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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

1. 긴 잠을 자고 났더니 한결 나아졌다. 

오늘까지 마감인 네 개의 글을  써야 하고

상처입었을 것이 분명한 두 사람(혹시 세 사람일까?)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아버지가 없었던 아이라서 다행인 것은

근거없는 권위주의에 대해 참기 힘들 만큼의 예민한 안테나를 지녔다는 것.

근거있는 권위에 대해서는 그럭저럭 패스하지만

권위'주의'는 참지 못한다.

25살에 낙원동 옥탑방에서

춤꾼이었다가 막 편집장이 된

콧수염이 있던 남자와의 대화가 지금도 생생하다.

그는 자유분방한 사람이라서

지금쯤은 원고마감을 해야 하는 시기에

갑자기 새로운 기획을 꺼내서 취재하자고 했고

몇 번 그런 일들을 겪은 후 머리끝까지 불만이 가득찼던 나는

책에는 공정이 있고 지금 그걸 하자는 것은 이번 호 책을 내지 말자는 말이다,

좀 모르면 배우라,고

따박따박 말대꾸를 했다.

부들부들 떨리던 그 남자의 콧수염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옆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던 후배는

내가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단다.

며칠 후에 우리는 짤렸다.

해고를 통보받는 그 자리에서

나는 천진난만하게

"그래도 그동안 진행했던 원고, 필자 정보 같은 건 인수인계를 해야하는데"라고

책 걱정을 했고(나 그 때 프로였던 걸까?)

콧수염 남자는 냉소를 날리며 필요없다고 했다.

ㅆㅂ 그 후로 책 세번 더 내고 그만 둘 새끼가

잘도 그렇게 기자들을 싹 갈아치웠지.

그 때 편집실 기자 2명 말고도 문예아카데미 언니들 두 명도 같이 짤렸다.

작년에 그 모든 일을 지시했을 김모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며

이제 그만 잊자는 생각을 했다. 명복을 빈다는 말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우리는 그냥 그런 기집애들 이었을 거다.

1년에 활동비를 반도 못 받아도

꾸역꾸역 열심히 일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했을까?

갈 데 없는 애들을 데리고 있다고 생각했을까?

'어른들'이 오면 차를 내야 했고

지방 축제 취재를 가면 지역유지 옆자리에 앉혔던 선배들

지금도 진보적 인사들로 가끔 이름이 오르내리는 인간들.

그렇게 짤리고 3년 정도는 인사동 골목에만 가도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상처라는 건 그런 거다.

나는 지금도 봉천동 골목길, 대한성공회 우리마을,을 지나가면

가슴이 두근두근 거린다.

뭔가 쓰라리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 장소를 새로운 기억으로 채워넣어야한다.

영화제 일을 하다가 그만 둔 사람이 '토사구팽당하는 기분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나는 그 사람 편이다.

내 안테나는 그런 방향에 예민해져있다.

 

2. 

누구와 함께 연대할 것인가.

아니야 연대라는 거창한 단어를 쓸 필요도 없어.

누구와 함께 일할 것인가.

수요일, 행사가 끝나고 참여감독들에게 무려 회를 사면서

수고를 치하하고 다음 갈 길을 열어보였을 때

"펀딩을 해서 탄탄하게 만든 다음에 불러야지"라든지

"밀양은 작업이 수도 없이 많은데 뭘 또" 라든지

기행에서의 어떤 감흥을 말했을 때

시니컬하게 "좋지, 좋지만 말이야"라는 식으로 나오는 말들을 듣다가

결국 폭발.

그렇게 화를 내 본 적이 몇 년 만인가.

 

말없는 J가

그애는 술을 엄청 많이 먹었을 때만 말을 하는 사람인데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덧붙였다.

"다큐멘터리가요 내가 찍고 싶은 것을 찍는 것도 중요하지만요

카메라가 필요한 곳에 가는 일도 중요하잖아요"

오, 나의 J.

내가 너를 끌어들인 일은 최근 10년 동안 한 일 중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기억해두겠어.

 

다음 날 읽은 슬픈 문장.

'술자리의 비극은 한 사람은 주정을 하고, 한 사람은 그걸 진심이라고 읽는 데서 온다'

 

나는 그 날 밤 한 방울의 술도 입에 대지 않았음에도

나는 폭발을 하고 만 거다.

설득해서 같이 갈 건가, 그냥 갈 건가.

사람을 버리는 일에 익숙하지않은 나.

하지만 요즘은 기운, 에너지가 중요하다.

할 일이 너무 많고 카메라는 너무 부족하다.

짧은 노력에 큰 성과를 바라는 영악한 카메라 조차도

나는 감싸안고 간다.

하지만 패배주의와 무기력은..... 감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맑은 물 한 컵을 순식간에 물들이는 파란 잉크처럼

우울, 무기력, 패배감은 위험해.

 

3. 

네번째 작업을 시작할 때 내 카메라를 거부하던 보육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언제까지 보육교사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나중에 '류미례감독 특별전' 같은 거 할 때 제 얼굴 보는 거 싫어요"

손가락을 꼽아가며 계산해보니 푸른영상에 들어온지 18년째이다.

18년동안 네 개 밖에 만들지 못했다.

'한국의 다큐멘터리감독들 시즌 2'의 기준이 네 작품 이상 만든 감독이었다고 한다.

간당간당하게 이름을 올렸네.

감독 특별전, 같은 걸 하기에는 여전히 초짜같은 상태지만

네 작품을 만든 덕분에 한국의 다큐멘터리감독들 상영전에

영화를 상영하게 되었다.

6월 8일, 6월 22일에 상영한다.

대담을 나눌 패널을 추천해달라고 했는데

평론가 집단 중에는, 아니 글쓰는 집단 중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

나의 영화는 공동체 상영으로 만난 관객들의 공감에서만 빛날 뿐

내 영화에 대해 글을 쓴 학자, 기자, 평론가는 없다.

그러다 생각해낸 사람.

장문의 호소문을 쓰고

번호를 수소문해서 전화를 하고

허락을 얻고

지난 글들을 정리한다.

2007년에 이런 인터뷰를 했었다.

인터뷰하러 나갈 시간도 없어서 서면으로 인터뷰를 하고

애가 울고 불고 해서 쓰다 말다 하면서

나는 이런 서면인터뷰를 했었다.

2007년에. 

참 드라마틱한 삶이야. 

  

1. 추측하건대 감독님께서는 대학에 입학하여 자연스럽게 사회문제에 눈을 뜬 의식화 학생이었을 것으로 생각해봅니다. 이 추측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감독님의 대학생활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언제 대학에 입학하셨고, 당대의 정치 사회적 배경, 어떤 활동(공부 포함)을 주로 하셨으며, 기억나는 사건, 향후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경험 등에 대해 수고스러우시더라도 간략하게 정리해주실 수 있는지요.

저는 역사선생님이 되고 싶었습니다. 사실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기 보다는 역사를 공부하고싶었습니다. 국사선생님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해야겠다며 단호하게 뭔가를 얘기할 때 그 모습이 좋았어요. 무엇보다 주어지는 교과서만 열심히 읽어대던 저는 앞으로 살아갈 일에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배우면 앞선 사람들의 경험에서 내 삶의 힌트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가 싶었습니다. 선생님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된 건 먹고는 살아야할테니 직업으로서 교사를 하며 역사를 계속 공부를 하면 어떨가 하는 고등학생다운 생각이었던 거죠. 하하

서울대 국사교육과를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였는데 원서를 쓸 때 담임선생님이 제 성적이 편차가 너무 커서 뭐라 얘기해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고대를 갔습니다. 오빠와 언니가 고대에 다녀서 그냥 별 생각없이 고대에 갔습니다.(제가 좀 단순합니다)

운동권이 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엄마...>에도 나오는 러시아언니의 모습이 좋아 보이지않았습니다. 저는 운동이 언니를 망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운동은 절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합격증을 받으러 간 날, 민주광장에서 집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재단비리를 규탄하는 학원민주화촉구 집회였습니다. 사회는 모르지만 비리는 나쁜 거니까...하고 생각하며 학민투(학원민주화투쟁을 이렇게 줄여말했죠)는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입학하자마자 수업거부투쟁이 있었고 학교는 휴업령을 내렸습니다. 중앙도서관에서 철야농성을 했고...그 즈음에 현대 식칼테러 사건이 있었습니다. 큰 건 모르지만, 사회가 뭐가 잘못된 건 모르지만 그렇게 조금씩 부당하다고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함께 분노하고 집회에 참석하고 피세일(전단 뿌리기) 같은 걸 했습니다.

그덕에 선배들 눈에 띄어서 언더팀에서 학습을 했구요 그후로 저도 저를 가르쳤던 선배들처럼 후배들과 함께 세미나를 하고 학생회 활동을 했습니다. 저는 과 사회부장이었고요(과 학생회장 선거에서 떨어졌습니다. 아시겠지만 정파주의가 만연하던 때였어요. 저는 이름도 없는 소수정파 소속이었습니다) 그래서 4월이면 4.18, 5월이면 5.18, 6월이면 6.10 그렇게 교양토론회를 준비하고 가두투쟁이 있으면 텍을 전달하곤 했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인상적인 고비가 되었던 건 8951일의 기억입니다. 그날의 기억이 학교에서 사회로 시야가 넓어진 최초의 계기일 것입니다. <엄마...>에 나오는 언니는 운동을 하다가 포기하고 거의 패배자로 보일 정도로 가라앉아 살고 있었습니다. 언니의 모습 때문에 운동은 제게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51, 88학번 선배언니를 따라서 가두투쟁을 처음 나가봤습니다. 그 때 연대에서 메이데이 집회가 있었는데 430일에 아예 버스를 못다니게 해서 연대 뒷산을 타다가 경찰에게 붙잡혔습니다. 오빠가 데리러와서 밤 늦게 집에 돌아왔어요. 다음날이 51일이었는데 선배 따라서 가투를 나갔습니다. 서울 지리를 잘 몰라서 거기가 어딘지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현동 가구단지였던 것같습니다. 전날 경찰에 잡혔던 기억 때문에 의기소침해있었는데...정말 날씨가 좋았어요. 화장을 곱게 한 여자들이 제 옆을 지나갔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뭔가를 외쳐도 세상은 전혀 바뀌지 않을 것같습니다. 날씨는 곱고 여자들은 곱게 화장을 하고 거리를 걷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누군가 동을 뜨자...그 곱게 화장을 한 여자들이 다들 거리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의 그 벅찬 느낌, 아마도 제 인생의 반전같은 게 아니었을까 싶어요.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주의에 빠져있던 제가 그 날의 그 반전은 통쾌했고 향후 몇 년동안 저는 지치지 않고 열심히 활동을 하였습니다. 학비를 벌어야해서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면서 등록을 하고 싶지 않은 적도 많았습니다. 저는 수업엔 전혀 들어가지 않았거든요. 학교 바깥의 세미나에서 배우는 게 더 재미있고 유익하다는 생각을 했었고 학교를 떠난 후에 제가 할 일은 졸업장이 필요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막연하게 들었습니다. 그러나 엄마가....식음을 전폐하시고 울었습니다. “내가 능력이 있으면 니가 그러겠냐..” 나는 엄마의 피해의식이 싫었지만 학교를 졸업하는 일이 현재의 내 것을 포기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그냥 학교를 다녀드렸습니다. 등록할 때마다 거금의 돈, 나의 노동의 결과물을 학교에 바쳐야한다는 사실이 아까웠지만 엄마가 바라는 일이라면 해도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4년차가 되자 학교 바깥의, 그러니까 다른 학교로까지 확장을 한 조직사업을 진행하였습니다. 소수정파라서 조직확장이 불가피했죠. 여러 학교의 다양한 사람들과 세미나도 하고 조직확장과 관련한 토론도 하고 그랬어요. 이 시기의 저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과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런 식으로 조직에서 맡겨주는 일을 하면 노동운동으로 수월하게 이전할수 있으리라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6년차가 되어 이전을 원했을 때, 우리 조직이 그저 그런 써클에 불과하다는 것 을 알았고 거기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동기들이 졸업을 하며 진로를 고민할 때내심 비웃고 너네는 어쩔 수 없는 쁘띠부르지와구나라는 평가를 스스럼없이 내렸었는데 저 또한 어쩔 수 없었던 것같더군요. 글은 다음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2. 소연의 글에 따르면 감독님께서는 애초에 노동운동에 꿈을 두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왜 노동운동에 뜻을 갖게 되셨으며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노동운동가를 생각하셨는지요.

 

제가 대학을 다녔던 시기에 <파업전야>가 만들어졌고 안재성의 <불꽃>같은 현장 노동소설이인기였습니다. 그런 데서 만들어진 것처럼 맑스 레닌주의에 기반한 혁명사상을 함께 알려나가고 역사의 주인인 노동자라는 말대로 혁명을 준비하는 일을 하고 싶었죠. 가끔 생각했던 건 내 생전에 혁명을 볼 수 없을지 몰라도 어쨌든 내 삶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데 조금이라도 일조할 수 있다면, 팍팍한 길을 조금이라도 평평하게 만드는 일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이라는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굉장히 추상적인 생각이었던 것같아요. 노동자로 살면서 소모임을 조직하고 세미나도 하고 집회도 하고...뭐 그런 거있잖아요. 학생 시절에 했던 활동의 연장으로 생각했던 것같습니다. 이제사 돌이켜보면 제 생각들에 대해서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누가 누구를 가르친단 말인지, 착각을 했던 건 아닌가 싶어요.

 

3. 노동운동가 지망생에서 영상활동가로의 변신은 개인의 진로선택이기도 하지만, 80년대에서 90년대로의 한국사회 변화를 극적으로 상징하기도 합니다. 소연은 감독님께서 카메라가 노동운동을 지향하는 자신의 활동에 강력한 정치적 무기가 되기를 바랐다라고 쓰고 있는데, 그 반대의 입장에서 현실 노동운동에 대한 환멸 같은 없으셨는지요. 노동운동내부에 존재하는 남성중심성 같은 요소를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운동을 포기하고 노동운동에 대한 꿈을 접을 수밖에없었던 건 바깥보다는 제 안의 문제가 컸던 것같습니다. 아마도...신입생 시절의 패배의식에 다시금 빠졌던 건 아닌가 싶더군요. 어쨌든 조직에 대한 실망감으로 뒤늦게 헤맸습니다. 그 즈음 기억나는 두 개의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청량리 철거투쟁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씩 청량리에 가곤 했습니다. 임대아파트 쟁취가 투쟁목표였지요. 저희집은 광명 하안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장미넝쿨이 아름답던 그 단지에 어느 날 담을 쌓더군요. 왜 그런가 물었더니 옆단지가 임대아파트단지라서랍니다. 임대아파트 단지 애들이 우리 단지에 와서 놀고 그래서 그 출입을 막기 위해서 담을 쌓는답니다. 저는 그때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가 선택한 길에 가난이 있을 거고 나중에 내 아이들이 그러겠지. 그런 생각에 미래가 두려웠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삶에 대해서 너무나 주눅이 들어있었던 것같습니다. 결론적으로 전 제 나약함을 뒤늦게 알았던 것입니다. 6년 가까운 학생운동 시절에 전 입만 살아있었던 빈껍데기였습니다. 삶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떠들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후 2~3년 정도 아무것도 못하고 헤매었습니다. 그 때 컴퓨터 통신에 빠져살았지요. 저를 아는 모든 선후배와 단절을 했고 저는 채팅하면서 지냈습니다. 밤이면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수학강사였어요) 술을 마시고...그렇게 형편없이 살았어요.

어느 날 밤, 그 날도 학원이 끝나고 동료강사들과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데, 아파트 단지를 걸어서 들어오는데 문득 정말 먼지처럼 살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언제까지. 그리고 뭐든 다시 시작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뒤늦게 생각했죠. 나는 어떤 사람이었지? 내가 좋아하던 게 뭐였지? 그런 저런 고민 끝에 전 그저 소설을 좋아하고 영화를 좋아하던 그런 사람이었죠. 대학에 가면....이라는 명목으로 모든 것을 미뤄둔 채, 대학에 가면 그 좋은 것들을 하자, 그렇게 미뤄둔 채. 그 길에서 다시시작을 하자. 그래서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이런저런 강의들을 엄청 많이 듣고, 민예총에서 문화비평교실 1기 수강생이 되어 또 많은 강의를 듣고 그렇게 지냈습니다. 그 뒷풀이에서 민예총분이 월간 민족예술에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저의 첫 직장은 기자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다년간 채팅으로 엄청난 타자속도를 자랑했기 때문에 자원봉사자로 타자수 역할부터 시작했습니다. 밤에는 학원에 가야했기 때문에 그저 낮동안의 자원봉사였죠. 그리고 한 달 후에 학원을 그만 두었습니다. 민예총에 내 길은 아니었지만 그 곳은 많은 사람들을 마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길찾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해보자, 그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1년 쯤 후에 취재를 갔다가 다큐멘터리라는 것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4. 류미례 감독님에 대한 언설들은 여성영화감독으로서 감독님의 성적 정체성에 많은 비중을 두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감독님이 언제, 어떤 경로를 통해 그 여성성에 눈을 뜨게 되셨는지는 제가 입수한 자료에서는 확실하게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이를 설명할 만한 특별한 경험이 있었는지요.

 

결혼을 통해서입니다.

제가 다니던 대학은 뭐랄까, 참 남성적인 곳이었습니다. 성폭력으로 규정될 농담들은 일상다반사였고 '사내답게 마셔라'라는 노래를 하루에도 몇 번씩 부르기도 했었고 생일파티에 브래지어에 술을 따라 빨아마시기도 있었죠. 치욕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저는 명예남성이 됨으로써 잘 살아갔습니다.

결혼을 하고 직장에서 엠티를 갔었어요. 우리가 묵었던 민박집 주인의 아버지는 아주 나이가 많고 몸의 절반을 쓰지 못하는 분이었어요. 그런데 그분에게 아주 젊은 부인이 있더군요. 마당에서 식사준비를 하면서 사람들이 그랬어요.

"저 나이에 새장가를 드셨네. 자식이 효자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제가 말했어요.

"저희 엄마가 그러는데요 남자들은 숟가락 들 힘만 있어도 여자생각을 한대요"

사실 그 며칠 전에 엄마는 "세상 남자들은 바람피워야만 자기가 능력있는 줄 안다" 면서, 엄마 친구가 중풍으로 쓰러졌는데 그 남편은 딴집살림을 차렸다며 엄마 세대의 그 남자들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었거든요(주로 욕이었죠), 저는 진지하게 한 말이었는데 한 선배가 그랬어요.

"어쭈, 제법인데? 더 얘기해봐~"

갑자기 제 말 때문에 분위기가 이상해져버렸고 여성동료 중 한 사람은 눈쌀을 찌푸리며 자리를 떠났습니다. 저는 무척 당황했습니다. 그 일은 며칠동안 저를 괴롭혔죠. 열심히 공부만 하다가 대학에 갔는데 학생회실에서 가끔씩 야한 농담을 할 때가 있었어요. 처음엔 민망했지만 전 열심히 노력해서 더심한 농담으로 받아치는 사람이 되었어요. 어쩌면 그건 생존을 위한 노력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공간을 떠나고 싶지 않았고 제 불편함이나 민망함은

내가 참아야하만 하는 거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그리고 어느 순간 저도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있었어요.나이가 들고 이런 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그 시간을 후회했습니다. 그런데 엠티사건을 겪으면서 본의 아니게 비슷한 처지가 되어있는 저를 느꼈습니다. 결혼을 한다는 건 사회가 정해놓은 선 안에 들어간다는 것 뿐만 아니라 감수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같더군요. 기성의 틀 안에 들어있으면서 둔감해지기는 참 쉬운 일이니까요. 물론 결혼과 출산과 육아를 거치면서 저는 많이 변하고 있는 것같습니다. 스스로가 여성이라는 걸 진심으로 자각하고 있으니까요.

결혼 전에도 힘든 일들은 많았지만 전 제가 '여자라서' 힘들다는 생각을 해보진 못했습니다. 그런데 결혼하고나니 사는 게 참 힘들더군요. 결혼하고 얼마 안 있어서 어느 날 남편한테 물었습니다.

"나는 내 옷 내가 챙겨입는데 왜 당신은 항상 나보고 당신 옷 어디있냐고 물어봐?"

남편은 깜짝 놀라면서 "정말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해?"하며 확인하더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며 남편은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큰일이네" 하면서 그런 게 페미니즘인 것같은데 말이지....그 때 저는 발끈하며 반발했었어요.

"나는 페미니즘 싫어해. 나는 페미니스트도 싫어하거든?"

남편은 계속, 아냐, 그런 게 페미니즘인데 말이지...

우리는 처음의 의문은 접어두고 서로 페미니스트니 아니니 하면서 옥신각신했었죠.

 

나는 그런 이론도 모르고 그런 이름도 싫어. 나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왜 그래야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

밑도 끝도 없는 그날 밤의 황당한 논쟁은 그냥 그렇게 끝나고 잊혀졌습니다. 2001년 정도까지 저는 페미니스트나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무서워했어요. 그 말을 번역하면 여성주의자나 여성주의가 되는 것같은데 제가 여성주의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늦깎이 여성주의자라고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나설 수 있었던 건 나루때문입니다.

어느 날 나루가 저한테 말해주었습니다. 그 페미니스트, 그 페미니즘, 이렇게 뭔가 보여졌던 것들과 너를 연관시키지 마. 여성주의는 가장 약하고 가장 힘없는 존재들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일 뿐이야. 그러면 되는 거야.

나루는 더 멋진 말을 했지만 다 기억은 안나고 그런 나루가 스스로를 여성주의자라고 칭했기 때문에 그런 나루의 모습이 여성주의라면 저도 여성주의를 좋아할 수있을 것같아서 그리고...결혼을 하고 나서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틀, 얘기들이 나를 옭아매는 것을 느끼면서 그냥 이해하고 싶지 않아서 이런저런 의문을 표하는 내가 내 이런 모습이 여성주의라면, 여성주의의 시작이라면 그렇게 시작을 하면 되겠지. 현명한 자는 역사로부터 배우고 어리석은 자는 경험으로부터 배운다는데 저는 지극히 경험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인 것같습니다. 그래서 경험 속에서 많은 것들을 배웁니다. 유모차를 가지고 외출을 했다가 수없이 많은 턱과 계단들 때문에 고생하면서 이동권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아이를 업고 버스를 타거나 관공서에 갈 때 표현못할 차별을 느낍니다.

얼마 전, 모유은행 사건을 겪으면서도 저는 그것이 저를 무시해서라고 생각했어요. 만약 내가 남자였더라도 그들은 내게 그렇게 대할까? 그저 좋은 뜻을 가진 사람이니 절차는 신경쓰지 않아도 되겠지. 집에서 살림만 하는 여성들은 그래도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해. 저는 혼자 막 상상을 해요. 피해의식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그래요, 난 피해의식이 너무나 많아요. 대학 시절의 저는, 결혼 전의 저는 그래도 나름대로 물러설 곳이 있었던 것같습니다. 불편함을 느낄 때 그 감정을 묵인하면 되었습니다. 수치심을 느낄 때 그 더듬이를 잘라내면 되었습니다. 고교시절에 대학을 가기 위해서 욕구를 꾹꾹 눌렀던 것처럼 그 공간에서 살아가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애써 저를 적응시켰습니다.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여성의 몸이었지만 여성이 아니었습니다. 3의 성으로 살아갔습니다.

하지만 지금 사는 건 그렇게가 안됩니다. 저는 애가 셋 딸린 30대 중반의 허름한 아줌마입니다. 평상시 옷차림이나 공식적인 자리에서의 옷차림이나 별 차이가 없는데 예전, 관객과의 대화 때 사회자가 "영화감독이라고 하지만 보통 아줌마죠? 편하게 말씀하세요" 했을 때

좋아서 웃었습니다만 방금 애들 셋 데리고 포도를 사러 갔는데 1kg2천원이라고 해서 "1kg가 어느 정도예요?" 했더니 아주 귀찮은 듯 "그런 거 신경쓰지 말고 그냥 담아"하시더군요.

기분이 상했지만 그냥 두송이 담아서 돈 내고 왔어요. 싸움을 잘 못하긴 하지만 감정조절을 못하기 때문에 애들 있을 땐 그냥 참습니다. 그런 일을 당할 땐 혼자 분을 삭입니다. 그러면서 생각합니다. 만약 내가 양복입은 남자였어도 그랬을까? 그러면서 별의별 상상을 다 합니다. 그래서인지 내 안에는 분노가 참 많습니다. 남편과의 관계에서 그런 분노는 더합니다. 아이를 낳고 작업을 중단한 채 집에서 아이만 돌봅니다. 남편은 퇴근하자마자 집에 와서 열심히 집안일을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최선을 다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며칠 전 누가 그랬습니다.

"세상에 신부님 같은 사람 없죠..."

저는 남편에게 고마움을 느끼다가다도 그런 말을 들을 때, 그리고 그런 말을 들은 남편이

"아닙니다. 제 처는 일도 못하고 집에서 살림만 하는 걸요" 라고 얘기하지 않고 흐뭇하게 웃을 때 화가 납니다. 하지만 그날 저는 "맞아요. 저는 그래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고마움을 느끼는 건 사실이니까. 더 크게 일어나는 내 안의 화는 외면한 채 고마움만을 말합니다. 그러면 그 자리는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계속 화기애애해집니다. 만약 제 안의 말들을 다 쏟아내면 난 시원하겠지만 그 자리는 어색해지겠죠. 분란보다는 평안을 추구하다보니 이제 저는 저의 진심이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마땅히 해야할 행동을 하는 나와 같은 처지의 어떤 여성에 대해서 "그 사람 왜 그렇게 날카로와?"라는 식으로 누군가 말하면 안도의 한숨을 쉽니다. '난 적어도 저런 평가는 받지 않겠지?'

처음엔 평안을 위해서 저를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제가 변해있더군요. 처음 진보넷 블로그가 만들어졌을 때 저는 소통할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좀 절박한 것같습니다. 자꾸 제가 소중한 뭔가로부터 멀어지는 것같아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저는 남성/이성애자/비장애인....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안착하여 평온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니까. 일상의 잔물결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조금씩 알아가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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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노력하지 않아도 그저 '애가 셋 딸린 30대 중반의 허름한 아줌마'로서 차별과 편견들을 대면합니다. 가끔, 운전을 배워볼까? 관공서에 갈 땐 좀 비싼 옷을 입고 화장을 해야하는 건가? 뭐 그런 생각을 합니다만 좀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해보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정상성'이라는 편협한 기준으로 꽉 짜여진 세상에서 저같은 사람이 노력해봤자 얻을 게 얼마나 있겠나 싶습니다. 운전을 하게 되면 또 그 세계에서 유능하지 못해서, 여자라서 차별을 겪겠죠.

 

5. <낮은 목소리>등을 만든 변영주 감독은 여성영화를 피해자 즉 여성의 시각으로 세상을 반영해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 그래서 현실의 여러 문제를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1차적인 자기 문제로 전환시켜내는 영화라고 정의한 적이 있습니다. 류미례 감독님께서 갖고 계시는 여성영화에 대한 정의나 성격규정은 무엇인지요.

 

변영주감독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여성영화를 만들겠다,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영화를 만드는 건 아닙니다. 저는 제 영화가 항상 보는 사람에게 동일시, 공감을 통해서 자기 문제로 바라볼 수 있기를 바라며 영화를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감은 제 영화의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제가 여성이기 때문에 제 영화가 여성으로서 겪는 일들을 많이 다루게 되긴 할 것입니다. 저는 글을 쓸 때 제 프로필에 여성의 눈으로 장애와 가난을 바라봅니다라고 씁니다. 제게 있어서 장애와 가난은 중요한 화두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바라보는 저의 존재가 여성이라는 것이 참 좋습니다. 여전히 명예남성으로 살아왔던 시간의 찌꺼기가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들이 어떻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지 섬세하게 살피려 합니다. 그 과정이 바로 모든 이들이 겪어야할 과정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6. <나는 행복하다 1, 2> <엄마>에서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나레이션의 기법이 있다면 불안한 나레이터라고 묘사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화면 안의 세계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만, 안정적이고 전지적인 정보를 가진 이야기의 전달자가 아니라, 벌어지는 상황에 대하여 본인도 어쩔 줄을 몰라 당황하는 그래서 어쩌면 감독이 아니라 관객의 입장에 더 가까운 나레이터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기와 같은 형식이라고 생각도 해보았습니다만, 감독님께서 이런 나레이션의 방식을 의식적으로 선택한 이유가 있는지요. 만일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의사전달 효과를 의도하신 건지 궁금합니다.

 

 

7. 감독님의 영화작법에 영향을 준 다른 작품이나 작가가 있는지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극영화나 다큐멘터리 작품이 있다면 말씀해 주실 수 있는지요 (제 개인적으로 감독님의 개인블로그를 잠시 확인한 적이 있고, 그래서 쉼 없이 많은 작품들을 감상하신다는 사실을 인지한 상태에서 드리는 질문입니다)

 

저는 <영매>의 박기복감독으로부터 처음으로 다큐멘터리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 그 전에 노동자뉴스제작단의 김명준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다큐에 대해서 처음으로 뜻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저는 카메라를 무기로 노동운동에 복무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나라는 사람이 노동운동을 하진 못할 것같다는 걸 긴 고민 끝에 알았고 그래도 노동운동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 헤매임 끝에서 만나게 된 것이 김명준선생님의 강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큐멘터리를 배우기 위해 여기저기 알아봤는데 박기복감독이 다큐0.7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소수정예 강의를 하더군요. 그래서 그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후에 다시 한겨레문화센터에서 노동자뉴스제작단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처음 다큐에 입문하게된 것은 김태일 감독의 <22일간의 고백> 조연출로 였습니다. 김태일 감독으로부터 저는 농부의 마음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라, 는 뜻깊은 가르침을 얻습니다. 저는 제가 재능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압니다. 대학 시절에도 그렇고 영화라는 것을 의식적으로 멀리 해왔기 때문에 한 번도 영화주의자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실로 그 구멍을 메울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했습니다. 저는 항상 열심히 메모하고열심히 적고...그렇게 제 생각들을 기억하려 합니다. 김태일 감독 때문에 저도 다큐를 할 수 있을 거라는 꿈을 갖게되었죠.

제가 제일 좋아하는 다큐멘터리는 오정훈 감독의 <세 발 까마귀>입니다. 박노해 없는 박노해 다큐라고 할 텐데요 길찾기, 혹은 길만들기에 대한 고민이 잘 드러나있어서 무척 좋아합니다.

최근에 본 극영화는 <콘스탄트 가드너>가 좋더군요.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8. 정신지체 장애인들과의 만남, 그들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 그들과 친구가 되고 싶어 작품을 만들게 된 배경을 읽으면 우연적인 요소들이 많이 개입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나는 행복하다 1, 2> 이후 6년여가 흐른 지금, 돌이켜 보면 청년 류미례가 무의식 중에 갖고 있었던 세계관, 철학적 비전 같은 것이 그 주제 선택에 동인이 되었지 않았나 하고 생각해 볼 수도 있겠는데요. 감독님 개인적으로는 노동운동에서 장애인으로 관심사가 이전했던 사실에 대해 현재 어떻게 해석하고 계시는지요.

 

저한테는 작품 하나하나가 단절적인 제 삶의 궤적을 기록하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평생을 안고 갈 화두로 첫 작품을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 주제는 노동, 인권 뭐 그런 추상적이면서도 거시적인 것이었는데요 우연히 정신지체장애인들을 만나고 거기서 위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저희 엄마한테 들려드리듯이 얘기해드리고 싶었습니다.제 경험을 나누는 것으로서의 영화만들기는 그렇게 시작이 됩니다. 그 후 결혼을 하면서 <엄마>를 만들면서 저는 내 앞의 삶을 꾸준히 혹독하게 잘 겪어내는 것이 내 영화를 살찌우는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엄마....>를 만들기 전의 제 시간은 정말 지옥이 따로 없을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다시 카메라를 들 수 있을지 두려웠고 나만 애를 키워야하는 사실 때문에 남편이 미웠어요. 그래서 정말 많이 싸웠어요. 이혼까지 생각을 했었죠. 그 와중에 김동원 감독님이 엄마로서 만들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보라고 했습니다. 저는그 때눈물이 났습니다. 서운해서요.^^ 그런데 뭐 어쨌든 <엄마...>를 만드는 시간은 제가 뛰쳐나가고 싶던 제 시간을 껴안을 수 있었던 과정이었고 지금까지 이혼하지 않고 잘 살고 있어요. 지금 작업하고 있는 <먼 길>은 아마도 <엄마, 두 번째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을 것같네요.

9.일상적인 소재, 사적인 나레이션 등은 감독님의 작품들을 상당히 관객 친화적으로 만드는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감독님의 영화행위에 있어 관객들과의 소통은 중요한 단계일 것이라고 추측 합니다만, 감독님께서는 어떤 관객층을 염두에 두고 영화를 만드시는지요. 여성일반이라고 할 수도 있고, 감독님과 연배가 비슷한 젊은 층 여성, 혹은 남녀 구분을 두지 않는 불특정 다수, 혹은 동료 여성영화인 등을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차적으로 저와 같은 여성들입니다. ‘저와 같은 여성들이라는 단어는 기본적으로 절망해본 적 있는 사람, 포기해본 적 있는 사람, 자신의 힘과 노력만으로 도저히 안되는 어떤 상황 앞에서 절망해본 적 있는 사람,입니다. 대학시절과 민예총 일 사이에있는 공백기는 제 삶의 밑바닥이었습니다. 밑바닥에서 배운 건 타인에 대한 이해심이었습니다. 대학시절의저를 생각해보면 좀 재수없다고나 할까요. 함부로 남을 가르치려했고, 함부로 남을 판단하려했습니다. 그리고 잘 알지도 못하고 떠들었어요. 그 시간을 거쳤기 때문에 저는 누군가가 어떠한 상황에 있든, 그리고 어떤 행동을 하든 한 번 이해해보려고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누구도 이해하기 힘든 상황에 놓여져있었거든요. 그 때 알던 사람들은 제게 그런 말까지 햇었어요. “너는 고통을 즐기냐?” 그들이 생각하기에 뻔히 정답이 있는 것같은데도 저는 그냥 저앉아있었기 때문이지요. 힘은 자기 안에서 찾아집니다. 가라앉을 때까지 가라앉았다가 바닥을 치고 올라가고 나면, 그렇게 자기 힘을 찾고 나면 그 뒤의 삶은 풍요로워집니다.

푸른영상에 들어와서 동료들이 그만 둘 때 저는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그 삶이전에 바닥이 있었기 때문이죠. 지금 내가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 하더라도 예전에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서 그렇다고 죽지도 못하면서 살았던 그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저는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어요.

그런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비슷한 경험을 가진 이들과 소통하고싶습니다. 그래서 가끔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내 영화를 이해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고 속상해하지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사람이라도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기쁜 거죠.

저는 글도 이런 방식으로씁니다. 주장글은 제게 맞지 않습니다. 참세상에 연재글을 쓰고 있는데 얼마 전에 덧글을 발견햇습니다. “지겹소. 그러고 싶다, 는 결론, 그건 누구 몫이오?” 저는 이해합니다. 저는 제가하지 못하는 일은 글에도, 영화에도담지 못합니다. 이경순 감독의 <쇼킹 패밀리>를 보면서 가족해체에 대한 주장을 엿보기도 했습니다만 저는 비겁하게라도 가정을 꾸려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제 영화는 제가 선택한 삶의 방식을 넘어서지 못할것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이런표현 좋아하진 않지만) 가장 후진적인 대중과 소통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제자리이고 저는 그 자리가 좋습니.

 

10.감독님의 소재선택 경향을 두고 봤을 때 앞으로는 결혼 생활이나 육아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기대할 수도

글이 끊겼어요. 제 네 번째 영화는 보육노동자에 대한 다큐멘터리입니다. 제블로그의 먼길, 카테고리를 봐주세요. ^^

이 글을 작성하는 시간이 참 좋았습니다(2007년 9월 7일 어떤 영화학도의 논문을 위한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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