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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카메라

99년에 <동강은 흐른다>를 만들고 난 후 주인공인 할머니 생신을 맞아 놀러갔었다.

기차를 타고 예미역에 도착하니 문모아저씨가 마중을 나오셨었다.

세 집 밖에 안되던 제장마을.

온 마을 사람들이 다모여 깻잎모종을 심고 있는데

이장님이 강변에 놀러온 도시사람들한테 화가 나셨다.

스쿠버복장을 멋지게 차려입은 그들은

술판을 벌이고 밧데리로 고기를 잡고 있었다.

문모아저씨가 나한테 카메라를 들고 따라오라고 하셨다.

 

도시 사람들은 항의하는 마을 사람들을 함부로 비웃었다.

픽픽 웃으면서 "여기가 당신네 거야?" 했다.

세련된 서울 말씨, 하얀 피부의 그들이 조소를 띤 얼굴로 같잖아 하는 표정을 짓자

빨개진 얼굴, 센 강원도 사투리. 더듬거리는 말투로 애써 싸워보려고 노력하던 문모아저씨가

나한테 큰소리로 외쳤다.

"찍어!"

나는 카메라를 꺼내서 찍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너 어디서 왔어? 너 뭐야?

나도 비교적 또.렷.한. 서울말씨로 대꾸했다.

그러시는 분들은 어디서 오셨는데요?

마을 분들 허락받고 마을 강을 찍는데 뭐가 문제라도 있나요?

 

그들은 불법을 저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짐을 싸서 철수했다. 내게 쌍욕을 내뱉으며.

하지만 내겐 카메라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몸으로는 어쩌지 못했다.

내가 그때 기분이 좋았을까?

액정도 없었던 VX-1000. 이제 막 생겨나던 VJ라는 단어. 그리고 무수히 양산되던 VJ들.

카메라가 없었다면 아무 것도 아니었을 나를 그들이 무서워했다.

 

마을 사람들이 통쾌해하며 나를 추켜세우는 동안....

나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나를 믿다니. 내가 힘이 되다니.

나는 내가 대견스러운 게 아니라

그분들이 슬펐다.

한 번도 주인공이 되지 못했던 분들,

자기 삶에서조차 주인공이 되지 못했던 분들.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아가지만 별 것 아닌 일에 함부로 무시당하는 분들.

나는 고작 나를 믿고 나를 의지하는 그 분들이...정말 슬펐다.

 

2006년 뜨거운 여름.

보육노동자들이 거리투쟁을 시작했을 때

내내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느꼈던 것.

부당한 세상에 대한 확인.

함부로 말을 내뱉던 공무원들.

하지만 내겐 카메라가 있었다.

카메라가 함께 있으면 그들은 태도를 바꿨다.

긴 시간이 흐른 후 촬영본 써치를 하면서

확연히 바뀌는 그 태도들을 보면서 다시 확인하는 것.

카메라의 힘.

 

그 거리에서 나는 보육노동자들을 믿었고

그 분들은 나를 믿었다.

지금도 이 '믿는다'는 단어를 입밖에 내어 말을 할 때면

그날 그 거리, 특히나 노숙투쟁 마지막 날, 정부종합청사 앞마당 풍경이 떠오른다.

밖에는 전국에서 올라온 보육노동자들이 모여있고

지역대표들이 보육공공성 확보를 위한 백만인 서명용지를 보육국장에게 전달하려고 할 때

절대로 건물 안에 못 들어간다고, 그냥 방문실에 맡겨두라는 공무원과

어떻게든 국장을 만나야겠다는 보육노동자들 사이의 실랑이.

그리고 우리가 면담을 요청하며 땡볕에서 기다리는 동안

모임을 끝내고 유유히 지나가던 시설장들.

 

나는 그날 위원장님의 눈물을 처음 보았다.

"현장에서도 보육노동자들은 함부로 버려지고 함부로 대해지는데

우리는 이렇게 1박 2일동안 길바닥에서 자고

그저 이 서명용지 하나 전달하겠다는데도 들어갈 수 없는데

시설장들은 저렇게 편안하게 드나듭니까?

이래도 되는 겁니까?"

몸싸움을 시작할 때 그들이 가장 먼저 했던 행동은 카메라를 뺏는 거였다.

내 옆에서 양복을 차려입고 시종일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런 저런 것들을 묻던 사복형사가

가장 먼저 내 카메라를 뺏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5년이 지난 지금도 그 순간의 공기가 느껴진다.

카메라를 뺏기던 그 순간, 아니 뺏긴지도 모르고 '이게 뭐지..'하던.

주위의 소음들이 갑자기 차단되는 듯하던.

지금 이 순간에도 가슴이 서늘해지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

카메라를 돌려받고 가장 먼저 들었던 기분은.... 부끄러움. 말로 표현 못할.

태준식감독이라면 절대로 이러지 않았겠지?

나는 그동안 너무나 말랑말랑한 다큐만 찍어온 거지?

독립다큐의 연성화경향을 말할 때 괜히 혼자 뜨끔하는 건

내가, 내 영화가 그렇기 때문이었으니까.

 

그래서 드디어 오래 전부터 동경하던 '노동'이라는 영역에

'엄마'로서의 존재감을 가지고 '뛰어들어서 얼마나 기쁜가

혁명이나 노동계급이라는 말을 함부로 내뱉던 20대를 지나와서

이젠 정말 땅에 발을 딛고 선 채로 다시 노동이라는 영역을 만나서 얼마나 기쁜가

먼 길을 돌아서 이제 나는 드디어 내 자리를 찾았구나

그렇게 기뻐했지만.....

하지만 그런 감격을 말하기에는

나는 너무나 무능하고 무기력했다.

 

그리고 무기력의 꼭대기에는 예기치않은 임신과 출산이 있었다.

거리에서도 무능했던 나는 끝끝내 무능하고 무책임하고 말았다.

2010년 여름 첫번째 가편집이 끝난 후, 사람들이 말했다.

책임감과 부채감이 너무나 크게 느껴져. 이런 영화는 좋지 않아.

내가 드러나는 장면, 한별이가 내 아이라는 걸 알게 하는 장면들은 다빼고서

거리 투쟁과 어린이집 일상을 중심으로 캡쳐를 하고 편집 했던  첫번째시도는

누구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그리고 내겐 시간이 너무 없었다.

니가 하던 걸 해. 너네 집 포토앨범 만든다고 생각해.

지금은 책임감이나 욕심 다 버리고 그냥 포토앨범 만든다고 생각해. 제발.

 

그래서 다시 우리집 얘기가 되어버렸다.

부산영화제에서의 첫 상영을 앞두고 부산에 있는 위원장님께 전화를 할 땐 참 마음이 무거웠는데.

결국 통화가 안됐고 부산에서는 보육노조 홍보담당이었던 지니야만 함께 했다.

영화를 보자마자 올라온 듯한 <아이들> 최초 리뷰.

매 순간이 기승전결인 흥미진진한 일상이야기 - 다큐멘터리 [아이들]

 

그녀의 리뷰는 뭐랄까.... 다독인다 혹은 봐준다라는 느낌.

어느 순간 우리는 서로에게 부채감을 느끼는 관계가 되어버린거다

나에 대한 누군가의 믿음을 느낀다는건 든든함과 부담스러움을 동시에 지고가는 일.

부담스러움을 극복하는 일은 내가 다시 내 자리에서 이 일을, 이 영화를 바라봐야하는 것.

알아요. 너무 잘 알아서 노력하고 있어요.

나는 좀더 유능해지고 싶다

다시는 카메라를 뺏기는 일 따위는 당하지 않을 거고

새 카메라와 새 편집툴을 능숙하게 다룰 거고....

그리고.... . 더 깊어지고 더 선명해질 것이다.

 

매번 GV때마다 관객들이 얘기한다.

'씩씩이어린이집이 왜 문을 닫았는지 궁금해요.'

'보육환경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고 하는데 어떤 얘기 하고 싶었던 거예요?'

이번 주 토요일 영상자료원 상영회에서는 콕 짚어서 부탁까지 했다.

'제가 아이돌보미 일을 해요. 돌봄에 대한 영화를 꼭 만들어주셨으면 해요'

 

매번 길이 길을 만들었고 더듬거리며 그 길을 걸었다.

이제 다섯번째 영화는 집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기대+설레임+걱정

 

부산에서 보육노조위원장님('전'이라는 말을 붙여야겠지. 보육노조는 없어졌으니까)이

보내주신 편지. 상영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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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명선입니다. 연락이 늦어 죄송합니다

류미례감독님과 시네마달의 고마운 배려로

보내주신 <아이들> 다큐상영으로 좋은 시간 가질 수 있었답니다.

감사드립니다!

 

저희 보육노조 선생님들이 모두다 행복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빠져들어 보았습니다.

지금 당장은 후기를 올려드리진 못해도

영상을 본 선생님들 중 몇분들에게 부탁해보니

짬이 나면 소감이라도 올리고 싶다고 하니

저희가 시네마달 사이트로 찾아들어가서 자발적으로 올리는 걸로 하면 되겠지요^^

 

우선 상영당일 찍은 사진 몇 장 올립니다.

그럼.

건강과 평화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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