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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명랑한 밤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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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3/14
    두번째로 만나는 세상(3)
    하루

약속

매일 12시에 학교 앞에 가면 5분이나 10분쯤 기다려서 하늘을 데려온다.

1학년 아이들은 두명씩 짝을 지어 줄을 선 후에 선생님을 따라 교문까지 나온다.

항상 11시 50분쯤에 교문 앞으로 가는데....

어제는 하늘이네 반이 평소보다 일찍 끝났었나보다.

11시 50분에 갔는데 7반은 모두 흩어지고 없었다.

그 때부터 정말 정신이 없었다.

하늘이가 없는 것이다.

매일 만나는 엄마들은 다들 자기 아이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우리 딸은 없었다.

교무실로 들어가는 선생님을 쫓아가서 "저희 아이 어디있어요?"하고 물었더니

엄마 아빠가 오기로 한 사람들은 남아 있으라고 했단다.

 

놀이터에 노는 아이들 틈에도, 철봉에 매달려있는 아이들 속에도 하늘은 없었다.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정문 앞을 왔다갔다 하며 목이 터져라 하늘을 불러도 없었다.

후문에 가보니 후문 앞은 휑했다.

내가 운동장과 정문을 왔다갔다 하는 동안 갈 사람은 다 간 것이다.

후문 앞에 서서 하늘아 하늘아..막 부르고 있는데

저기 저, 얼굴도 안보이는 비탈길 끝에 선 두 아이 중에 한 아이가

엄마....하고 아련하게 부른다.

2층집 인하랑 손을 꼭 잡고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고.

 

밤에 누워서 잠을 자려는데 하늘이가 나보고 내일은 좀더 일찍 오라고 한다.

그래서 말해주었다.

엄마는 제 때에 갔고, 선생님이 분명히 엄마가 오는 사람은 기다리라고 했는데

네가 안기다리고 먼저 가버려서 엄마가 아까 미친 사람처럼 돌아다녔다고.

하늘이 엄마 없이 집에 온 걸 칭찬하느라 중요한 걸 까먹었다는 걸 그제사 알았다.

 

약속이란 건 시간과 장소를 정한 후 한 사람이 좀 늦더라도 기다려주는거야.

우리 약속시간은 12시였고 나는 네가 12시 10분에 와도 꼭꼭 기다리는데

너는 11시 50분밖에 안됐는데 엄마를 기다리지 않았어. 앞으로 그러지마.

 



나는 왜 말을 저렇게밖에 못하는 걸까?

아무튼 하늘은 좀 울먹였다. 그리고 내 말을 수긍하는 것같았다.

그리고 나와 남편은 모든 사람들이 반복하는 그 레파토리,

낯선 사람이 "하늘아  엄마가 너 데리고 오라고 그랬어"라는 말을 해도

절대로 따라가지 말 것.

혹시나 엄마 아빠가 교문앞에 없으면 교문 안, 운동장에서 기다릴 것.

그런 말을 반복, 반복했다.

아이에게 불신을 먼저 가르쳐야하는 현실이 참.... 그렇다.

 

2.

2주일 전부터 생협을 이용하고 있다.

어제 생협 고기와 생협 당근과 생협 감자로 이유식을 만들었는데

상해버렸다. ㅠ.ㅠ 아침에 일어나보니 쉰내가 났다.

끓여서 혼자 먹으려니까(끓이면 탈은 나지 않을 것같아서) 남편이 갖다 버렸다.

음식물 쓰레기 봉투에 담는데 속이 쓰려 죽는 줄 알았다.

시간 약속을 못 지킨 거지. 미안해 고기야, 당근아, 감자야...

 

3.

요즘 슬럼프다.

건질 게 있는 고민이라 달게 겪으리라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우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내가 만들었던 영화들, 뱉었던 말들이 다 아프고 부끄럽다.

세상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했던 것같아서....

부끄럽다. 시간을 가지고 좀더 부끄러워하고 좀더 생각하고....그래야겠다.

 

4. 육아와 관련하여

나는 앵두와 같이 있는 시간이 좋다.

도와줄 분이 나섰지만 결국 나는 포기했다.

나는 앵두와 함께 있는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나의 일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평생 한 번 있을 이 시간을 선택했다.

그리고 돌아서서 걱정한다. 작업은 어떻게 하지?

 

2주일 전쯤, 행사 동영상 편집 때문에 사무실엘 갔다.

지저분한 사무실, 지저분한 침대에 애를 재우면서

이런 식이라면 육아에 전념할 수 있는 도우미 분의 도움을 받는 게 낫겠지,싶었다.

상영시간이 얼마 남지 않는 영상물이라 아이를 먼지구덩이에 재우고서라도

일을 해야했다. 집에만 있으면 이런 절박감을 전혀 느낄 수 없다.

나는 고민해야하는 상황,

아이와 일 사이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상황을 애써 피해오고 있다.

행사는 잘 끝났고 나는 다시 집에서 아이랑 뒹굴거린다.

 

일과 아이 사이에서 동동거리던 나의 자아는 그 존재감이 엷어져있다.

나는 앵두와 온전히 행복하다.

그리고 생각한다.

세상의 많은 엄마들은, 내 친구들은 이렇게 일에서 멀어져갔겠구나.

평온한 시간이다.

그리고 무서운 시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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