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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12/13
    박탈감.
    껌뻑
  2. 2006/12/12
    사람과 닮은 글을 보고 싶.(5)
    껌뻑
  3. 2006/12/12
    필요한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해.(2)
    껌뻑
  4. 2006/12/06
    젠더의 채널을 돌려라
    껌뻑
  5. 2006/12/05
    여성 에로티시즘의 마술적 힘, 레오노르 피니(2)
    껌뻑
  6. 2006/10/22
    세필유성
    껌뻑
  7. 2006/09/23
    야성의 꽃다방 특집 방송
    껌뻑
  8. 2006/08/20
    천상의 피조물
    껌뻑
  9. 2006/07/03
    지지합니다.(2)
    껌뻑
  10. 2006/06/10
    말만 차이
    껌뻑

박탈감.

한 때 부자였고,

한 때 부족할 것이 없었고,

한 때 넘치는 사랑을 받았고,

 

그런데 지금은 가난하고

그런데 지금은 항상 부족하고 배고프고

그런데 지금은 외롭고, 미워하고 미움받고.

 

 

이런 변한 상황들, 이런 박탈감 때문에 세상에 눈을 뜨게 되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내가 만약 그 일을 겪지 않았다면 ,이 공간에서 너랑 만나지 못했을지도 몰라"

 

그 사람들의 현재는 어쨌든 나와 함께지만, 그들의 과거는 나랑 판이하게 달랐다.

그리고 과거의 집안 몰락? 같은 급격락 추락, 박탈의 경험은 그들에게 여전히 상처라는 점...이 그들과 나 사이의 불안한 괴리를 느끼게 했다.

 

술자리에서, 자기 포함, 가족들이 경험한 그! 급격한 추락을 이야기하며 통곡하는 친구들을 위로할 때가 종종 있었는데 그 때마다 정말 이 '시츄에이숀'이 코메디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나는 그들과 공유할 수 있는 추락의 경험도 없다.

그리고 그들이 볼 때는 추락할 것도 없는 삶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이유들이 나름대로 절절했다.

 

그들은 자신의 집이 압구정동 100평짜리에서 마포구 30평으로 줄어들었다고 울고,

아빠가 대기업 사장에서 벤쳐기업 이사되었다고 울고

자기는 삼성맨이랑 결혼했는데, 자기 친구는 삼성계열사 사장 아들놈이랑 결혼했다고 울고

아는 사람은 서울대 갔는데, 자긴 연고대,이대갔다고 울고..

그리고 이 외의  몇가지 추락 경험들 중에는 내가 잘 모르는 말도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한참 울다가 밝은 얼굴로 말한다.

 

"그렇지만 이런 경험들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너를 만나고, 내가 너같은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그건 정말 행운이지"

 

사실 그 친구는, 나의 성심성의를 다한 위로의 댓가로,

칭찬을 선사해주고 싶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듣는 나로써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들 말에선 '예수재림' 분위기가 난다. '낮은 곳에 임한' 분위기 말이다.

 

'난 낮은 곳에 있소'라고 말한 적 없고, 게다가 '낮은 곳에 와서 날 좀 이해해 주쇼'라고 이야기한 적은 더더욱 없건만, 그들은 왜 저런 착각을 머리에 간직하고 살아갈까.

 

난 단지 내가 잘은 모를지라도, 그들의 친구가 되고 싶었기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어깨를 쓸어주었다. 그 고통에 즉각적인 공감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들의 감정이 그랬다니 친구로써 최대한 존중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친구가 되긴 좀 힘들 것 같다.

 

뭐 하나 동등한 것이 없다. 그들의 머리 속에 박탈은, 인생 급추락으로 평가되고 있는 게 맞다. 위에서 아래로. 행복에서 불행으로. 높은 곳에서 아래로. 그래서 여전히 울고 있는 얼굴로 '너같은 상황을 이해할 수 있어서 행운이야'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거겠지.

 

아래로 떨어지다 보니 만나는 사람, 나.

나도 나를 되돌아 보게 된다. 난 대체  저 아래 어디쯤 서 있는 걸까.

 

여튼 난 기독교 제일 싫은데, 이 친구들은 하나같이 기독교도들이다.

어쩜 그래서인지도 몰라. 라고 편히 생각해 버리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또 싸워야 한다. 또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아..피곤해. 아. 피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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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닮은 글을 보고 싶.

어떤 이의 글을 보면, 글을 쓴 사람에게 나도 모르게 호감을 갖는 경우가 있다.

좋은 글은, 말 그대로 나를 기분 좋게 만든다. 그리고 너무 자연스럽게 그 글을 쓴 사람조차 나를 기분좋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 그렇게 되면 기분이 더욱 좋다. 나는 글을 통해 그 사람을 제대로 이해했으며 어쩌면 동지나 친구나 기타 등등의 의미있는 관계를 만들어갈지도 모르니까. 이런 사건은, 인생에서 몇 안되는 신나는 일 중에 하나다.

 

그런데 글과 그 사람이 다를 때가 있다.

그러니까, 글이 느무나 훌륭하셔서 글쓴 사람도 꽤나 훌륭할 거라고 착각을 할 때가 있는 것이다. 나의 경험상, 훌륭한 필자들과 대면하게 되었을 때, 몇몇은 글이 사람의 형상으로 되살아난 듯한 경우가 있었다. 그렇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 않은 경우 중  몇몇은 상상을 뛰어 넘는 못되 쳐먹은 놈들(대부분 남자들 그것도 맑시스트로 자처하는 놈들이었다.물론 남자 아닌 인간들도 있지만.)이 글솜씨만 좋은 경우다.

- 글 줄이나 써대서 관심 끈 다음에 자신만의 할렘을 만드는 그런 족속들은 그 옛날 모뎀통신시절에나 많은 줄 알았더니 지금도 여전히 많다. 사실 이런 상황들이야 말로 머리에 먹물들었다는 것과 지혜나 판단력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관계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예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이런 괴리가 좀 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글이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무렴 글쓴이와 글 사이에 실오라기 같은 공통점이 없을라고? 저런 흔적을 남긴 뇌의 어느 구석에는 분명 훌륭한 부분이 존재하지 않을까? 이런 질문들하면서 어떻게든 글과 사람을 이어보려고 노력 하는 와중에도 내 눈이 썩고 귀가 썩고 인생이 썩어간다. 그런 인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것만으로..

 

이쯤 되서야 나는, 내 속물적 바램인 능력숭배를 점검하게 되는 게다. 어떤 이를 좋아할 때 그 사람이 가진 능력을 좋아하는 거하고 ,그 사람하고 구분을 못하는 그런 병 말이다. 이것의 증상은, 특정한 능력을 숭앙하는 내 자신이 그 능력을 가진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거다. 사실 이걸 굳이 구분 안 할 수 있으면 가장 좋은데 그런 분리가 필요할 때가 있다. 안 그러면 정말 낭패다. 왜냐하면 그 글은 그냥 쓰레기인데 내가 거기에 목매달 수 있기 때문이다. 완전 헛소리인데 거기에 목숨걸 수 있기 때문이다. 글쓴이가 했던 이야기들, 단지 글을 풀어나가는 솜씨에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에 글쓴이의 인생, 철학, 삶의 태도와 아무런 관련이 없을 수 있는데 혼자 괜히 오바하는 희망을 걸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론 글쓰기를 그냥 능력으로 받아들여야 할 때 조금 슬프다. 글쓰기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소통을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게 다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항상 경계를 늦추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건 나를 피곤하게 만든다.

 

그래서 왠만하면 글이, 그 글을 쓴 사람하고 닮아있으면 좋겠다. 그럼 정말 소통한다는 느낌이 들테니까. 그럼 조금은 희망적으로 신나는 일을 할 용기가 생길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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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해.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리려고 할 때, 뒤에서 머리라도 잡아당길 그 무언인가가 없어, 항상 죽음을 생각한다는 어느 지식인의 글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의 글이 우스워서가 아니었다.  너무 솔직하게 글을 써서 당황했던 것이고, 그 글이 무언가를 폭로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창피했던 것이다.

 

얼굴도 붉어졌고. 부끄러운 나를 멀리서 봤더니 또 창피해서 웃음이 났다. 내가 창피했던 이유는 하나다.  내가 그토록 버리고자 했던 나의 모습이 만천하에-결국 나 자신에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꽤 오래 전에, "난 네가 필요해"라는 그런 망할 달콤함에 매달려 사는 걸 접자 했다. 부모가, 자식이, 연인이, 친구가 나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나는 산다..라는 삶의 태도가 나에게 얼마나 잔인한가를 알았고, 그들에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것인지 직접 들었으며, 보상이 없어도 좋은 관계란, 내가 도망갈 곳을 찾는 일종의 망상이고, 그런 마약같은 의존을 끊었야 했다.

 

이것이 마약인 이유는 그 과정에 있는 것 같다. 

필요한 사람을 자처하는 과정은 내게, 대략 이러했다.

 

그들은 무언가 갈구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혹은 그러할 것이다라고 내가, 그들을 판단한다. 실제로 그럴 때도 있다. 그렇지만 그건 성명서나 문서로 작성되어 내게 배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증거가 남지 않는다. )

 

그들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나는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알아서 보살핀다.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말을 할 수 없다고 착각하는 것도 있으리라.고도 여겨진다. 여튼 말을 할 수 없다는 상황 자체가, 애정을 투사하는 굉장한 동인이 된다.)

 

나는 나의 말을 줄여 나가고 그들의 바램을 앵무새처럼 따라 말한다.

(애정의 대상이 직접 말하지 않아도 대리자를 자처하며 모든 일들을 처리할 때 쯤이면 나와 그 대상의 경계 구분이 불투명해지면서 점점 나의 이야기를 대상의 요구에 섞어서 이야기하고 대상의 바램이 나의 바램과 하나라고 착각한다. 이건 엄밀히 희생은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큰 쾌감이 숨이있기 때문에. 나는 나를 드러내지 않아도 나의 요구를 말할 수 있으며, 애정의 대상은 나에게 감사할 것으로 여겨지며 주변의 사람들은 나에 대한 평판을 높이 살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나만의 판단인거다.)

 

그들은 나를 원치 않았다고 말한다. 적어도 그런 방식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은 그들의 바램을 입밖으로 말한 적이 없으며, 내가 그들의 바램이라고 떠벌렸던 것은 결국 나의 바램이며, 망상이라고 결론지어져 버린 것이다. 수많은 연인관계들은 여기서 끝장을 본다. 보상받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식의 제스추어들은 언젠가 꼭 이런 식의 종말을 맞이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되풀이 됐다. 과정이 이러하니, 필연적으로 공허함이나 환멸, 스스로 상처라고 말하는 것들이 뒤따른다. 탓하는 것도 지겹고, 스스로에게도 지겹다. 원인도 모르고 결과는 항상 똑같았다. 결국 사는 게 항상 배고파 지는 거다.

 

난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남의 필요를 뒤집어 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어쨌든 지겹다면, 당장 그 짓을 때려 치워야한다. - 정말 지겨웠다.

 

나의 생의 근거는 상당 부분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그나저나한 '나'여야 한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구성하는 나의 삶에도 보상은 있어야 하며

적절한 거리도, 밀접하지 않은 다양한 관계들도 필요하다.

 

그래서 예전에 한 번, 그 곳에서 다시 시작된 적이 있었다. 나의 친구, 나의 연인, 나의 동료...이렇게.

 

그리고 여기서 다시 한 번 시작해야 할까보다.

 

 

지금은,  나는 나대로 살아도 좋은 것이다.

그런 게 나한테 필요한 때라는 걸, 어느 솔직한 지식인이 알게 해줘, 창피하면서도 참 다행스럽다. 나는 죽을 때 머리를 당기는 이가 없을 지라도 이 삶을 살아낸 내 자신이 대견해서 죽거나 혹은 잘났다고 살아갈 거다.

 

암, 그럴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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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의 채널을 돌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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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에로티시즘의 마술적 힘, 레오노르 피니

응시만하다가는눈이빠질거같아
여성 에로티시즘의 마술적 힘, 레오노르 피니

 
“나는 여자이고 여성적인 경험을 했지만 레즈비언은 아니다”

레오노르 피니, 당신은 대체 누구요?

LesCarcans_19841982년, 휘트니 채드윅(Whitney Chadwick)과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여성들과의 성적 경험들은 있었지만 레즈비언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또,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초현실주의 작가로 분류하려 들자, 자신은 초현실주의 운동 그룹에 가담하는 것을 거부 했을 뿐 아니라, 초현실주의자도 아니라고 말한다.
‘나는 무엇이다’ 라고 말하기보다 ‘나는 무엇이 아니다’라고 식의 발뺌을 서슴지 않는 그녀는, 우리가 조금이라도 편히 닿을 수 있는 말(word) 안에 그녀를 데려다 놓을라치면, 자꾸 미꾸라지처럼 빠져 나간다.
그리고서는 세이렌의 거부할 수 없는 노래마냥, 대중들 앞에 매력 넘치는 피안의 세계만을 툭툭 던져 놓을 뿐이다. 그러니 우린 그녀를 가깝게 당겨 오지도, 그렇다고 멀리 보내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거리를 둔 채 눈치를 살피는 수밖에. 레오노르 피니 양반, 도대체, 당신은 뭐요?

나는 초현실주의 화가가 아니다.

situation_1985그녀의 정체는, 출신 성분에서조차 딱 부러지는 게 없다. 1908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어머니는 이탈리아 인, 아버지는 아르헨티나 출신인데다 스페인 혈통도 지녔다. 또 독학으로 미술공부를 한 탓에, 이름 있는 유명 미술학교 근처에도 못가 본 그녀를 설명할 수 있는 지연이나 혈연 학연조차 마땅치 않은 상황이다.

그러나, 우리는, 피니가 1931년에 파리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면부터 그녀를 초현실주의 미술가 그룹에 묶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단서들을 발견하게 된다. 막슨 에른스트나 살바도르 달리, 앙드레 브르통과 같이, 그 이름도 무척 익숙한 초현실주의 대가들과 같이 어울려 다녔다는 문서, 사진들이 남아 있고, 초현실주의와 관련한 기념비적 전시란 전시는 모두 다 참여했다는 사실들이 그것이다. 1930년대에 런던과 파리에서 열렸던 『초현실주의』전,『초현실주의와 다다』전과 같은 초현실주의 그룹의 활동에 피니는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만약 피니가 ‘나는 초현실주의자도, 초현실주의 작가도 아니오’라고 그토록 강력하게 말만 하지 않았어도 레오노르 피니, 이 여자는 거장의 반열에 안착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나 피니는, 초현실주의의 수장인 브르통이 청교도주의를 두둔하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고, 살바도르 달리나 파블로 피카소 같은 남성화가가 남성 안의 여성을 찾는답시고, 여성을 뮤즈로 대상화 하는 것에 반대했다. 또 초현실주의 남성그룹 안에 존재하는 호모포비아는 레오노르 피니가 이들과 함께 하는데 방해요소가 되었다.

어느 글에서처럼 피니는, 성의 해방을 사칭하며(-.-) 여성 섹슈얼리티의 자율성을 존중하지 않는 (남성)초현실주의자들에게 적대적이었다. 반면 프리다 칼로, 레오노라 캐링턴과 같은 여성화가들과 함께 깊은 유대를 가지면서 자신의 독자적 노선을 굳건히 해 나간다. 피니의 작품들은 이를 예시해 준다. 작품 안 여성들은 신이 되어 되어 잠자는 남성을 넌지시 바라보거나, 동물과 한 몸이 되어, 신화 속 남성 주인공들의 자리를 꿰차거나 강력한 성적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쯤 되면 우리는 피니를 초현실주의 화가 반열에 올리는 것을 망설이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저토록 ‘안’ 해방적인 성해방을 이야기하는 초현실주의 안에 그녀를 처박아 놓는다는 건 굳이 독자 노선을 걸으며 여성의 성해방을 이야기한 피니에게 정말 억울한 일일 테니까.

나는 레즈비언이 아니다.

Leonor_Fini_Ileria_1972그렇다면 그녀를 레즈비언이라고 이야기하는 건 어떨까? 우선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에 초점을 맞춰 진위를 따져보자. 내가 집착적으로 수집하는 여성화가들의 여성편력들 안에 피니의 것은 많지가 않다.
다만 주변의 숱한 남성들이 피니에게 구혼을 하였으나, 거부하였고, 일대일 관계보다는 공동체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좋아했다는 것, 젠더와 관계없이 인간을 두루 사랑하는 것을 선호했다고 것 정도? 이것 말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거라곤, 레오노라 캐링턴과 피니가 함께 살았다는 그 일년여의 기간 동안 뭔가 심상치 않은 사건들이 있었기를 소망할 수밖에...
어쨌든, 여성미술가들을 내 맘대로 짝 맞추어 보는 개인적인 백합물 콜렉션과는 별도로,레오노르 피니의 성정체성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단한가지는 ‘레즈비언이 아니다’라는 본인의 진술이외엔 확실한 증명꺼리가 없다.

그렇지만 그녀가 초현실주의 남성화가들의 집단에 들어가기를 거부했던 이유들이나 작품에서 나타난 여러 면모들은 그녀를 레즈비언 미술가로 이야기할 만한 충분한 증거들이 되고 있다. 20세기 초까지 금기시 되었던, 여성 화가의 여성 누드화를 최초로 감행한 여성화가이고, 그 안에 기존의 남성 화가들의 여성누드와는 확연히 차별되는 감수성을 선보였고 고양이라는 상징을 통해 여성 에로티시즘의 세계와 힘을 구성하려 했으며, 여성의 성적 에너지와 해방을 일관 되게 재현했다. 피니는 기존 미술이라는 영역에서 보기 힘들었던 여성들의 에로티시즘을 특유의 판타지로, 전면에 드러냈는데 이는 분명 레즈비언의 경험과 욕망을 가시화하는 것과 연관된다.

레오노르 피니는 레즈비언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녀의 작품은 레즈비언과 연결되어 있다. 현재까지 그녀의 요망한 작품들은, 수많은 레즈비언을 포함한 여성들에게, 여성 에로티시즘의 마술적 힘을 환기하고 있다.







 
* 소개된 그림의 제목과 제작년도는,

1_LesCarcans_1984

2_situation_1985
3_Dimanche apres_midi_1980
4_gorgone_1988
5_Le Couronnement de la Bienheureuse Felline_1974
6_LEntracte de lapotheose1938_1939
7_Leonor_Fini_Ileria_1972

피니의 더 많은 작업을 보고 싶다면,

http://www.leonor-fini.com/ 

칼럼니스트 소개
모변
응시만 하다가는 눈이 빠질 것 같아.
여성 퀴어, 페미니스트 퀴어 예술가들의 작품을 맛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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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필유성

볼펜을 샀다.

 

수성펜은 사지 않았다.

 

수성펜으로 쓴 글씨는 빗 속에 다 쓸려가니까.

 

세필이 되는 유성펜을 달라고 점원에게 이야기하니 딱 한 종류가 있다고 했다.

 

모양도 날렵하니 맘에 들었다.

 

 

 

기분이 좋다.

 

가늘지만 분명하게. 지워지지 않는 유성펜.

 

의미도 분명하고 지워지지 않는다. 내가 찟기 전까지는

 

가늘게 써지는 유성펜 좋아.

 

이걸로 열심히 공부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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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성의 꽃다방 특집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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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의 피조물


 

 

말리가 쓴 도깨비 신부라는 만화를 읽은 게 얼마 안되어서인지,

영적 매개인 물의 이미지가 그득한 이 포스터가 맘에 들어왔다.

 

천상의 피조물인 두 존재가 물 속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는 장면이 더 많았으면 좋았을텐데..

대신 영화 속 줄리엣과 파커는 마치 자신들이 신이나 되는 냥 흙과 물로 자신들의 영혼을 주조해냈으니, 그걸로도 충분했으리라.

 

나의 10대를 떠올려봤다.

그녀와의 사랑을 사랑이라 말하지 못하고 '특별한 우정..그리고'로 맺었던

제4세계 속 피안의 며칠을 헤아려 본다.

 

사실 우리는 피조물조차 되지 못했다.

 

어떠한 신도 우리를 만들었다고 시인하길 꺼려했으며

우린 우리 자신의 창조자이자 피조물이어야했다.

 

 

어머니, 당신을 포함한  그 어떤 신들조차도 우리의 존재를 증명하지 못하리라.

 

 

 

두 영혼의 미친 생존기에 안습한 공감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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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합니다.

트랙팩님의 [성폭력 생존자에 관한 지지와 연대] 에 관련된 글.

당신의 말하기를 지지합니다.

 

나의 말하기를 지지하듯이.

 

 

끝까지 말할 수 없어도 지지합니다.

 

끝나지 않는 싸움이어도 싸우지 않을 수 없잖아요.

 

 

내가 당신과 같지 않아도 지지 합니다.

 

내가 당신과 다름이 오히려 힘이 되니까요.

 

 

언제나 반듯하고 논리적이지 않아도 지지합니다.

 

언제나 이성의 광기보다는 몸의 기억이 보다 진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거든요.

 

 

 

힘내지 않아도 괜찮지 않아도 좋아요.

 

당신의 말을 향해 있는 나의 몸과 기억 또한 그러하니까.

 

 

여기에 저..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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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만 차이

현장출신의 반성매매활동가와 성노동을 이야기하는 지식인 여성의 대화를 듣게 되다.

...

 

피해자란 말을 넘어서자는 게, 차이를 무화하자는 이야기는 아닐진데

 

성매매 여성이 주체가 되려면 성노동이라는 언어만 있으면 땡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선언만 하면, 우리 안에 무의식적으로 자리잡은 가부장적 차별의식이 자동적으로 동등한 권력 선상의 차이로 치환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안타깝게도 연대를 이야기하기엔 아직 멀었습니다.

 

성매매여성들 사이의 차이에 숨지 말고

그냥 비판을 받아 들이고 소통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라고..

 

내 자신에게도 되내이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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