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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23일

1. 내일부터 편집을 시작할 건데
시작하기 전에 유려한 문장,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고 싶었다.
페북 타임라인에 올라있던 황00의 문장이 마음에 들어서
통으로 읽어보려고 도서관에 갔는데
황,만 생각나고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타임라인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내가 봤던 그 문장이
어디에 가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대로 도서관을 나가기에는 아쉬워서 
반납대의 책들을 훑어보다가
어디선가 들어본 제목의 만화책을 들고 집에 돌아왔다.
보다보니 '어디선가 들어본'이 아니라
내가 읽었던 이야기였다.
그런데 나는 이 만화를 본 적이 없다.
이건 뭔가. 
처음 보는 그림인데 아는 이야기라니.
전생의 기억이라도 되는 건가...

이런 저런 노력 끝에 결국 알게 된 사실은
나는 이 이야기를 소설로 읽었다는 것.
전생이라니....ㅎ

2. 나는 가끔 나의 전생을 생각해왔다.
아홉살 이맘 때였을 거다.
겨울방학의 어느 날, 나는 어둠컴컴한 방 안에서
시이튼 동물기를 읽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 겨울곰의 내장 이야기가 나온다. 
사냥꾼이 곰을 사냥한 후
그 내장을 먹는다.
곰의 몸은 겨울잠 모드로 바뀐 상태라
내장에는 영양분이 축적되어 있다.
책에는 내장의 상태와 그 맛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었는데
내 혀는 혹은 내 뇌는 문장보다 훨씬 더 풍부하게 그 맛을 기억해냈다.
그래서 생각했다. 내가 전생에 사냥꾼이었군.

스무살 무렵, 과에서 답사를 갔다.
나는 과외를 하느라 하루 늦게 혼자 갔다.
답사 자료집에 나온 일정표를 보고 
미리 어떤 곳에 가서 교수님과 친구들을 기다렸다.
긴 시간을 기다렸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옛 절 터에서 쨍한 햇살 때문에 
진했던 나무 그림자를 바라보며
그 그림자가 점점 길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문득 그 공기가, 그 풍경이, 
무엇보다 그 외로움이 너무나 익숙해서
그 때 생각했다. 나는 전생에 이 곳에 있었는데. 
그런데 여자의 몸으로 있었던 것같은데.
사람이 죽고 나면 다른 세상으로 가는 강을 건너기 전에
전생의 기억을 잊게 하는 어떤 샘물을 마신다는데
나는 몇번째 생에서인가 그 샘물을 마시지 않았나봐.
그런 저런 생각을 하며 절 터에서 낮을 보냈다. 

결국 나는 그 절터에서 사람들을 만나지 못해서
그날 밤 숙소인 불국사 앞 여관으로 갔다.
환하게 불이 켜졌던 그 여관 앞에는
자갈이 깔려있어서 
내가 걸을 때마다 자박자박 소리가 났다.
자박자박 걸어 불켜진 문을 열던 그 시간이
지금은 전생같다.

3. 내가 다시 20대가 된다면 
개가식 도서관에서 하루종일 책을 읽고 싶다.
그런데 지나온 나의 20대는 너무 어둡고 질척거렸다.
그것을 잊은 채, 
다시 20대가 된다면, 
이라는 가정을 하곤 했다.
오늘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다가 
질척거렸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그 때는 힘들었지만 그래서 왜 나한테, 
왜 나한테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원망을 하기도 했지만
나는 오늘 생각했다.
당신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내가 딛고온 그 시간 덕분에 
지금 내가 당신과 함께 울 수 있어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당신의 마음과 영혼에 생채기를 내는 지금의 이 시간은
울어도 굴러도 뛰어도 소리쳐도
당신이 무엇을 하더라도
당신에게 무심한 채 천천히 흘러갈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지나간다.
그리고 45살의 나,
당신에게 위로를 건넨다.
지금 나의 이 모습으로.
당신이 겪고 있고 앞으로 겪어야할 그 모든 시간을
먼저 겪은 내가 당신에게 말한다.

비틀거리더라도 
더이상 걸을 힘이 없어서 잠시 주저 앉더라도
뒤돌아보지 말아라. 
그렇게 나아가라.
어느 날 문득 지금의 이 시간이
까마득히 멀게 느껴질 날이 있을 거다.
마치 전생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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