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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탈감.

한 때 부자였고,

한 때 부족할 것이 없었고,

한 때 넘치는 사랑을 받았고,

 

그런데 지금은 가난하고

그런데 지금은 항상 부족하고 배고프고

그런데 지금은 외롭고, 미워하고 미움받고.

 

 

이런 변한 상황들, 이런 박탈감 때문에 세상에 눈을 뜨게 되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내가 만약 그 일을 겪지 않았다면 ,이 공간에서 너랑 만나지 못했을지도 몰라"

 

그 사람들의 현재는 어쨌든 나와 함께지만, 그들의 과거는 나랑 판이하게 달랐다.

그리고 과거의 집안 몰락? 같은 급격락 추락, 박탈의 경험은 그들에게 여전히 상처라는 점...이 그들과 나 사이의 불안한 괴리를 느끼게 했다.

 

술자리에서, 자기 포함, 가족들이 경험한 그! 급격한 추락을 이야기하며 통곡하는 친구들을 위로할 때가 종종 있었는데 그 때마다 정말 이 '시츄에이숀'이 코메디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나는 그들과 공유할 수 있는 추락의 경험도 없다.

그리고 그들이 볼 때는 추락할 것도 없는 삶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이유들이 나름대로 절절했다.

 

그들은 자신의 집이 압구정동 100평짜리에서 마포구 30평으로 줄어들었다고 울고,

아빠가 대기업 사장에서 벤쳐기업 이사되었다고 울고

자기는 삼성맨이랑 결혼했는데, 자기 친구는 삼성계열사 사장 아들놈이랑 결혼했다고 울고

아는 사람은 서울대 갔는데, 자긴 연고대,이대갔다고 울고..

그리고 이 외의  몇가지 추락 경험들 중에는 내가 잘 모르는 말도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한참 울다가 밝은 얼굴로 말한다.

 

"그렇지만 이런 경험들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너를 만나고, 내가 너같은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그건 정말 행운이지"

 

사실 그 친구는, 나의 성심성의를 다한 위로의 댓가로,

칭찬을 선사해주고 싶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듣는 나로써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들 말에선 '예수재림' 분위기가 난다. '낮은 곳에 임한' 분위기 말이다.

 

'난 낮은 곳에 있소'라고 말한 적 없고, 게다가 '낮은 곳에 와서 날 좀 이해해 주쇼'라고 이야기한 적은 더더욱 없건만, 그들은 왜 저런 착각을 머리에 간직하고 살아갈까.

 

난 단지 내가 잘은 모를지라도, 그들의 친구가 되고 싶었기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어깨를 쓸어주었다. 그 고통에 즉각적인 공감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들의 감정이 그랬다니 친구로써 최대한 존중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친구가 되긴 좀 힘들 것 같다.

 

뭐 하나 동등한 것이 없다. 그들의 머리 속에 박탈은, 인생 급추락으로 평가되고 있는 게 맞다. 위에서 아래로. 행복에서 불행으로. 높은 곳에서 아래로. 그래서 여전히 울고 있는 얼굴로 '너같은 상황을 이해할 수 있어서 행운이야'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거겠지.

 

아래로 떨어지다 보니 만나는 사람, 나.

나도 나를 되돌아 보게 된다. 난 대체  저 아래 어디쯤 서 있는 걸까.

 

여튼 난 기독교 제일 싫은데, 이 친구들은 하나같이 기독교도들이다.

어쩜 그래서인지도 몰라. 라고 편히 생각해 버리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또 싸워야 한다. 또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아..피곤해. 아. 피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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