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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모탄의 아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임모탄의 아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미래사회와 장애

 

<매드 맥스:분노의 거리>가 많은 관객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핵전쟁 이후 미래 사회의 어느 시간을 그리고 있는 이 영화에는 수많은 장애인들이 등장합니다. 디스토피아의 어두운 미래가 배경이기 때문에 문명이 몰락하고 나면 결국 약육강식의 법칙만이 지배한다는 슬픈 현실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 임모탄도, 임모탄의 아들들도 보조기구 없이는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존재들이지만 맥스같은 건강한 신체의 비장애인을 피주머니로 이용하며 잘도 살아가고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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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오래 전 일인데요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연구에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했던 가수 강원래 씨는 일어나 걷고 싶은 자신의 열렬한 희망을 뮤직비디오를 통해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그 후 ‘함께걸음’에 소개된 김종배 씨의 기사를 보며 강원래 씨의 꿈이 가까운 미래에 실현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 미국 피츠버그 재활공학센터 책임연구원이었던 김종배 씨의 첨단 재활공학 기술 ‘LOCOMAT’ 소개 동영상의 제목은 ‘전신마비의 몸으로 21년 만에 걸어보다’였습니다. 강원래 씨의 뮤직비디오와 그 동영상을 보고 나서 과학기술의 발달이 신체장애에 따르는 문제들을 해결해줄 수 있을 거라는 상상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매드 맥스-분노의 거리>에서 등장하는 임모탄의 아들들을 보면서 이번 호 글의 주제를 정했습니다. 미래사회에서 장애는 어떤 모습일까요? 과학은 잘 모르고 재활공학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제가 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미래사회에 대한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SF영화들을 살펴보는 것이었습니다. 이 글은 최근작 <매드 맥스-분노의 도로>를 포함한 여러 SF영화들 속에서 장애는 어떠한 모습으로 등장하는지를 살펴봅니다. 제가 SF영화를 좋아해서 이 주제에 대해서는 새로운 영화가 나올 때마다 여러 매체에 대해서 글을 써왔기 때문에 그런 글들을 재구성하기도 했으니 이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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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사회를 그린 영화는 꾸준히 진화해오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꼽히는 <블레이드 러너>에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레플리컨트(복제인간)가 등장합니다. 레플리컨트의 존재론적인 질문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이러한 질문은 <아일랜드>를 통해서 다시 한 번 던져집니다. 이밖에도 미래사회를 그린 영화들은 많습니다. 자신을 인간으로 생각하는 사랑스러운 로봇의 이야기 <에이.아이(A.I)> , 이제껏 보아왔던 모든 세상이 사실은 가짜였다는 것으로 큰 충격을 던지는 <트루먼 쇼>와 <다크 시티>, 정보화의 수준만큼이나 꽉 짜인 감시체제로 주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마이너리티 리포트>, 탯줄을 연상시키는 라인을 척추에 꽂음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되는 <엑시스텐즈>까지 영화 속 미래사회는 다양한 면모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들 영화들이 그리는 미래는 대부분 암울합니다. 고도의 테크놀로지가 인간 생활을 풍요롭게 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영화 속 인간들이 맞닥뜨리는 가장 큰 적은 테크놀로지 자체가 되어 있습니다. 장애 문제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은 성큼 발전해있는데 영화 속 장애인들은 무기력하게 방치되어있거나 오히려 더 냉정하고 싸늘한 시선 속에서 소외되어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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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작 <가타카>는 인간의 성공과 실패가 유전인자에 의해서 결정되는 가까운 미래사회를 담고 있습니다. 이 사회의 여성들은 더 이상 출산의 고통을 감내하지 않습니다. 선택된 유전자를 이용해 안전하고 확실한 방식인 ‘인간의 아이’를 생산해내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자연스러운 사랑의 결과로 태어나는 ‘신의 아이’는 출세의 기회 자체를 봉쇄당한 채 사회의 하층민으로 살아갑니다. 장애를 가졌을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완벽한 유전자를 가졌지만 사고 때문에 하반신이 마비된 제롬 유진 머로우의 운명은 더더욱 가혹합니다. 완벽한 유전자 덕분에 뛰어난 수영선수였지만 자동차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제롬은 절망 속에서 살아가다 주인공 빈센트에게 자신의 신분을 빌려주고 스스로 한 줌 재가 되고 맙니다. 주인공인 비장애인 빈센트의 입장에서 보면 고마울 따름이겠지만 여기에는 장애에 대한 섬뜩한 시선이 숨겨져 있습니다.

기억을 돌이켜보면 나찌 독일에 의해 자행된 대학살의 희생자는 유대인만이 아니었습니다. 공산주의자와 성소수자, 장애인들 또한 대량 학살의 희생자였습니다.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에 관한한 이 영화는 히틀러의 태도와 많이 닮아있습니다. 완벽한 우성인자들만 추출되는 이 사회의 시스템에 따르면 장애인은 선천적으로 태어날 가능성 자체가 배제되기 때문입니다.

장애가 없는 세상이라 좋지 않냐고요?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사회의 장애인은 없어지는 게 아니라 숨어 있습니다. 선천적 장애를 발본색원 하는 데 유능한 이 사회가 중도장애에 대해서는 참으로 무능할 뿐입니다. 우주에 식민지를 건설할 만큼 과학기술은 발달했지만 중도 장애에 대해서 사회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제롬은 사회로부터 도태되어 쓸쓸하게 살아가다가 스스로 벽난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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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타카> 뿐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SF영화에서 과학기술은 장애문제를 외면합니다. 현실주의자와 게임디자이너 사이의 갈등을 그린 <엑시스텐즈>의 등장인물들은 척추에 구멍을 뚫은 바이오포트를 통해 게임을 즐깁니다. 게임의 쾌락이 너무 커서 장애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중독되듯 사이버 세상에 접속합니다. 주인공들의 대화 중에는 잘못하면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두려움이 배어납니다. 하지만 게임의 쾌감에 중독되어 모험을 하는 거지요. 두려움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그 사회가 장애에 대해서만은 아무런 대책을 마련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2008년작 <아이언맨>을 보면 그 무관심과 무능의 이유를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천재적인 두뇌와 재능으로 세계 최강의 무기업체를 이끄는 CEO 토니 스타크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게릴라군의 공격으로 가슴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게 됩니다. 최신 무기를 만들라는 게릴라군의 눈을 피해 그는 새로운 발명품 아크 발전기를 만듭니다. 토니가 가공할만한 파괴력을 자랑하는 폭탄 안에 겨우 01.15그램 들어있는 팔라듐을 모으고 모아서 아크 발전기를 만드는 가장 큰 이유는 살기 위해서입니다. 이 아크 발전기는 토니의 심장입니다. 폭탄 파편 때문에 제 기능을 발휘 못하는 심장을 대신해 토니의 몸에 동력을 공급하는 토니의 목숨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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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토니는 가장 먼저 아크 발전기술에 몰두합니다. 아크 발전기술을 둘러싼 토니와 오베디아 사이의 논쟁을 살펴보면 영화 속 미래사회가 왜 그다지도 장애문제에 대해서 무관심한지 알 수 있습니다. 공동 CEO 오베디아는 무기 생산보다는 아크 발전기술에 몰두해야한다는 토니의 의견을 한마디로 묵살합니다. 이유는 ‘비용 효율성이 너무 안 좋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토니는 절박합니다. 결국 비용 효율성 때문에 30년간이나 진척이 없던 아크발전기술은 천재 토니의 집중 연구로 가뿐히 해결됩니다. 살아남기 위해 토니는 목숨을 걸고 그 기술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물론 '아이언 맨'은 오락영화이기 때문에 이 모든 일들이 가볍고 경쾌하게 그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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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의 성취로 장애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히노키오>와 <레지던트 이블2>에서도 나타납니다. 일본영화 <히노키오>에는 휠체어 장애인 사토루가 등장하는데 로봇 공학자인 사토루의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원격조종로봇을 통한 대리 등교를 시도합니다. 또한 <레지던트 이블2>의 찰스박사는 딸의 소아마비를 치료하기 위해 T바이러스를 개발합니다.

이렇게 늘어놓고 보니 뭔가 공통점이 보이지 않습니까? 즉, 발달된 과학기술이 곧바로 장애문제의 해결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 반면 과학기술자가 장애에 관심을 기울일 때에는 본인이나 가족에게 장애가 있는 경우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공통점은 이렇게 선한 의도로 개발된 과학기술의 성과에 가장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군수산업 자본가들이라는 점입니다.

결국 문제는 차별입니다. 과학기술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혜택을 주지 않습니다. 영화 속 세상에서 사회는, 과학기술은, 장애문제의 해결보다는 돈이 되거나 권력이 되는 군수산업에 우선적으로 힘을 쏟습니다. 개별 과학자가 자신의 문제, 자기 가족의 문제라서 몰두하는 경우에만 장애 문제는 진지하게 고민될 뿐입니다. 그래서 결국 장애는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규정되는 것이고 개인이 가진 자원의 양에 따라 문제가 되지 않거나 처절하게 겪어내야만 하는 어떤 것이 되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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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마지막으로 이 글의 제목에 대답을 해야겠습니다. 임모탄이 죽고 난 후 그의 장애인 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영화는 오직 한 컷으로 그 미래를 짐작하게 합니다. 퓨리오사의 지배가 예견되는 상황에서 문을 열라는 군중의 외침에 임모탄의 장애인 아들은 꼼짝도 못한 채 눈치만 봅니다. 아버지의 권위가 막강했을 때에 그 아들은 장애를 가진 몸으로도 주변 사람들에게 군림하며 살아왔습니다. 아버지의 권력은 그 척박한 환경에서도 그가 기계의 도움을 통해 장애인으로 살지 않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 이후 퓨리오사가 주도하는 질서 하에서는 이제 임모탄의 아들은 장애인으로서 처절한 삶을 겪어내야 할 것입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신체적 불편함을 해결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이 개발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장애문제의 해결로 곧바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 그 사회가 우선시하는 삶의 가치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장애의 범위와 의미는 달라진다는 것. 바로 이것이 얼굴과 이야기를 달리하며 수많은 SF영화들이 우리에게 건네는 메시지입니다. 장애해방의 미래사회는 지금 우리가 선 자리에서 장애해방을 쟁취하고자 하는 노력을 부단히 했을 때에라야 어렵게 얻을 수 있겠지요. 잊지 말아 주세요. 지금 우리가 선 자리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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