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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전생이라는 건 죄다 슬슬 기억나는 게 아니지"

......

"잘해야 어쩌다 아주 일부가 생각나. 어디까지나 돌발적으로. 작은 구멍으로 그 벽 너머를 엿보는 것처럼. 거기 펼쳐진 광경의 작은 한 귀퉁이밖에 볼 수 없어."

                            -셰에라자드 181쪽

 

가족들을 만나고 집에 돌아와서

밀린 일들을 정신없이 하다가

잠깐 pause 상태가 오면

어김없이 두고온 기억과 대면한다.

 

하루키의 책을 읽다가

(요즘 나는 토막토막 글을 읽는다. 

첨부파일을 클릭했다가 너무 느린 인터넷 때문에 기다려야할 때가 되면

얼른 몇 문장을 읽는 식으로. 좀 미친 듯)

맥락없이 저 문장들을 접하고

갑자기 떠오른 기억에 잠시 긴 pause.

 

돌아가시던 해 또는 그 전 해의 일일 것이다. 

아버지는 낮에 들 일을 끝낸 동네 사람들에게 저녁을 대접했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와서 농촌 정서를 잘 모르지만 

나중에 농활을 가봤는데 집 일 했다고 그렇게 저녁을 대접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아버지는 서비스정신이 과했거나

아니면 파티주의자였을 거다. 

저녁식사 중에 우리 고양이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다음 날, 우리 고양이가 없어졌다.

나비야 어디 갔니 며칠을 찾았다.

그러다가 엄마한테 들었다. 

관절염으로 고생하는 아무개네 집에 고양이를 줬다고.

아버지는 내 친구를 약재로 쓰라고 줘버린 거다.

 

내 고양이를 구하기 위해 그 집엘 갔다.

그 집은 아이들에게는 공포의 장소였다.

그집 아들 행남이는 다운증후군이었고

행남이의 누나 두 사람은 소아마비로 엎드려 살았다.

아버지 심부름으로 그 집, 담배가게에 가서 만나게 되는 건

햇빛을 보지 못한 행남이네 누나의 하얀 얼굴.

어둠 속에서 하얀 얼굴만 둥둥 뜬 채

담배 이름을 묻고 값을 얘기하고 거스름돈을 줬다.

그 언니의 몸 전부를 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 집엔 행남이가 있었다.

그래서 담배가게 안집엘 아이들은 절대로 가지 않았다. 

 

내 고양이를 찾기 위해 마음을 굳게 먹고 그 집을 찾던 날

햇빛은 너무나 강렬해서 내 머리통은 뜨겁게 달아올랐고

나는 두려움에 가득찬 채 담배가게 안집의 대문 앞에 섰다.

뜨거운 햇볕에 뜨겁게 달궈진, 닫힌 양철대문을

나는 큰 맘 먹고 밀었다.

살짝 열린 문 틈으로 보였던 그 집 마당.

두려움 때문에 들어가지는 못한 채 

그 틈 사이 

"거기 펼쳐진 작은 한 귀퉁이밖에 볼 수 없"었던 그 날.

 

나의 고양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애타게, 하지만 두려움에 떨며

나비야 나비야 불렀지만

나비는 오지 않았고

모르는 아주머니가 와서

불친절한 목소리로

너는 누구인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물었다

 

나는 저기 저 장터 앞 집 아무개의 딸이고

우리 고양이가 여기 있다고 해서 왔다고 했다.

아주머니는 고양이는 없다고, 그냥 가라고 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한 채 돌아왔다.

나중에 언니들과 엄마는

고양이는 죽었다고.

벌써 약이 되었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이번 설에 가서 새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이 새로울 건 없었다.

태몽에서부터, 입덧의 양상, 엄마의 배 모양,

그리고 엄마의 몸 밖으로 나오던 순간의 몸의 자세까지

나는 의심할 것 없는 아들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출산을 돕던 김약방집 주인이

"아들이다!" 크게 외쳤다가

당황하며 "아니 딸이네" 외치는 순간

기쁨의 공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고

이번엔 틀림없이 아들이라고 기뻐하며 기다렸던 외할머니가

"하늘을 욕하며 집에 가버렸다"는 이야기를

나는 이제 외운다. 반복해서 들었으니까. 

 

이번 설에 오빠는 아버지의 절망을 좀더 디테일하게 묘사해서 들려주었다.

내가 태어나던 날, 임신의 순간부터 기다리며

엄마와 태중의 아들의 건강을 위해 흑염소까지 고아먹였던

그 희망의 아이가

아들이 아니라 딸이라는 것을 알게된 후

토방에 앉아 한숨을 쉬던 아버지가

결국 담배를 피워물었다고 한다. 

담배를 안 피우던 아버지가 담배를 피워무는 것을 본 오빠가

"아버지, 내가 잘할께요"라고 말했단다.

 

삶이 외로웠던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남자형제를 만들어주기를 결심했다.

그래서 엄마는 여섯 명의 딸을 더 낳았고 그 중 두 딸은 죽었다.

하지만 장남 오빠는

그토록 아들을 원하는 아버지를 보며

'왜 나만으로는 안되는지, 내가 왜 아버지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는지'

궁금하고 괴로웠다고 한다.

 

오빠가 그 말을 하는 순간

나와 남동생은 그 때 오빠가 몇살이었는데 그런 생각을 다 했는지 물었고

우리는 열심히 나이 계산을 했었다.

62년생 오빠와 71년생 나.

그러니까 내가 태어나던 해 오빠는 9살.

우리 한별이보다 어린 남자아이가 상심하는 아버지한테

"아버지, 내가 잘할께요"라고 말하는 풍경.

 

이제 나는 괜찮은데

아버지가 좀 가여웠다.

나의 고양이를 그렇게 보내버린 아버지에 대해서

조금은 연민을 가지게 된 듯.

 

작은 구멍으로 벽 너머를 엿보듯이

지나간 날의 한 순간을

만난다.

전생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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