살기 힘드니까 OT, 연장 OT, 회사에서 하라는 데로 다했어요. 노동조합에서 OT하지 말라고 해도 다 했어요. 97년 회사가 직장폐쇄를 할 때 노동조합 몰래 라인에 투입돼서 일했던 사람이에요. 지금 같으면 안 그럴 텐데…."지금 생각하니까 그 때 행동이 다른 조합원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란 걸 알았다.
김명화 조합원은 시그네틱스 싸움이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다. 월급을 더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일 안 하고 돈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파주 가서 일하겠다는 건 데 회사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단다. 대한민국 여성으로 태어나 먹고살기가 이렇게 힘든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젠 싸움에 이기고 지는 게 문제가 아니고 어째든 끝까지 싸워보자는 오기만 남았다.
"영풍도 우리가 이렇게 오래 싸울 줄은 몰랐다고 해요. 몇 번 치면 끝나겠지 한 거죠. 한마디로 우리를 얕본 거죠."

죽으러 갈 수만은 없다

2001년 워크아웃 당시 산업은행은 염창동 공장을 팔면 파주공장으로 데려가겠다는 약정서를 써 주었다. 하지만 영풍에서 시그네틱스를 인수를 하면서 안산공장으로 가라는 일방적인 통고를 해 왔다.
"영풍그룹엔 노동조합이 없어요. 우리를 데려가면 조합이 생기는 거 잖아요. 안산 공장에 데려다 놓고 염창동에서 일하던 조합원들을 다 털어 버리려는 시나리오를 다 짜 놓았더라구요. 우리가 안산 공장에 죽으러 갈 수는 없잖아요."
지금 안산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60명이 채 될까 한다. 일거리를 모두 파주 공장으로 빼 돌리고, 일거리가 없는 안산 공장 사람들을 자진 퇴사하게 만들고 있다.
"안산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 중에 맘에 드는 사람과 비조합원들은 파주 공장으로 발령을 내렸어요. 지금 파주공장에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일용직들이에요. 고등학교 갓 졸업한 사람들을 바쁠 때만 데려다 쓰고, 일이 없으면 자기들 마음대로 쫓아내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못 들어가는 거예요." 요즘 반도체 사업이 호황이지만 파주 공장에는 일용직만 뽑고 염창동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받아주지 않고 있다.
시그네틱스 싸움이 길어지면서 아이들, 남편 때문에 힘들어하는 조합원들이 많아졌다. 김명화 조합원은 작년 4월부터 남편과 다시 합쳐서 살고 있지만 남편이 반대해도 이 싸움을 그만둘 생각은 없다.
"이혼을 하더라도 이 싸움은 끝내야 해요. 그 생각으로 싸우고 있어요." 김명화 조합원은  그만두라는 남편한테 열심히 일 했는데 회사가 안 알아주고, 억울해서 라도 파주 공장에 꼭 가서 일할 거라고 말했다. 파주 공장에서 정년 퇴직까지 일 할거라는 말에 남편도 '그럼, 열심히 싸우라'고 했다.

여성 노동자로 산다는 건

지난 4월 2일 김명화 조합원은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다. 산업은행 앞에서 합법적인 집회를 하다가 구로 경찰서에 끌려가 유치장 신세를 지고 알몸 수색을 당했다.
"조사만 받고 돌려보낼 줄 알았는데 유치장에 가뒀어요. 여자 경찰이 끈이 있는 건 다 풀고, 브래지어 끈도 풀어라, 운동화도 벗고 고무신을 신으라고 했어요. 그러더니 갑자기 뒤돌아 서서 바지랑 팬티를 무릎까지 내리고 앉았다 일어서라고 했어요. 생리하는 여성 조합원에게도 똑같이 시켰어요." 경찰의 강압적인 분위기에 조합원들은 아무런 항의도 못하고 모욕을 느껴야 했다. 새벽에 집에 들어가 어떡하다 여기까지 왔나 비참해 지고, 밤새 잠도 못 잤다. 아침에 다시 투쟁에 나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생각도 많았다. 하지만 나중엔 오기가 생기고 이런 꼴을 당하고 도저히 물러설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 싸움 끝장을 봐야겠다는 생각에 도시락을 싸고 다시 투쟁에 나섰다.
"경찰은 우리가 자해 할 까봐 그랬다는데 그게 말이 돼냐구요. 집회 나올 때 안 떨어지는 아이 때문에 가슴 아프고, 나와서도 아이들이 밥은 잘 먹었는지 걱정하는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이 무슨 자살을 하고 자해를 하겠어요? 조합원들이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나보다 나이 어린 경찰 앞에서 아무 소리도 못하고 당한 게 분해요."
김명화 조합원은 파주 공장으로 데려간다는, 그 약속만 지켜 주었으면 좋겠단다. 오래 싸우다 보니, 우리 문제만이 아니라 모든 여성 노동자들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며 열심히 사는 여성 노동자들이 억울한 일을 안 당했으면 좋겠단다. 여성의 수치심을 이용해서 노동조합을 탄압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김명화 조합원은 오늘도 산업은행 앞으로 출근을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