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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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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걸기
  2. 200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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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걸기
  3. 200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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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걸기
  4. 200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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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걸기
  5. 200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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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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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6/09/20
    어이가 없어서 한 마디 해줬다.(6)
    말걸기
  8. 2006/09/14
    동화 속 풍경 같은
    말걸기
  9. 2006/09/13
    말걸기의 '찰칵' 역사
    말걸기
  10. 2006/09/13
    금빛 호수(3)
    말걸기

소래포구의 풍경

 

지난 일요일 오후 소래포구로 귀항하는 배들을 담았다.

 

 

@ NIKON D200 | Nikkor 105mm F2.8D | 105.0mm | 1/1000s | f/11.0 | ISO 100

 

 

@ NIKON D200 | Nikkor 105mm F2.8D | 105.0mm | 1/800s | f/11.0 | ISO 100

 

 

@ NIKON D200 | Nikkor 105mm F2.8D | 105.0mm | 1/640s | f/11.0 | ISO 100

 

 

@ NIKON D200 | Sigma 10-20mm F4-5.6G | 12.0mm | 1/1000s | f/11.0 | ISO 100

 

 

@ NIKON D200 | Nikkor 24-50mm F/3.3-4.5D | 44.0mm | 1/1000s | f/11.0 | ISO 100

 

 

사람들이 많은 저 다리는 철교다. 예전에 협궤열차가 지나던 철교였던 모양이다. 특히 일제강점기 때는 수탈열차들이 다녔단다. 지금은 사람들만 다닌다. 다리 외쪽은 시흥, 오른쪽은 인천. 시흥에다가 차를 세워놓고 저 철길을 건너 소래포구 시장을 가로질러 차가 다니는 다리를 건너며 사진을 찍었다. 새우와 전어철이라 그런지 휴일 이 동네는 사람과 자동차로 가득했다. 걸어다니기도 어려울만큼.

 

 

차린 건 변변치 않지만...

 

@ NIKON D200 | Nikkor 105mm F2.8D | 105.0mm | 1/6s | f/3.3 | ISO 100

 

 

얼마 전에 햅쌀이라 하여 쌀 작은 것 한 포대 옆구리에 차고 왔다. 콩이나 현미 등을 항상 섞어서 밥을 짓지만 이번에 쌀맛을 제대로 보려고 쌀밥을 짓었다. 그리고 나서 문득 사진에 담고 싶었다.

 

음... 생각보다 맛나게 보이진 않네. 음식 사진 찍는 사람들은 조명을 최대 8개까지 쓴다는데... 그리고 포천쌀이라는 이 쌀, 기대보다 감동적인 맛은 아니었다. 그대도 김치랑 먹으니 맛있더라.

 

이제 슬슬 배고플 시간들 되었을텐데... 차린 건 변변치 않지만 눈팅으로라두 배를 채우셔.

 

 

 

 

새우와 소라

 

새우는 몇 개 먹었지만, 소라는 사진 찍은 후 구경도 못했다. 오이도에 일몰 찍으러 갔다가 일몰은 뒤로하고 새우와 소라만 찍었다. 나름의 아름다움을 선사했을 바다의 일몰보다 눈 앞의 먹을 것이 더 매혹적인 저녁이었다.

 

냠냠... 눈으로라도 맛나게 드시길...

 

 

@ NIKON D200 | Nikkor 105mm F2.8D | 플래시 | 105.0mm | 1/60s | f/16.0 | ISO 100

 

이랬던 새우눈이 어찌 변하냐면...

 

@ NIKON D200 | Nikkor 105mm F2.8D | 플래시 | 105.0mm | 1/60s | f/16.0 | ISO 100

 

맑고 똘망해 보이던 새우눈이 익으니 멍청해졌다. 그래도 이게 더 맛나 보인다.

 

@ NIKON D200 | Nikkor 105mm F2.8D | 플래시 | 105.0mm | 1/60s | f/16.0 | ISO 100

 

익는 모습만 보고... 먹고 싶었는데... 근데, 크게 보니까 좀 징그럽다.

 

 

꿀꿀한 시절...

 

말걸기는 최근 꿀꿀해졌다. 9월 초가 되자 이제야 백수다운 생활을 하겠구나 생각하며 여유와 함께 다음 삶을 설계해야겠다 마음 먹었다. 물론, 몇 가지 미루어 온 잡일들을 하면서. 그런데, 9월 들어 사람들을 만나면서 꿀꿀해졌다. 꿀꿀해진 이유는 만난 사람들마다 제각각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꿀꿀... 말걸기가 돼지라서 사람 만나면 '꿀꿀'거리나 보다.

 

 

상처 받은 영혼들

 

말걸기 주위에서는 왜 이리 상처 받은 영혼들이 많을까. 그들의 상처를 이해할수록 말걸기도 갑갑해진다. 만남의 자리에서는 그 상처를 감싸주며 딛고 일어서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름대로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상처에 덧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하면서. 그러다가 그 사람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올 때는 말걸기의 마음도 너덜너덜해졌음을 깨닫는다.

 

말걸기도 상처 받은 영혼인데 그들은 말걸기의 상처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들 스스로의 상처에 갖혀 남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말걸기의 의지가 될 수 없는 자들이다.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상대가 되지 못한다. 말걸기가 큰 아량과 내면의 힘이 있다면 모를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과련 그런 인연은 계속되어야 하는가?

 

 

상처 받고 있는 영혼들

 

아무리 뜯어보아도 소위 '운동판'에서는 잡것들이 주류다. 좌파니 우파니 정체성을 논해도 대부분 잡것들이거나 잡것들이 쳐놓은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매한 것들이 주류다. 나름의 건강한 상식과 신념과 철학을 갖추어도 이런 상황에서 개인의 힘은 무력하기 짝이 없다. 상당한 능력을 발휘해야 할 사람들이 오래된 그물에 걸려 허우적댈 뿐이다. 얼마나 괴로울까?

 

그들은 상처 받으면서도 의연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더 상처를 받는다. 말걸기도 옆에서 함께 개거품 물면서 그 얼토당토 않은 사태에 분노와 조롱을 표하지만, 그랬다고 그들의 상처가 치유되겠는가. 결국 말걸기가 그들에게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손짓

 

만나는 사람 중에는 말걸기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있다. 고마운 사람들이다. 말걸기에게 기회를 제공할 의사가 있다는 것은, 말걸기를 과대평가한 면도 있을 터이고 구제해야겠다는 우정의 발로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의 절박함, 또는 욕심이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말걸기가 원하는 일과 그들이 제안한 일이 얼마나 일치하는 지 따져봐야 할 것이다. 간략한 재보기에 따르면 이 일은 이래서 부담스럽고, 저 일은 저래서 부담스럽다. 그리고 이 일은 이 방향으로 가는 길이고, 저 일은 저 방향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말걸기에게는 기로다. 꼭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기로다. 말걸기의 길은 과연 어디인가?

 

 

또 다른 세계

 

말걸기 평생에 만날 것 같지 않았던 사람들과 인연이 쌓이고 있다. 그들은 꼭 특별한 길을 함께 가고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흐름이 있고 분위기가 있다. 말걸기의 가치와는 상당히 동떨어진 가치가 난무하는 무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말걸기가 꼭꼭 누르고 살았던 욕망을 자극하는 세계이다.

 

말걸기에게 그림을 가르쳤던 선생은, "너무 많은 재주를 가지고 있어서 그림에 열중하지 못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과연 말걸기는 또 다른 세계로 질주할 수 있을 것인가? 그곳으로 가다가 문득 '신념'의 부름에 괴로워하지는 않을까? 어쩌면 그 '신념'도 하나의 '욕망'일텐데 말이다.

 

 

은근한 무게, 가정

 

진경맘과 너나나나의 블로그의 포스트들은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다른 이의 경험이 이토록 큰 깨달음을 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하지만 깨달음이 한 덩이 무게라면 두려움은 두 덩이 무게이다. 말걸기에게, 스스로 '이래야 한다' 말하는 명제를 충실히 지킬 자질이 있는가 의심스럽다. 그 의심을 파란꼬리와의 잦은 다툼에서 확인한다.

 

 

 

9월은 중순부터 확 꿀꿀해져 버렸다. 피곤해도 잠도 안온다.

 

 

 

안개낀 쓸쓸한 항구

 

바이칼 호수에는 '리스트비안카'라는 자그마한 항구 도시가 있다. 바이칼의 특산 생선인 '오물' 요리로 유명한 도시이다. 호숫가 좁은 도로 한쪽은 호텔들이, 한쪽은 선술집과 좌판이 늘어선 작은 항구이다.

 

저녁을 먹고 보드카 한 잔 하려고 항구까지 나와서 선술집에 들렀다. 한 잔 하고 저 편을 바라보니 안개가 가득하였다. 하지만 안개를 성공적으로 사진에 담지는 못했다. 그래도 쓸쓸한 항구의 분위기는 담았다.

 

외롭게 앉아 있는 사람. 건너편 선술집에서 마주 앉아 보드카를 들이키는 사람들.

 

 

@ 06-07-05 23:10 | NIKON D200 | Nikkor 24-50mm F/3.3-4.5D | 29.0mm | 13.0s | f/11.0 | ISO 100

 

 

불빛이 번지는 곳이 어색하다. 왕건이가 CCD에 붙어 먹어서 손을 댔는데 그래도 이상하다.

 

 

먹는 얘기

 

지각생님의 [뭐든지 잘먹어야 해?] 에 관련된 글.

 

 

지각생님의 자신의 식습관에 대한 얘기를 풀어 놓았길래 말걸기도 식습관 혹은 먹는 얘기를 좀 해볼까 해서.

 

 

1.

 

말걸기는 먹고 나서 괴로운 게 경험으로 확인된 몇 가지 음식은 먹지 않는다. 혹은, 잘 먹지 않는다. 대표적인 게 닭이다. 닭은 정말 맛나는 음식이긴 하다. 하지만 말걸기는 닭을 먹으면 속이 괴롭다. 맥주집에서는 튀긴 닭이 맛나게 보여 몇 조각 먹기는 하지만 다음날의 괴로움을 감수하며 먹는 것이다. 튀긴 닭이 아니라 백숙, 삼계탕이라면 '괴로움' 정도가 아니다. 하루 죙일 화장실을 들락날락해야 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먹지 않는 음식이다.

 

인삼은 먹으면 바로 신호가 온다. 얼굴이 상기되고 심장 박동수가 상승한다. 확 올라오는 열에 어쩔 줄 모를 정도로 괴롭다. 억대를 호가하는 산삼이라도 말걸기에게는 칡뿌리만 못하다. 이렇듯 소위 '열 많은 음식'을 잘 먹지 않는다. 말걸기가 열 많은 음식 목록을 줄줄 외워대는 게 아니니 먹는 것들도 많겠지만 여러 차례의 경험으로 각인되지 않았으니 먹을테다.

 

개도 안 먹는다. 몇 번 먹어보고 좋지 않아서 먹지 않지만, 솔직히 개라서 안 먹는 이유도 있는 듯하다.

 

그럼, 나머지는? 말걸기가 먹어본 음식의 종류가 세상에 있는 음식 중에 100분의 1이나 될까마는 차려진 건 다 먹어왔다. 그리고 그날의 몸상태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먹어보지 않은 음식도 잘 먹는다. 돈과 정보와 시간이 없어서 못 먹지 기회만 된다면야, 말걸기는 뭐든 먹을 게 뻔하다.

 

 

2.

 

대체로 음식재료는 가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많이도 먹는다. 한 해 한 해 지나면서 먹는 양이 쭉쭉 줄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보통 이상으로 많이 먹는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말걸기가 먹는 걸 옆에서 보는 사람들은 '진짜 많이 먹는다'고 놀랬다. 그럼 말걸기는 '3분의 1로 줄어든거야' 했다. 지금은 더 줄었다. 아마도 밥을 먹지 않을 때가 많아지다보니 그랬나 보다.

 

말걸기가 많이 먹는 이유는 워낙 식탐이 강해서 그런 것 같다. 식탐은 어려서 형성된 듯한데, 3남매가 먹는 경쟁을 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말걸기 어려서는 굶은 적이 없으니 못살지는 않았다. 하지만 3남매, 그리고 아버지까지 가세하면 먹는 건 언제나 만족스럽지 않았다. 얼마나 먹어댔는지...

 

또 하나는 부모님이 어려서부터 '골고루 많이' 먹도록 가르쳤다. 그래서 눈살 찌푸리고 싸우거나 야단맞은 적도 많았다. 그래도 '착한' 어린 말걸기는 꾸역꾸역 잘도 먹었다.

 

 

3.

 

말걸기 어려서는 많은 종류의 음식을 먹어보지는 못했다. '신기한', 그리고 '비싼' 음식은 고등학교 때부터 하나씩 알게 되었다. 그것들은 집 밖에서 먹는(혹은 만들어진) 음식들이었다. 그 '신기한', 그리고 '비싼' 음식이란, 보쌈, 양장피 따위를 말한다. 어려서 중국집에 가면 주욱 늘어진 메뉴판은 '폼'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파는 건 짜장면과 짬뽕과 탕수육이 전부라고 믿었다. 고등학생이 되서야 양장피와 팔보채를 먹어 보았다.

 

말걸기가 가장 부유하게 살았던 때가 고등학생부터 대학생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때는 가족끼리 가끔씩 외식을 했고 점점 더 '신기하고 비싼' 음식을 맛보았다. 그 시절에 몇 개의 호텔 뷔페 식당엘 가 보았다. 소위 패밀리 레스토랑이라는 데에서도 음식을 맛 보았다. 이런 데는 징하게 먹어댈 수 있는 '기쁨'이 있었다.

 

 

4.

 

직딩이 된 후로는 양도 중요했지만 맛이 더 중요해졌다. 그래서 '맛집'이라면 가서 먹어보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직딩으로 지내다 보니 더욱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알게 되었다. 이미 먹어보았거나 즐기는 사람 쫓아서 먹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 때부터는 같은 재료라고 해도 음식 맛을 잘 내는 곳으로 가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맛없는 음식을 외면하는 건 아니다. 일단, 차려놓은 음식은 다 먹었다. 말걸기가 너무 맛이 없어서 끝까지 먹지 못한 음식은 단 하나다. 정통 제주식 뚝배기. 이건 진짜 못 먹을 정도로 맛없다.

 

그러니까, 맛이 중요하면서도 맛없다고 음식을 내팽개치거나, 먹을 때 투덜대지 않는다. 다 먹고 나서 '맛없네. 다시는 먹지 말아야지' 한다. 아무리 가난한 직딩이라도 손에 돈이 있기 때문에 맛을 느끼기 위해 음식에 돈을 썼다. 엥겔지수 끝내주는 직딩이었는데 아무래도 돈발이 약하다보니, 음식을 판단하는 기준도 '가격 대비 효용(맛과 양)'을 따지게 되었다.

 

한 끼 식사 비용으로는 과하다 싶어도 '가격 대비 효용'이 좋으면 가끔씩 먹는 음식이 생겼다. 그런 메뉴들이 여럿이니 '가격 대비 효용' 좋은 음식을 자주 먹게 되었다. 이런 음식들은 시간이 지나면 말걸기를 불렀다. '이쯤 되면 한 번 먹어줘야 하지 않겠니?'

 

먹는 것을 좋아하는 말걸기에게는 두 번의 상처가 있다. 하나는, 신촌에 능안갈비집이 있었는데 이집의 소뼈해장국은 예술이었다. 가격대 효용으로 따지면 전국 최고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집이 20세기 말에 사라졌다. 어디로 이사를 간 건지 망한 건지 알지도 못한다. 몇 해 슬퍼했다. 진정... 아직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다.

 

또 하나의 상처는 서여의도의 엔티마호텔 1층에 이탈리아 음식점이 있었다. 이 집 피자는 너무 맛있어서, 직딩 시절 사무실에서 빡오른 혈압을 내리기 위해 자주 애용했다. 볼피 피자는 말걸기가 가장 사랑했던 피자였다. 다른 피자들도 맛있고. 그러던 어느날 내장 공사한다면서 문을 닫았는데 공사를 마치고서는 다른 음식점이 입점했다. 2년째 슬퍼하고 있다.

 

지난 여름 내내 머릿 속을 떠나지 않아 말걸기를 괴롭힌 음식도 있다. 양양의 막국수다. 군대에 있을 때 막국수 맛을 보고 감동을 받았던 양양의 실로암은 맛이 변해버린 걸 작년에 알았다. 그 사건을 슬퍼하고 있을 때 새롭게 뜨는 막국수집을 알게 되었다. 백수광부가 소개해준 입암리 막국수. 이게 얼마나 시원하고 맛있는지 배터지게 먹어도 또 먹고 싶을 정도다. 더위를 느낀 날에 찾아오는 막국수의 추억이여! (슬퍼진다 ㅠㅠ)

 

 

5.

 

말걸기는 하나의 재료의 비중이 높은 것보다는 골고루 갖춘 음식을 좋아한다. 고기를 먹을 때 채소가 없으면 잘 먹지 않는다. 회를 먹을 때도 채소를 많이 먹는다. 고기를 구워 먹는 것보다는 보쌈, 회를 먹는 것보다는 회초밥을 먹었을 때 더 만족한다. 단백질과 지방과 탄수화물과 비타민과 식이섬유 등등을 골고루 균형 있게 먹는 걸 좋아한다. 중국요리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중국요리는 이걸 다 섞어 놓은 요리가 많기 때문이다. 맛도 있고.

 

말걸기는 편식을 하지도 않고 그리 투정을 부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나이가 하나씩 들면서 맛에 민감해지는지 땡기지 않은 음식은 잘 먹지 않게 된다. 이 때문이 아니라면 몸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별로 건강하지 않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6.

 

먹는 문제에 있어서 말걸기의 최대의 과제는 집에서 만들어 먹는 버릇이 없다는 것이다. '집딩'이 된 후로는 차츰 밥을 해 먹는 비중도 높아지고 이것 저것 깨작깨작 만드는 음식도 있긴 한데 한심한 수준이다. 이 게으름을 돌파할 방법은 '요리해 먹는 기쁨'을 깨닫는 것 뿐이지 않을까 한다.

 

 

 

배고프다. 뭐든 먹고 싶다. 다음 기회에 먹는 얘기 또 해야지.

 

 

어이가 없어서 한 마디 해줬다.

 

민주노동당 당원토론방에 [찬물]이라는 자의 글이 올라와 있다.

 

▲ 심재옥 최고위원의 '업무 보다 육아가 우선' 주장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봅시다

 

 

그래서, 한 마디 해줬다. 아주 논리적으로 구구절절 얘기하기는 귀찮고 해서, 간략한 콩트와 길지 않은 잔소리와 블랙 코미디로 답해줬다. 이러니 좀 길어졌네.

 

▲ 찬물 / 제대로 된 최고위원회라면...

 

 

말걸기의 게시물을 옮기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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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로 있었을 법한 최고위 회의를 상상해 봅시다.

 

(찬물님이 전해 주신 말씀만으로도 당시 상황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을 것 같군요.)

 

○ 문성현 대표 : "한미 FTA 저지 투쟁에 올인하기 위해 최고위원들이 전국순회 등 모범을 보이자"

 

○ 심재옥 최고 : (아마도) "나는 아이를 돌봐야 해서 전국순회는 어렵다."

 

○ 문성현 대표 등 기타 최고위원들 : (아마도) 한미 FTA 저지 투쟁의 중차대성을 설명하며, 최고위원들의 모범이 있어야 한다는 등... 심재옥 최고에게 책임감 있게 참여할 것을 독려...했겠지요.

 

○ 심재옥 최고 : (아마도 사정을 좀 더 상세히 설명하였으나 여전히 난감함이... 그리고 나서) "업무는 중단할 수 있어도 육아는 포기할 수 없다"

 


■ 제대로된 최고위원회라면...

 

○ 문성현 대표 : "한미 FTA 저지 투쟁에 올인하기 위해 최고위원들이 전국순회 등 모범을 보이자"

 

○ 심재옥 최고 : "나는 아이를 돌봐야 해서 전국순회는 어렵다."

 

○ 어느 최고위원이든간에 : "물론이다. 아이를 돌봐야 하는 심재옥 최고의 일정은 육아에 지장이 없도록 계획해야 옳다."

 

○ 문성현 대표 : "심재옥 최고의 일정은 실무를 준비할 때 육아에 지장이 없도록 계획하는 것으로 한다."

 


아무래도 후자의 회의가 깔끔하면서도 진보정당의 지도부 답지 않나요?

 

찬물님께서 말씀하신 "업무와 육아문제의 대비"는, 여성의 의지가 아닙니다. "업무와 육아문제의 대비"는, 언제나 남성이, 권력이, 자본이 그리 하도록 했답니다. 그것이 어떤 일이건간에 자신의 일을 원하는 지구 상의 모든 엄마들은 "업무와 육아문제가 대비"되는 상황을 무척이나 싫어한답니다. 그 둘이 대비되는 순간 둘 중 하나는 충실히 이행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내면적 갈등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그건 엄마들(혹은 엄마가 될까 생각하는 여성들)에게는 큰 고통이랍니다.

 

찬물님께서 말씀하신 '범부'들은, 그 고통을 이겨내기 어렵도록 하는 사회 때문에 둘 중 하나를 포기하거나 뒤죽박죽으로 삽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야 하는 게 진보정당, 민주노동당입니다. 민주노동당이, 최고지도부라고 해서, 그 책임이 막중하다고 해서 '예외'로 두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 누구가 최고지도부라고 해도 엄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최고위원인 엄마가 아이를 성실히 돌보는 걸 제대로 보장하지 않으면, 민주노동당이라는 조직은 언제든지 '예외'를 인정할 준비가 되도록 내면화됩니다. 사실은 이미 내면화되어 있기때문에 심재옥 최고가 더욱 고통스러운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마지막으로 웃기도 어려운, 실제 있었던 블랙 코미디 하나는 들려드리지요.

 

중앙당 상근자 하나가 아이를 낳았습니다. 1년 육아휴직을 신청했습니다. 이 상근자와 함께 정말 열심히 일하고 싶은 또 다른 상근자가 말했습니다.

 

"동지, 정말 육아휴직 쓸겨? '진보'도 좋지만 우리에게는 '변혁'의 길이 있잖아"

 

 

동화 속 풍경 같은

 

바이칼 호수의 물이 흘러 나가는 유일한 강이 '앙가라'강이다. 이르쿠츠크 외곽 앙가라강변에 있는, 소나무 섞인 자작나무 숲속에 통나무집들이 있다. 동화 속 풍경 같은 아래 사진의 집은 바이칼-이르쿠츠크 여행 때 몇 일 밤 묵었던 곳이다.

 

이 통나무집들은, 소비에트 시절 모든 인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여름 별장 '다차'였다. '다차'는 텃밭을 일구고 여름을 보내기 좋은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소비에트가 무너질 때 '다차'는 각자 개인의 소유가 되었다. 여전히 자신의 '다차'에서 여름을 보내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사회답게 다차를 몇 푼에 넘겨받아 관광 숙박 시설로 운영하는 회사가 생겨났다.

 

일행이 머물렀던 곳은 이르쿠츠크의 모회사로부터 인수하여 통나무집 호텔을 운영하는 한인의 소유다. 모기만 없다면 아주 훌륭한 여름 휴양지이다.

 

 

@ 06-07-08 00:19 | NIKON D200 | Sigma 10-20mm F4-5.6G | 17.0mm | 124.700s | f/5.6 | ISO 100

 

 

안으로 들어가면 뭔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사진이 풍기는 기대와는 달리 사진 속 건물은 호텔 사장과 직원들이 사용하는 공간이다. 

 

 

말걸기의 '찰칵' 역사

 

말걸기가 사진을 처음 찍은 게 언제였을까? 아마 어려서 자그마한 '똑딱이' 필름 사진기로 어쩌다가 아빠나 엄마를 졸라 찍어 보았을 것이다. 보통의 필름 카메라들이 한 컷을 담는 필름을 두 개로 쪼개 찍는 올림푸스의 사진기가 집에 있었는데 그걸 찍었던 기억이 있다. 이 사진기는 일종의 가족 범용이었다. 누구나 '내가 찍을래' 하면 찍을 수 있었으니까. 물론, 필름을 넣고 사진을 찍을 만한 집안 행사(여행 같은)가 있어야 했지만.

 

이 사진기 외에 말걸기의 부친께서는 오래 전부터 사진기를 갖고 계셨다. 이 사진기에는 쉽게 손을 댈 수 없었다. 왜냐고? 귀한 거니까. 아주 구닥다리이지만 상당히 품위 있는 사진기가 있었는데 그건 부모님댁 어딘가에 아직도 귀하게 모셔져 있을지 모르겠다. 혹시 독일제 명품 라이카? 글쎄... 어쨌든 이 사진기는 구닥다리라 노출계도 없고 뭐 그런 거였다. 확실히 사진찍기에는 불편하다.

 

가족의 운이란 이런 것일 수도 있다. 작은 이모는 독일 유학생으로 가서 의사가 되었고 의사 이모부가 생겼다. 말걸기 어려서는 서독은 무지 잘 사는 나라였고 이모-이모부는 아부지께 Canon 사진기를 선물했던 모양이다. 사진기 모델에 관심없을 때 사용하던 거라 말걸기는 기억하지 못하는 이 Canon 사진기 또한 손대기 힘든 물건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초등 6학년이었던가, 아부지께서 저 멀리 삼성동 어디를 가자셨다. 관세청에서 밀수품들 압수한 것 파는 곳이란다. 사진기들만 유심히 살피시더니 Nikon FM2를 사셨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이 날은 역사적인 날이다. 몇 월 몇 일인지도 모르지만...

 

새 기종의 사진기는 기존의 Canon 사진기보다 가벼웠고 스트렙(사진기를 목에 메는 줄)도 좋아서 훨씬 뽀대나 보였다. 그리고 새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말걸기의 아부지는 집안 행사 때마다 Nikon FM2를 사용하셨다. 그럼 Canon의 운명은?

 

아부지 사진 찍을 때마다 부러워 하던 말걸기의 손에 쥐어졌다. 아무 때는 아니고 아부지가 허락하실 때에만. 그러다가 가끔씩 말걸기의 손에서 놀던 Canon 사진기는 점차 말걸기의 손때를 많이 타게 되었고 고등학교 다닐 때는 어렵지 않게 사진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일년에 다 합쳐봐야 수 차례밖에 없는 수학여행이나 친구들과 놀러갈 때 뿐이지만. 거의 말걸기의 것이 되어버린 것이지. 이 때는 필름값도 말걸기가 주로 대지 않았을까 싶다. 이렇게 연중 몇 번의 행사와 함께 말걸기는 사진을 찍어댔다. 한 번 찍으면 그 비싼 필름 몇 통을 해치워버렸다.

 

초등 6년 때부터 SLR(일안반사식렌즈)을 찍기 시작한 말걸기는 대학생 쯤 되어서 FM2를 손에 쥐고 사진을 찍게 되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때에 손을 대기 시작했던 이 기종은 대학 때는 사실상 말걸기의 것이 되어버렸다.

 

 

Canon 사진기는 55mm 단렌즈였고 밝기는 F/1.2로 기억한다. 말걸기는 이게 무슨 의미인지 최근에야 알았다. 놀라운 명품이란 뜻이지.

 

50mm 전후의 초점거리의 렌즈를 표준렌즈라고 한다. 이는 사람의 눈과 비슷한 원근감을 갖는 렌즈란 뜻이다. 수치가 작아지면 광각렌즈라고 해서 사람의 눈보다 훨씬 거리감이 있어 보이는 렌즈다. 반대로 초점거리가 커지면 망원렌즈라고 해서 사람의 눈보다 원근감이 줄어든다. 즉, 렌즈는 기본적으로 원근감을 어느 정도 왜곡하느냐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다. 또, 이 초점거리에 따라 화각, 즉 시야의 범위도 달라진다. 당연히 광각일수록 넓고 망원일수록 좁다.

 

Canon으로 사진을 찍을 때는 단렌즈였기 때문에 가끔씩 갑갑할 때가 있었다. 말걸기는 이 정도의 시야를 사진에 담고 싶은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저 멀리 있는 걸 찍고 싶은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Nikon FM2를 손에 쥐게 되었을 때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50mm F/1.4 단렌즈 외에도 80-200mm 망원 줌렌즈도 있었기 때문이다. 말걸기는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망원렌즈가 표준보다 훌륭한 렌즈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무척 기뻐했다.

 

이 두 개의 렌즈로 사진을 찍다가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확실하게 원근감의 왜곡이라는 개념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표준이든 망원이든 표현의 필요에 따라 렌즈를 달리해야 한다는 점. 따라서 광각 렌즈로도 사진을 찍고 싶어졌다. 이 때 운이 좋은 말걸기 앞에 후원자가 나타났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면서 '아, 광각 렌즈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를 외치던 말걸기에게 누나가 렌즈 하나를 선사한 것이다. 지금도 사용하는 24-50mm 광각-표준 줌렌즈. 이 렌즈를 선택한 건 한정된 돈으로 광각의 느낌을 살릴 수 있는 렌즈였기 때문이다. 그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돈 있는 사람들은 절대 이 렌즈 안 산다. 그러나, 말걸기에게는 어디냐?

 

초광각은 아니었지만 광각렌즈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건 크나 큰 행운이었다. 24-50, 80-200mm의 초점거리면 그냥 그렇게 사진을 찍을 수 었었으니까. 표준만 오래 찍어보았기 때문에 다양한 화각의 렌즈의 가치도 쉽게 깨칠 수 있었던 것 같다.

 

 

화각에 대한 이해를 깨치던 시절, 말걸기의 사진 생활에 또 다른 장벽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대학 3학년 때 학과 후배 하나가 사진을 무척 좋아해서 사진동아리 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녀석과 사진 얘기를 나누면서 이것저것 배우기도 하고 언제는 사진을 찍는 걸 지켜보고선 현상, 인화하는 것까지 함께 해 본 적이 있다. 그때, 사진은 찍는 것에서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 인화하면서 완성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즉, 말걸기는 반쪽 사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꿈을 꾸기 시작했다. 말걸기만의 암실을 갖는 것.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흑백 필름으로 사진을 찍으면서 직접 현상, 인화를 할 수 있는 암실은커녕 그 정도의 공간이 있는 집도 마련하지 못했으니까. 먼 미래에는 가능할까? 사실 암실 이전에 필름, 현상, 인화값이 부담이었다. 말걸기는 소위 '출사'라는 걸 가보지 못했다. 이를테면, 저 산 꼭대기에 가서 전경을 찍어야지, 저 나무와 꽃을 찍어야지, 거리의 사람들과 풍물을 담아야지 따위를 해 본 적이 없다. 단, 한 번 대학 1학년 때 교양 과제물을 내기 위해 서울 시내를 돌아다닌 것 빼고.

 

경제 사정도 그러했고, 대학 때는 언제나 그랬드시 항상 '활동'에 묻혀 있었으니 말걸기만의 사진 생활은 없었다. 단지, 과행사(신입행 환영회서부터 수학여행, 졸업여행 등등)나 각종 놀러가기 프로그램에서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아주 즐거운 사진들을 많이 찍었다. 그러다 보니 인물 스냅 장르라고나 할까, 그런 사진만 찍어댔다.

 

 

나이를 먹으면서 가끔씩 찍던 것도 차츰 횟수가 줄어들었다. 무거운 가방을 들고 돌아다니는 건 꾀나 힘들다. 일행 모두가 사진을 찍기 위한 게 아니면 쫓아다니기 힘들다. 짐도 두 배나 되고. 세파에 찌들면서 사진기 들고 어딜 가는 게 조금씩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살면서도 뭔가 새로운 전기가 닥치면 사진을 마구 찍을 기회를 잡길 희망하고 있었다.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바로 사직이다. 사직으로 돈이 생겼다. 드럽고 치사하게 받아낸 퇴직금의 절반은 사진 장비에 쏟았다. 필름 사진기만큼의 해상도는 아니나 상당히 진보한 디지털 사진기는 필름, 현상, 인화값을 없애고 초기 투자로 상당한 기간 동안 비용 부담 없는 사진 생활을 가능하게 하리라는 기대로 Nikon D200을 손에 쥐었다.

 

DSLR에 대해 잘 몰랐던 말걸기는 사진 장비 마련 후 또 한번의 갈등을 겪었다. 같은 초점거리의 렌즈라 해도 DSLR에서의 초점거리는 SLR의 1.5배가 되는 것이었다. 즉, 말걸기의 24-50mm은 D200에 꽂으면, FM2로 환산하자면 36-75mm라는 표준 줌렌즈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D200에 24-50mm를 꽂고 나서 사진을 찍는데 광각의 느낌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결국, 풍경을 왕창 담아와야 할 시베리아-몽골 여행을 가기 전에 조금씩 비상금으로 모아 두었던 돈을 털어 10-20mm 초광각 줌렌즈를 사고야 말았다. 지금으로써는 후회는 없고 오히려 안 샀으면 후회가 컸을 거라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괴로왔다.

 

또 하나, DSLR로 전향하면서 현상, 인화에 대한 갈망도 새롭게 바뀌었다. 디지털 사진은 보정이 현상과 인화의 상당 부분을 대체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필카와 디카는 각각의 장단점을 갖지만 말걸기의 사정으로 보자면 디카가 훨씬 나은 점이 많다.

 

 

D200을 선택한 것은 Nikon의 제품이기 때문이었다. FM2에서 사용하던 렌즈를 사용할 수 있으니까. 세세하게는 몰랐지만 운이 좋은 선택이 되었다. 선택을 하는 과정에서 새 기종을 계기로 생겨난 사진 동호회를 알게 되었고 이 동호회에서 다양한 장르의 사진을 접하고 있고 또한 찍어 보기도 한다. 혼자서 20년 넘게 하나씩 깨우쳤던 것보다 빠르게 사진을 공부하게 된다. 이런 나날이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쉼'의 세월에서 누릴 수 있는 복이다.

 

앞날의 경제적 어려움을 '무시'하고 선택한 DSLR의 생활, 후회는 없고 욕망만 커지고 있다. 사진을 찍으면 찍을수록. 이 욕망을 다 채울 수 있진 않겠지? 그림 그리는 꿈을 버린 말걸기에게 사진은 대체품으로 그치지 않고 새로운 세계가 되길 희망한다. 언제나 그렇겠지만 삶의 또 다른 부담은 있지만...

 

 

금빛 호수

 

바이칼에는 알혼섬이 있다. 이미 그 얘기는 했고. 알혼섬 중심지는 후쥐르 마을이다. 이 얘기도 했고. 이 마을은 섬의 서쪽 호수변에 있는데, 그 호수변 언덕에서 석양을 담았다. 금빛 석양이다. 언덕 위에 홀로 삐딱하고도 왜소하게 서 있는 소나무 실루엣과 함께.

 

저 구름과 호숫물을 떼어다가 팔아도 될 듯 진짜 금빛이네. 실은 저 실루엣 보려도 금 몇 돈을 썼는지... 아, 금보다는 그 광경이 더 값지니 득보고 왔다.

 

그대, 가고 싶지?

 

 

@ 06-07-03 22:12:01 | NIKON D200 | Nikkor 24-50mm F/3.3-4.5D | 25.0mm | 1/180s | f/6.3 | ISO 200

 

 

구름 위에 작은 점은 새.

왜 ISO를 200으로 놓고 찍었을까. 바보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