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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2

밀양에 처음 간 것은 2013년 10월이다. 나는 밀양에 대한 작업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건 나와의 약속이자 누군가에 대한 선언이다. 자기 밥상에 숟가락 얹는 사람으로 취급받았던 것에 대한 냉소이기도 하고 그 밥상은 결코 너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만약 당신의 횡포 때문에 작업을 접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 사람이 첫번째가 아니라 두번째라는 것을 당신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2014년에 이런 글을 썼었다. 나는 그 때 밀양에서 만난 사람들에 매료되어 있었다. 서글픈 열정의 추억. 글에서 나는 여섯번째에는 작업을 위해 밀양에 갈 것이다,라고 쓰고 있지만 밀양에 가지 않았다. 다시는 가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흙탕물을 뒤집어 쓴 듯한 느낌. 그런 모멸감은 내 인생에서 몇 번 없었던 듯하다. 모멸감으로부터 벗어나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선배는 내게 "그러니까 카메라 많은 데에는 가는 게 아니야"라고 말했고 알았다고 말하고 약간 울었던가. 몰라 잘. 그냥 밀양을 생각하면 쓴물이 올라오는 느낌. 여섯 번째에는 가족여행으로 갔다. 그냥 가족여행이었다. 밀양에 갈 생각은 아니었지만 마침 장터가 있었고 거기 어떤 선생님이 "장터를 밀양 시내에서 하는데 사람이 없으면 슬플 것같다"라는 글을 읽고, 갔다. 아이들과 재미있게 잘 지냈다. 민물회도 먹고. 호텔에서 사우나도 하고. 뭐 그 때의 우리들은 모든 걸 잃은 상태였으니 모든 시간이 소중했고 또 애틋했다. 

모든 관계는 깨지기 쉬운 것들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관계는 깨져버렸다. 밀양과 내가 작업이라는 관계 안에서 만날 가능성은 없어져버렸다. 가끔 슬프기도 하지만 지나가는 것은 그냥 지나가는 대로 남겨두는 것이 아름다운 거다. 상처없이 그 공간과 그 시간과 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뜨겁고 정직한 작업자들이 그 곳에 모여들 수 있기를. 거기까지가 내가 정한 나의 임무이다. 

일상의 잔 물결에서 감동의 실마리를

-독립영화감독 류미례의 영화 이야기

 

#프롤로그

전교조 선생님들 앞에서 영화이야기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한 달여를 고민하는 중이다. 대학 1학년 때 옆방에 있었던 영화 동아리 선배가 영화출연을 제의하면서 알게 되었던 전교조. 원고를 쓰던 중에 행정법원으로부터 법외노조판결을 받은 전교조. “그 때 외로웠노라는 말 보다 더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그때 전교조 선생님이 한 분이라도 있었다면, 나 같은 것도 어쩌면 한 날쯤은 빛나는 날이 있지 않았을까……라는 저 크레인의 전사 김진숙 위원의 말 속에서 간절히 빛나는 전교조. 이 시기, 말을 꺼내는 게 송구스러운 나는 그저 내 삶의 굽이굽이에 영화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고백하고 싶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내게 갖는 오해 중에 하나는 내가 오래 전부터 영화를 아주 좋아했을 거라는 믿음이다. 다큐멘터리감독은 당연히(!) 영화를 좋아할 거라는 생각. 푸른영상의 동료들을 보면 그 오해는 근거를 갖게 된다. 푸른영상 여덟 명의 멤버 중 여섯 명은 영화관련 학과를 전공했거나 어릴 적부터 영화를 좋아했던 사람들이다. 다른 한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다큐멘터리가 좋아져서인터넷 검색을 통해 푸른영상을 찾아온 독특한 케이스이고 그리고 내가 있다. 영화와 나의 관계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살아온 시간 동안 영화와 나는 아주 변화무쌍한 관계들을 맺어왔다. 우연한 만남이지만 이렇게라도 정리할 기회를 갖게 되어서 기쁘다. 불혹의 나이에 터닝 포인트를 이렇게라도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으로 글을 시작한다.

 

#1. 두려움과 동경의 대상이었던 이동영화관

어릴 적 나는 바닷가 마을의 가겟집 아이였다. 당신이 만약 시골 출신이라면 시골 마을의 가겟집 아이가 얼마만큼 동경의 대상인지를 알 것이다. 다른 아이들이 방과 후에 들일을 도울 때, 가겟집 아이인 나는 가게를 지켰다. 쫀드기나 비닐과자가 간식인 하얀 얼굴빛의 가겟집 아이를 동네 아이들은 참 부러워했다. 마을에 이동영화관이 들어오면 그 부러움은 절정에 달했다. 집 앞 장터에 천막이 쳐지고 이동영화관 사람들은 우리 집에서 전기를 끌어다 썼다. 숙식을 제공하고 포스터를 붙여주는 우리 식구들에게 영화관 입장은 당연히 공짜였다. 우리 식구들이 이동영화관 사람들에게 부탁을 하면 친구 몇몇도 공짜입장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시간이 달콤하게만 기억되지는 않는다. 장철이나 적룡의 무협영화는 즐겁게 볼 수 있었지만 오지명과 윤정희가 반라의 몸으로 뒹굴던 멜로영화들은 그 때 그 나이에도 켕기는 기분으로 힐끔거리며 봐야만 했었으니까. 어느 해 여름엔 학교 체육선생님들이 총출동해서 학생들의 영화관 출입을 막은 적도 있었다. 그 와중에 이동영화관 관계자들과 선생님들 사이에 다툼이 일었다. 웅성거리는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일대 결투가 벌어졌고 결국 흙투성이가 되어 싸움에 패배한 선생님들은 우리 집 마당 평상에 앉아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문 틈으로 살펴보던 두 분 체육선생님의 초라한 뒷모습은 지금도 안쓰러움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당시에는 안쓰러움 보다는 두려움이 컸다. 다음 날, 학교에 간 나는 하루 종일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나쁜 이동영화관에게 전기를 빌려준 가겟집, 그 가겟집 아이에게 호통이 돌아오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결국 두려움으로 끝을 맺었지만 이동영화관은 낭만으로 기억된다. 초라한 장터에 이동영화관이 들어오면 색색의 전등불이 켜지고 마을은 축제의 장으로 변했다. 이웃 마을 사람들까지 몰려들어 길게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렸고 영화가 시작되면 찐 감자나 옥수수를 베어 물며 환상 속으로 빠져 들었다. 초롱초롱 별빛 아래 어른거리던 영사막의 그림자들, 뒷구멍을 찾아 헤매던 동네 오빠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간이 사무치게 그립다.

 

#2. 길 찾기, 혹은 길 만들기

80년대 학번인 내게 대학생활은 수업거부로 시작되었다. 합격증을 받으러 학교를 찾던 날에도 군데군데 잔설이 남아있는 민주광장에서는 등록금 인상에 반대하는 집회가 한창이었고 사회는 모르겠지만 등록금 인상은 왠지 부당한 것 같다는 소박한 생각으로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극장은 멀리 해야만 할 것 같았기에 스무 살이 넘도록 개봉관에는 한 번도 가지 않았고, 가끔 동기들과 학교 근처 동시상영관에 떼로 몰려가곤 했다. 학교 앞 잡화점에서 할인권을 받아 <불의 나라>, <카프리의 깊은 밤> 같은 영화들을 낄낄거리며 보다 보면 어느새 어두워졌고 그 어둠이 좋아 막걸리 집에 들어가 술잔을 기울이며 시덥잖은 고민들을 주고받곤 했다. 그 뿐이었다. 당시의 내게 영화란 술자리나 족구처럼 친구들과 어울리는 매개일 뿐, 난 한 번도 씨네필인 적이 없었고 영화 또한 내게 진지한 물음을 던져주지 않았다.

그리고 긴 암흑의 시간이 왔다. 학교를 졸업하며 길을 잃었고 친구들과도 뿔뿔이 흩어졌다. 부당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살아가는 것만이 가치있는 삶이라고 여겼었다. 평생을 그렇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어떻게 살아야할 지 막막해졌고 무엇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누구는 취직을 준비하고 누구는 대학원에 갔지만 나는 어디로도 가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서있었다. 25살이 넘은 나이에 나는 뒤늦은 사춘기를 겪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음악을 좋아했고 소설을 좋아했고 그리고 영화를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내가 좋아하던 모든 것들을 나는 입시 이후로 미뤄두었지만……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새로운 세상을 본 것이다. 길을 잃고 헤매면서 나는 어쩌면 퇴행의 길을 걸었던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 아니 내가 좋아했던 것들을 출발선 삼아 다시 시작하면 안 될까? 어쨌든 살아가야하니까. 가슴 뛰는 삶을 살기 위해서라면 세월 저 편에 꼭꼭 묻어두었던 그 보퉁이라도 다시 풀어보면 안될까? 그 때부터 나는 영화관련 강좌를 닥치는 대로 들었다. 푸른영상 동료들은 지금도 나를 가방끈 긴 사람이라고 놀린다. 학력이 높아서가 아니라 하도 많은 강좌를 들어서. 물론 지금의 내게서 그 강좌들의 효과는 찾아볼 수 없지만 어쨌든 좋아하는 일을 다시 찾았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열심히 영화를 보거나, 혹은 열심히 촬영을 한 후 지친 몸으로 잠자리에 누우면 새로이 시작될 다른 하루가 기대되곤 했었다. 그렇게 영화는 내게 축복으로 다가왔다.

 

#3. 친구가 되고 싶은 소심한 카메라

나는 다큐멘터리를 선택했다. 시나리오 강좌를 들으며 잠깐 극영화에 대한 생각도 해봤지만 실제 세계를 담는 다큐멘터리로 세상을 반영하고 그렇게 만든 다큐멘터리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나의 첫 번째 영화의 주인공들은 지적 장애인이었다. 몇 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장애인 전문 다큐감독이라는 이름표를 얻긴 했지만 처음부터 장애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건 아니다. 푸른영상에 작업 의뢰가 들어왔고 마침 그 때 입봉을 준비하고 있던 내가 그 일을 맡게 된 것뿐이었다. 나는 푸른영상의 다른 선배들처럼 빈민, 국가보안법, 노동운동과 같은 큰 문제를 영화에 담고 싶었다. 그런데 의무감으로 시작한 작업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나는 내 영화의 주인공들과 깊이 교감하며 카메라와 대상이라는 관계가 파괴되는 순간의 기쁨을 맛보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카메라를 든 사람과 찍히는 사람은 평등해질 수가 없다. 결과적으로 남는 건 촬영본이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감독이기 때문이다. 평등해지기 위한 수많은 자기반성, 꾼이 되지 않기 위한 경계, ‘나는 절대로 당신을 100%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는 겸손. 그 모든 노력이 어렵게 어렵게 결실을 맺을 때,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만이 한 사람의 마음이라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촬영 초반부. 내 영화의 주인공인 지적 장애인들이 쾌활하게 웃을 때, 그들이 마음 아파하며 눈물 흘릴 때, 나는 무릎 위에 놓인 카메라를 들지 못한 채 몇 번이고 망설였다. 내 카메라가 당신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면, 내 카메라 때문에 당신들의 웃음이 흩어진다면, 나 때문에 당신이 마음껏 울 수도 없다면, 다큐멘터리 감독은 될 수 있을지언정, 당신의 친구라고 할 수 없을 것같았으니까. 그리고 긴 시간이 지난 지금, 카메라는 그들과 나 사이를 이어주는 매개가 되었다. 조심스럽게 촬영한 화면들을 보며, 그 화면 안에 담긴 내 마음을 확인하며 우리들은 서로 웃고 울었다. 잘 만든 영화는 아니었지만 정성스런 연애편지처럼 내 영화들은 내 마음을 담을 수 있었고 그것이 내 영화의 등장인물들과 나를 가깝게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영화 작업을 하다 남편을 만나 봉천동에 살게 되었다. 그 때 내가 살았던 곳은 함께 사는 세상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물이었다. 장애인센터, 위기가정센터, 청소년 그룹홈이 함께 모인 곳이었다. 그곳은 가난한 사람들이 모인 봉천동, 그 골목에서도 게토처럼 보이지 않는 울타리가 있는 곳. 그 곳에서 나는 살았다. 외형만 보고서 어떤 사람들은 나의 삶이 드라마틱하다고 말했다. 영화작업을 하다가 인생이 변했다고도 말했다. 오랫동안 나는 그것이 괴로웠다. 외형적으로 나는 함께 사는 세상에 살고 있고, 또 봉천동에 살고 있지만 그건 나의 삶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나는 그저 그 곳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을 뿐, 아침이면 푸른영상 사무실로 출근했다. 나에게 덧씌워진 환상의 막들을 걷어내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오해하는 분들에게 뭐라고 말을 한단 말인가? 하지만 출산과 기나긴 육아를 거치며 이 고민들은 한 방에 해결되었다.

 

#4-1. 엄마로서의 경험을 말한다는 것

첫애 하은이를 낳고서 식당에 간 적이 있었다. 아기를 보느라 남편과 교대로 밥을 먹고 있는데 옆자리 아주머니가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요즘 애기엄마들은 참 대단해. 어떻게 저런 어린 애를 데리고 식당엘 오냐? 애가 다 클 때까지 참아야지~!"

세 번째 영화 <엄마]> 초청상영한다고 해서 기쁘게 찾아갔던 영화제에서 내 영화 말고 다른 영화를 좀 보려고 했더니 자원봉사자들은 나를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아기 업은 엄마는 출입금지라고 했다. 나는 초청받은 게스트라고, 아기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사정하자 자원봉사자 한 명을 딸려서 들여보내 주었다. 말하자면 그는 감시인이었던 것이다. 그냥 돌아 나오는데 서러움에 울컥 눈물이 솟았다. 그 뒤로 오랫동안 나는 식당에서 만난 아줌마 말처럼 애가 다 클 때까지' 많은 것들을 참았다. 하지만 정말 그래야만 하는 거였을까? 아기 키우는 엄마들은 나는 없다'고 생각하며 자기 안의 욕망을 죽여야 하는 걸까? 보통 사람들처럼 외식을 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공연을 보면 안 되는 걸까? 엄마가 아기와의 관계에서만 행복할 거라는 기대는 혹시나 강요는 아닐까?

농사일 때문에 아이를 묶어놓고 들일을 나갔다거나, 자는 아이를 두고 시장을 보고 왔다는 엄마나 언니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확실히 우리 세대의 육아는 윗세대보다는 편하다는 걸 알게 된다. 그래서 애 보기 힘들다는 얘기를 하려다가도 슬그머니 입을 다문다. 훨씬 더 어려운 시간을 지나온 윗세대 엄마들한테는 젊은 엄마들의 말이 공감보다는 반감을 생기게 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입을 다물다 보니 나중에는 말이 가슴 밑바닥에 고인 채 굳어가는 듯했다. 선배엄마들한테는 "그게 무슨 고생이라고?"라는 말을 들을까 봐, 결혼하지 않은 후배들한테는 "아기 얘기 좀 그만해"라는 말을 들을까 봐, 하고 싶은 말이 가슴 가득 고여 있는데도 말을 아꼈다.

그러다 영화 <엄마>를 만들었고, <아이들>을 만들었다. 내가 딸을 둔 엄마가 되어 우리 엄마를 바라보는 <엄마>, 세 아이와 함께 지내온 10년간의 육아일기인 <아이들>은 사실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평범한 내가 그 시간들을 카메라에 담아 영화를 만들자, 관객들은 영화를 통해 자신들의 기억을 불러내었다. <아이들>을 보고 나서 어떤 관객이 썼던 "나도, 그도, 우리 모두 지나온, 기억할 수 없지만 존재했던 시기의 애틋함"이라는 문구처럼, 나는 내 영화가 기억의 문을 여는 문고리가 되길 바랬다. 생활의 격랑에 밀려서 당신이 흘려보냈던 그 모든 시간은 고스란히 마음 저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다. 나의 영화가 당신의 그 반짝거리는 기억들을 불러낼 수 있기를, 그 기억의 문을 여는 작은 문고리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나는 영화를 만들었고 글을 썼고 그리고 사람들 앞에 서기도 헸다.

 

#4-2. 다큐멘터리, 나를 비추는 거울

결혼과 출산을 거치며 세상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살아내야할 일상에 지쳐 타인의 삶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었다. 일과 육아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지쳐가던 어느 날, 나는 문득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는 내 자리를 다시 한 번 바라보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내게 소재거리가 되고 나는 설득력 있는 발언을 하기 위해서라도 내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좀 더 혹독하고 좀 더 절실하게 겪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을 고르는 과정은 어느 순간 성찰의 시간이었고 때로는 치유의 과정이기도 했다. 나의 세 번째 영화 <엄마>는 나의 이야기, 내 가족의 이야기이다. 지극히 사적인, 나의 이야기를 하는 과정은 내 안에 숨어있던 어둠까지도 껴안는 시간이었다. <엄마> 때문에 만났던 관객들에게 나는 내가 겪고 느꼈던 그 시간들에 대해서 말을 했다. 나를 들여다보고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그 시간이 얼마나 축복이었는지를, 그리고 그렇게 어렵지 않은 그 일에 함께 나서보기를 몇 번이고 권하고 또 권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출산과 육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여전히 조심스럽다. 서른이 되기 전에 엄마를 포함한 주변 어른들로부터 지겹도록 들었던 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야 어른이 된다(그렇지 않은 사람은 미성숙하다)”는 그 말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 오해의 거미줄에 걸리는 것이 싫어서 입을 다물고 살았다.

하지만 한 번 꺼내기 시작하면 아기에 대한 기억의 실타래는 끝없이 풀려나온다. 처음 내 몸에 자리잡을 때의 이물스러움. 불러오는 배만큼 커져가던 기대와 공포. 가슴 속에 꽃 한 송이가 피어났던 첫 만남. 오직 나만을 의지하는 작은 생명에 대한 애처로움. 소통 불가능한 상태에서의 막막함…….

모성에 대해서 글을 쓰려고 하면 전투모드로 변하는 내 안의 다른 내가 느껴진다. 모성이라는 단어를 꺼낼 때마다, 나는 두 개의 칼을 빼어든다. 하나는 모성을 절대화하고 신비화하는 모성이데올로기, 또 하나는 모성을 시스템 안에 안주한 이들의 것이라 여기는 이들과 맞서기 위해서이다. 엄마로 지내온 시간을 이야기하는 것,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 저열해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뱅글뱅글 돌기만 하는 그 자리가 답답해보일지 모르겠지만, 왜 아무도 그 외로운 자리에 대해서 얘기해주지 않는가가 내 작업의 시작이었다.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았다. 엄마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숭고하고 초월적인 모성신화에 짓눌리고 소통이라고는 눈꼽만큼도 허용되지 않는 무기력한 아이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때론 살의까지 느끼며 견뎌왔던 시간들에 대해서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았다. 선배엄마들도 그렇게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데 왜 너만 유난을 떠느냐고 비난받을까 봐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말을 시작하자 같은 경험을 가진 이들이 공감의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나는 우리들이 거쳐온 시간이 각자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들을 수 있었다.

 

#4-3. 당신에게 어떻게 갈 수 있을까?

독립영화는 제작 뿐 아니라 배급에 있어서도 상업영화와는 다른 길을 걷는다. 극소수의 선택된 영화만이 극장에서 관객들을 만날 뿐, 대다수 독립영화들은 바늘구멍만한 상영기회를 얻기 위해 영화제다, 공동체상영이다, 발품을 팔아야 한다. 세 번째 영화 <엄마>가 운 좋게 극장상영의 기회를 얻었지만 정작 내가 만나고 싶었던 엄마들은 극장에 오지 못했다. 천만 관객시대를 얘기하고 있지만 영화는 아무나 볼 수 있는 예술장르가 아닌 것이다. 젖먹이 아기를 키우는 엄마들에게 극장은 멀고 먼 곳이다. 아기가 좀 자라서 어린이집에 맡겼다 하더라도 엄마들은 신데렐라처럼 6시가 되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톱니바퀴처럼 꽉 차인 일상을 살아가는 엄마들에게 극장 나들이는 맘먹고 질러야'하는 일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아이들을 위한 연극놀이였다. 엄마와 아이가 함께 와서 엄마는 영화를, 아이들은 놀이를 하는 것이다. ‘반짝' 하고 아이디어가 떠오르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아는 분이 소개해주셔서 좋은 극장을 3시간 동안 쓸 수 있게 되었고 상영공간이 확보되자 나는 교육연극을 전공한 선생님과 건강가정지원센터의 아이돌보미 선생님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극장 사정상 공개적으로 홍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화와 메일로만 조용히 상영소식을 알려갔다. 초대를 받은 이들은 비밀상영회'라며 나름 즐거워했다. 128석이라는 작은 소극장이 과연 채워질까 하는 궁금증과,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한다는 기대감으로 밤잠을 설쳤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오신다고 해서 행사 일주일 전부터는 참가신청을 받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날이 되었다. 엄마와 떨어지기 싫은 아이는 어쩔 수 없이 극장에 함께 들어갔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놀이공간에 남았다. 영화가 상영됐고, 이야기손님으로 오신 정신과 의사 정혜신 선생님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고, 준비했던 모든 행사가 끝나가자, 행사를 함께 준비했던 친구가 아이들을 데리러 갔다. 나중에 그 친구가 말해주었다. “문을 여는데 애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연극놀이 선생님만 바라보고 있었어. 하도 집중하고 있어서 내가 문을 여는 줄도 모르더라.”

여섯 번에 그치고 말았지만 그렇게 진행했던 '행복한 상영회'는 육아전담자들의 문화향유권이라는 측면에서 의미있는 장이었다. 매번 상영회 때마다 영화를 만든 나도, 연극놀이를 진행하던 선생님도 행복했다. 기회가 된다면 좀더 적극적으로 다시 추진해보고 싶다. 그렇게 <아이들>201010월부터 20147월 현재까지 132차례에 걸친 공동체상영을 진행했고 육아전담자들의 목소리들을 듣고 수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다섯번째 영화를 기획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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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밀양, 내 생애 반가운 손님

2014년이 내게 의미가 있다면 막내까지 학교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들이 모두 학교에 들어갔다고 해서 내게 더많은 시간이 허락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 아이 모두가 학령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은 공적 체계 안에서 아이들이 자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들에게도 소속된 사회가 생겼다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리고 나는 다섯 번째 영화를 만들고 싶다<아이들>의 마지막 내레이션처럼, 나에게 다섯 번째 영화는 뭔가 새로운 영역이기를 바랬다. 엄마들의 이야기와 아이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부족하고 여전히 절실하다. 12년간의 육아경험을 몸에 새긴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어느 날, 기적처럼 그 순간이 찾아왔다.

201310, 밀양에 갔다. 사실 처음부터 밀양에 가려던 건 아니었다. 세 아이를 키우는 동안 남편의 휴가일정에 맞춰 떠난 여행들은 집이 옮겨진 것일 뿐 사실 쉼은 아니었다. 그렇게 보낸 10, 이제 막내까지 유치원에 다니고 있으니 며칠 만이라도 혼자 떠나는 여행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부산영화제를 즐길 요량으로 잡았던 휴가 계획은 밀양에 촬영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소식에 급히 변경되었고 결국 생애 최초의 '홀로 휴가'는 부산이 아닌 밀양으로 가게 되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본 밀양은 아름다운 곳이었다. 넓지 않은 차도 양 편으로 작은 가게들이 오밀조밀 들어서 있었고, ‘송강호 거리’, ‘전도연 거리라고 적힌 작은 간판들이 이 도시가 영화 <밀양>의 촬영지였음을 알려 주었다.

그러나 그 작은 도시의 평화는 송전탑 때문에 깨진 상태였다. 765kw라는 엄청난 용량의 송전탑이 들어선다고 하자 평생 일궈온 땅을 지키기 위해 주민들은 매일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내가 '밀양765kV송전탑 반대대책위원회 미디어팀'의 임시 구성원이 되어 밀양 상동면 109번 공사부지에 올라갔을 때, 주민들은 손바닥 만한 내 작은 카메라를 반기며 눈물을 보이셨다. 마을 뒷산에 서는 송전탑을 막기 위해 주민들은 매일같이 1시간 넘게 산을 올랐다. 하지만 온 몸이 땀에 젖은 채 공사부지에 도착해보면 방패를 든 경찰들이 겹겹이 막고 있어서 공사 현장은 볼 수도 없었다. 가끔 할매 한 분이 우리 산 얼마나 파헤쳤는지 보자하고 다가서면 경찰들은 방패로 물샐 틈 없는 벽을 만들어 할매의 앞길을 막았다. 그런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서너 대의 경찰 카메라들이 몰려들어서 주민들의 얼굴을 찍었다. 내 작은 카메라가 그런 경찰들을 찍기 시작하자 할매들은 우리도 카메라 있다!”면서 가슴을 폈다.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는 내 직업이 그토록 쓸모 있다고 느껴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주민을 지키는 카메라가 되고 싶어서 나는 그 후로도 몇 번 더 밀양에 갔다.

밀양은 패배주의에 깊이 빠져있던 내 인생의 반가운 손님이었다. 세상을 바꾸겠다고 호언장담하던 20대가 눈 깜짝할 새도 없이 지나가버린 후, 세상보다 더 먼저 변해버린 내 안에는 패배주의 만이 남았다. 그리고 중년이 되어 밀양에 갔다. 그 곳에서 그 분들을 만났다. 그 분들의 물음은 소박하고 간결했다. 왜 우리 마을에 송전탑을 세웁니까? 왜 내가 농사짓는 땅을 빼앗습니까? 왜 내 갈 길을 막습니까? 길목이 막히면 주민들은 막힌 그 길 앞에 앉아서 그렇게 물었다. 해가 저물면 집에 돌아갔다가 다음 날이면 다시 그 자리에 앉아서 주민들은 묻고 또 물었다. 흉년이든 풍년이든 늘 씨를 뿌리고 추수를 하는 농부의 방식 그대로 주민들은 멈추지 않고 질문을 했다.

201310월 첫 방문 이후, 여섯 번을 더 밀양에 갔다. 처음 나는 주민을 지키는 카메라가 되고 싶었다. 경찰만 주민을 채증하는 게 아니라 주민측 카메라도 경찰을 채증한다는 사실은 주민들에게 힘을 주었다. 그 사실이 기뻤다. 주민들은 송전탑 건설 예정지에 지은 움막에서 생활하고 있었고 밀양에 가면 밀양 765kv송전탑반대 대책위원회가 정해주는 움막에서 주민들과 함께 지냈다. 어떤 움막은 전기와 수도가 들어와있어 잠자리만 불편한 정도였지만 어떤 움막은 전기와 물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친환경적으로 지내야했다. 특히 단장면 용회마을 101번 움막은 30분 정도 가파른 산길을 올라야했고 전기나 수도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의 힘으로만 살아야했다.

나는 밀양에서 여러 가지를 알았다. 전기가 누군가의 고통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도, 그리고 내 직업이 엄청나게 많은 전기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도. 네 번째로 밀양을 찾았을 때 101번 움막을 배정받은 나는 경찰이나 한전직원과의 충돌에 대비해 배터리를 아껴야했다. 산 위에서 촬영 없이 며칠을 보냈던 그 때, 비로소 소중한 사실 하나를 알았다. 밀양에 간다는 것은, 또는 밀양을 산다는 것은, 송전탑을 반대하고 반핵 싸움을 벌인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쌀을 씻어 밥을 하고 쌀뜨물로 설거지를 한다. 물이 부족하니 설거지 하는 방법도 특별하다. 반찬은 기름기 없는 음식 위주로 만들고 가끔 기름기 있는 반찬을 먹고 나면 종이로 그릇을 닦은 후 설거지를 한다. 1.5리터 PET병 절반이면 한 끼 설거지를 할 수 있었다. 밤이 되면 일찍 잠자리에 든다. 잠자리에 들지 않더라도 전기 없이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일은 대화이다. 이마에 단 등산용 작은 전등이나 촛불의 부드러운 빛, 혹은 달빛에 의존해서 서로의 얼굴을 보고 도란도란 나누던 그 밤의 대화들. 그렇게 며칠을 지내다 집으로 돌아오면 내가 얼마나 전기를 많이 쓰고 사는지, 내가 얼마나 물을 낭비하고 있는지 몸으로 느끼게 된다. 당연한 풍경으로 알았던 도시의 휘황찬란한 불빛들에 가슴이 조마조마해지고 한여름에 긴 옷을 준비해야만 하는 지하철 안의 과한 냉기에 속이 쓰라리다. 밀양에 간다는 것, 밀양을 산다는 것은 그렇게 소비와 안락과 풍요에 중독되어있는 삶에 대해 돌아보게 만든다.

전교조 선생님과의 만남을 통해 교사를 희망했고 스스로가 전교조 선생님이 되어 학교를, 아이들을, 교육을 고민했던 이계삼 선생님은 말한다.

석유에 중독된 삶, 소비와 안락 속에서 내팽개쳐진 인간의 품위, 만연했던 우울증과 비만, 일탈과 폭력, 석유 이후의 세계에서 전쟁과 추락의 격랑이 기다릴 것은 분명하지만, 다른 한편 이 거대한 전환의 시대는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시작할 기회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부디, 이 모든 일들이 너무 늦지 않기를.(청춘의 커리큘럼, 148)”

그리고 201468, 다섯 번째 밀양방문의 도착지는 위양마을 127번 움막이었다. 행정대집행을 며칠 앞두고 127번 움막에 머물던 마을주민 정임출 할매는 움막 바깥에 비를 피할 수 있는 비닐 장막을 쳤다. 몇몇 연대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비닐 장막을 치던 정임출 할매는 말했다.

하루를 더 살더라도 오는 손님들 한 데서 자게 할 수는 없으니까.”

그로부터 나흘 후 127번 움막은 강제철거되었다. 그 날 많이 울고 많이 분노했지만 그것이 끝이라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7개 마을에 농성장은 새로 꾸며졌고 그곳은 사랑방이자 교육의 장이고, 게스트 하우스이자 식당 노릇을 할 것이다. 연대단체 회원들이 송전탑 반대 주민들이 생산한 농산물을 사는 '미니팜 협동조합-밀양의 친구들'이 만들어지고 1구좌에 1만 원의 기금을 내면 수확한 농산물을 받을 수 있는 한 평 프로젝트도 진행된다. <밀양 인권 침해 종합보고서>를 발간하고, "마을공동체 파괴 기록과 증언"과 백서를 발간할 것이다. 송전탑 반대운동은 이제 생명 가꾸기 운동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몇 번을 물러서고 몇 번을 뜯기더라도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밀양 주민들은 그렇게 내 인생의 반가운 손님이 되었다.

다섯 번째 작업으로 밀양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싶은 내가 꼭 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바로 어린이책 시민연대 회원들이다. 그들은 처지가 나와 비슷하다. 살림을 책임져야하는 그들이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은 아이들이 학교에 간 시간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가 맘먹고 찾아간 밀양에, 그들이 있었다. 그들이 오는 날은 잔칫날 같았다. 물과 전기를 맘대로 쓰지 못해 소박한 밥상으로 생활하는 할매들에게 그들은 늘 풍성한 밥상을 선사했다. 한 사람 한 사람 정성스레 싸온 도시락을 열어 둥글게 둘러앉으면 그것으로 잔칫상은 완성되었다.

이쯤에서 <아이들> 이야기를 다시 해야겠다. <아이들>에 환호하는 건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여성들이었다. <아이들>은 성별, 연령, 지역, 결혼 유무에 따라 상반된 반응을 보인다. 육아경험이 있는 여성들은 비슷한 기억을 떠올리며 지나온 시간을 돌아봤다. 그러나 남성관객들 중 일부는 얘 키운 게 그렇게 억울해서 영화까지 찍었습니까?”라는 말로 유별난 여자 취급을 하기도 했다. 가장 뼈아팠던 건 결혼도, 출산도 자기가 다 선택한 건데 안락한 정상가족 테두리 안에서 누릴 거 다 누리고 사는 중간계층 여성들의 자기만족적 수다라는 평가였다. 생활협동조합이나 공동육아에 관여하는 많은 여성들에 대해 먹고 살만 하니까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반응이었다. 그런데 밀양에 그 여성들이 있었다. 아이들 학교 보내놓고 밀양의 곳곳에 있는 움막을 다니며 주민들과 함께 밥을 먹었고 유한숙 어르신의 분향소 마련 때문에 주민들이 경찰로부터 핍박받을 때에도, 611일 행정대집행 때에도 그들은 치열하게 함께 싸웠다. 며칠 전, 밀양에 갔다가 그 중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 날 행정대집행이 있던 날, 남편이 연대자는 연대자의 자리에서 자기 할 일을 하는 게 주민들을 돕는 거라는 말을 듣고 내가 그랬어요. 내가 연대자냐? 나도 밀양 주민이다.”

밀양은 이제 단순한 지역의 이름이 아니게 되었다. 처음 나는 주민들의 상황을 돕고 싶었다. 평생 평생을 몸 붙이고 살아왔거나, 평생 살아갈 땅을 얻기 위해 고심한 끝에 정착한 분들이 국가의 명령에 의해, 그것도 정의롭지 못한 명령에 의해 건강권과 재산권을 침해받는 상황에 대한 저항에 함께 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결국 건강권과 재산권 문제만이 아니라 밀양의 싸움이 미래를 위한 싸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민들은 자주 말하신다.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냐? 이 나라, 이 땅, 너희들 자손들이 살아갈 시간을 위해 싸우는 거다

맞다. 그리고 어린이책 시민연대의 한 회원의 나도 밀양주민이다라는 선언은 밀양의 싸움이 밀양이라는 지역의 싸움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말이다. 132회나 진행되었던 <아이들> 상영 중 많은 비중을 차지했던 공동체 상영의 특징은 특이하게도 여성들이 스스로 그것을 조직했다는 데 있다. 그들은 생활세계의 경험을 중시하고 그 경험을 기반으로 지역에서 생활정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여성들이었다. 그리고 상영회를 조직했던 여성들과 다르지 않은 처지와 상황의 여성들이 지금 밀양에 있다. 내가 여섯 번째 영화로 밀양에 가야하는 이유이다.

 

#5-2. 다섯 번째 영화, 영화들

나는 지금 두 개의 영화를 만들고 있다. 하나는 기획 단계에 있는 밀양에 있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집 밖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대한 영화로 가제는 <따뜻한 손길-아이들2>이다. 201310월에 기획을 시작한 다큐멘터리 <따뜻한 손길-아이들2>는 집 밖의 육아와 사회적 엄마들의 목소리를 담을 다큐멘터리이다. 첫 애 하은이가 학교에 들어가는 것으로 끝나는 <아이들>을 보면서 여성관객들은 그 다음 이야기를 보고 싶다고 했다. 그 마음을 안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그리고 아이를 학교에 보낸다는 것은, 수없이 많은 갈림길에 선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기 때문이다. 내가 옳은 길을 가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고민들을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세 번째 영화 <엄마...>에서도, 네 번째 영화 <아이들>에서도 나는 엄마라는 이름으로 내게 씌워진 완벽함을 향한 사회의 요구로부터 끊임없이 도망가고 싶어하는 인물로 그려져있다. 다큐멘터리가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이라는 것을 감안한다 해도 영화의 90%는 사실에 기반한 것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아버지없는 아이로 살아왔던 나는,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보다도, 아버지가 없으니 문제가 있을 거라는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당당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살았다. 그리고 여전한 시선들 아래에서 나처럼 열심히 살고 있는 소위 말하는 비정상 가족의 아이들을 본다. 여전히 한 인간의 문제적 인성의 원인을 부모와의(특히 엄마와의!) 애착관계 실패라든지 성장 단계의 불완전한 이행에서 찾는 가족주의, 그 가족주의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 어떻게든 항변하고 싶은 마음이 <따뜻한 손길-아이들2>를 시작하게 만들었다. <따뜻한 손길-아이들2><아이들>에 환호했던,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모성신화에 시달리는 여성들과 함께 만드는, 지금보다는 나은 보육환경을 만들기 위한 한 시도이다.

그리고 제목도 짓지 못하고 있는 밀양에 대한 영화는 나와 그녀들의, 그리고 우리 아이들의 다음 세계를 가능하게 만들겠다는 결심으로부터 준비되고 있다.

 

#에필로그

가끔 내 삶을 돌아보면 굽이굽이 참 많이도 돌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상처가 많았다. 눈물도 많았다. 처음 다큐멘터리를 시작했을 때 선배감독들은 마음이 너무 약하다고, 다큐멘터리 감독은 마음이 굳세야한다고 조언하곤 했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나는 약한 마음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으로 살아남았다. 약한 마음이더라도 그 마음을 담아 카메라로 세상에 발언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은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는 사실은 내게 축복이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내게 소재거리가 되고 나는 설득력 있는 발언을 하기 위해서라도 내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좀 더 혹독하고 좀 더 절실하게 겪을 필요가 있었다.

25살에 처음 만난 다큐멘터리, 그 때 다큐멘터리는 나에게 구원이었다. 그리고 그 때 이후로 지금까지 다큐멘터리는 내가 살아가는 힘이다. 아이를 키우는 12년 동안 나는 내가 만드는 영화들은 세상에 뭔가를 외치기에는 힘이 없다고 생각했다. 변화를 외치거나 주장을 하기에는 내 삶은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알았다. 내가 사는 만큼 만들고, 사는 만큼 발견하면서, 내가 발견한 것을 주장해도 되지 않을까? 관객이 그것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저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 저런 말을 한다면 한 번쯤 귀를 기울여주자라는 맘을 먹게 하는 영화를 만들면 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영화를 만들고 또 세상에 내어놓는다. 나의 영화들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나의 영화들은 초라하다. 그렇지만 나는 내 영화를 통해서 당신과 만나기를 원한다. 내 안에 있는 무늬와 당신 안에 있는 무늬가 같다면 나의 메시지를 당신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나와 비슷한 무늬를 품고 있는 당신과 만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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