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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와 구더기

사람들에게 꼭꼭 보라고 이야기하고 문자보내고 그러고 있다.

내일 월요일에 하고 10월 1일 2시 30분에 특별상영이 한번 더 있다.

몰랐는데 야마가따영화제에서 오가와 신스케 상을 받았다고 한다.

 

<미운 오리 새끼>를 보면서는

'그래, 저렇게 자기 맘을 딱 알아주는 촬영감독이 있어야 영화가 되지' 생각했으나

<치즈와 구더기>를 보고서는 모든 것은 핑계,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다큐멘터리특별전에서 처음으로 본 영화.

어느 설명에서 '여성주의적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문구를 보고

얼른 달려가서 보았다.

보고 나오는데 나비랑 깅도 만났다.(오픈토크때 오신다더니.....><)

 

요즘 드는 생각은

온 세상에 서리가 내리듯 비슷한 고민들이 내려오는데

어떤 이들은 그 과정에서 명작을 만들기도 하고, 또 대가가 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서리의 존재 자체를 모르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고민 속에만 빠져있다가 뒤늦게 앞선 이들의 자취를 쫓아가는 것같다.

서리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이보다 서리의 존재를 체감하는 나는 그나마 행복하다고

그렇게 믿고 싶다. 동시대 다큐감독들의 자취에서 반짝, 하고 빛나는 뭔가를 발견하는

지금의 이 시간은 분명 축복이리니.

 

오늘도 랜더링 걸고서 어수선한 말들을 적어둔다.

지금 쓰고 싶은 글

1. 존경하는 여성영상집단 움 감독님들께

2. 로캉라테, 지아장커의 영화보고 정리하기

 

이렇게라도 적어두지 않으면 또 까먹을 거 같아서.... *^^*

고민을 함께 하고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좋다. 

열심히 살아야겠다.



 "제가 생각하고 믿는 바에 따르면, 흙 ‧ 공기 ‧ 물 그리고 불, 이 모든 것은 혼돈 그 자체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함께 하나의 큰 덩어리를 형성하는데 이는 마치 우유에서 치즈가 만들어지고 그 속에서 구더기가 생겨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구더기들은 천사들입니다. -메노키오"

 

‘일본다큐멘터리특별전’(9월20일~10월 2일, 인디스페이스)에서 상영되었던 카토 하루요 감독의 다큐멘터리 <치즈와 구더기>는 어머니를 떠나보내는 딸의 이야기이다. 영화는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책 <치즈와 구덩이>에서 제목을 따 왔으며, 그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감독은 죽어가는 어머니와 나이든 할머니와 함께 작은 시골마을에서 살고 있다. 카메라의 눈은 어머니의 투병과 이웃에 사는 오빠 가족의 일상을 그려낸다. 투병이라는 단어는 언뜻 격렬함과 비애를 떠올리게 하지만 영화는 시종일관 고요하게 삶을 보여준다.

 

어머니는 빗자루에 셀로판 종이로 코드를 붙인 가짜 사미센으로 연습을 하고 텃밭에 심을 작물에 대해 딸에게 조언을 구한다. 가발을 쓰고 외출했던 어머니가 돌아와서 보여주시는 건 보험회사에서 받은 현금 백만엔, 어머니와 딸은 이 돈으로 무엇을 할까 고민을 하고 이윽고 자동차와 작은 경운기를 마련하여 설명서를 보며 작동법을 익힌다. 그 사이 오빠네 집에는 새 생명이 탄생하고 어머니는 갓 태어난 작은 아기를 보며 환하게 웃는다. 알토란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운 에피소드들 어디에서도 죽음의 향기는 보이지 않는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어머니의 거처는 병원, 관객은 어쩔 수 없이 죽음을 가까이 느끼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사랑스럽고 편안하다. 후식으로 나온 딸기가 예쁘고 달다며 촬영하는 딸을 위해 그 중 한 개를 남겨주시고 치료 때문에 너무 많이 빠지는 머리카락 때문에 번갈아 쓸 모자를 만들기도 한다. 모자를 갈아쓰는 행위 하나도 이들 모녀에게는 이야기거리가 된다. 벗은 모자 안에는 빠진 머리카락이 수북하지만 딸은 새로 만든 모자가 잘 어울린다고 칭찬하며 어머니와 함께 웃는다.

 

등장인물 중 누구도 병에 대해서, 죽음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어머니가 가장 고민하는 건 그림이다. 퇴직교원들의 전시회에 출품하기 위해 해바라기와 인형과 레몬과 나무를 잘 그리고 싶어 골똘히 생각에 잠기고 마음에 들지 않는 해바라기의 잎사귀와 너무 야위게 그려진 인형의 볼을 어떻게 수정할까 고민한다. 온 가족이 모여 할머니의 생신을 축하하는 자리, 어머니는 새로 산 진짜 사미센으로 연주를 하고 할머니는 다음 생일엔 합주를 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어머니의 쾌유를 비는 가족의 마음이나 살고 싶어하는 어머니의 열망은 그렇게 엷게 배어난다. 어느 아침의 산책길, 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백을 한다.

 

“어렸을 때 아빠가 영구차를 타고 떠난 후 엄마도 그렇게 떠날까 봐 나는 너무 무서웠어”

조용히 딸의 마음을 받아주던 엄마가 문득 중얼거린다. “불쌍한 것”

하지만 딸은 “불쌍할 것 까지야.”라며 경쾌하게 받아넘기고 모녀는 또 그렇게 평소처럼 일상으로 돌아간다. 어머니는 할머니가 자기 두고 먼저 떠났다고 원망할 거라며 꼭 오래 살거라고 다짐을 하고 건강해보이는 어머니는 곧 집으로 돌아와 새로 산 TV를 보며 밝게 웃는다. 어떤 격렬함도 없이, 어떤 변화도 없이 그렇게 삶은 이어질 듯 보이지만 다음 장면에서 어머니의 편안한 얼굴은 흰 종이로 덮여있다. 

 

오빠네 아이들은 놀러온 듯 어머니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오랫동안 할머니를 못 볼거다”라는 어른들의 설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머니의 시신 주위를 맴돈다. 내내 흔들리지 않던 카메라가 문득 흔들린다. 1년 6개월된 조카가 어머니의 시신을 넘으려는 순간, 감독이자 딸인 하루요는 자기도 모르게 카메라를 껐다가 켠다. 그 때부터 조카는 서럽게 운다. 모든 이의 울음을 대신하듯 길고도 긴 울음을 서럽게 쏟아낸다.

 

그리고 이제 두 사람이 살아간다. 할머니는 아침에 일어나면 하루요가 옆에 있어서 좋다고 말하고 하루요도 외출했다가 돌아왔을 때 할머니가 계셔서 좋다고 말한다. 그래서 할머니는 생전의 어머니처럼 말한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않고 오래오래 살아있을게”

할머니는 손녀이자 감독인 하루요가 편집한 화면들을 보며 “사미센 연주하는 장면은 없니?” 라며 요청하기도 하고 어머니의 얼굴에 흰 종이가 덮이는 장면을 보면서는 “참 좋은 얼굴로 죽었구나”라며 빙그레 웃기도 한다.

 

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집 앞의 풀들을 모두 뽑으며 하루하루를 견뎠다는 할머니는 이제 손녀가 찍은 딸의 생전 모습을 보며 잠이 든다. 삶과 죽음은 경계없이 흐르고 그렇게 공존하는 듯 느껴진다. 눈물도 없이 고통도 없이 죽음과 삶 사이의 순간은 그렇게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첫 장면에서 인용했던 것처럼 천사가 내려오고 딸은 어머니의 밭을 일군다. 그렇게 삶은 가냘프고 끈질기게 계속되어진다. 이 영화는 자신의 가족에 대한 작은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우리가 모두 대면하는 죽음의 순간을 감동적으로 포착해낸 수작이다. 우리들 모두는 그렇게 천사가 내려오는 순간을 만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순간까지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겸손하게 살아가고 싶다. 영화 속 어머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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